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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진 - 초일류들의 뇌 사용법
조나 레러 지음, 김미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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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지금 남들과는 다른 ‘무엇’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사회를 살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무엇’을 찾아내려면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데, 그 ‘창의적 사고’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조차 퍼뜩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창의적 과정을 “모든 것이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쉿 소리를 내며 홱홱 돌아다니는 아이디어가 들끓는 가마솥”이라고 묘사했다고 합니다. 그 가마솥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많아야 들끓을 일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인문학공부야 말로 창의적 사고라는 가마솥에서 들끓을 수 있는 내용물을 넣어주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창의의 가마솥은 그렇다 치고, 창의적 사고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재능, 다시 말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에 관한 것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바로 조나 레러라는 이야기꾼이 쓴 <이매진>입니다. ‘콜럼비아 대학에서 신경과학을 전공하고 로즈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서 20세기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에릭 캔들의 실험실에서 연구했으며 뉴욕의 일류 레스토랑인 ‘르 시르크 2000’과 ‘르 베르나르댕’에서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다‘는 독특한 이력의 조나 레러를 만나게 된 것은, 제가 자주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바로 저의 ’꼬리를 무는 책읽기‘ 버릇 덕분입니다.

 

조나 레러가 스물여섯 살에 발표하여 큰 주목을 받은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com/yang412/12802521>를 읽게 된 것은 박완서 선생님이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http://blog.joins.com/yang412/12798700>에 적은 다음 구절 때문입니다.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뛰어난 작가, 화가, 작곡가, 요리사, 등 일급의 예술가들이 알아낸 진실들을, 신경과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게 과학적으로 옳았다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박완서 지음,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227쪽)”

 

먼저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소개하겠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나 레러는 이 책에서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 - 요리사도 예술가라 한다면 -들의 작품에서 신경과학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들을 추출해내고 그것들이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레러박사가 인용하고 있는 여덟 사람은 시인 월트 휘트먼, 소설가 조지 엘리엇과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시인이자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요리사 에스코피에, 화가 폴 세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입니다. 레너박사가 이들의 예술적 성과에서 추출한 키워드를 다시 정리해보면, 휘트먼에게서는 ‘감정’을, 엘리엇은 ‘삶의 복잡성’을, 에스코피에는 ‘미각과 후각’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을, 폴 세잔은 ‘시각’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청각’을 거트루드 스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자아’를 찾아내 설명한 것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읽고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찾아 읽게 되었다고 하신 것처럼, 저도 이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오랫동안 미루어 두었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되었고,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이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통합되어 비판적 이성의 범위를 확장해갈 수 있는지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다.(조나 레러 지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2007년, 336쪽)”고 적은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거듭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책’이라 하신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에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조나 레러에 매료되어 있었기에 그의 신작 <이매진>에 거는 기대가 컸던 것이고, 역시 <이매진>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매진>의 주제는 창의적 사고과정의 바탕이 되는 ‘상상력’입니다. 그런데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조나 레러답습니다. 옮겨 보겠습니다. “상상력의 해부구조를 해독했다고 해서 그 비밀을 풀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창의성이라는 주제가 그토록 흥미를 끄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여러 관점에서 기술해야 한다는 데 있다. 어쨌거나 각각의 뇌는 언제나 배경과 문화 안에 놓여 있으므로, 우리는 심리학과 사회학을 섞어서 마음의 내부와 외부세계를 융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매진>이 뉴런의 씰룩거림으로 시작하지만, 주위 환경이 창의성에 미치는 영향도 탐구하는 이유다.(14쪽)” 이 책의 얼개가 ‘따로’ 그리고 ‘또 같이’로 구성된 배경입니다. 1부 ‘따로’에서는 창의성과 관련이 있는 뇌의 신경해부 및 생리학적 연구 성과를 설명하고 2부 ‘또 같이’에서는 창의성이 폭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창의성을 주관하는 기능은 뇌의 어디에 있을까 궁금하시죠? “궁금하시면 14,400원!” 왜 500원이 아니냐구요? 답은 <이매진>에 있습니다. 저자는 통찰을 연구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방법과 그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터바바라 캠퍼스의 심리학교수인 조너선 스쿨러는 창의성을 시험하는 문제를 주고 피험자에게 단서가 담긴 단어를 보여주었는데, 그 단서를 왼쪽 눈에 보여주었을 때가 오른쪽 눈에 보여주었을 때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최근 뇌과학자들이 신비에 묻혀있던 뇌기능에 한발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뇌혈류의 변화를 감시하는 스캐너인 기능성MRI(fMRI)가 개발되면서입니다. fMRI와 뇌파검사(EEG)를 결합하면서 다양한 뇌기능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통찰의 순간을 찾아내려는 실험을 해보았더니 귀 바로 위의 우측 대뇌의 표면에 조그맣게 접혀있는 전측 상측두회(anterior superior temporal gyrus(aSTG)가 깨달음을 얻기 전 몇 초동안 유난히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살인적인 공연일정에 치여서 노래를 만들어내던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가던 밥 딜런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무용품을 만들어내는 3M회사의 연구원들의 생활방식과 버무려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도 조나 레러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기도 합니다. 창의성이 어디서 만들어지는가를 찾고, 그 다음에는 창의성의 바탕이 되는 통찰이 만들어지기 위한 기본적인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분명 외부의 것들이 의식에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것들이 의식에서 사라지는 순간……그녀의 마음은 깊은 곳으로부터 장면, 이름, 말, 기억,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던져 올렸다. 마치 뿜어져 나오는 분수처럼……”통찰이 창의적인 사고의 결정체를 만들어내는 순간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http://blog.joins.com/yang412/12874385> 역시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덕분에 읽었던 책입니다.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평가된 부르스 아돌프의 첼로곡을 연주해낸 요요마의 놀라운 재능이나, 야스퍼거증후군을 앓고 있는 서퍼 클레이 마르조가 ‘원을 그리며 보드를 돌려 파도의 꼭대기에 내려앉으면서, 날아오르는 중간에 몸의 방향을 뒤집어 해안에서 먼 뒤쪽을 바라보도록 하는’, 즉 바다에서 즉흥연주를 하는 식으로 스스로 개척한 ‘마르조 뒤집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는 것을 읽으면서, 창의적 사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조나 레러의 창의적 탐구활동의 범위가 그저 놀랍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50세를 전후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단 기간에 놀라운 수준의 작품을 그리게 된 앤 애덤스와 존 카터의 예술적 성공의 배경에는 그들이 앓게 된 전측두엽치매 때문이라는 점도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맑은 정신을 잃기 시작하면서 예술적 재능이 드러나는 비극적 질병의 본질이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해답은 전전두엽 피질에 있습니다. 배외측 전두엽 피질에는 충동을 제어하는 기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게에서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나, 혹은 창피한 고백을 하거나 먹을 것을 욕심내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피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신경세포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전두엽치매 환자에서는 이 부위의 신경세포들이 파괴되기 때문에 제어기능이 없어져 화를 내기 쉬운 성격이 된다거나 외부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감각정보가 오른쪽 측두엽에서 처리되어 통합된 느낌이 그대로 의식의 흐름으로 풀려나와 표현하려는 욕망이 제어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매진>의 1부 ‘따로’에서 개인에서 창의적 사고가 생기는 기전을 설명하고 있다면, 2부 ‘다같이’에서는 개인의 창의적 사고를 서로 융합하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과정을 심리학적, 사회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시도로 노스웨스턴대학의 사회학자 브라이언 우지교수가 고안한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맥연결망의 밀도(Q)를 측정하는 방법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Q의 양은 뮤지컬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친밀도’를 반영하는데, 어떤 뮤지컬이 그전에 여러 번 함께 작업했던 예술가들의 팀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면 Q값이 높게 나타나고, 처음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Q값이 낮게 나타나게 됩니다. Q값이 1.7 이하로 낮은 경우 그 뮤지컬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데, 재미있는 것은 Q값이 3.2이상으로 높은 경우에도 작업에 고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에 작품이 전작들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제작팀은 Q값이 2.6수준으로 구성되었을 때 최고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즉 오래된 친구들의 상호 작용으로 만들어내는 팀워크에 신참들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녹아들어 시너지를 내게 된다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사상 최고의 성공작으로 꼽히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라고 합니다.

 

이어서 저자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애니매이션 영화를 잇달아서 제작하고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사의 성공요인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조나 레러박사는 픽사 영화사의 독특한 건물구조와 업무방식이 이 영화사의 성공요인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처음 세 채의 별도의 건물로 된 설계도를 버리고 중앙에 널따란 아트리움을 둔 광활한 공간으로 다시 설계된 이유는 직원들의 상호작용을 절대적 가치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요약해보면, 픽사에서는 사람들이 가혹하거나 비판적인 언어를 쓰지 않으면서 아이디어를 개선할 수 있게 하는 플러싱(plussing)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플러싱이 제대로 작동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효과적이고 창의적인 돌파구가 뚫린다는 것인데, 비판이 오히려 깜짝 선물처럼 느껴지면서 십중팔구는 논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각자 한 가지씩 플러스를 떠올리고, 새로운 발상이 영화를 진전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합니다(210쪽).

 

<이매진>을 읽으면서 다양한 사례들을 맞춤한 구절에 인용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저자의 독특한 글솜씨를 다시 즐길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4문화운동은 임의적인 지적 경계선을 무시하고, 구분하는 선들을 흐려놓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자유로이 지식을 이식하며, 환원적 사실들을 우리의 실제 경험과 연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조나 레러 지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2007년, 334쪽)”이라고 했던 저자의 예고가 이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초일류의 뇌사용법’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초일류가 아니더라도 창의적으로 뇌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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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 충실한 영혼에게 말하는 그리스도의 다정한 대화, 최신완역판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이영복 옮김 / 이담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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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 제 2의 복음서라 칭송받고 있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데, ‘서기 1441년에 츠볼레 부근 성 아그네스산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 수도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적혀 있는 사본이 발견되면서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원래 수도사가 수도를 위하여 쓴 것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깊은 통찰력과 학식으로 일반에게도 좋은 삶의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제가 읽으면서 일부 종교적 배경이 강한 구절을 제외하고는 삶에 도움이 될 좋은 말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도 30여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습니다만, 전문번역가로서 우리말에 조예가 깊은 이영복님의 번역으로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본이라서 읽기에 편하고 이해가 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의 본명은 해메르켄(Haemerken)으로 쾰른 근교의 켐펜에서 1379년에 태어났고 열두살 무렵 데벤테르로 가서 종교생활을 시작하다가 공동생활 형제단에 가입하였고 스무 살에는 성아그네스수도원에서 가난과 순결과 순종이라는 세 가지의 종교적 맹세를 하고 수도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33세에 신부서품을 받았고, 책을 필사하는 일을 하면서 찬송가와 전기 등을 집필하는 등 신앙사업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저자가 생전에 애용했던 좌우명이 인상적입니다. “나는 휴식을 찾았지만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은 책들이 꽂혀 있는 작은 책 코너를 얻게 되었다.”

 

덕행으로 가는 3단계로 순수함의 길, 이해의 길 그리고 일치의 길을 안내하는 저자는 ‘영적 생활을 위한 유익한 훈계’, ‘내적 생활로 이끄는 권면’, ‘충실한 영혼에게 말하는 그리스도의 다정한 대화’, ‘성례전에 정중하게 임해야’라는 제목으로 각각에 해당하는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수도하는 분을 위한 그리스도적인 말씀들, 예를 들면, “온 우주를 만드신 주님, 숨겨진 하나님이여, 우리들에 대하여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296쪽)”이나 “사람은 인간으로부터 위로를 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강하게 하나님 속으로 뿌리를 뻗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의의 사람은 괴롭힘을 당하고, 유혹을 받고, 사악한 생각으로 번뇌하게 될 때 먼저 하나님에게 의지할 필요를 통감하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37쪽)” 등과 같은 구절도 있지만, “사람은 한없이 무엇을 바라서 곧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교만한 사람이나 비열한 사람은 편안함을 모른다.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은 거기에 반하여 평화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기의 욕망의 소리를 아직 지워버리지 못한 사람은 가끔 유혹을 받아서 작은 일에도 지고 만다.(26쪽)”라거나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자기를 뒤돌아보자.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며, 그릇되는 일이 많고, 죄에 빠지는 일도 많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은 언제나 유익한 일이다. 우리는 호오(好惡)의 감정에 의해서 일을 결정하기 때문이다.(43쪽)”와 같은 구절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좋은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을 묵상한다’는 제목의 말씀들은 요즘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웰 다잉의 개념에 부합한다는 느낌입니다. “당신은 행동과 생각에 있어서 오늘 죽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죽음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다.(71쪽)”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요즈음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을 읽은 수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대의 평화를 다른 사람의 말 위에 두지 말라. 그것에 의해서 그대 자신이 변할 수는 없다. (중략)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힘쓰지말고, 또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겁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평화가 있다. 마음의 불안과 오감의 흐트러짐은 부당한 사랑과 근거 없는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199쪽)”

 

말씀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분들에게는 신앙을 돈독하게 하는 말씀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말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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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달린다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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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말에 양재천 산책길에 나가면 땀을 뒤집어 쓴 채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달리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 마지막으로 달려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달리는 재주가 없어 단거리는 반에서 꼴찌를 면한 적이 없고, 장거리 달리기 역시 달리기 시작하면 이내 숨이 턱에 차서 주저앉는 편이 수월해서인지 걷기는 할지언정 달리기는 기피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달리기 열풍으로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데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 분들도 이유가 참 다양할 것 같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혹은 기록에 도전하기 위하여 등등... 그런데 철학자는 왜 달리기를 할까요? <철학자가 달린다>는 제목의 책을 보고 첫 번째 든 궁금증입니다. 영국 웨일스 뉴포트 출신으로 현재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마크 롤랜즈교수는 <철학자와 늑대>에서 야성이 남은 늑대와 11년을 같이 지내면서 돌아보게 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유머와 감동으로 풀어내 인기몰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늑대가 롤랜즈교수의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집안의 물건들을 물어뜯어 자칫 집안이 초토화될 위기를 맞으면서 개를 지치게 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모두 여덟 개로 나눈 글은 저자의 달리기에 관한 시대적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에 처녀 출전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여, 세월을 거슬러 소년시절을 보냈던 영국의 미니드 마엔에서 개 부츠와 달리기를 하던 1976년의 기억, 앞서 말씀드린 늑대 브레닌과 달리기를 하던 아일랜드의 레스모어반도에서의 1999년의 추억, 이어서 마이애미로 이주한 2007년 새로 만난 개 휴고와 마이애미의 위험한 소택지를 달리던 추억, 그리고 늑대 브레닌과 프랑스 오브강둑에서 늑대 브레닌과 마지막으로 달리던 추억을 거쳐서 2011년 ING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를 마무리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기르던 개 부츠와 동네 야산을 뛰어오르던 롤랜즈교수가 늑대 브레닌 때문에 다시 뛰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사실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말벗도 하고 격려도 주고받거나, 바람도 함께 느끼면서 같이 있으려고 함께 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롤랜즈교수는 개 혹은 늑대와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장거리 달리기가 궤도에 오를 때마다 생각이 멈추고 사유가 시작되는 시점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기는 사유가 들어오는 열린 공간으로, 저자는 자신의 육체가 달릴 때, 그의 사유도 장비나 선택과는 거의 무관한 방식으로 함께 달린다(80쪽)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자신만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달리기! 이보다 더 행복하고 짜릿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활동이 도대체 있을까? 달리는 동안 정신은 육체와 함께 달아나고, 뇌 속과 다리의 리듬과 팔의 흔들림 속에서 신비로운 언어의 꽃이 만개해 고동치는 것 같다.(81쪽)’라고 한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나 ‘내가 달릴 때, 나의 정신은 텅 빈다. 달리는 동안 드는 모든 생각은 그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달리는 동안 나를 덮치는 사유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고 마는 가벼운 돌풍과 같다.(82쪽)’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즉흥적으로 결정한 마라톤대회 참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아리근육이 파열하는 위기도 맞게 되지만 출전을 강행하게 된 것은 쇠락하는 육체와 정신의 한판 승부를 붙여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장거리 달리기의 자유를 스피노자보다는 데카르트의 자유라고 비유하고 있는 저자는 마이애미 마라톤대회에서 하프코스에서 풀코스를 뛰기로 마음을 바꾸는 과정에서 앞서 말씀드렸던 달리기와 사유와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장거리 달리기에서 자아가 독립된 부분이나 단면들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체화된 형태에서 데카르트의 탈육체화를 거쳐 흄의 춤추는 사유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221쪽)” 이런 단계를 자아의 해체과정이라고 본 저자는 하프코스를 넘어가면서 느낀 사르트르기라고 명명하는 새로운 경험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스피노자기에서 데카르트기를 거쳐 흄기까지 오는 동안 자아는 육체와 정신의 연장선에서 정신으로 그 다음은 다시 사유로 축소된다. 사르트르기에는 정신이 사유에서 무(無)로 더욱 축소된다.(223쪽)”

 

이처럼 저자는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다양한 누낌을 철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사유한 결과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 색다른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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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과의 만남 - 사유의 스승이 된 철학자들의 이야기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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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제철학학교의 로제 폴 드루아 교수님의 신간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을 읽었습니다. 드루아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일상에서 철학하기; http://blog.joins.com/yang412/12905092>였습니다. 저자는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이라는 부제를 달아, 지극히 평범한 일상 행위들로부터 출발한 것이 우리에게 의외의 놀라움을 안겨주고 이 놀라움으로부터 철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독자들이 이해하기를 희망했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하여 ‘철학’이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한 학문이라는 인식을 뛰어넘어 일상의 삶 자체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와의 두 번째 만남은 일상의 의미에서 조금 더 나아가 서양철학을 통사(通史) 형태로 요약한 <처음 시작하는 철학; http://blog.joins.com/yang412/13199292>이었습니다. 그리스, 중세 및 르네상스시대, 고전주의시대, 계몽주의시대 그리고 현대로 구분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스물세 명(사실은 네 명의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을 한 명으로 묶는다면 스무 명이 됩니다.)의 서양철학자들을 고르고 그분들의 삶과 대표적인 철학적 사유를 정리하였습니다. 처음 만남에서는 엉뚱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는 방대하다고 할 서양철학의 핵심을 철학을 잘 모르는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요약하고 있어 철학적 내공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 될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은 <처음 사직하는 철학>의 속편으로, 역시 전편과 같은 형식으로 <사유의 스승들>이라는 원제처럼 모두 스무 명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삶과 정신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 철학자에만 국한하지 않고 미국 철학자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이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대부분철학의 깊이가 없는 저도 이젠 익숙한 이름입니다만, 그래도 간혹은 정말 처음 이름을 듣는 분도 있습니다.

 

출판사 리뷰를 요약하여 얼개를 다시 정리해보면, 이 책은 일곱 가지 주제에 따라 스무 명의 사유의 스승들을 분류하여, 그들의 철학을 간단명료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부에서 고대 철학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서 잃어버린 명증성을 찾아 다시 경험으로 돌아온 앙리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누구나 본질이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경험할 수는 있다는 확신을 가진 분들입니다. 2부에서 철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과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하여 사뭇 다른 견해를 가졌던 버트런드 러셀, 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을 다루었습니다. 20세기 철학에서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언어’가 소리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추구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한나 아렌트,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을 분석하였습니다.

 

4부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 의미의 해체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지난 2천여 년에 걸쳐 이어오던 인간의 질서 - 더 행복하고, 정의롭고,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어왔던 -가 빠르게 붕괴되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지구적 파괴현상을 두고 침묵한 철학자들과 달리 의미와 무의미, 우연성과 자유, 행동과 부조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성찰해온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그리고 알베르 카뮈를 다루었습니다. 5부에서는 진리는 해방을 가져오고, 새로운 자유를 창출한다고 믿고, 정신의 문을 열어 굴레를 벗어나고자 한 마하트마 간디, 루이 알튀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철학을 분석하고 6부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 인간 개념의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노력한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에마뉘엘 레비나스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논쟁과 대립을 통하여 인류가 맞고 있는 위기를 해결할 무엇이 도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현대철학은 여전히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을 마지막 7부에서 자크 데리다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경험, 과학, 언어, 자유와 부조리, 진리 탐험, 위기, 논쟁 등 일곱 가지 키워드를 중점적으로 파헤쳐온 선각자들의 생각들을 읽다보면 진리를 향한 인간의 모험은 계속되고, 역사의 가능성 또한 여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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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한 클래식 - 음악이 삶에 가르쳐주는 소중한 것들
요아힘 카이저 지음, 홍은정 옮김 / 문예중앙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젊어서부터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부문이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탓인지, 앎을 넓혀보려는 노력조차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공부를 해볼 기회가 생기더라도 바탕이 얇은 탓에 이해하는데 힘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무슨 공부든지 다 때가 있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다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처럼 전통 클래식에 관한 공부기회가 생겼습니다. ‘음악비평의 교황’이라 불리는 요아힘 카이저의 <그가 사랑한 클래식>을 읽게 된 것입니다. 1928년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난 요아힘 카이저는 음악학, 독문학, 철학, 사회학(테오도르 W. 아도르노에게 사사)을 전공했고 <쥐트도이췌 차이퉁>에 입사한 이래 클래식 음악전문 저널리스트로 50년 넘게 음악비평을 싸왔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 꼽히며, 1977년부터 1996년까지는 슈투트가르트 음악·조형예술 국립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고 합니다.

 

<그가 사랑한 클래식>은 요아힘 카이저의 클래식 에세이입니다. 특히 클래식 애호가들이 그에게 보내온 질문들에 대하여, 독일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췌 차이퉁>의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카이저의 클래식 수업’이라는 비디오 칼럼을 통하여 답을 주어왔는데, 2년여 간 연재된 칼럼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녹아나는 글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되어 어렵게만 생각되는 클래식음악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4분 33초 동안 아무 음도 연주하지 않는 휴식을 둔 <4분 33초>라는 피아노곡을 설명하면서 휴식마저도 음악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위대한 음악은 항상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결코 중단되는 법이 없으며 그 안에 움직임을 품고 있다. 그 속에서 무언가 감동적이고 감정적인 것, 무언가 우울하거나 경쾌한 것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음악은 어떤 내용, 중요한 가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휴식, 휴지부는 영혼의 숨고르기와 같다.(33쪽)”

 

<그가 사랑한 클래식>을 읽으면서 몇 차례 눈길이 멎은 것은 바그너에 대한 의문들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과연 독일 사회에서 용인되어도 좋은가, 라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반유대적이며 아돌프 히틀러가 숭배하던 음악가를 진지하게 대해도 괜찮은 것인가의 문제였다.(77쪽)” 역시 일제시기에 친일 행적을 보였던 예술가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나치의 기수’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독일국가민주당(1964년 창당한 독일의 극우정당)을 지지할 위험에 빠지게 될까?(207쪽)”라는 질문에 대하여 “독일국가민주당에 표를 던질 이유를 하나도 가지지 않은 자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즐겨 듣는다고 해서 갑자기 그 당의 지지자로 둔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정치적 입장의 토대가 될 수 없다.(208쪽)”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악보를 모두 암기해서 연주해야만 하나?”라는 질문에 대하여 연주자의 기억력에 관한 글도 흥미롭습니다. 연극제작에 참여하다 보면 배우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배우들의 대사를 모두 외울 수 있게 됩니다. 오랜 시간을 배우들과 같이 연습을 진행하다보면 절로 외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훈련을 거치면 악보에 담은 연주내용을 모두 암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프란츠 리스트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를 외우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반면 요하네스 브람스는 한 번도 악보를 연주회장에 들고 간 적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하구요.(91쪽)

 

조금 아쉬운 점은 57꼭지의 이야기들 가운데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클래식 음악을 들어보기를 권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바그너의 오페라의 경우 ‘클래식, 들어볼까요?’에서는 볼프강 빈트가센이 부르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중에서 <머나먼 나라에>를 들어보라 합니다. 느끼신 것처럼 쉽게 구할 수 없는 음악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저자가 추천하는 음악들을 따로 모아 CD로 제공했더라면 이 책이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허영한 교수님이 오라토리오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담은 <헨델의 성경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2555544>에서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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