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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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국의 신예작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처녀작 <침대>를 읽고서, 정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의 체중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을 조회해보니 미국 댈러스에 살고 있는 버스터 심커스씨가 40세의 나이에 무려 1,376kg이나 된다고 합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삶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고, 체중이 그처럼 불어나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 경우는 체중이 85kg를 넘어가면서 몸이 둔해지고 운동이 조금 많아져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통에 위기의식이 들면서 체중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노력이라고 해도 그저 조금 빠르게 걷는 운동과 함께 식사량을 줄이는 노력을 같이 했던 것인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20km정도 걷다가 70km 이상으로 늘려 걸으면서 체중감소효과가 뚜렷해지면서, 체중감소노력을 꾸준하게 계속한 끝에 만 1년 만에 69kg까지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체중이 표준을 넘어서는 분들은 체질상 문제가 있거나 하는 것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20년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사이에 체중이 630kg에 이르게 된 주인공의 형 에드 멜컴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이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엮이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어가면서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벽에 붙은 전자시계가 7483일째를 가르치는 날 주인공과 방을 같이 쓰는 형 멜컴의 모습을 그리면서 시작하지만, 이야기는 수시로 과거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시점을 파악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이날은 20년간 침대에 머물러온 멜컴이 방송을 타게 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로 한 날이라는 사실이 뒤에 밝혀지게 됩니다.

 

멜컴은 어렸을 적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튀는 행동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특히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옷을 벗어 나체가 된다거나, 지붕위에 있는 TV안테나에 매달린다거나,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중에 비오는 운동장에서 비를 홈빡 맞고 있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멜컴의 이와 같은 튀는 행동은 세상에서 제일 처음 그와 같은 행동을 해보아야 된다는 특별한 생각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에 나오기는 합니다만, 제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의심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멜컴의 행동을 막으려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끊임없이 감싸는 모습을 보일 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가운데 운명의 25살 생일날 멜컴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되고, 침대에서 먹고-자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큰 아들을 끊임없이 감싸고도는 어머니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는 결국은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어머니는 과체중남편을 돌본 경험이 있는 미국 여인 노마 비가 보내준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며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는 형 멜컴과 같이 지내게 됩니다. 주인공은 부모가 형에게 쏟는 관심을 부러워하면서도 별다른 문제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청년이지만, 형을 바라보는 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순진한 구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형과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가운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데 충격을 받은 루와 함께 노마 비를 찾아 미국 오하이오로 가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은 루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합니다. 초비만인 형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집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주인공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엄마는 자신의 지나친 사랑이 우리 모두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13쪽)라는 생각을 하지만, 노마 비는 자신과 멜컴의 어머니, 멜컴을 사랑하는 루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멜컴의 어머니는 멜컴을, 노마 비는 죽은 남편 브라이언을, 그리고 루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하여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사랑, 대단한 이타주의를 말입니다(324쪽) 하지만 자칫 그 사랑이 상대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노마 비는 브라이언이 죽은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사랑은 긴 선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제아무리 사랑이라도 양쪽 끝이 있지요. 그 중 하나는 좋은 끝이에요. (…)하지만 사랑에는 나쁜 끝도 존재해요. 사랑이 우리를 망가뜨릴 수도 있으니까요.(325쪽)”

 

멜컴이 침대에서 나오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어”라고 질책하는 주인공에 대하여 오히려 “아니야 내가 구원한거야(368쪽)”라고 답합니다. 역설적일 수도 있는 그의 답변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멜컴은 왜 내가 가족을 구원한 것이라고 강변했을까요? 가족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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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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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같이 일하는 부서의 워크숍에서 제가 교양강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책읽기를 주제로 하고 “책은 왜 읽는가?”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참석자들의 80% 이상이 여성이고, 가사도 책임져야 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책읽기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마음의 혹은 시간적 여유가 없는 형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책읽기가 삶에 도움이 된다는 점과 분량이 많지 않아도 효율적인 책읽기요령, 그리고 시작하는 방법 등에 관하여 저의 경험을 중심으로 40분 정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준비기간이 불과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자료를 충분하게 모아 활용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습니다만, 그동안 읽었던 몇 가지 책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혜윤님의 <삶을 바꾸는 책읽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6103>,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 안상헌님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 등입니다.

 

고전읽기에 관해서는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아내 에스테르 칼비노가 붙인 서문에 “독자들은 칼비노가 ‘자신만의’ 고전을 비롯해, 자신이 인생의 각 단계들을 거치며 영향을 받았던 작가나 시인, 과학에 관심을 두었던 작가들에 대해 썼던 평론과 논문들”을 두루 수록했음을 밝히고 특히 20세기 작가들의 경우는 칼비노가 특별하게 존경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뽑았다고 했습니다. 출판사 리뷰에서는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등의 고대 작가에서부터 스탕달, 톨스토이, 플로베르, 발자크를 비롯해 마크 트웨인, 찰스 디킨스, 헨리 제임스, 보르헤스 등의 현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30여 명의 고전 작가들과 그 작품들에 대해 쓴 개인적인 독서기”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긴 이소연님은 “거창한 비평 용어 없이 때로는 노골적인 경배와 때로는 치밀한 문체분석이, 또는 역사적 관점에서 주제를 직시하는 혜안이 공존하는 에세이”라고 적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보르헤스의 <픽션들> 정도만 읽은 책일 뿐,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도 적지 않은데다가, 이름도 친숙한 스탕달, 발자크, 디킨스, 플로베르, 톨스토이, 마크 트웨인, 헤밍웨이 등의 작품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것들을 다루고 있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보면 고전이라고 부를만한 작품들에 대한 저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교양강좌에서 인용한 부분은 프롤로그라고 할 수도 있는 “왜 고전을 읽는가”였습니다. 칼비노는 ‘고전이란’ 질문에 대한 모두 열네 가지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모두 공감이 가는 고전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만, 특히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한 첫 번째 정의에서 빵 터지면서 크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다시’라는 전제를 단 것은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소년기부터 열심히 책을 읽어도 고전의 반열에 드는 작품들 가운데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 무수히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해석과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책을 읽게 되면 고전에 담긴 더욱 세밀한 부분과 다양한 면모, 또 그 의미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해석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책,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12쪽)”이라는 정의야 말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에밀 시오랑의 글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낫다.(20쪽)”는 저자의 권고를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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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 - 일의 의미를 찾아서
최명기 지음 / 필로소픽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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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나는 왜 일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봅니다. 이미 직장을 여러 번 옮겼을 뿐 아니라, 하는 일마저도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으니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라는 답은 물건너 간 것 같고, 돈 때문에?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정답은 아닌 것 같은데, 막상 손에 잡히는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일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부제가 달린 최명기 원장님의 “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최명기 원장님은 이미 <내 몸은 내가 지킨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73430>를 통해서 만나보았는데, 글을 정말 잘 씁니다. 첫째, 영화면 영화, 책이면 책, 다양한 소재에서 글꼭지를 끌어다가 저자의 생각을 엮고 있습니다. 둘째, 사실은 이 점이 중요합니다만, 짧은 글을 잘 씁니다. 글을 쓰다보면 엉킨 생각을 제대로 풀지 못해서 길게 늘어지기 쉽습니다만, 저자는 짧게 끊어 쓰면서도 읽는 호흡이 수월하게 넘어가는 글을 잘 쓴다는 말씀입니다.

 

저자는 사람들마다 다양한 일하는 이유가 모두 소중하다고 전제를 하고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도에 있어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그래도 무한정 이야기를 끌고갈 수 없기 때문이었는지, 돈, 인정욕구와 과시, 불안과 소속감, 성취감, 재미, 성장, 승부욕, 도전, 명령, 이타심 등의 열 가지 항목으로 압축하여 나름대로의 해석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전공인 정신의학분야에서 진료를 하면서 만난 환자 사례도 적당하게 인용하고, 자신의 경험도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게 읽히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술을 매일 마시던 사람이 건강 때문에 술을 끊게 되면 큰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저녁때면 매일 술자리가 있었는데 일단 저녁 시간에 큰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 따라서 술이 없게 되면 텅 빈 삶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담이 되어서 다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15쪽)” 제가 1년 반 정도 술을 줄이고 있습니다. 아주 끊었다고 할 수 없어 줄이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만, 그래서 저녁시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책읽기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블로깅을 하는 입장에서 공감할 수도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꼭 책을 내서 대가를 지불받지 않더라도 블그의 글에 수많은 사람이 위로를 얻고 댓글도 달아주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52쪽)” 책을 내게 되면 더 좋은 일이 되겠구요.

 

저의 삶의 궤적과 관련이 있는 글도 보입니다. “의대 교수가 되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박봉을 받으며 전임 의사로 일하던 사람 중 의대교수를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부모가 모두 의대 교수인 동료에게 밀리는 이도 있고 병원 내 정치에 떠밀려서 교수가 못 되는 이도 있다.(79쪽)” 참고 버틸 것인가 일찍 포기하고 떠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고민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에 읽은 <나는 왜 일보다 사람이 힘들까;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4701>를 읽으면서 크게 공감하던 부분입니다만, 일단 일하는 곳의 분위기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직장은 일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근무하는 동안에는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직장이 즐거워지는 법입니다. 제가 조직을 이끌 때 늘 하던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하는 직장을 만들기 위하여 모두 같이 노력하자.’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배신의 아픔을 겪었습니다만, 같이 일할 때는 정말 재미있고 즐거운 분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상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다양한 종류의 일하는 이유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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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자의 고독 - 개정판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5
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김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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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084663>라는 책의 제목처럼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심지어는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까지도 언젠가는 소멸될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열규교수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4271393>에서, 우리네 선조들이 높게 쳐준 ‘갖추어진 삶’의 맺음, 즉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면, 안채 안방 혹은 안사랑에서 이른바 ‘와석종신’해야 하고, 임종자리에는 자식이 빠짐없이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현대의학이 발달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심장이 뛰도록 하기도 합니다만, 돌아가시는 분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임종의 순간을 지키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처럼 고독사(孤獨死)에 대한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57511).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 ‘고독사’는 정의가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세태가 변해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외부에 알리기를 원치 않거나, 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는 것인데, 이는 죽은 이가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사회 또한 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9778).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기대수명이 지난 세기에 비하여 획기적으로 늘고 있습니다만, 역설적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교수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죽음을 임종의 순간에서 노화가 일어나는 과정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고독하게 되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병약해지고 노쇠해지는데, 서서히 쇠락해간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삶으로부터 격리시켜 점차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지만 정작 그 사람은 여전히 사람들이 주위에 남아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떠나갈 때 절실하게 원하는 도움과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들을 멀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고독한 가운데 죽음을 맞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은 문명화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변해온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유래한 지옥이나 천국 같은 내세적 관념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연속성의 신화를 만든 시기로, 사람이 죽음에 대처하는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는 종교적 영향이 줄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서, 두려운 죽음을 가능한 한 멀리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억압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로서 심지어는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타인의 죽음과 나를 분리시킴으로서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타인과 나의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가장 최근 일어나고 있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로운 태도입니다.

 

죽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 죽음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의지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태초의 낙원에서 영생하는 존재였던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인데, 살아가는 동안 신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내세가 보장된다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등 사람들의 삶은 고단하고 짧았으며, 삶을 위협하는 이러한 위험요소들은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종교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위안요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중세 유럽사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고 전염병이 강력한 힘으로 전 유럽을 휩쓸었다. 사람들은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했다. 성직자와 탁발승이 이 공포를 더 강화시켰다.(21쪽)” 니체는 <반그리스도교;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23753>에서 저자의 이러한 견해가 보다 더 오랜 과거에 성립된 것임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평화롭던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믿던 유대교의 신 야훼는 힘과 기쁨과 희망의 상징이었고, 신을 숭배하는 것은 민족의 강성함과 계절의 변화, 농장에서 얻은 모든 복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인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황폐해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 되자 유대교의 성직자들은 ‘모든 행복은 신의 은총이며, 모든 불행은 신을 믿지 않은데 따른 벌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 외, 479쪽)’라고 신도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어온 신’을 ‘조건에 의하여 제약된 신’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재판과 같이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추방, 투옥, 고문, 그리고 화형과 같은 끔찍한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중세와는 달리 현대에 들어 발전된 사회에서는 초자연적인 믿음에 기대어 삶을 위협하는 요소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려는 경향은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었던 상황들이 의학의 발전으로 설명이 가능해지고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진 덕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집단 간의 충돌은 점차 심화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엘리자 그리즈월드는 <위도 10도;http://blog.joinsmsn.com/yang412/12464128>에서 특히 남북 위도 10도 사이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은 영토문제, 물과 석유와 같은 자원을 둘러싼 이해의 충돌 그리고 상대종교의 공격적인 포교에 자극을 받아 대응차원의 포교가 진행되가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지리아의 종교지도자들이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어 지구상의 종교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희망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종교의 영향이 줄어들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것인데, 하나는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의 본질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과 현대국가의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국가가 폭력을 효율적으로 독점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개인의 삶의 안전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던 죽음이 꺼리는 대상으로 변환되고, 자기불명성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강화시키는 피드백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죽음의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커지면서 죽음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에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점에 저자는 착안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31쪽)”

 

최근 개봉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로 향했던 키티의 마음을 다시 붙드는데 성공한 레빈은 키티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빈이 자신의 의구심을 풀어내는 계기는 바로 형 니콜라이의 죽음입니다. 키티는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는 니콜라이를 스스럼없이 깨끗이 닦아주고 따듯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에누리 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것, 그것은 신체적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것과는 별도로, 남아 있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37쪽) 사람들이 점차로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물러서 있게 되고 죽음에 대하여 침묵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짧게 요약한 것처럼 타인과의 죽음에 거리를 두어 죽음에 대한 연상이 자신의 죽음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는 잠재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어가는 사람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상을 저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산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심리적 현상으로 설명하지만, 사회의 발전에 따라 등장하게 된 개인화와 자아인식의 발전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죽어가는 과정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의 세계, 그것과 연결된 독특한 기억, 나만의 감정과 체험, 나 자신의 지식과 소망 등을 오롯이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의 상실감이다.(73쪽)” 어떻게 보면 죽은 자에게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며, 오히려 산 자에게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의 생명을 끊는 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살아있는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은 안타까운 일인 것 같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서구문명의 문명화과정을 정리해온 저자가 죽음에 대한 서구인들의 의식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옮긴이가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살아있는 자와 죽어가는 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죽음을 분석한 것인데, 저자는 현대로 들어서면서 죽음이 위생화되는 과정이 살아 있는 자의 권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죽어가는 자와 노인을 격리시킨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일대학교의 셸리 케이건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59113>에서 영혼의 존재와 영생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반드시 죽는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무게를 실어 죽음과 삶의 의미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앞서 저자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해온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유형 가운데 마지막,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타인과 나의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가 주목하는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구체적인 고민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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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쓴 <왜 고전을 읽는가>를 읽고 있습니다. 고전과 그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에 앞서 저자는 무려 열네 가지나 되는 고전의 정의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처음 읽으면서도 마치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데,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라는 다소 진부한 듯, 정곡을 찌르는 정의도 있습니다만,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한 첫 번째 정의는 가벼운 것 같지만 독자를 배려한 프로작가 다운 면모를 읽는 것 같습니다.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는 고전의 정의를 인용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해서 내놓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스완네 집쪽으로(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48920>을 [양기화의 북소리]를 통해서 독자들께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국일미디어에서 나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을 때, 사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에서 차별화 의식을 설명하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들어 읽었다는 이스탄블 공과대학의 신입생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이 신입생의 말에 공감하듯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책읽기에도 계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된 것은 앞서 소개한 리뷰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박완서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에서 읽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에서 다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신경과학 분야를 전공한 저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래 전 아내가 구입해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인데, 다른 책들을 읽는 사이사이에 짬을 내다보니 장장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슈들 가운데 제가 이미 알고 있어 익숙한 것은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만,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쉽게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북 같은 것을 읽고 시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생각은 얼마 전에 읽은 폴 벤느의 <푸코, 사유와 인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0902>을 통하여 푸코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알랭 드 보통이 전하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한 프루스트의 작품과 편지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첫 번째 주제,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등등의 제목들을 그런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칼비노가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라고 정의하고, 읽는 사람마다의 독특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고전인 만큼 작품에 대한 이차 서적이나 주석본, 해설서 들을 가능한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충고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작가의 원전을 읽을 수 있다면 최선이겠습니다만, 원전을 읽을 수 없다면 좋은 번역가의 번역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프루스트의 “어떻게 하면 시간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15쪽)”라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요약하였습니다. 당시 파리의 유력 일간지 <랭트랑지장>이 1922년 여름에 “지구가 갑자기 파멸하게 된다면 그 최후의 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변으로부터 끌어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는 베네딕트 스피노자의 미래지향적 모범답안을 떠올릴 것입니다만, 저는 최근에 읽은 <내 몸은 내가 지킨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73430>에서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나는 절대로 사과나무는 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제일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내가 제일 느끼고 싶은 것을 경험할 것이다.”라고 한 최명기 원장의 주장에 관심이 끌리고 있습니다. 지구가 파멸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잊지 않고 루브르의 새로운 전시실을 방문할 것이고, X양의 발치에 몸을 던질 것이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것(11쪽)”이라는 같은 맥락의 프루스트의 답변은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한 가지 슬픈 일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라고 한 프루스트의 동생 로베르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국일미디어판을 기준으로 11권에 44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분량이 우선 손길을 멈칫거리도록 만드는데, 읽기를 시작한 다음에도 화자를 둘러싼 분위기를 시시콜콜 서술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침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긴 문장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크기의 활자를 이용하여 일렬로 배열할 경우, 그 길이는 약간 못 미치지만 무려 4미터에 이르고, 웬만한 와인병의 아랫부분을 17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정도(41쪽)”의 문장을 제5권에서 볼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작은 글씨로도 한 쪽을 넘기는 분량의 이 문장은 베르뒤랭 부인의 응접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베르뒤랭부인은 ‘소돔과 고모라’편의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발베크에 있는 그녀의 별장에서부터 ‘갇힌 여인’ 편에서는 파리에 있는 그녀의 집 응접실이 사교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꿈나라로부터 솟아오른 소파 하나가 놓은 곳 주위로는”으로 시작해서 “그들의 연이은 집들, 베르뒤랭의 응접실 각각에 내재하는 듯했다.(42-43쪽)”에 이르는 문장을 여전히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산책을 나가는 양재천 산책길 한 모퉁이에는 산사나무들이 심겨있는 곳이 있습니다.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산사열매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프루스트처럼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솔길에는 산사나무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 산사 꽃향기는 마치 내가 성모마리아 제단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그 형태 안에 뚜렷이 드러나며 촉촉하게 내 주위를 감돌았고, 장식된 꽃들 역시 마치 성당의 붉은 복도 난간이나 채색 유리창살 대에 투조 세공을 한 딸기 꽃의 하얀 살로 피어난 꽃들처럼, 저마다 방심한 표정으로 섬세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불꽃 양식 잎맥 무늬 수술다발을 들고 있었다.(244쪽)”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돋보기, 아니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세밀하게 살펴 글로 묘사한 프루스트의 능력에 놀랄 따름입니다.

 

프루스트는 병약했다고 합니다. 열 살 때 시작한 천식은 평생 그를 괴롭혔는데, 특히 낮에 기침이 심했기 때문에 낮과 밤을 거꾸로 살았다고 합니다. 민감한 피부와 이웃의 소음도 그를 괴롭혔는데 이는 지나치게 발달한 오감을 통하여 주위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점에 대한 반대급부였을 것입니다. 보통은 오직 고통을 받을 때에만 우리가 적절하게 탐구적이 될 수 있다는 프루스트적 논리를 지적하고, “사람이 지혜를 얻는 두 가지 방법 - 하나는 선생님을 통해서 고통 없이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 - 가운데 고통스러운 쪽의 지혜가 훨씬 더 우월하다는 프루스트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를 모두 직접 경험을 통하여 얻을 수만은 없는 한계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들을 골라 그들이 받은 고통이 무엇이고 효과적인 대응방법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지위 상승을 열망하는 베르뒤랭 부인과 앙드레의 어머니,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프랑수와즈, 자기 확신이 넘치는 블로크, 애인 오데트의 마음을 독점하기 위하여 마음앓이를 하는 스완 등입니다. 프루스트는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들의 고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줄 따름입니다. 보통의 작중인물에 대한 분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프루스트는 너그러웠고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의 친구들은 ‘프루스트화하다’라는 동사를 만들어냈겠습니까? 이 단어는 “약간은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아울러 속된 말로 표현하면 끝도 없이 유쾌한 겉치레”를 가리키는 것이다.(170쪽)”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주변에 이런 사람 하나쯤은 꼭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프루스트 역시 “대화, 이것은 우정의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상은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주지 않는 피상적인 여담에 불과하다. 우리가 평생 동안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151쪽)”고 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보통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책을 내려놓는 방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책읽기에 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샛길로 빠져서 마무리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는 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내놓은 저자는 우선 프루스트가 앙드레 지드에게 “우리 동시대인들 사이의 유행과는 반대로, 나는 인간이 문학에 대한 매우 고상한 관념을 가지는 동시에 문학을 향해 온화한 조소를 던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239쪽)”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다음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책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또는 오히려 물신주의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위험에 관한 독특한 자각을 표현했던 것이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이 쓴 책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유익함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그 한계의 음미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독자들이 건강한 책읽기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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