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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 - 윌리엄 캘빈이 들려주는 인간 지능의 진화사 사이언스 마스터스 12
윌리엄 H.캘빈 지음, 윤소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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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캘빈교수의 <생각의 탄생>을 읽기 시작하면서 든 의문은 “생각이란 무엇일까?”였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은 뇌에서도 특히 대뇌 반구와 관련있는 생각 그리고 지능이 어떻게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5쪽)”고 적고 있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리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2장 ‘만족스러운 추측의 전개’에서는 제임스 굴드와 캐럴 그랜트 굴드가 쓴 <동물의 마음>에 나오는 “선천적인 정보 처리과정, 본능적 행동, 내적 동기와 본능적 욕구, 선천적으로 유도되는 학습, 이 모든 것은 분명 동물의 인식 능력 범위에서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생각이나 판단, 결심과 같은 우리 정신활동의 보다 심원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은 무엇일까?”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생각이 무엇인지 똑 떨어지는 답을 찾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에둘러 설명하고 있는 인간의 지능과 언어능력, 기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생각일까요?

 

몇 가지 힌트를 모아보면, 2장을 통하여 저자는 인간의 지능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학습속도가 빠르다는 점, 유연성과 창조성이라는 점, 논리적으로 추론한다는 점, 미래에 대하여 세세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자신이 보았다고 생각한 것의 일부는 실은 기억으로 채워진 것이다.(85쪽)”는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5장의 제목은 '지능의 토대로서의 통사론‘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통사론이 사람다운 지능을 판가름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통사론이 없다면, 우리는 침팬지보다 영리할 것이 없다.(128쪽)”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언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며, 생각의 경계를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진화’라는 제목의 제6장에서 저자가 남겨놓은 결정적 단서를 놓칠 뻔 했습니다. “사고는 감정과 기억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아니, 어떻게 보면 생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어쩌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움직임이다. 생각은 대부분 순식간에 덧없이 흘러가 버린다.(211쪽)” 그리고 보면 저자가 사용한 사고(思考)라는 단어가 바로 생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기억에 대하여 강조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장기기억이 ‘시’공패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공간패턴이 시공패턴으로 전환되는가를 가르쳐 주는 많은 사례를 알고 있다. (…) 단기 기억은 활동중인 시공패턴(심리학 문헌에서 ‘일하는 기억’으로 일컬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순각적이며 공간적이기만 한 패턴 일 수도 있다.(215쪽)”

 

제7장 ‘지적 행동의 진화에서는 대뇌 피질의 뉴런의 활동으로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지능과 언어의 비약적 발전을 불러일으켰을 후보들을 가지고 있다. 다윈기계 그리고 피질과 피질 사이의 연결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약 25만년 전, 혁신이 어려운 호모 에렉투스 문명이 호모 사피엔스의 끊임없는 변화하는 문명으로 진화하도록 한 동인이었을 수 있다.(281쪽)” 즉 신경세포가 담겨 있는 대뇌피질의 용적이 커지고 신경세포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복잡해져 상호작용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설명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인간의 삶이 다른 동물들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 즉 ‘생각’이란 지적 활동이 탄생하게 된 원인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인문학적 자료들을 인용하여 독자의 생각의 날개를 펼쳐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혹시 지나치게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가지는 분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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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 조선 선비들이 찾은 우리나라 산 이야기
나종면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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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산에 최초로 도전했던 미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는 1924년 필라델피아에서의 한 강연회에서,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어 죽을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까?”라는 어느 부인의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니 산에 가는 일을 ‘등산’, 높은 산에 오르는 일을 ‘정복’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산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말씀합니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야산의 작은 오솔길을 즐겨 찾는 수준에 만족하고 있는 저는 ‘산에 든다’고 적기도 합니다.

 

산수를 즐기셨다는 우리네 선조들께서는 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궁금합니다. 이미 8세기 초에 혜초대사께서 천축국까지의 여행길을 <왕오천축국전>에 기록하셨던 것을 보면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전통이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이어져왔을 터입니다. 마침 한국학을 연구하시는 나종면박사가 쓴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를 통하여 산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전에 부안문화원이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 문인 심광세의 유변산록(遊邊山錄)과 17세기 문인 김서경의 송송사상유변산서(送宋士祥遊邊山序) 그리고 19세기말 소승규의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를 묶은 <유봉래산일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1202235>를 읽으면서 조선 선비들의 유람이 어떠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을 조금 더 심화시켜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산수유람은 독서를 중심으로 정진하던 전대의 수양방법론에 변화가 일어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난 결과였다고 합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 글을 짓는 것과는 달리 직접 산천을 유람하면서 사물을 눈으로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적어내는 훈련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기행문을 유기(遊記)라는 이름의 산문형식으로 남겼는데, 글쓴이가 자신의 여행일정을 중심으로 하여 행로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산천경계를 묘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행문은 그곳을 찾아가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안내서가 되고, 찾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읽을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소승규는 유봉래산일기에서 “뒷날 누워서 산수를 유람하는 읽을거리로 삼고자(와유; 臥遊)” 변산기행을 글로 남긴다 하였습니다. 이 책을 옮기신 허경진교수는 각주에서 송서(宋書) 종병전(宗炳傳)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종병이) 병이 들자 강릉으로 돌아와서 탄식하며 생각했다. ‘늙음과 질병이 함께 이르렀으니, 이름난 산들을 두루 구경하기 어렵겠구나. 이제는 마음을 맑게 하고 도를 살피며, 누워서 즐기는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다니며 노닐었던 산들을 모두 방 안에 그려 놓았다.(유봉래산일기, 115쪽)” 사실은 저 역시 외국을 여행하게 되면 출발 전부터 여행과 관련된 일들을 정리하고,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 거리를 정리해오고 있습니다. 꼭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다기보다는 훗날 다시 꺼내 읽으면서 기억을 되살려보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종면박사님은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에 백두산, 금강산 등 조선의 명산이라 할 만한 곳을 포함하여 스물 세 곳의 산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유기(遊記)를 살펴, 산에 드는 선비들의 마음가짐과 그분들이 산수를 그려낸 솜씨를 우리 시대에 맞게 옮기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조 때 문인, 문무자 이옥이 중흥유기(重興遊期)에 적은 산행에 관한 재미있는 계율도 있습니다. “도성의 문을 나서며 삼장의 법을 세웠다. 첫째, 시에 대한 규율이다. 둘째, 술에 대한 규율이다, 셋째 몸가짐에 대한 규율이다.(30쪽)” 조선 선비들의 산수유람은 단순히 산을 오르내리는 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산수 속에서 심성을 도야하였으며, 관리생활을 하면서도 동경했던 은일의 세계를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속리산 문장대에 오른 정조 때 문인 지암 이동항은 “천리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한껏 다 바라보아서 속세의 티끌과 먼지들이 가득했던 가슴을 씻어내었으니, 이것이 내가 대에 올라온 목적이다.(109쪽)”라고 소감을 남기고 있습니다.

 

산수유람은 뜻이 통하는 몇몇이서 술과 음식을 챙겨 종자에게 지우고 나서게 되는데, 산수가 좋은 곳에 머물면서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돌아가면서 시를 지어 부르기 마련입니다. 집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만, 문무자 이옥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의 선비들의 유람길 준비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짚는 척촉장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 시통 하나, 통속에는 우리나라 사라의 시권 하나, 채전축 하나, 일인용 찬합 하나, 유의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했다. (…) 오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16쪽)”

 

소승규의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의 경우 1897년 4월 16일부터 5월 5일까지 19일 동안 부안의 변산을 유람하면서 기록한 기행문인데, 산수의 유려함을 기록하는 한편 동행했던 소초 김은학과 동운 황치경 등 3명이 번갈아 지은 여든 세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난곡 소승규가 변산 채석강에서 지은 시를 소개하면,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나 또한 욕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니

강호 어느 곳 경치가 가장 좋던가.

白鷗翩翩莫飛去, 捕爾者非我(백구편편막비거, 포이자비아)

我亦忘機今己久, 江湖何處景最好(아역망기금기구, 강호하처경최호)


동행하는 선비들이 돌아가며 시를 짓는 경우에는 미리 떼어둔 운을 맞추어 지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시를 지을 때나 산수를 묘사할 때도 고금의 예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좋은 글쓰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영숙교수님이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엮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0858>의 ‘붉은 깃발을 세우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병법을 이해하는 사람이 글을 잘 지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다’라고 시작하는 짧지 않은 비유는 물론 ‘글 짓는 자의 걱정은 항상 갈피를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다.(눈물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197쪽)’고 정리한 점까지도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한 토막의 말일지라도 정곡 찌르기를 눈 오는 밤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 또한 딱 한 마디 말로 핵심 뽑아내기를 세 번 북을 울리고 관문을 빼앗듯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당나라 헌종 때 장수 이소의 전략이나 춘추시대 노나라 장공 때 사람 조귀의 전략을 모르는 독자라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독자를 위하여 설명을 더하는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고문학이 어렵다는 일반의 생각은 인용하고 있는 고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의 선비들의 산수유람에 따라 나서 볼까요? 요즈음이야 산에 든다고 하면 복장과 각종 장비를 갖추고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합니다만, 조선의 양반님네들은 걸어가는 법이 없고 종자나 승려가 들어주는 남녀를 타고 가기 마련이라서 양반들의 고상한 취미는 이들의 위태롭고 힘든 노동이 뒷받침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산세가 험해지기 전까지는 어려움이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옛사람의 산행기는 요즈음 사람들과는 달리 산의 초입에서부터 상세하게 그려나가기 시작하는 점이라고 합니다. 옥오재 송상기가 남긴 유계룡산기(遊鷄龍山記)에서는 동학사의 초입의 동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동구에 들어서자, 한 줄기 시냇물이 바위와 수풀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혹은 바위에 부딪혀 격하기 튀어 뿜어 나오듯 흩어지기도 하고, 혹은 널찍하게 깔려서 잔잔하게 흐르기도 하며, 빛깔은 하늘처럼 푸르다. 바위 빛깔도 역시 창백하여 사랑스럽다. 좌우의 단풍나무 붉은색과 소나무의 비췻빛은 그림처럼 점철되어있다.(101쪽)”

 

이와 같은 산의 초입에 옛사람들의 관심이 지금과 다른 이유를 남종면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의 입산은 산의 입구에서부터 이루어진다. 평지와 산이 만나는 접점, 즉 산의 입구를 초도(超道)라 부르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저 현실세계[속세]의 넝쿨처럼 질기게 얽힌 인연[반연(攀緣)]을 뛰어넘어야만 올바른 수양이 시작된다고 본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나는 것, 느껴지는 것을 억지로 차단하지 않아도 초도를 지나는 것 자체가 외부를 차단하며 끊는 것이다.(18쪽)” 당연히 산의 초입에서부터 마음을 다듬어 산에 서려있는 신령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슬로우 어답터라고 할 수 있는 저는 아직까지도 금강산구경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당 이상수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를 더욱 꼼꼼히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금강산을 돌아 배를 띄우고 해금강까지 돌아본 어당이 해금강의 수려한 풍광을 세세하게 묘사한 끝에 “하늘의 신기한 기운이 세차게 달려 동으로 모여들어 만 이천 봉우리를 크게 벌이어 놓고 바다에 닿아서 끝이 나며 그 나머지로 기교를 베풀어 놓은 것이 의당 이와 같다.(172쪽)”고 하였으니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여기 더하여 저자는 어당이 산수를 오래 관찰하여 사색하여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전하고 있습니다. “산수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만 가지 모습으로 보일 수가 있다 이미 자신의 칠정(七情)이 변한 상태에서 산수를 보면 산수도 칠정에 따라 변한다. 산수는 미추(美醜)가 없으므로, 자신의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 평정 상태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산수는 스스로 신령해질 수 없다. 산수는 사람이 신리(神理)로 만나는 것이다. 산을 온전히 보고자 한다면, 다가가서 그 골체(骨體)를 보고 떨어져서 그 신리를 보아야 한다. 마주 보고 등짐에 따라 취(趣)와 태(態)가 모두 다르니, 높은 안목과 세심한 마음으로 품평을 정밀히 해야 한다. 또 부족한 점을 알아야 하고, 빼어난 곳을 지날 때면 그 요점을 터득해야 할 뿐이다. 갑자기 매우 장대한 것을 보았다고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173쪽)” 어떻게 공감이 되십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는 배드랜드(Badland) 국립공원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습니다. 구경할 곳이 많은 탓에 같은 곳을 두 번 볼 여유가 없던 시절인데 유일하게 반복해서 찾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맑은 날 황혼 무렵에 처음 찾은 배드랜드는 넓게 펼쳐진 초원 한 복판에서 갑자기 드러나는 황량한 모습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도 그 충격은 근처를 지나는 여행일정을 짤 때마다 발길을 당겨, 한번은 맑은 날 아침 무렵에, 그리고 한 번은 안개가 자욱한 날에 이곳을 더 찾게 만들었습니다. ‘산수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만 가지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한 어당의 말씀과는 달리 배드랜드는 다양한 분위기를 스스로 연출한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배드랜드를 찾게 된다면 어당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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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의 역사 - 절대 측정을 향한 인류의 꿈과 여정
로버트 P. 크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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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시절이었으니 아마도 8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시던 교수님께서 당시로서는 생소한 SI Unit 체계에 대하여 발표하시는 것을 지켜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새로운 것을 찾아 공부하시고 후학들에게 가르쳐주기를 즐겨하셨던 분입니다. <SI Unit>는 국제단위로 번역되는 불어 “Systeme International d'Unites”를 줄인 용어입니다. 각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위계를 서로 비교하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단위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측정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국제적 노력의 과정을 모아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척, 관 등과 같이 옛날부터 사용되어온 도량형을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는 미터법이 바로 이 국제단위입니다. 도량형의 표준을 세우는 것은 상거래의 질서를 투명하게 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었던 것으로 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가름하는 중요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난전에서 물건을 사면서 저울의 눈금을 속인다는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국제단위의 핵심이 되는 미터법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실현되었다는 것인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프랑스 사회는 도량형의 표준이 없어 상거래에서 불편이 가중되었고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지고 있어 프랑스 과학계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도량형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이 꾸준하게 제기되어 왔던 것인데, 프랑스 왕은 관습을 바꾸지 않으려는 관련 분야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반대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하여 개혁세력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영주가 기존 도량혈을 악용하여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고 성토하는 목소리가 고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과학아케데미에서 제안한 도량형은 ‘모든 시대를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고안된 것인데 길이와 무게의 표준을 자연표준에 연계했던 것입니다. 즉,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의 4000만 분의 1로,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의 무게”로 정의되었고, 1799년 제작되어 프랑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에탈롱를 길이와 무게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미터법은 단순하고 합리적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정착되는데도 수십년이 걸렸지만 점차 다른 나라에도 전파되었지만, 영국과 미국에서는 여전히 자국의 도량형을 표준으로 사용하면서 미터법을 병용하고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은 국제단위로 변환하는데 투입되어야 할 재정적 부담과 독자적 도량형에 대한 자존심이 같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미터법은 1875년 미터법에 대한 국제협약이 체결되면서 감독권한이 프랑스를 떠나 새로 설립된 국제기구, 국제도량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1879년에는 도량형원기가 제작되어 채택되어 국제도량형국은 원기를 관리하고 회원국의 부원기를 교정하는 임무를 맡는 한편 미터법을 시간과 전기 등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MKSA 단위계를 확립하였습니다. 여기에 온도와 빛의 세기로 켈빈과 칸델라 그리고 1971년에는 몰이 일곱 번째 단위로 추가되었고, 뉴턴, 헤르츠, 줄, 와트 등의 기본단위에서 파생된 ‘유도단위’까지 정해졌습니다.

 

최초의 길이단위 미터가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처럼 임의의 기준을 적용했던 단위들을 자연에서 측정이 가능한 불변의 대상을 찾는 작업이 꾸준하게 이어져서 <측정의 역사> 290쪽에서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길이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력을 상수로 하여 정하게 되었고, 시간은 세슘 133 원자의 초미세갈라짐을 상수로 정하였으며, 국제질량원기를 상수로 하던 무게도 플랑크상수를 기준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위는 필요해서 만든 것이며, 인간의 삶은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한다. 우스꽝스러운 단위는 측정행위가 얼마나 자의적인가를 풍자하고 조롱하고 드러내는 나름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측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측정체계가 주목받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을 때 뿐이다.(199쪽)“라고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뒤에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퀸시 애덤스는 “미터법은 인간의 창의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이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정작 미국은 아직까지도 미터법을 표준도량형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자는 표준도량형은 만물의 언어로 통하게 되었지만, 보편성은 차별을 없애는 한편 차이까지 없었다면서 측정의 표준이 가지고 올 그 무언가에 대한 불안한 느낌을 적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리해보면 국제단위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고 있는데,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생소한 분야라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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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파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4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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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한국 추리소설을 읽었습니다. 신촌의 어느 샛길에서 주한 중국대사관 번호판을 단 외교차량을 세우고 음주측정을 요구하는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작가가 소개하는 프롤로그에서는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로 흘러갈지 감조차도 세워지지 않는 막연한 느낌을 받습니다. 홍콩모텔이라는 제목의 1부, 민주일보라는 2부, 원더랜드라는 3부의 제목 역시 상황이 전개되는 장소일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더욱이 1부를 시작하는 작은 제목의 이름은 ‘B파일 397021 은행원’입니다. ‘도대체 뭐야?’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 1부 제목이기도 한 홍콩모텔의 한 방에서 은행원 조선족출신 리영민이 지독한 숙취 속에서 눈을 뜨고 이미 죽어있는 여성과 함께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는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어 갑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미스테리의 그물을 엮어 사건을 얽어내기에는 아무래도 긴장의 강도를 유지하기 쉽지 않은 듯, 민주일보 편집국장, CBC방송국 사장 그리고 주인공과 관련이 있는 혹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아 상황을 더 복잡하게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제목은 ‘B파일 044316 고참기자’ 주인공은 민주일보 문화부 고참기자 윤순철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B파일 900734 전업킬러’에서는 여자킬러 미호가 등장해서 대통령 측근을 살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B파일 310218 신참기자’에서는 마포경찰서를 출입하는 민주일보 사회부 신참기자 에스더가 고민 끝에 기사작성을 포기한 건으로 낙종하고서 데스크로부터 야단을 맞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네 사람의 등장순서를 흐트러짐없이 반복하면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전개되는 상황은 모두 따로 벌어지고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다가 드디어 고참기자와 전업킬러가 동시에 등장하게 되고, 이어서 은행원은 신참기자가 동시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3부가 시작되면서 네 사람은 무대가 되는 원더랜드에 모여들게 됩니다.

 

작가가 조금씩 던져주던 힌트는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원더랜드에서 네 명의 등장인물이 모여들어 상황의 핵심을 파헤치게 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뿌려둔 작은 팁들을 서로 연결하여 대단원으로 이끌어 들이는 과정이 탄탄하게 짜여있어 허술해 보인다 싶은 구석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작가의 스토리구성이 정말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읽는 사람의 추리가 이야기 전개를 타고 흐르게 만드는 작가의 힘이 절로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변사사건이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부 기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에 사회부 기자를 둘러싼 언론계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저 같은 이도 해당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싶은 구절.... “기자들 앞에서 말실수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걸. 굳이 쓰고 싶지 않아도, 쓰지 않으면 낙종하기 때문에 쓴다. 피를 말리는 미디어 경쟁 시장에서 윤리적 딜레마는 차후의 문제다.(46쪽)”

 

이야기를 끌고 가는 네 명의 주인공에 달려 있는 파일번호의 의미는 3부 원더랜드편에서 밝혀집니다만, 그 비밀을 알게 되면서 씁쓰름한 느낌을 넘어서 등으로 스산한 느낌이 흘러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전개된 상황을 조성한 머리는 별다른 변화가 없으나 다만 몸통은 머리의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마무리되는 상황은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당면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 갑자기 우울모드에 빠집니다.

 

아참 프롤로그에서 음주단속 경찰과 대치하던 주한 중국대사관 외교차량에 타고 있던 사람은 에필로그에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궁금하세요. 궁금하면 5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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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탄생 - 왜 우리는 종교에 의지하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김소희 옮김, 이정모 감수 / 지식갤러리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지난해 초 북소리에서 소개한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를 통하여 마이클 셔머를 만난 바 있습니다. 그는 1997년 과학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회의주의 학회(Skeptics Society)를 설립하고 과학 저널 『스켑틱』(www.skeptic.com)을 창간하여 현재까지 발행인과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회의주의는 아직 생소한 영역입니다만, 국내에서도 관심을 가진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그는 과학의 근거를 바탕으로 사이비과학, 창조론, 미신 등에 맞서왔습니다.

 

2008년 온 나라가 광우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읽었던,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의 리뷰를 이렇게 시작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성적이기 때문에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물론 믿게 되기까지 자세하게 뜯어보는 과정을 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니고 남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보기에는 분명 황당함이 있음에도 상대가 확신하고 있을 때 답답함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광우병위험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중심으로 썼던 리뷰는 하루만에 10만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600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은 제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이 격한 마음을 여과없이 담아낸 것들이었습니다.

 

셔머는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에서 사람들이 이상한 것들을 믿는 까닭을 “첫째, 희망하기를 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적인 방식에서 생각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특수한 방식에서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제하고 그러한 믿음을 검토하여 문제점을 찾아내려 합니다.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발전하여 <믿음의 탄생>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일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에서 나름대로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런 패턴은 어떤 행위자가 특정한 이유에서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경향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낸 패턴에 따라 특정방향으로 몰고 가면서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것(믿음의존적 실재론)입니다. 이런 과정은 신경생물학적 작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결과물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의 탄생>의 번역을 감수하신 이정모교수님은 이 책의 내용을 아주 잘 정리해놓으셨습니다.

 

“1부 ‘믿음의 여정’에서는 세 사람이 겪은 초과학적 사건을 예로 들어 믿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2부 ‘믿음의 생물학’에서는 믿음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실재하기보다는 우리의 뇌에서 만들어져 일정한 방식으로 패턴화되고 전파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3부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는 내세와 종교적 믿음, 외계인의 존재, 음모론에 대한 믿음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4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는 정치상황에서의 첨예한 음모론이나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대립 역시 뇌가 만들어낸 믿음에 근거한다는 점을 지적한다.(5쪽)”

 

저자는 “내가 회의론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믿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대로 믿고 싶기 때문이다. 진실이었으면 하는 것과 실제 진실인 것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해답은 바로 과학이다.(9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믿음이 뇌의 신경생물학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라고 한다면 셔머의 회의론 역시 비과학을 믿는 사람들과 방향은 다르겠으나 역시 믿음이 만들어지는 뇌신경생물학적 작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의 여정’의 화두는 ‘존재’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어느 날 음성으로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는 칙 다르피노는 메시지의 내용이 ‘그 존재와 나와의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의학이나 과학을 신뢰하는 입장에서는 다르피노가 들었다는 음성을 환청이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존재가 외부에 있나?’하는 의문에 답을 얻고자 하는 다르피노는 그 존재가 지구 밖에 있는 외계지적생명체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의사로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영적탐구를 통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던 프랜시스 콜린스는 미시시피 서부의 캐스캐이드산을 오르면서 답을 구할 수 있었다는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위엄과 아름다움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퉁이를 돌자 예기치 못하게 얼어붙은 수백 피트의 아름다운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탐구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48쪽)”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주장에 주목할 만한 증거가 있다고 믿는, 마이클 셔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기독교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문화적으로 결정되지만 기독교의 믿음만은 진정한 종교에 근거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실험심리학을 공부하던 대학원과정에서 역개종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 악마문제였다고 합니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면, 왜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인데, 사랑하는 사람이 끔찍한 자동차사고를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불행을 당한 많은 이들이 이런 의문으로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에 대한 고 이병철회장의 의문에서도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신학자 김용규님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신이 악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선하다. 그런데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났기 때문에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주간조선 2012년 7월 12일자, [백만장자의 마지막질문 24] ‘신은 왜 히틀러나 흉악범같은 악인을 만들었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6400) 즉, “자연 악이든 도덕적 악이든 간에, 악은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자연 악은 자연에 주어진 ‘자연법칙’에서, 도덕적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신은 자연에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자연법칙을, 그리고 인간에게도 역시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고통·불행·죽음과 같은 모든 악이 여기에서 나온다.”(주간조선 2012년 7월 2일자, [백만장자의 마지막질문 24]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6392)는 것입니다.

 

다시 셔머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면, 니체는 셔머보다 더 극적인 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선조 대대로 루터파 신도였던 집안에서 태어난 니체는 소년시절 ‘꼬마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지만, 정작 그의 저서 <반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악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이라고 설명한 니체는 “그리스도교는 ‘악’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강한 인간을 ‘악인’으로 단정 지어 놓고서 철저히 배제했다.”고 하였습니다. ‘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등과 같이 존재하지 않은 것을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되는 유대교의 사제들이 필요에 따라서 신과 도덕을 변조한 것이라 단정하고, “그들은 자기에게 편리한 쪽으로 신을 이용한다. 사제들은 자신의 바람이 실현되는 사회를 ‘신의 나라’라 이름붙이고, 그 ‘신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신의 의지’라 이름 붙였다.(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동서문화사 펴냄, 481쪽)”

 

<믿음의 탄생>에서 믿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2부 ‘믿음의 생물학’에서는 패턴성과 행위자성에 관한 신경생물학적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신경생물학적 연구성과를 인용하고 있어 쉽게 읽혀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패턴성은 학습하는 뇌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진화과정을 통하여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지만, 아직 완벽한 프로그램으로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패턴이 있든 없든 의미 있는 패턴을 찾으려고 하는 이유는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패턴찾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신과 마법은 수백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믿을만한 패턴을 찾으려는 노력의 역사는 일천한 관계로 패턴의 진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겠습니다.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대뇌의 신경세포, 뉴런과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개입하게 되는데, 특히 전대상회피질과 전전두엽피질에서 있는 오류탐지네트워크가 연합학습을 통하여 잘못된 패턴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행위자성이 개입된다고 추정되는 뇌의 활동은 ‘마음이론’이라는 과정인데, 다른 사람들이 믿음, 갈망, 의도를 가진다고 인식할 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 갈망, 의도 역시 인식한다고 합니다. 마음이론 과정이 일어나는 뇌구역은 전대상옆피질, 상측두고랑, 양쪽 측두극 부위입니다.

 

3부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신의 존재와 외계인의 존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앎이 많지 않아 깊게 다루지 못합니다만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와 관련하여 영혼의 실재를 생각해봅니다. 영혼의 존재를 말할 때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던컨 맥두걸박사의 실험이 인용되곤 합니다. 1907년에 발표된 것인데, 임종환자 6명의 몸무게를 죽음 전후에 측정하였더니 숨을 거두는 순간 갑자기 21그램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인간의 영혼 역시 물질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측정이 얼마나 정밀하게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용규님은 영혼은 물질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영혼은 생명을 주관할 뿐 아니라 신의 영과 만나 자기를 초월하게 하는 기능이다.”라고 하였습니다.(주간조선 2012년 9월 22일자, [백만장자의 마지막질문 24] ‘영혼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8450)

 

하지만 셔머는 “영혼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독특한 정보패턴이다. 우리가 죽은 뒤에 개인 정보 패턴을 존속할 매개체가 없는 한, 영혼은 우리와 함께 죽는다.”는 일원론적 관점과 “의식을 가진 천상의 물질이 있어 생명체의 독특한 본질이 죽음 뒤에도 생존한다.”고 믿는 이원론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원론적 관점은 역시 천상의 물질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될 것 같습니다. 신의 존재에 관하여 김용규님은 역시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에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문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보입니다. “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서 작동한다. 사실 초자연적․초과학적인 것은 없다.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원인으로 아직 설명하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을 뿐이다.(256쪽) (…) 시공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은 과학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연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257쪽)”라는 셔머의 설명과 대비하여 생각해보면 두 견해가 만나는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셔머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납치된 항공기를 충돌시켜 붕괴시킨 9.11사건이 통제된 계획 아래 이루어진 폭파라는 충격적인 음모론을 인용하여 음모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사회에서도 대선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일부 인사들이 대선개표과정이 조작되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천안함 침몰사건 등 우리 사회에서도 음모론의 뿌리가 꽤 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음모론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믿음의 탄생>에서는 우리사회의 고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내용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에필로그의 말미에서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은 비록 찾기 어렵지만, 과학은 진실을 발견하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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