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해파리 씨의 이름은 관해파리다. 적어도 우리가 헤엄치는 범위에 그 개체는 하나뿐이니까. 관해파리는 식물처럼 자신을 복제하여 자라나며 영원히 산다. 천 년을 살았는지 만 년을 살았는지 아는 물고기는 아무도 없다. 관해파리 씨의 몸집은 고래만큼이나 크다. 관해파리끼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저주파로 대화한다. 그 낮은 목소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지구를 반 바퀴 돌며 대양 전역에 이른다. 그래서 관해파리 씨는 고래들처럼 이 대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은 저 멀리뿐 아니라 아득한 옛날의 일까지도 다 안다는 점이다. 그리 오래 살아왔어도 남을 해칠 힘은 없는 분이라 누군가 작정하고 뜯어 먹으려 한다면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겠지만, 심해 식구 누구도 관해파리 씨를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건 대양의 역사를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니. 이 세계의 기록을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테니. - P14
삶이란 게 그렇지. 어떻게든 잘 참고 견디고 버티는 듯하다가도, 팽팽하게 당긴 끈처럼 한순간에 툭 끊어져 다 무너져버릴 때가 있지. 부디 그들이 물고기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이 심해에 내려올 때는 모두 같아." 나는 기도를 드렸다. 큰니가 빛을 죽이며 같이 몸을 숙였다. "모두 같지." "맹독이든, 병균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여기에서는 모두 같아. 모두가 아름다운 눈송이가 되지. 은혜로운 양식이자 생명의 기쁨이 되지." "썩지 않는 것들만 빼고." - P16
나는 몇 년 전 알을 낳기로 결심하고 여자로 전환한 친구를 떠올렸다. 번식의 주체가 되고 일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고난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퇴화하여 반려의 장기 일부가 되느니 기왕에 태어난 삶, 한생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겠노라고 했다. - P18
"자연계는 신비로운 것이야, 나무수염. 통상의 상식은 통하지 않아." - P19
그럴 때가 온다. 끈이 끊어질 때가. 아등바등도 인내도, 의지조차도 기력을 다할 때가. - P20
"세상의 끈이 끊어졌군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도 오래 참고 견뎠어요. 의연하고도 인내심 있게." - P21
"저 위의 주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제 세상이 조금은 좋아지려나요? 흙 위를 뒤덮은 괴물들이 지금 다 사라지고 나면, 썩지 않는 것을 먹고 죽는 아이들도, 그런 것에 목이 감겨 살이 짓물러가며 죽는 아이들도 사라지려나요?" - P22
여자가 주인공인 게임은 여성향일까, 남성향일까? 게임 주인공은 유저가 이입하는 대상인가, 아니면 욕망하는 대상인가? 누구에게 어느 쪽이 작용할지 알 수 없으니 정석은 두 성별을 다 내놓는 것이다. 초창기 게임들은 모두 이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게임 그래픽이 화려해지면서 도리어 성별이 하나로 고정되기 시작했고, 몰입감은 예전보다 약해지고 말았다. 만약 예산상 한 명밖에 구현할 수 없다면 어느 성별이어야 하나? - P30
이세연이 말하는 ‘직접 내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법칙은 수없이 많았다. 유저가 멍하니 화면을 지켜보는 시간은 5분을 넘지 않게 할 것. 단순하게라도 주기적으로 조작과 선택을 하게 할 것. 선택지를 줄 때에는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이도록 할 것.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일지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져야 하며,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 선택으로 큰 피해나 이득을 보는 일은 없도록 할 것. 단지 다양한 분기를 보여주는 데에 그칠 것. 몇 가지 선택은 운명을 크게 바꾸어야 하고 엔딩은 충분히 많아야 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엔딩을 얻기 위한 경로는 가장 어려워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의 엔딩은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백 시간의 플레이에 대한 보답이 비극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 P44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스러운 선택도 할 수가 없어.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 P46
게임은 절대 오래 만들면 안 되는 물건이다. 게임은 1년이면 유행이 변한다. 책은 유사 이래로 종이에 쓰였고 영화는 유사 이래로 영화관에 걸렸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다. 1년이면 모든 기기가 업그레이드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기종과 기술이 나와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어버린다. 개발 기간이 2년만 넘어가도 변한 기술을 뒤쫓느라 게임을 뒤엎어야 하고, 그러면서 비용이 늘고, 늘어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점점 기획이 커지면서 비용이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악몽 같은 쳇바퀴 늪에 빠지고 만다. 아니면 내놓을 때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든가. - P51
"돈이야. 돈이 현실감을 주지. 누가 얼마나 많은 돈을 게임에 퍼부었느냐에 따라 대우를 다르게 해주는 거지. 서민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부자들에게 그들이 때려 넣은 돈 만큼 보상해주는 거야. 그 막대한 자본력을 보며 유저들이 경탄하고 찬사를 바치게 하는 거지. 그러면 그 돈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자 영웅이 되는 거야. 그 사람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모든 선택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게 밸런스야. 그게 공정함이야. 진짜 현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지. 현실과 똑같으니까. 유저도 좋다고 몰려오고 회사도 떼돈을 벌고." - P67
"있잖아, 나." 홍운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생각해봤는데. 나, 네 세계에 남아도 될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려고 이런 대사를 넣었을까. 하지만 이것도 이세연이 끌어안고 살던 산더미 같은 법칙 중의 하나였다. 할 법한 말을 할 것.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예측을 살짝 넘는 말을 할 것. 그래서 이 상황에 개연성이 있다고 믿게 할 것.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그래서 몰입하게 할 것. - P70
그랬었지. 잘 짠 몇 개의 퀘스트가 게임 전체를 빛나게 한다고. 유저는 시나리오의 평균값을 체험한다고. 그것도 시나리오 작가 혼자 생각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게임을 잘 살펴 몇 마디의 대사로 모순을 없앨 것. 시스템이 만드는 괴리를 시나리오로 풀처럼 발라 메울 것. 그렇게 모순이 없어지면 몰입감이 생긴다. 그래서,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시나리오 작가가 조용히 그런 일을 해주지 않으면 그 게임은 망하지만, 왜 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 P74
예측할 수는 있지만 예측을 살짝 벗어나는 이벤트로 유저를 놀라게 할 것. 이벤트를 볼 확률은 높게, 하지만 놓쳤을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여 그 일이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게 할 것. 그래서 믿게 할 것.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 같은 선택도 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 P77
"얼굴 좋아 보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간 별일 없었어?" 마치 내가 그간 어떤 선택을 했든, 어떤 길을 걸었든, 우리가 어떤 다툼을 했든, 모든 일들은 세월에 마모되고 윤색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추억만이 이 자리에 남아 빛나고 있다고 말하듯이. - P77
쓰지 않는 물건은 사라진다. 인적이 드문 장소는 없어진다. 때로는 산이나 개울이 없어지고 어느 날에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계속 쓰거나 지켜보아야 한다. 양자역학의 원리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 존재하여 관찰로 고정해야 하는 셈이려나. - P87
바람이 불었고 갈매기가 끼루룩 울었다. 파도가 부서져 우리 발치까지 부글거리는 거품을 흘려보냈다가 물러났다. 별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구름이 달을 가리며 황금빛으로 빛났다. 바다에 비친 달이 물결에 금싸라기처럼 부서졌다. 나는 그 모두를 눈에 담았다. […] 아름다웠다. 내 말은, 풍경이 말이지. 뭐 어쨌든. - P91
"너를 제일 만나고 싶었어." 네가 급작스럽게 갔기에. 그래서 너의 이야기에는 결말이 없었기에. 연재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중단된 소설처럼, 문장 중간에 뚝 끊긴 말처럼, 하다 만 대화처럼. 나는 다음에 뭔가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 속에서 남은 삶을 살았다. […] 그리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상적이지 않아도 좋으니. ‘아,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싶은, 그런 소소한 결말을. - P106
늘 바라마지 않았다. 이런 풍경이 너의 결말이기를.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고, 따듯하고 푹신한 곳에 편히 누워 고요함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를. 너의 결말이 안온함 가운데 찾아오기를. 그렇게 뚝 끊긴 너의 이야기에 내가 지금 만든 이 작은 결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너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내가 그랬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내 남은 아이들도 위로받기를, 너와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맺기를. 비록 겉보기만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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