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글을 쓰려고 펜을 집어들었을 때,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펜에 차례로 커다란 눈물방울 같은 얼룩이 생겨나는가 하면, 더욱 놀라운 것은, 때 이른 죽음이나 부패에 관한 감미롭고 유창한 문장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것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것보다 더 나빴다. 왜냐하면 글이란–올랜도의 경우가 증명하듯이–손가락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펜을 조작하는 신경이 우리 몸의 모든 섬유를 휘감아, 심장을 깁고, 간을 관통한다. 그녀의 통증의 근원은 왼쪽 손가락 같았으나, 그녀는 몸 구석구석에 독이 퍼지는 것을 느꼈고, 마침내 가장 필사적인 치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시대 정신에 무조건 항복하고, 남편을 하나 얻는 것이었다. - P213

그녀는 사치스럽게 머리를 푹신한 베개에 눕히면서 한숨을 쉬었다."나는 오랜 세월을 거쳐 행복을 찾아다녔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명성도 찾아다녔지만 놓쳤고, 사랑은 아직 알지 못한다. 인생을–아니, 죽음이 더 낫다. 나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알아왔는데"라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아무도 이해하지는 못했다. 여러 해 전에 그 집시가 말했듯이–하늘만을 지붕삼아 여기 평화롭게 누워 있는 편이 낫다. 그건 터키에서 있었던 일이지. - P218

이튿날 아침 식사 때 그는 자기 이름을 말했다. 마머 듀크 본스 롭 쉘머딘이라고 했다.
"알고 있었어요!?라고 올랜도가 말했는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야성적이고, 거무스레한 깃털달린 것의 이름에 어울리는 어딘가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이며, 정열적이고, 우울하면서 결연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그 이름은 떼까마귀의 강청색의 푸른빛, 까악까악거리는 그들의 쉰 웃음 소리, 은빛 웅덩이로 뱀처럼 꼬면서 떨어지는 그들의 깃털들, 그리고 곧 묘사하게 될 그 밖의 수많은 것을 연상케 했다. - P220

"당신, 남자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요?"라고 그는 걱정스럽게 묻곤 했고, 그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이 여자가 아니라는 게 정말일까요?"라고. 그리고는 그들은 더 이상 법석 떨지 않고, 이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각자가 상대방의 재빠른 공감에 너무도 놀랐기 때문인데, 그것은 각자에게 여자가 남자처럼 관대하고 솔직할 수 있으며, 또한 남자가 여자처럼 신비스럽고 섬세할 수 있다는 너무나도 큰 사실을 알게 되어, 그들은 즉시 그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226

그녀는 지금 눈에 들어온 이상한 광경 때문에 땅에 쓰러질 뻔 했다. 정원이 있었고, 몇 마리의 새들도 보였다. 세상은 변함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내내 세상은 계속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그녀는 외쳤다. - P239

그녀의 감정이 너무 강렬해, 그녀는 자기 몸이 녹아버린 상상 마저 들었고, 실제로 약간의 실신 상태에 빠졌다. 한순간 그녀는 아름답고 무덤덤한 광경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마침내 이상하게 그녀는 의식을 회복했다. 심장 위에 안고 있던 원고가 생물처럼 꿈지럭거리더니 고동치기 시작했으며, 더욱 이상한 것은, 올랜도와 원고가 아주 멋지게 교감하고 있다는 증거로, 올랜도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원고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읽어주어야만 한다. 읽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녀의 가슴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자연에게 맹렬하게 대항했다. 주변은 온통 사슴 사냥개들과 장미 덤불이었다. 그러나 사슴 사냥개나 장미는 원고를 읽을 수 없다. 그것은 전에는 그녀가 결코 깨닫지 못했던 신의 슬픈 실수였다. 인간만이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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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멋지고 아주 존경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세상에도 보기 흉한 송장 같은 몸뚱이에 들어 앉아, 통탄스럽게도 다른 능력들을 먹어 치우는 버릇이 있어, 지성이 가장 큰 덩치로 자란 곳에서는 마음도, 감각도, 아량도, 자비도, 인내도, 친절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질식 직전에 몰리게 된다. 게다가 시인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다른 사람들은 하찮게 본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항시 반목하고, 상처를 입히고, 시기하며, 재치 있는 말대꾸에 바쁘다. 그것도 달변으로 한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공감을 요구한다. - P189

이른 4월의 화창한 밤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초생달의 빛과 섞이고, 거기에 가로등 불빛이 가세해서 인간의 얼굴과 렌 씨의 건축물들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럴 수 없이 부드럽게 보였지만, 그것이 녹아 없어지려는 지점에서 은색의 불빛이 그것을 다잡아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대화도 그래야 한다고 올랜도는(바보 같은 공상에 잠기면서) 생각했다. 사교계도 그래야 하고, 우정도 그래야 하고, 사랑도 그래야 한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인간 상호 간의 교제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순간, 아무렇게나 배열된 헛간들, 나무들, 건초더미들과 마차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의 완전한 상징처럼 보여 우리는 또 다시 탐색을 시작한다. - P191

멀리서 야경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서리 내리는 새벽 정각 열두 시오." 이 말이 입 밖에 떨어지자마자 자정을 알리는 시계의 첫 번째 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 처음으로 세인트폴 대성당의 둥근 지붕 뒤에 모여 있는 작은 구름이 올랜도의 눈에 띄었다.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구름은 커지면서 주위를 어둡게 했고, 맹렬한 속도로 퍼졌다. 동시에 가벼운 미풍이 일더니, 자정을 알리는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릴 때쯤에는, 동쪽과 서쪽과 북쪽 하늘은 개였는데도, 하늘 전체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어둠으로 덮여버렸다. 그러고는 구름이 북쪽으로 퍼져나갔다. 런던의 높은 지대를 차례로 구름이 삼켜버렸다. 불빛을 환하게 밝힌 메이페어만이 대조적으로 전보다 더 환하게 불타고 있었다. 여덟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구름 조각 몇 개가 서둘러 피커딜리 위로 퍼져 나갔다. 그 구름들은 모여서 맹렬한 속도로 서쪽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아홉 번째와 열 번째, 그리고 열한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거대한 어둠이 런던 전체를 뒤덮었다. 자정을 알리는 열두 번째 소리와 함께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사나운 구름 덩어리가 도시를 뒤덮었다. 모든 것이 캄캄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18세기가 끝이 났다. 19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 P199

습기라는 것은 가장 교활한 적인데, 햇빛은 커튼으로 막을 수 있고, 서리는 뜨거운 불로 녹일 수 있는데 비해, 습기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침입하기 때문이다. 습기는 조용하고 보이지 않으며 도처에 존재한다. 습기에 나무가 불어나고, 물주전자에 백태가 끼게 하고, 쇠를 부식시키며, 돌을 못 쓰게 만든다. 이 과정은 너무도 천천히 진행되어, 우리가 서랍장이나 석탄통을 들어 올렸을 때, 우리 손 안에서 모든 것이 조각이 날 때에야 비로소 습기의 피해를 알게 된다. - P200

습기는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 사람들은 가슴에는 냉기를, 머리에는 습기를 느꼈다. 그들은 감정을 어떻게든 따뜻하게 녹여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에 이런저런 꾀를 부려보았다. 사랑과 탄생, 죽음이 갖가지 미사여구에 싸였다. 남녀 두 성은 점점 더 거리가 벌어졌다. 솔직한 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쌍방 모두에게서 핑계와 은폐가 끈덕지게 행해졌다. 그리고 밖의 축축한 대지에서 담쟁이나 상록수가 무성한 것처럼,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높은 출생률을 구가했다. 평균적인 여인의 일생은 출산의 연속이었다. 19세에 결혼해서 30세가 될 즈음에는 15명 내지는 18명의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서 대영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습기는–습기를 막을 재주가 없었으므로–목공예품으로 들어간 것처럼 잉크병에도 들어왔다–그 결과 문장이 불어나고, 형용사가 늘어나고, 서정시는 서사시가 되고, 한 칸 정도 길이의 에세이로 쓸 수 있었던 것이 열 권, 스무 권의 백과사전이 되었다. - P202

이 모든 것들이 이것을 막을 재주가 없는 민감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유스비우스 처브가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그의 회고록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어느 날 아침 "온통 하찮은 것에 대해" 2절판 원고지 35매를 쓰고, 잉크병 마개를 닫은 뒤 정원을 한 바퀴 돌기 위해 나갔다. 곧 그는 자신이 관목 숲에 둘러싸인 것을 알았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무수한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발밑에서 훨씬 더 많은 잎더미를 밟고 있는 듯"했다. 정원 끝자락에 피워놓은 젖은 모닥불에서 짙은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 지구상의 어떤 불로도 저 거대한 초목 더미를 모두 태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를 보아도 식물이 무성했다. 오이들의 줄기가 풀밭을 지나 "소용돌이꼴로 말리면서" 그의 발치까지 뻗어 있었다. 거대한 꽃양배추들은 층층이 쌓이며 자라나, 그의 혼돈된 상상속에서 그것들은 느티나무들과 겨루는 듯했다. 암탉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의 달걀을 끝없이 낳았다. 그때 그는 한숨을 쉬면서, 그 자신이 애가 많다는 생각과, 지금 집 안에서는 불쌍한 아내 제인이 열다섯 번째 애기 출산의 진통 한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암탉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고 자문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상 그 자체, 또는 천상의 정면, 즉 하늘은 천사들의 동의를, 사실은 선동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하늘에는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일 년 내내 구름이 고래처럼, 아니 코끼리처럼 몸을 틀고 뒹굴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었다. 처브는 그에게 압박해오는 한없이 드넓은 하늘을 이렇게 비유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영국 제도 위에 넓게 퍼져 있는 하늘 전체가 거대한 깃털 침대와 다름없다고, 정원과 침실과 닭장의 무차별적인 생산력이 하늘에 그대로 복사되어 있었다. - P202

그녀가 마차의 구석으로 몸을 묻으면서, 바람도, 비도, 태양도, 아니면 천둥 그 어느 것도 저 번들거리는 건물들을 부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콧잔등만 긁히고, 트럼펫은 녹이 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영원무궁토록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서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마차가 콘스티튜션 힐을 달려 올라갈 때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빛 속에서 평온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녀는 바지의 시계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물론 한낮 정오의 빛이었다. 이처럼 산문적이고, 이처럼 평범하고, 이처럼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무덤덤하면서, 저것처럼 영원히 존속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올랜도는 두 번 다시 보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미 그녀의 혈액 흐름이 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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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영어는 한때 부끄러움의 원천이었지만, 이제 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서투른 영어는 나의 유산이다. 나는 완벽한 영어에서 일부러 멀어질 것을 외치는 작가들과 영어를 탈취해 도망자의 언어로 비틂으로써 영어를 어지럽히고, 뒤흔들고, 난도질하고, 괴랄하게 만들고, 타자화하는 작가들과 – 문학적 계보를 공유한다. 영어를 타자화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 언어에 박힌 제국주의 권력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며, 영어를 절개하여 그 어두운 역사가 비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시인 너새니얼 매키는 에세이 「타자: 명사에서 동사로」에서 타자라는 명사는 사회적 의미를 띠고, 타자화하다라는 동사는 예술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구분한다.

<예술적 타자화는 문화적 건실성과 다양성 증진의 기반인 혁신, 발명, 변화와 관계 있다. 사회적 타자화는 권력, 배제, 특권과 관계 있다. 즉 한 명사를 중심에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자성을 측정, 배분, 주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예속되는 사람들에 의한 전자의 실천에 초점을 둔다.> - P136

시인으로서 나는 지금까지 시종일관 영어를 권력 투쟁을 위한 무기로 취급해왔고, 나보다 더 힘센 자를 상대로 그 무기를 휘둘렀다. 그래서 영어로 애정 표현을 하는 데에 서투르다. 집에서 나는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늘 조심하다 보니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안으로 들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고통과 불가분하게 뒤얽힌 사랑으로 양육된 나머지, 그 사랑을 공기 중에 일단 노출해버리면 그것이 산화되어 괜히 내가 영어로 내 가족을 배신하는 꼴이 될까 봐 두렵다. - P140

우리가 시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을 때 느끼는 인간적인 충동은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여, 루이스 하이드의 표현처럼 "그에 따라 서로 연결된 관계"의 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에서 예술은 상품이어서 유포가 차단되고 개별적으로 보관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예술작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익을 챙기는 것은 백인 저작자들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 아미리 바라카가 귀중한 인용구를 선사한다. "모든 문화는 서로 배운다. 문제는 뭐냐 하면 비틀스는 자기들이 아는 모든 것을 블라인드 윌리에게 배웠다는데 왜 블라인드 윌리는 아직도 미시시피 잭슨시에서 승강기 운전원으로 일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 P142

영화감독 트린 T. 민하는 내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speaking 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를 제안한다.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트린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에 관해 말하기보다 근처에서 말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과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는 거죠. 그리하여 당신이 대상자와 아주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대표하거나, 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여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근처에서, 즉 가까운 거리에서 말할 수 있을 뿐이며(그 타자가 물리적으로 현존하든 부재하든), 그러려면 의미 규정을 의도적으로 멈추어 의미가 간단히 봉쇄되지 않게 하고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자가 그리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 있게 됩니다. 이 접근 방식은 양자 모두에게 자유를 주며,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이 방식의 강력한 윤리적 견지를 알아본 영화인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권위자의 위치를 점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전지전능의 주장과 지식의 위계에 따라 생성되는 무수한 판단 기준으로부터 당신은 사실상 자유로워집니다.> - P142

서투른 영어는 잘 트윗 되지 않는다. 내 시에서 한 구절을 트윗 하면 아마 납으로 만든 풍선처럼 가라앉을 것이다. 서투른 영어는 오프라인으로, 책이나 라이브 공연으로 공유하는 것이 가장 좋다. 서투른 영어는 소리 내서 읽어야만 이해되는 대화형 어휘이지만, 혹시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 질겅거리는 음절들은 어떤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이 내게 익숙하게 느껴지고, 바로 그래서 서투른 영어는 백인 이외의 인종 집단들을 한자리에 모아놓는다. 그러나 서투른 영어는 멸종되어가는 예술이다. 인터넷이 우리에게 화면 스크롤 절반 정도면 끝나는 길이로 명료하고 간결한 시를 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억양이 들어간 영어로 누가 말하는 것을 진정으로 알아듣고 싶다면, 속도를 늦추고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귀를 훈련하고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터넷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 - P145

2016년 대통령 선거 이후로, 나는 노는 것도 저항의 한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트랜스젠더의 삶이 지닌 불안정성도 드러내야 하지만, 그들의 흥청거리는 삶에 담긴 체제 전복성도 알려져야만 한다. 『이상향을 유람하다:퀴어한 미래의 바로 그 순간』에서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유흥을 벌이고,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실행해야 한다. 퀴어스러움은 현재 우리가 겪는 비관과 고역의 낭만을 넘어 전진하도록 추동하는 어떤 열망이다." 예술은 이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잠시라도 꿈꾸는 일이다. 그렇지만 소셜미디어가 그런 비밀스러운 유토피아를 거의 즉시 뿌리 뽑아 표면에 드러내고 첨단기술 기업의 알고리즘이 예술과 시가 공유되는 영역을 감독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감춰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 P149

내가 자랄 때 흑인 아이, 갈색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인종을 차별했다. 한국 아이들 역시 별생각 없이 인종을 차별했다. 비백인 아이들이 내게 찢어진 눈 어쩌고 해도 별로 상처받지 않았던 것은 나도 맞받아치며 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흠 없는 피해자는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 똑같은 처지였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저 ‘너의 서투른 영어 곁에서 나의 서투른 영어에 관해‘ 쓰기만 할 수는 없다. 근처에서 말하고자 노력할 때는 우리 사이의 간격도 직시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일단 나 자신을 연루시키면, 그렇게 연루시키는 일을 도저히 적정한 선에서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의 간격은 계급이다. 한인 타운에서 한국인은 앞에 나와 손님을 상대하고 멕시코인은 뒤에서 보조하는 일을 한다. 한번은 내가 친구를 사귀었는데 엄마가 그 아이와 놀면 안 된다고 해서 왜냐고 묻자, 엄마는 그 아이가 멕시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악할 일은 내가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네가 멕시코 사람이라서 너랑 놀면 안 된대." 그러자 걔가 말했다. "나는 푸에르토리코 사람이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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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순수가 보호받고 위안받을 때의 정신 상태라면, 어린 날의 불안은 그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보호받고 위안받는다고 느낄 때의 정신 상태다. - P113

2011년 새뮤얼 R. 서머스와 마이클 I. 노턴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지된 반흑인 편견이 감소했다고 대답한 백인 응답자들은 반백인 편견은 증가했다고 응답했다. 인종주의를 제로섬 게임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관점은 너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들면 나에 대한 적대감이 늘어난다는 제프 세션스 전 법무장관의 말에 잘 압축되어 있다. 이 연구가 진행되던 당시 미국 백인들은 실제로 반백인 편견을 반흑인 편견보다 더 큰 사회문제로 여겼다. 오로지 한 명을 제외한 미국 대통령 전원이 백인이고, 역사적으로 의석의 90퍼센트를 백인이 차지해왔고, 백인이 보유하는 평균 순자산이 비백인보다 10~13배 높은데도 그렇게 믿었다. 사실 인종 간 소득 격차는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30년 전 중위 흑인 가구의 보유 자산은 6,800달러였으나 지금은 불과 1,700달러이며, 이에 반해 중위 백인 가구의 자산은 같은 기간 10만 2,000달러에서 11만 6,800달러로 증가했다. 자원의 축적이 너무 불균형해서 백인성이라는 인종 프로젝트는 실질적으로 백인 과두체제를 뜻한다고 철학자 린다 마틴 앨코프는 표현한다. - P119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눈이 멀 때, 시야가 캄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을 뜬 채로 우유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하얗게 변한다. 나는 어디를 가든 백색을 본다. 나는 그 백색의 간계를 감지한다. 심지어 내 생각마저도 엑스선 찍을 때 쓰는 방사선 불투과성 조영제를 주입한 것마냥 백색으로 얼룩졌다는 것을 안다. 그 얼룩은 나의 삶을 남한테 끊임없이 사과하도록 만든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기대에 못 미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과 반대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여전히 내 삶을 백인성과 결부시켜 바라본다. - P121

내가 백인성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 나라의 자본주의적 백인우월주의 위계질서 속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명명백백하게 따져봐야 하는데 여태 그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꼼꼼히 따져보기는커녕, 일부 아시아인은 인종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고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백인들이 하는 똑같은 소리 못지않게 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인종 정체성 때문에 차별만 받은 것이 아니라 혜택도 누렸기 때문이다. 인종을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이 아시아인들이 바로 내 사촌이고, 내 옛 남자친구이며, 브루클린에 안락하게 틀어박혀 맑고 포근한 날 불현듯 나는 인종에 영향받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자진해서 그 문제를 생각할 뿐이라고 여기는 나 자신이다. 나 또한 오로지 나와 내 직계 가족만을 위해서 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전부 누르고 앞서가라는 이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신과 일치된 생존 본능을 갖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을 옥죄는 수치심은 묻어버린 채 말이다. 정도는 조금씩 달라도 미국에서 자란 아시아인은 모두 내가 묘사한 수치심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 기름진 불길을 느껴봤다. - P122

『정동 이미지 의식』에서 정신분석학자 실번 톰킨스는 경멸과 수치심이 사회에서 어떻게 구분되는지 규명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경멸은 결속을 저해하지 않도록 드물게 사용되는 반면, 위계적으로 조직된 사회에서는 개인, 계급, 국가 사이에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암묵적 동의 아래 빈번하게 사용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경멸은 흔히 비판자가 타인이 저지른 일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으로 대체된다. 또는 비판자가 타인이 저지른 일에 괴로움을 표출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또는 타인이 저지른 잘못에 시정을 요구하며 분노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 P124

가족이 과테말라에서 왔건, 아프가니스탄에서 왔건, 한국에서 왔건, 1965년 이후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역사는 미국을 넘어서 각자의 출신국으로 확장된다. 그곳에서 우리의 동족들은 서구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미국이 세우거나 지원한 독재 정권에 의한 대량 살상을 겪었다. 미국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애쓰느라고 우리는 인생에서 제2의 기회를 선사받은 양 황송해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이 나라가 우리에게 부여한 기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자본주의적 확장이 우리의 조국의 피를 빨아 부를 챙긴 방식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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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 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순수는 성적인 것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unmarked) "자유롭게 본연의 너와 나가 될 수 있다"라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 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 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인종적 서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집요하게 상기당하고 그 위치 때문에 심지어 범죄자가 되면 순수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리처드 프라이어가 농담한 대로다. "나는 여덟 살 때까지 아이였어요. 그 후 깜둥이가 되었지요." - P108

수치심을 일으킨 공격자가 내 삶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내 그림자를 그자로 착각하여 몸을 움츠린다. 수치심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같아서, 집 밖으로 잠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용체가 자극받아 나는 반응한다. 체면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수치심은 내 얼굴을 깔고 앉아버린다. - P109

사람들은 흔히 수치심을 아시아적인 속성과 유교적인 명예 체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가해한 수치심의 의례와 연결 짓지만,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그 수치심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 – 또는 가해자 – 로서 점하는 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 P109

수치심은 나 자신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분리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사르트르가 쓴 대로 "타자가 나를 보는 대로" 나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다 자란 지금에야 나는 어렸던 내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불복종에서 유머를 발견한다. - P111

인종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늘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11

백인의 공포 정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누적적이며, 자기혐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사람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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