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조차 창조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발견해내고 있었다. 이전까지 우주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환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핵분열은 보통 별이나 거대한 천체 엔진 중심 부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지름이 1.5미터밖에 되지 않고 6킬로그램의 조그마한 플루토늄 코어가 들어 있는 작은 금속 구체 내부에다 핵분열을 성공시켰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게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나치를(나중에는 러시아였고 중국이었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적을) 이기려는 광란의 경쟁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 일을 한 건 프로메테우스가 준 선물을 극한으로 작열시킴으로써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 P179

그는 우리나라가 지적으로 탁월한 과업을 세운 것은 역사나 우연의 산물도, 일종의 정부 기획도 아니며 그보다 더 이상하고 근원적인 무언가 때문이라고 믿었다. 중앙 유럽의 한 나라로서 사회 전체에 가해지는 압박, 그 안에서 개개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극도의 불안, 그리고 비범하지 못하면 멸종하고 말리라는 절박함 때문이라는 거였다. 한번은 그의 핵 억지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가 나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악과 고통을 전부 세상에 내보내고 나면 상자 안에 뭐가 남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병 바닥—알다시피 그건 사실 상자가 아니라 커다란 항아리나 병에 가깝거든—에서 조용하게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건 엘피스Epis라네. 대개 사람들은 그 존재를 희망의 정령으로 여겨 파멸의 정령인 모로스Moros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존재의 이름과 본성을 좀 더 정확히 풀이하자면, 인간이 가진 기대에 대한 관념 정도가 아닐까 싶어. 악의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우리는 모르잖나? 때로는 가장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힘이 시간이 지나 우리를 구원할 도구가 되기도 하니까." 나는 그에게 어째서 신들이 아픔과 고통과 병과 죄악을 몽땅 자유롭게 풀어놓고 정작 희망만은 병 안에 가둬놓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눈을 찡긋하며 그야 신들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 P180

그는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았고, 그게 그의 도덕적 판단을 상당 부분 물들였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카지노에서 돈을 따려고, 아니면 포커 게임에서 좀 이겨보려고 『게임과 경제 행동 이론』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동기를 완벽히 수학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류의 영혼 일부분을 수학으로 포착하려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이 경제나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 선택을 할 때 따르는 일련의 규칙을 이론화하는 데 상당히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니 힐베르트가 연치의 마음속에 불붙인 잉걸불,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붙들겠다는 그의 원대한 희망은, 완전히 꺼진 게 아니었던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나 혼자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도 같다. 사실 그에게는 뭐 그리 고귀한 목표 따위는 없었을 수도 있다. 언제나 그랬듯 그냥 무책임하게 즐겼던 것인지도. - P181

모든 것을 수학화하고 싶어했다.
생물학, 경제학, 신경학, 우주학에서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꿈.
인간 사고의 모든 영역을 변혁하고 무한한 계산의 힘을 세상에 풀어 과학의 목덜미를 움켜쥐겠다는 꿈.

그는 그래서 그 기계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장치는 아주 획기적으로 새로운지라 실제 작동된 후에야 쓸모의 상당 부분이 선명해질 거요." 그가 내게 한 말이다.
그는 알았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기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임을.
그리고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 P191

만약 34번가에 같은 폭탄을 떨어트리면 다운타운 전체가 초토화되어 내 주변의 모두가 죽고 모든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질 테지. 이런 생각을 하며 시내를 돌아다니면 잔해와 돌무더기가 사방에 보이기 시작했다. 공사장 인부들을 보면 그저 웃음이 났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무너질 텐데 뭐하러 다리를 짓고 아파트를 짓는담? 다들 미쳤군! 전혀 이해를 못하는군! 뭐하러 새로운 걸 만들어? 다 쓸모없는데! 폭탄은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폭탄을 만들기란 쉬웠고, 머지않아 또 사용될 것이 틀림없었다.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은 늘 그렇게 행동하니까. 국제관계는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었다. 그러니 새로운 창조는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다고 나는 확신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의 믿음은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났고,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음에 나는 진심으로 기쁘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리가 필히 파국으로 치달으리라 생각했다. 특히 그 작자들이 매니악을 이용해 수소폭탄을 만들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 P199

폰 노이만의 발명품이 아니었다면 열핵무기는 사실상 만들어질 수 없었다. 컴퓨터의 운명은 애초부터 열핵무기와 단단히 얽혀 있었다. 폭탄 제조 경쟁은 컴퓨터에 대한 조리의 열망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고, 반대로 매니악을 만들려는 노력은 핵무기 경쟁으로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렇게나 소름이 끼친다. 인간 발명품 중 가장 독창적인 물건과 가장 파괴적인 물건이 정확히 동시에 탄생하다니. 우주를 정복하고 생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첨단 기술 세상의 많은 부분이 단 한 사람의 편집증적 집착으로 인해, 또 수소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계산하느라 개발된 전자 컴퓨터로 인해 추진력을 얻었다. 울람을 생각해도 그렇다.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무덤 속에 한 발을, 아니 두 발을 디뎠던 폴란드인 수학자가 이후 정신 나간 상상력을 발휘한 덕에 우리는 기적 같은 계산법을 얻었다. 그 기법이 마침 딱 알맞은 시기에, 마침 딱 알맞은 기술과 만나 수리물리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세상은 불타기 시작했다. - P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조직의 태도는 모른 체하고, 가족과 친척을 지원하는 데 필사적인 부모님에게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나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아들과 손주들이 인질처럼 잡혀 있는 부모님이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고. 아이를 낳아본 적 없는 나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세운 책망의 가시에 자꾸만 스스로 찔렸다.
북송 사업에 대해 후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공개되면 조직 인으로서 아버지가 비판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아버지도 이 정도는 말하게 해주고 싶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할 테니까. - P94

하루는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려는 간호사에게 아버지가 폭언을 했다. 아프다고, 그만하라고 소리치는 아버지를 괜찮다며 무시했던 간호사였지만, 나는 바로 그에게 사과하고 도리어 아버지에 게 화를 냈다.
"아버지,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 열심히 하는데, 아버지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인데 뭐라는 거예요!" 내가 세게 나가자 아버지는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외쳤다.
"나를 위해서라니! 모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나를 위해서라고 하지 마라!"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병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간호사들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분노가 에너지로 바뀌었는지 진지한 표정의 아버지는 멀쩡해 보였다.
"아버지가 옳네. 그래, 모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아버지에게 사과했다.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버지가 말했다.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금 전만 해도 차디찼던 피부가 몹시도 뜨거웠다. 한낮의 태양 같은 열기가 온몸에 퍼졌다. 하지만 새벽 다섯시였으니 태양빛일 리는 없었다. 정확히는 다섯시 이십구분 사십오초. 그건 폭탄의 열기였다. 이내 그렇게 갑자기 시작되었던 것이 갑자기 끝났다. 열기가 흩어졌고, 빛도 사라졌다. 환호하고 손뼉 치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이들이 기쁨에 겨워 소리지르며 자축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은 말이 없었다. 다른 몇몇은 우리 머리 위에 피어오른 불길한 버섯 모양의 구름을 올려다보며 기도했다. 구름 내부에서는 자줏빛 방사선이 생경하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은 성충권까지 높이, 더 높이 올라갔고, 폭발로 시작된 무시무시한 우렛소리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산에 부딪혀 왔다갔다하며 계속해서 되울렸다. - P153

돌이켜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칼로 물 베듯 선명히 구분할 수는 없다. 부다페스트를 떠날 때의 아픔과 전쟁으로 상실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잊히질 않고, 십대 시절 털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목에 금메달을 건 채 스케이트를 탈 때 내 이름을 연호하던 사람들의 아득한 목소리가, 뚜껑 없는 마차를 타고 성대한 파티에 갈 때 머리칼을 나부끼던 바람이 지금도 생생하다. 파티는 아버지가 우리집에서 연 것이었는데, 진짜 집시 악단이 와서 주말 내내 멈추지 않고 노래를 연주했다. 친척 어른들과 사촌들, 우리 대가족의 친구들이 별안간 시끌벅적하게 등장하면 피아노와 가구를 옮기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추며 놀았다. 이 모든 행복한 기억이 번지면서 악몽과 뒤섞인다. - P155

미국의 지옥경을 누비던 기나긴 오디세이 동안에 나의 일부는 분명 죽음을 맞이했다. 견디기 힘든 열기 속에 땀을 흘리며 광활한 공허함을 응시하던 일, 가도 가도 끝나지 않던 밝은 초록색의 옥수수밭,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생긴 주유소들, 왜인지 조니가 선호했던 추레한 모델들, 활짝 웃지만 머리는 텅 빈 여자들을 만나 같이 웃어 주어야 했던 작은 마을과 소도시, 식당과 가로변 술집과 레스토랑에서 무지함을 뽐내던 멍청한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잠자고 있어야 했던 일까지. 그 나라에는 문화라는 게 아예 없었다. 그저 행복한 아내들이 애국심 넘치고 지극히 미국적인 1950년대 낙관주의에 젖어 자기네들 가전제품을 극찬하고, 미련한 남편들은 술병을 들고서 새로 산 잔디깎이를 미는 그런 나라. - P162

다음날 아침 남편은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그날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다 른 모든 걸 외면한 채 모든 형태의 기술 발전에 자신을 쏟아부었다. 순수수학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나란 존재도 깡그리 지워졌다. 그는 어떠한 유예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으며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도 이 세상에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핵 딜레마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그의 최고와 최악의 모습을 완벽히 반영하고 있었다. 빈틈 없이 논리적이면서 완벽히 반직관적이고, 사이코패스의 경계에 걸쳐 있을 만큼 철저히 이성적인 모습. 많이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남편은 인생을 순전히 게임으로 보았다. 얼마나 치명적이고 심각한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한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새끼 들짐승의 놀이 방식이 미래에 목숨이 위험해질 상황에 대비한 훈련인 것과 똑같은 이치로, 어쩌면 수학도 그저 기묘하고 놀라운 게임들을 모아놓은 집합체이며, 누구도 상상 못한 미래를 대비해 개인의 차원에서건 집단의 차원에서건 인간 정신을 천천히 변화시키는 것이 그 기획의 진짜 목적,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 너머의 목적이라는 것. 하지만 인간의 고삐 풀린 상상력에서 튀어나온 그 끔찍한 게임들의 문제는, 그것을 현실에서 실행할 때 우리가 어떠한 지식도 대처법도 갖고 있지 않은 위험—그야 현실의 규칙과 진짜 목적은 신만이 알고 있으므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65

나는 조니에게 1928년 그가 발표한 논문 「실내 게임이론」을 읽었노라고 말을 꺼냈다. 혹시 그게 체스 같은 게임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내가 묻자 그는 프로펠러를 힘차게 한 번 돌린 뒤 대답했다. "아뇨, 아니, 아니지! 체스는 게임이 아니니까! 그건 잘 정의된 형식의 계산이지요. 복잡해서 정답을 찾아내는 게 어려울 수는 있어도 이론상 체스에는 반드시 해법이나 최적의 방식이, 체스판의 말들이 어느 자리에서 어떤 형세를 이루고 있건 간에 완벽한 다음 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진짜 게임은 그렇지 않아요. 현실 속 게임은 딴판입니다. 현실에서 이기려면 거짓말과 속임수가 필수니까요. 나는 치밀한 속임수로 구성된 게임에 흥미를 느낍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 마저 속이는 게임 말입니다! 그런 게임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상대의 생각을 읽어내야 합니다. 상대에게 어떻게 대응할지 또 상대가 나의 다음 수를 어떻게 예측할지 생각해야 하지요. 나의 이론은 그런 게임을 다릅니다." - P169

MAD의 원리에 따르면 핵무기를 실어나르는 장거리 폭격기가 일 년 삼백육십 오 일 이십사 시간 내내 착륙하지 않고 지구를 돌아야 하고, 그 비행기들은 핵탄두를 잔뜩 싣고 심해를 순찰하는 거대 잠수함단과 거대 네트워크를 통해 연계되어야 하며,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워싱턴에서 모스크바까지 날아갈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수천 대가 지하 저장고와 요새화된 벙커에 깊이 묻힌 채 아포칼립스의 나팔소리를 침착하게 기다려야 했다. 이 위태로운 평형상태, 섬뜩한 게임은 냉전이 끝나고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너무나도 많은 무기가 그대로 남아, 결함 있고 노쇠한 통제 장치의 감시를 받으며, 마치 오래전 죽은 고대 파라오의 시체처럼 강철관에 보존된 채 죽음과 함께 삶이 시작될 날만을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다. - P174

인생은 게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삶의 풍성함과 복잡함은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방정식이라 해도 포착할 수 없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완벽한 포커 플레이어가 아니다. 대단히 비합리적이기도, 의욕만 앞서기도, 감정에 좌우되어 온갖 모순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유발되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성의 광기 어린 꿈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자비이자 이상한 천사이다.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 나는 최후의 말을 원하고, 그 말은 너무도 근본적인 것이어서 현실 속의 도달할 수 없는 부분과 뒤엉켜 있다. 나는 논리에서 이탈해 버릴까 봐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내 본능과 솔직함에, 그리고 미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미래가 되고, 모든 시간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된다. 그러니 논리에서 벗어난다 한들 무슨 손해가 있을까? - P17

나는 아주 새롭고 참된 단계로 진입하면서 그 단계 자체에 호기심을 느낀다. 그건 그림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직접적이다. 마치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 나는 그 순간들 속으로 깊이 내려앉았고, 그래서 그것들을 지나쳐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주위를 둘러싼 에너지에 닿은 상태이며 나는 몸서리친다. 어딘가 미친, 미쳐버린 조화. 나도 안다, 내 시선은 세상에 완전히 항복한 원시인의 시선과 같을 것이다. 선이 굵은 선과 악만을 허용하고, 머리카락처럼 악에 뒤엉켜 있는 선에 대해서는, 선이기도 한 악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신들처럼 원시적인 시선. - P17

새로운 시대, 나 자신의 시대, 이 시대가 즉시 나의 도착을 알린다. 나는 충분히 용감한가? 지금으로선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먼 고통에서 왔으니까. 나는 사랑의 지옥에서 왔고 이제 당신에게서 벗어났으니까. 나는 멀리서, 중대한 혈통에서 왔다. 나는 삶의 고통에서 왔다. 그리고 더 이상 그걸 원하지 않는다. 나는 행복의 전율을 원한다. 나는 모차르트의 공정함을 원한다. 하지만 나는 모순을 원하기도 한다. 자유? 그건 내 마지막 피난처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강요했으며, 그것을 재능처럼 지니지 않고 영웅적으로 보유한다: 나는 영웅적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흐름을 원한다. - P22

이 지금–순간, 나는 경이를 향한 산만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갈망에, 그리고 수도꼭지에서 나와 향기 가득한 정원 잔디밭으로 흘러가는 물에 비친 태양의 무수한 반사광에 에워싸여 있다. 정원과 반사광들은 내가 지금 여기서 지어낸 것이고, 그것들은 내 삶 속 이 순간의 말하기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도구다. 내 상태는 물이 흐르고 있는 정원이다. 나는 그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시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말들을 섞으려 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건 눈으로 볼 때처럼 빠르게 읽어야 한다. - P23

나 자신을 새로 만들고 당신을 새로 만들기 위해, 나는 정원과 그림자의 상태로 돌아간다. 상쾌한 현실, 나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존재하려면 세심한 주의를 계속 기울여야만 한다. 그림자 주변에는 흥건한 땀의 열기가 있다. 나는 살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한계에 다다르지 못한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러면 그 한계의 경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아니, 위험한 자유의 모험에는 경계가 없다. 그리고 나는 위험을 감수한다. 나는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산다. 나는 노랗게 흔들리는 아카시아들로 가득하며, 나는 이제 막 여정을 시작한 자이며, 나는 내 인생의 걸음걸음이 어떤 잃어버린 바다로 이어질지 추측해 가며 비극적인 기분으로 여정에 나선다. 나는 내 안의 구석진 곳들을 미친 듯이 통제하고, 그 발광은 너무도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나를 질식시킨다. 나는 이전이고, 거의이고, 전혀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당신에 대한 사랑을 그치면서 얻게 되었다. - P25

그래, 이것은 삶에 의해 보이는 삶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붙잡는 법을 갑자기 잊어버린다. 존재하는 것들을 붙잡는 법을 모르는 나는 무엇이든 상관치 않고 지금 일어나는 일을 산다: 나는 실수들로부터 거의 자유로워졌다. 나는 자유롭게 풀려난 말馬이 맹렬히 달리게 한다. 나는 힘차게 달려가는 자, 오직 현실만이 내 한계를 설정한다. - P26

나는 약한 걸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친 리듬에 사로 잡힌 약한 여자일까? 만일 내가 강하고 단단했다면 그 리듬이 들리기나 했을까? 나는 어떤 답도 얻지 못한다: 나는 있다. 내가 삶에서 얻는 답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으로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나로 있다. 가끔 나는 비명을 지른다: 더 이상 내가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나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고,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삶의 음역대를 형성한다. - P30

따라서 글쓰기는 말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말은 말이 아닌 것을 낚는다. 행간에 있는 말 아닌 것이 미끼를 물면 글이 쓰인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이 잡히고 나면 안심하고 말을 내버릴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비유가 끝나는 곳이다: 말이 아닌 것, 미끼를 물기, 말에 통합되기. 그러니 당신을 구원하는 건 넋을 놓은 글쓰기다. - P31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게 될까? 순간들을 말할 것이다. 나는 너무 멀리 가고, 그래야만 존재한다. 나는 열렬히 존재한다. 이 엄청난 열기—언젠가는 삶을 멈출 수 있을까? 이 슬픔이여, 너무도 많이 죽는 나여. 나는 땅을 뚫고 내려가는 뿌리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간다. 나는 열정이라는 재능을 얻은 자, 마른 나무의 모닥불 속에서 뒤틀리며 타오른다. 내 존재를 확장하고픈 나는 내 너머에 존재하는 비의秘儀를 그것에게 가져다 준다. 나는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내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모은다, 시간, 시계의 똑딱거림 속에서 고동치는 시간. - P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득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첫 방북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원산에서 고속도로를 지나 이 자리로 옮겨진 모두가 고개를 숙일 때, 나 혼자 멍하니 동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뒷머리에 손을 얹고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몇 초 후 다시 머리를 들 때까지 그 손은 계속 내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부동자세에서 풀려난 후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머리를 누르다니, 부모도 한 적이 없는 짓이었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름 끼치는 굴욕감을 맛보았다. - P65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북한 사람은 현지 매체의 카메라 앞에서든 해외에서 취재를 온 인터뷰에서든 "장군님 덕택에 행복합 니다. 감사합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라고 말한다.
평양에서 나고 자란 양씨 집안 아이들은 〈디어 평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많이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 한다. 조부모를 향한 소박한 감사 인사처럼 보이는 이 말이 실은 강렬한 아이러니라는 것을 파악한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 P67

아버지는 이미 일흔넷이었으므로 고희연이라고 주장하기는 다소 애매했지만, 부모님에게는 소정의 목적이 있었다. 오빠들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에 사는 먼 친척들까지 평양으로 불러 모아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이었다. 칠순 잔치는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평양으로 갈 통행 허가증을 얻기 위한 ‘공식‘ 사유였다. 정년퇴직 후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간부가 된 아버지는 칠순 잔치를 당신이 건강할 때 해야 할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다. 6.25전쟁 전에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갔다가 차별과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북송 사업으로 북에 넘어간 친구들도 초대해야 한다며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옥류관에 불러 모아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에 크게 뽑아서 돌릴 거야. 액자에 딱 넣어서 선물이랑 돈도 좀 넣어주고.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아버지는 늘상 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 P70

아버지는 북송 사업의 선봉대 역할을 자처했다. 북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동포 사회에서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인 활동가였다.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미화해서 타인에게 이주를 추천하는 무모함을 혁명적 임무라고 믿고 수행했던 것이다. 자기 자식들 손에까지 편도 표를 들려서 북한에 보낸 몇 년 후, 그 나라에 방문해서야 누구보다 북송 사업의 실태를 잘 알게 된 사람이었다.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뿐더러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각도 있었을 터이다. 세 아들과 가족들이 ‘인질‘이 되고야 말았으니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훈장을 달고 활짝 웃는 부모님의 얼굴이 피에로 같다고 생각하며 나도 웃었다. 북조선을 조국으로 선택해 살아온 두 분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없었다. 그저 믿고 살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 부모님이 웃고 있었다. - P71

뉴욕에 오기 전 함께 일했던, 일본을 대표하는 TV 뉴스 프로그램의 디렉터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베개 밑에 깔린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니 항공기가 충돌해 연기를 내뿜고 있는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을 모든 채널에서 내보내고 있었다." […]
그날부터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연설 때마다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나라들을 언급했다. 언론에서 ‘DPRK(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가 오르내릴 때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 미국은 이듬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는데, 일본이든 미국이든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가족이 살고 있는 나라를 적대시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일 무력에 의한 보복을 외쳐대는 것 또한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 P75

"안녕, 영희.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파일이 학생비자 신청을 위해 대사관에 제출할 서류예요. 불안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려요. 당신은 우리 대학원의 정식 학생이고,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학생의 배울 권리를 지키는 것이 대학의 의무입니다. 만약 미국에 오기 위한 비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직접 주일 미국대사관에 요청할 거예요. 이 건에 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우리에게 맡겨요. 가족을 만나러 간다면서요. 여행 잘해요!" - P80

아버지는 저녁에 반주를 들 때마다 뉴욕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한국인 유학생 친구가 많이 생겼다고 하자 무척이나 기뻐했 다. 어머니는 남편과 딸이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안심하면서 평양으로 가져갈 짐을 싸는 데 여념이 없었다. 뉴욕에서 오사카까지도 멀지만, 오사카에서 평양까지 가는 길 또한 쉽지 않은 여정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돌아가면 그만큼 평양의 가족들은 기뻐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와주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조카들에게 ‘뉴욕 고모‘는 인기 만점이었다. 부모님에게도 뉴욕에서 일부러 와준 딸은 자랑거리였다. 가장 중요한 점은 30년 만에야 겨우 가족이 모두 모였다는 사실이었다. - P81

나는 옥류관에서 열린 잔치를 카메라로 기록하면서 채플린의 말을 떠올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내 가족을 롱숏으로 바라보기 위해 렌즈의 힘을 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해도 미워해도 답답해도 멀리 떨어져 살아도 가족과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존재를 부감하여 다각도로 보기 위해서는 밀어낼 필요가 있다. 가족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원거리에서 응시하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다. 살아온 날들을 해부하여 내 백그라운드의 정체를 넓고도 깊게 알고 싶었다. 그런 다음 가족과 나를 분리하고 싶었다. - P87

아버지의 연설을 들으며 내 가족을 해부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던 아버지가 실로 많은 말을 삼키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 역시 많은 말을 삼켜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 번은 꼭 해야지" 하던 아버지의 말과 연설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둘 다 아버지의 말이었다. 둘 다 아버지였다. 잠옷 차림으로 진심을 말하는 아버지도,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버지도 모두 나의 아버지였다.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본심과 명분 사이를 오가지 않을까. 본심 속에도 명분이 있고 명분도 본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다면체라 여러 측면으로 둘러 싸여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비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평범해 보여도 인간이란 그러한 생명체인 것이다. 훈장을 단 아버지를 보면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떠오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혁명을 외치는 아버지도 평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88

"수용소에 들어가서 몇 년 후에 무죄라고 밝혀지면 보통은 손 해배상감이지."내가 말했다.
"너는 입 다물고 있어." 어머니가 말했다.
불합리한 일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가족이 살고 있는 나라의 불합리성에는 특히나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원래 그런 나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예외로 두는 건 불 공정한 것 아닌가. ‘김씨 왕조‘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공정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 P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