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은 작다. 그런데도 송아지 가죽 부츠를 신고 남자다운 걸음걸이로 걷는다. 샘의 그림자가 뒤로 뻗어 루시의 발끝을 건드린다. 샘은 그림자가 진짜 키이고 몸뚱이는 거추장스러운 일시적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내가 카우보이가 되면, 샘은 말한다. 내가 모험가가 되면. 최근에는, 내가 이름난 무법자가 되면. 내가 어른이 되면. 열망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다. - P18

먼지바람이 코를 쓸고 가 루시는 멈춰 서서 기침을 한다. 목구멍이 울컥거린다. 어제 저녁밥을 길에 쏟아 낸다.
바로 떠돌이 개들이 달려와 토사물을 핥는다. 순간 루시는 머뭇거린다. 샘의 부츠가 초조하게 바닥을 치고 있는데도. 루시는 하나 남은 혈육을 버리고 개들 사이에 쭈그리고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두고 개들과 싸우는 상상을 한다. 개의 삶은 배와 다리로 이 루어진 삶, 뛰고 먹는 삶이다. 단순한 삶. - P18

연기와 화약 구름 속에서 바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샘." 루시는 자기도 울고 싶지만 꾹 누른다. 이제 본디 자기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샘, 이 등신아, 바오베이(아가야), 멍청아." 달콤함과 신랄함을, 다정함과 욕을 섞어. 바처럼. "가자." - P22

샘이 학교에서 왼쪽 눈에 자두 같은 멍이 들어 돌아온 날, 바가 루시에게 으르렁거렸다. 루시의 옷은 잘못의 증거처럼 멀끔했다. 겁쟁이. 비겁한 계집애. 사실 루시는 샘이 놀리는 아이들에 맞서는 걸 보았지만 샘이 소리를 지르는 게 용감한 건지는 잘 몰랐다. 소란을 피우는 게 용감한 것인가, 아니면 루시가 그랬던 것처럼 침이 타고 흐르는 얼굴을 조용히 숙이고 있는 게 용감한 것인가?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 P29

루시는 내려다본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샘의 얼굴을 언제나 내려다본다. 진흙처럼 갈색이고 진흙처럼 무정형이고 질투 날 정도로 쉽게 감정이 나타나는 얼굴이다. 여러 감정이 나타나지만 두려움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려움이 있다. 처음으로 동생 얼굴에서 자기 모습을 본다. 그리고 지금이, 학교에서의 괴롭힘이나 차가운 총구의 감각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용기의 순간임을 루시는 깨닫는다. 루시는 눈을 감는다. 주저앉아 팔에 얼굴을 묻는다. 가만히 있는 게 지당한 방법이라고 판단한다. - P33

바는 일확천금을 얻으려 했고 등 뒤에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평생 식구들을 몰고 다녔다. 언제나 더 새로운 곳을 향해. 더 거친 땅으로. 반짝이는 부가 벼락같이 나타나리라는 약속을 좇아. 몇 해 동안 아버지는 금을, 주인 없는 땅이나 파헤쳐지지 않은 금맥이 있다는 소문을 좇았다. 가 보면 언제나 똑같이 파헤쳐지고 망가진 언덕, 돌 파편만 가득한 시내뿐이었다. 탐광은 바가 가끔 가는 도박 굴에서 하는 게임이나 마찬가지로 운에 좌우되는 일이었고 바는 언제나 운이 없는 쪽이었다. 마가 단호하게 이제부터는 석탄으로 일한 만큼 버는 삶을 살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탄광에서 탄광으로, 짐마차를 타고 언덕을 넘고 또 넘었다. 통 바닥에 마지막 남은 설탕을 긁어내는 손가락처럼. - P37

루시가 세 살인가 네 살 때 바가 가르쳐 준 요령이었다. 루시가 놀다가 짐마차를 놓쳐 버렸을 때다. 엄청나게 넓은 하늘이 루시를 짓눌렀다. 풀밭이 끝이 없이 일렁였다. 루시는 샘처럼 날 때부터 용감하고 항상 싸돌아다니는 아이가 아니었다. 루시는 울음을 터뜨렸다. 몇 시간 뒤에 바가 루시를 찾아내고는 루시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더니 위쪽을 보라고 했다.
이 지역에서 하늘 아래 한참 서 있다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구름이 정처 없이 흘러간다. 그러다가 구름이 돌아서 나를 향해 소용돌이치듯 모여든다. 한참 있다 보면 언덕이 작아진다. 아니, 내가 자라난다. 원한다면 언덕을 넘어 저 멀리 파란 산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거인이 되었고 이 땅이 모두 내 땅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또 길을 잃으면,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너도 이 땅에 속한다는 걸 잊지 마라. 바가 말했다. 겁내지 말고. 팅워?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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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 모두 우리가 셋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둘이고 자주 둘이고 영원히 혼자이지만 우리는 셋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 게 좋았다. 언제나 곁눈질을 하던 관계에서 드디어 셋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 것이 좋았고 셋이서 오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음을 알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 - P172

비교할 게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할 확률이 높다. 아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근처를 둘러보면 민아와 해든이 있었다. 아름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을 때. 끼어 있다는 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민아와 해든은 아름에게 부표 같았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을 전부 이해할 순 없고 부표가 떠다니는 것을 보며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었다. 이들이 이쯤 있으니, 나는 그보다 한두 파도 뒤를 떠다니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다행이라고, 그 정도만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고, 손을 휘저어 가까스로 해든이든 민아든 누구의 손끝에라도 닿을 수 있다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왜 그들이 그렇게 필요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이 훌륭하니까, 라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 P195

바람이 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아름은 우리를 묶은, 특히 나를 그들에게 묶은 이 마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야 좋아하는 마음. 너에게 없는 것이 내게 있고 내게 없는 것이 너에게 있길 바라는 마음. 혹은 기꺼이 그렇게 착각하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 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단단해진 종아리를 쉬게 두었다. - P205

실은 출판사에서 표지 시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사진은 두 개였다. 민아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과, 언젠가 아름이 실수로 깨뜨린 도자기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으로 작품을 찍은, 작품으로서 찍은 사물, 인간 아닌 것이었다. 깨진 접시. 얼기설기 겹쳐진 사금파리 대여섯 조각. 늦은 오후의 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는 듯, 주변 공기를 금빛으로 부드럽게 부풀린 듯한 민아의 뒷모습과 깨진 그릇의 파편을 쌓아올린 무채색의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부터, 그리고 줄곧 남기고 싶어하던 우정과 결함의 흔적이었다. 애정과 서툶의 증거.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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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지적하는 입장도 힘들지만, 친구에게 지적받는 입장은 더 힘들지 않을까. 해든은 아름의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민아와 함께 일할 때도 항상 민아에게 배우는 입장이던 아름, 이제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와서 자신이 세운 원칙과 일하는 방식을 배워야 하는 아름을. 친구일 때는 볼 수 없던 흠 같은 것, 수십 년 산 나무의 깊은 옹이 같은 것을 볼 때마다 친구일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뾰족한 마음이 그를 향했지만, 그 흠까지 포함한 아름의 어딘지 고집스럽고 어수룩하고 열심인 모습을 보며 해든은 생각했다. 나는 저 사람을 미워해봐야 오래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 P137

역할이라는 거 정말 어렵지. 그 역할로 인정받고 싶을 때는 더욱더, 그러던 중에 넘어졌다고 생각하면 더욱 더, 자괴감에서 회복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이런 깨달음도 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이 생각도 언젠가 했던 생각이다. 생각이 돌아왔다. 직업을 바꿨는데도. 어라, 지난여름에 했던 생각이 또 똑같이 도돌이표. 민아에게 게으르고 나태하고 뭉개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 싫다는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왔는데, 여전했다. 나라는 캐릭터라는 거 정말 지겹고도 낯설지. 그런 애라는 거 아는데도, 모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140

그래, 가끔 선배가 좋게 말해주지 않을 때가 있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좋게 말한다는 건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한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충분히 말해준다는 뜻이었다. 아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 P143

이제 퇴원해? 일은? 일하면서 뭐 먹니? 죽 좀 보내줄까? 아님 반찬? 고기?
되레 그런 걱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색해한 건 민아 자신이었다. 어, 아니, 응, 고마워······ 같은 말을 어물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언제 이렇게 달라진 걸까. 내가 알던 엄마는 언제까지의 엄마인 걸까. 그리고 나는 평생에 걸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몇 명이나 오해하며 살아갈까. - P168

지금 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또다른 생의 자신은 어딘가에서 더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건 아무래도 소용없고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우리는 퍽 잘 어울리지 않은가, 하고 민아는 생각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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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우리 엄마는 꿈이 뭐였대요? 저는 한 번도 물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엄마 꿈이 뭐였는지 몰라요. 엄마를 많이 좋아하셨죠? 둘도 없는 친구셨죠? 두 분이 팔짱 끼고 같이 거리도 걷고 비밀도 나누고 그러셨죠? 저도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당장은 얘기 못하지만요. 아직 할 수 없는 얘기가 많지만요. 저도 편지 보내고 싶어요. 답장도 받고 싶어요. 명진씨, 저는 꿈이 싫어요. 저는 꿈이 중요하지 않은데 제 친구들은 꿈을 찾아가느라, 그게 너무 중요해 보여서 저를 떠나가지 말라고 말을 못했거든요. 가을바람 맞으니 외롭네요. 지금 저도 가을에 있어요. 단풍 구경은 아직 못했지만요. 바빠서는 아니고요. 사실, 단풍 구경 안 좋아해요. 그냥 그래요······ - P91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게 좋았다. 인생에 하나쯤, 사람들이 나를 먼저 찾아줄 이유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인형을 그리고 나는 원하던 걸 받았다. 잘 굴러가는 톱니바퀴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맞물리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인형을 그리기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사람들이 찾으면 찾을수록 잘하고 싶어졌다. - P94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거대한 숲과 집과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저렇게 큰 캔버스에 큰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얼마나 좋을까,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아. 아주 작은 붓으로 인형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막상 큰 그림 앞에 서면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나의 미련 같은 것들은 그냥 미련이었다고, 그렇게 후련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 P94

우직하고 오래가고 싶어.
그렇게 얘기했을 때 아름은 그렇게 될 수 있어, 라고 해주지 않았다.
해든은 민첩하고 계속될 거야.
그렇게 말해주었다. 듣고 싶었던 말이 뭔지도 몰랐던 나에게 최고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몇 년간 사진을 전공한 건 나였는데 아름의 말을 듣고야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지. 나는 쉰 적이 없고 그래서 민첩할 줄 알고 일을 계속하고 싶어하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이우환도 권진규도 아니니까······ 그제야 좀 웃을 수 있었다. 아주 옅은 웃음 일지라도. - P108

아름은 솔직했다. 속엣말과 내뱉는 말이 일치하지 않는 걸 못 견디는 편인 것 같았다. 싫으면 싫다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라고 말했다. 미안할 땐 미안하다고, 좋으면 좋다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했다. 그건 큰 장점이고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솔직함에 당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할 준비가 안 될 사람에게 솔직한 아름의 말은 미울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아름이 나에게 진짜 예술가 같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아름이 자신과 나를 가르는 선 같은 게 있는 듯했다. 그렇게 솔직하게는 말하지 마. 우리가 멀고 다르다고 말하지 마. 나도 안단 말이야. 나는 아름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 P112

그런데 말이야.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말을 못해도 있는 마음 같은 게 있어. 그 마음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 알아도 말하지 못하고 몰라도 비슷한 걸 말해버리는 사람도 있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건 진짜야. - P112

아름과 민아 언니를 생각하면, 그 둘 사이에 나를 끼워 생각하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테두리는 비슷한 모양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두처럼 그 속을 채운 것들은 다를지라도. 서로 다른 마음이 세 개. 세 개의 마음. 나는 세 개의 마음이 어쩐지 둥그렇게 생겼을 거라고 상상하고. 그것은 맛이 다른 세 개의 만두일 수도 있지만, 가끔 그 둥근 마음으로 저글링을 하는 나를 상상한다. 마음을 던지고 받는 장면을 허공에 떠 있는 마음과 손에 쥔 마음, 던져지는 마음과 떨어지는 마음, 떠나는 마음과 돌아오는 마음······ 리듬을 잘 지키면 척척척 마음들이 순서대로 자리를 바꿔 도착하지만, 리듬이 깨지는 순간 우르르 내 품으로 떨어지는 마음 세 개. 이름이 세 개. 상상 저글링은 긴장되고 짜릿하고 어설프고 곧잘 실패하지만 연습하면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을 잘 굴리고 잘 받게 될지도 모른다. - P113

저 정물 같은 미소. 아름이 왜 얼굴을 그리다가 얼굴을 찍게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그 사람의 심성을 닮는 듯했다. 아름은 얼굴을 자세히 보고, 얼굴에서 많은 것을 읽고, 얼굴에 많은 걸 담고 있는 사람이다. 해든은 그런 아름을 좋아했다. 속 모를 사람이라도. 너무 신중해서 답답할 때가 있더라도. 자기가 뭘 가졌는지 모르고 내미는 손만 잡고 남의 등만 보더라도. 해든은 가끔 아름을 ‘신중하다‘고 표현하고 스스로 그 표현에 질색할 때가 있었다. 왠지 그 말의 반의어는 ‘경솔하다‘ 같고, 아름의 반대엔 자신이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건 자격지심인가. 불퉁한 마음으로 웹 국어사전에 ‘신중하다‘를 쳐보기도 했는데, 별생각 없이 검색했던 게 도움이 되었다. ‘신중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매우 조심스럽다‘였다. 거기에는 무게도 가치판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해든은 자신의 모난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조심스러우면 그럴 수 있지. 남의 뒤에 서 있을 수 있지. - P124

아름, 재능은 그런 한 단어가 아니고 그 속에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포함된 단어인데, 네가 만난 사람들과 네가 다한 열심도 거기 들어가.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실패했다 해도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네가 바라는 성공에 필요한 재능이 없는 거지. 다른 여러 재능은 있을 거야. 그래서 재능은 항상 사후적일 거야. 되고 나야 그런저런 재능이 있었군, 하고 평가 할 수 있거든.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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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약에도 체해. 그럴 때 있잖아. 선의에도 걸려 넘어지잖아.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어. 우린 겨우 서른 언저리잖아. - P74

아름에게는 아름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고, 해든에게는 해든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뇌와 좌뇌처럼, 언제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뉘었나 생각해보면······ 나는 과거 이야기에 취한 사람이 싫어, 아름이 그렇게 말했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전에도 후에도 아름에게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일은 적었지만. 아름이 말하는 과거가 나 대학생 때, 나 고등학생 때, 나 어렸을 때, 하며 시작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아직 축축한 사람들의 이야기. 또 거기에 내내 취해 있는 사람들의 자기 연민, 자기 변명, 자기 서사. 그런 걸 싫다고 한 거겠지. 그쯤은 뉘앙스로 맥락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것쯤은 충분히 공유하고 공감하는 사이였으니까. - P76

선배 생각보다 사랑 좋아하네.
사랑 좋아하지. 없으니까 노래로 부르지.
그럼 선배······ 연예인도 제법 좋아하는 거 아니야? 없으니까 인형으로 만드는 거 아니야?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의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일이 좋은 거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찰나 아름이 먼저 말했다.
나는 선배가 말랑말랑할 때가 좋아. - P79

숨을 참았다기보다 숨을 내쉴 때 나도 모르게 무서워, 하고 말하게 될까봐 그 말을 참았다. 소리 없이 혀끝에서 말을 굴렸다. 무섭다고 말해도 될까. 안 되겠지. 수술을 앞둔 당사자한테 사실 나 너무 무섭다고 말하는 것.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하나하나 꼽아볼 때마다 전부 잃을까봐 무섭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가 헤어지는 일을 엄마만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은 나도 엄마와 헤어지는 일을 내내 무서워했다는 것을, 무서워서 외면하고 도망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떨어지는 일이 두려워 애초에 붙어 있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로 알게 되었다. 아플 때 엄마는 너그럽고, 담대했다. 내가 언제나 원하던 엄마 같았다. - P81

나는 내가 엄마보다 용감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모든 헤어짐을 생각하며, 나로부터 떠나갈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눈물보다 콧물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옷소매와 머리카락에 묻히며 정신없이 울었다. 괴상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나다운 것 같았다. 언제나 하고 싶었던 것. 혼자이거나 누군가의 앞에서이거나. 평펑 울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승맞게 울다가 가을은 왜 이렇게 을씨년스럽냐, 하고 애꿎은 가을을 탓했다. 그냥 다 싫었다. 슬슬 건조해지는 공기, 물들어 말라가는 나뭇잎, 앙상해지는 나무, 추워지는 날씨, 지겨운 일교차, 갑자기 바뀌는 온도만큼이나 갑자기 떠나가는 사람들.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떠날 것만 같은 사람들, 매번 나만 혼자 남는 감각. 지겹다. 그 말이 절로 나왔다. 지겨웠다. - P81

나보다 타인을 더 걱정하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아파지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마음? 네가 아프면 내가 괴로우니 아프지 말아달라는 이기적인 마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큰 불행은 타인에게 가는 것이고 나에게는 그보다 작은 불행만 올 것이라 자만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 사랑인 건지, 잠깐 생각해 봤으나 알 수 없었다. 너무 어려웠다. 그런 건. 함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커다래서 잡히지 않았다. 열광과 몰입 외에 무엇이 사랑일까. 질투와 소유욕 외에. 조급함과 뜨거움 외에 사랑이 뭘까. 그 외의 사랑이 나에게 있을까? 나는 자주 의심했다. - P84

걱정이 사랑이라면, 걱정도 사랑이라면 나는 왜 이 사실을 당장 엄마에게 알리지 못하는 걸까. 누군가가 나를 걱정한다면 나는 오히려 불안해지고 두려워질 것만 같다. 그건 또 어째서일까. - P85

샌드위치는 이름을 보고 고르면 이름대 로 정확한 맛을 나에게 주었다. 가볍고 든든할 수 있다니. 식사인데 부담스럽지 않고 식사인 만큼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니. 샌드위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거의 먹을 때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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