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해파리 씨의 이름은 관해파리다. 적어도 우리가 헤엄치는 범위에 그 개체는 하나뿐이니까. 관해파리는 식물처럼 자신을 복제하여 자라나며 영원히 산다. 천 년을 살았는지 만 년을 살았는지 아는 물고기는 아무도 없다. 관해파리 씨의 몸집은 고래만큼이나 크다. 관해파리끼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저주파로 대화한다. 그 낮은 목소리는 고래와 마찬가지로, 지구를 반 바퀴 돌며 대양 전역에 이른다. 그래서 관해파리 씨는 고래들처럼 이 대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은 저 멀리뿐 아니라 아득한 옛날의 일까지도 다 안다는 점이다.
그리 오래 살아왔어도 남을 해칠 힘은 없는 분이라 누군가 작정하고 뜯어 먹으려 한다면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겠지만, 심해 식구 누구도 관해파리 씨를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건 대양의 역사를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니. 이 세계의 기록을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테니. - P14

삶이란 게 그렇지. 어떻게든 잘 참고 견디고 버티는 듯하다가도, 팽팽하게 당긴 끈처럼 한순간에 툭 끊어져 다 무너져버릴 때가 있지. 부디 그들이 물고기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를.
"이 심해에 내려올 때는 모두 같아."
나는 기도를 드렸다. 큰니가 빛을 죽이며 같이 몸을 숙였다.
"모두 같지."
"맹독이든, 병균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여기에서는 모두 같아. 모두가 아름다운 눈송이가 되지. 은혜로운 양식이자 생명의 기쁨이 되지."
"썩지 않는 것들만 빼고." - P16

나는 몇 년 전 알을 낳기로 결심하고 여자로 전환한 친구를 떠올렸다. 번식의 주체가 되고 일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고난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퇴화하여 반려의 장기 일부가 되느니 기왕에 태어난 삶, 한생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겠노라고 했다. - P18

"자연계는 신비로운 것이야, 나무수염. 통상의 상식은 통하지 않아." - P19

그럴 때가 온다. 끈이 끊어질 때가. 아등바등도 인내도, 의지조차도 기력을 다할 때가. - P20

"세상의 끈이 끊어졌군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도 오래 참고 견뎠어요. 의연하고도 인내심 있게." - P21

"저 위의 주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제 세상이 조금은 좋아지려나요? 흙 위를 뒤덮은 괴물들이 지금 다 사라지고 나면, 썩지 않는 것을 먹고 죽는 아이들도, 그런 것에 목이 감겨 살이 짓물러가며 죽는 아이들도 사라지려나요?" - P22

여자가 주인공인 게임은 여성향일까, 남성향일까? 게임 주인공은 유저가 이입하는 대상인가, 아니면 욕망하는 대상인가? 누구에게 어느 쪽이 작용할지 알 수 없으니 정석은 두 성별을 다 내놓는 것이다. 초창기 게임들은 모두 이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게임 그래픽이 화려해지면서 도리어 성별이 하나로 고정되기 시작했고, 몰입감은 예전보다 약해지고 말았다. 만약 예산상 한 명밖에 구현할 수 없다면 어느 성별이어야 하나? - P30

이세연이 말하는 ‘직접 내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법칙은 수없이 많았다. 유저가 멍하니 화면을 지켜보는 시간은 5분을 넘지 않게 할 것. 단순하게라도 주기적으로 조작과 선택을 하게 할 것. 선택지를 줄 때에는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이도록 할 것.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일지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져야 하며,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 선택으로 큰 피해나 이득을 보는 일은 없도록 할 것. 단지 다양한 분기를 보여주는 데에 그칠 것. 몇 가지 선택은 운명을 크게 바꾸어야 하고 엔딩은 충분히 많아야 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엔딩을 얻기 위한 경로는 가장 어려워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의 엔딩은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백 시간의 플레이에 대한 보답이 비극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 P44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스러운 선택도 할 수가 없어.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 P46

게임은 절대 오래 만들면 안 되는 물건이다. 게임은 1년이면 유행이 변한다. 책은 유사 이래로 종이에 쓰였고 영화는 유사 이래로 영화관에 걸렸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다. 1년이면 모든 기기가 업그레이드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기종과 기술이 나와 패러다임이 통째로 바뀌어버린다. 개발 기간이 2년만 넘어가도 변한 기술을 뒤쫓느라 게임을 뒤엎어야 하고, 그러면서 비용이 늘고, 늘어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점점 기획이 커지면서 비용이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악몽 같은 쳇바퀴 늪에 빠지고 만다. 아니면 내놓을 때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든가. - P51

"돈이야. 돈이 현실감을 주지. 누가 얼마나 많은 돈을 게임에 퍼부었느냐에 따라 대우를 다르게 해주는 거지. 서민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부자들에게 그들이 때려 넣은 돈 만큼 보상해주는 거야. 그 막대한 자본력을 보며 유저들이 경탄하고 찬사를 바치게 하는 거지. 그러면 그 돈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이자 영웅이 되는 거야. 그 사람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모든 선택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게 밸런스야. 그게 공정함이야. 진짜 현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지. 현실과 똑같으니까. 유저도 좋다고 몰려오고 회사도 떼돈을 벌고." - P67

"있잖아, 나."
홍운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생각해봤는데. 나, 네 세계에 남아도 될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려고 이런 대사를 넣었을까. 하지만 이것도 이세연이 끌어안고 살던 산더미 같은 법칙 중의 하나였다. 할 법한 말을 할 것.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예측을 살짝 넘는 말을 할 것. 그래서 이 상황에 개연성이 있다고 믿게 할 것.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그래서 몰입하게 할 것. - P70

그랬었지. 잘 짠 몇 개의 퀘스트가 게임 전체를 빛나게 한다고. 유저는 시나리오의 평균값을 체험한다고. 그것도 시나리오 작가 혼자 생각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게임을 잘 살펴 몇 마디의 대사로 모순을 없앨 것. 시스템이 만드는 괴리를 시나리오로 풀처럼 발라 메울 것. 그렇게 모순이 없어지면 몰입감이 생긴다. 그래서, 절대로, 유저를 게임에서 소외시키지 말 것.
시나리오 작가가 조용히 그런 일을 해주지 않으면 그 게임은 망하지만, 왜 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 P74

예측할 수는 있지만 예측을 살짝 벗어나는 이벤트로 유저를 놀라게 할 것. 이벤트를 볼 확률은 높게, 하지만 놓쳤을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여 그 일이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게 할 것. 그래서 믿게 할 것.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 같은 선택도 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 P77

"얼굴 좋아 보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간 별일 없었어?"
마치 내가 그간 어떤 선택을 했든, 어떤 길을 걸었든, 우리가 어떤 다툼을 했든, 모든 일들은 세월에 마모되고 윤색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추억만이 이 자리에 남아 빛나고 있다고 말하듯이. - P77

쓰지 않는 물건은 사라진다. 인적이 드문 장소는 없어진다. 때로는 산이나 개울이 없어지고 어느 날에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계속 쓰거나 지켜보아야 한다. 양자역학의 원리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 존재하여 관찰로 고정해야 하는 셈이려나. - P87

바람이 불었고 갈매기가 끼루룩 울었다. 파도가 부서져 우리 발치까지 부글거리는 거품을 흘려보냈다가 물러났다. 별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구름이 달을 가리며 황금빛으로 빛났다. 바다에 비친 달이 물결에 금싸라기처럼 부서졌다. 나는 그 모두를 눈에 담았다. […]
아름다웠다. 내 말은, 풍경이 말이지. 뭐 어쨌든. - P91

"너를 제일 만나고 싶었어."
네가 급작스럽게 갔기에.
그래서 너의 이야기에는 결말이 없었기에.
연재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중단된 소설처럼, 문장 중간에 뚝 끊긴 말처럼, 하다 만 대화처럼. 나는 다음에 뭔가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 속에서 남은 삶을 살았다.
[…]
그리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상적이지 않아도 좋으니. ‘아,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싶은, 그런 소소한 결말을. - P106

늘 바라마지 않았다. 이런 풍경이 너의 결말이기를.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고, 따듯하고 푹신한 곳에 편히 누워 고요함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를. 너의 결말이 안온함 가운데 찾아오기를. 그렇게 뚝 끊긴 너의 이야기에 내가 지금 만든 이 작은 결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너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내가 그랬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내 남은 아이들도 위로받기를, 너와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맺기를.
비록 겉보기만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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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들은 류진위안의 머릿속에 띄엄띄엄 희미하게 남아서 하나로 연결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기억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아 류진위안은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87

"내일 아침에 일어나시면 원래대로 회복하실지도 모르지요. 예전에 저희 할머니가 낮에 할 수 없는 일을 밤에는 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우리 어머니도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변할 수 있다고 하셨어. 두 분 말씀이 맞기만을 바라야지." - P94

칭린은 어머니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는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어머니, 인사불성이 된 어머니가 어떤 일로 인해 엄청나게 변해버린 듯했다. 더이상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비밀을 간직한 사람 같았다. 그 비밀 때문에 어머니가 거대한 책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표지만 알았을 뿐 내용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 - P98

그때 멍하니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룽중융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영혼은 현세에 없어."
[…]
칭린과 중융은 대경실색했다. 룽중융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세 글자 이상 말한 적이 없다면서, 처음 병을 잃기 시작했을 때 본인이 현세를 떠나 또다른 세계로 천천히 가고 있다고 자주 말했노라 알려줬다. "두 분이 받아들이는 게 우리 상식과 다른지도 몰라. 혹시 이런 상태는 병이 아니라 당신들 소망이 아닐까." - P101

칭린은 첫번째 일기를 펼쳤다. 처음부터 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퇴색한 만년필 글씨에 시선을 떨군 순간 갑자기 불안이 밀려왔다. 그는 여기에 무엇이 기록됐는지 몰랐다. 여기에서 완전히 낯선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낯섦이 그의 인생에 충격을 가져오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났다. 칭린은 그때 어머니는 왜 본인이 죽고 나서 보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P105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살아 있어야만 통증도 있어. 죽으면 아픔도 사라지지." 그 장면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어린 그녀는 수예방에서 공작의 꽁지깃을 수놓다가 바늘에 찔렸다. 새빨간 피가 손 끝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고 그녀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다가와 힐끗 쳐다보고는 야단치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또다른 방법도 있어. 기억을 없애는 거야. 그러면 아팠는지조차 몰라." - P109

시간은 늘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러갔다. 어쩌면 하루나 일 년, 또 어쩌면 백 일이나 백 년일지도 몰랐다. 그때 갑자기 검은색의 농도가 흐려졌다. 흐릿한 잿빛이 머리 위로 나타났고, 그 빛 속에는 부드러운 베일이 나풀거리는 듯했다. 딩쯔타오는 그 베일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잿빛이 시작되는 쪽을 향해 일정한 선이 계단처럼 고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세어봤다. 열여덟까지 세고 나자 잘 보이지 않았다.
18층, 왜 하필 18층일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 P110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이 순식간에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딩쯔타오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문득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그때 그녀는 호숫가의 작은 대나무 정자에 앉아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물결과 호수 위를 나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면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중얼거렸다. "보슬비 내리는 꿈속의 변방은 아득하고, 누대를 메운 옥피리 소리는 차갑구나." - P112

류샤오촨이 칭린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말했다. "시간은 앞으로도 많아. 우리 아버지가 예순 살에 퇴직하셨거든.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흥분하셔서는 드디어 아내와 제대로 살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어. 그렇게 이십여 년을 함께 하셨지. 나중에는 전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 그러면서 예전에 늘 떨어져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하시더라. 아니었으면 한 사람과 오륙 십 년이나 함께 산 것을 떠올릴 때마다 인생이 가치 없게 느껴졌을 거라고. 봐봐, 이게 바로 살아본 사람의 심오한 깨달음이라고." 칭린이 웃으며 어르신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 P134

칭린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처럼 빈손으로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현실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현실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이어서 지금처럼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인생의 가치에 대해 류샤오촨의 아버지가 했다는 말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맞는 말이었다. 바쁘지 않은 인생이라도 똑같이 피곤할 수 있었다. - P135

한 학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룽 선생님, 부자가 이런 곳에 살았다고 확신하세요? 심지어 화려한 저택까지 짓고요?"
룽중융이 대답했다. "이 세상은 말이지, 사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가능해."
칭린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 P137

룽중융이 대꾸했다. "보지 않았을 땐 몰랐는데 보고 나니 가슴이 뛰네. 느낌이 아주 좋아. 부자가 저택을 짓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아주 좋아했을 지역 같아. 중국 부자들은 괜히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뿌리 박고 정착하는 걸 좋아하지. 그렇게 뿌리를 내리는 곳이 고향이 되고. 지나치게 가난한 지역은, 예를 들어 물과 나무가 부족한 곳은 생활이 불편해서 원치 않았을 거야. 그런데 여기는 위치가 정말 좋아. 겹겹의 산이 병풍 같고 물도 풍부해. 조금 멀 뿐이지. 돈 있는 사람한테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아. 심지어 외질수록 더 좋아하기도 해. 재산을 숨기기 쉬우니까. 또 궁벽한 시골에 사는 친족들은 소박하고, 왕법 보다 가볍을 중시하거든. 관청보다 종가를 두려워한다고. 그러니 다루기 쉽지. 자기 집안사람을 잔뜩 데려오면 그 지역을 지키기도 쉽고. 원수가 있어도 찾아오기 쉽지 않을 거야. 말하자면 세상의 은신처 같다고 할까." - P139

그들은 차 안에서 남방과 북방의 지주 저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서민의 부유함이 왜 국가 부강의 기반이 되는지, 전통 민가가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지, 민간 건축에서 빠지지 않는 중국식 문화의 특징이 무엇인지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룽중융은 이제는 그런 게 없어졌다고 말했다. 건축사가 없던 시대에는 오히려 알고 있었어. 건축이란 자연을 경외하고 자연 속에 녹아 유기적인 한 부분이 되어야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말이야. 반면 지금은 대부분의 마을이 자연에 시위하는 형태로 건물을 짓지. 마치 봐봐, 내가 너보다 훨씬 대단하니까 더 빛나고 멋져야 해, 라고 말하는 것 같다니까. 그런 건축은 결말이 좋을 수 없어. 자연의 힘은 이길 수 없거든. - P140

칭린은 뭔가를 잡은 것 같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혼란에 빠진 것도 같았다. 두 손을 깊고 짙은 구름 속에 넣어 분명히 움켜쥐었는데 양손이 텅 빈 느낌이었다. - P143

칭린은 세상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는지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장원에서 봤던 커다란 ‘인‘과 ‘내‘ 글자가 떠올랐다. 요동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글자들이 무슨 쓸모가 있었겠는가?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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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이 문 오른쪽 담장의 대나무로 향했다. 대나무에서 새로 올라온 가지와 잎이 무척 파랬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창 앞의 대나무, 맑고 푸름이 홀로 기이하구나‘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로, 얼굴마저 아른아른 떠오르는 듯했다. 딩쯔타오가 자기도 모르게 "사조로구나" 하고 말했다. - P52

모든 것이 짙은 구름에 싸여 새하얗게 변하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끊임없이 움켜쥐었지만 무의미한 헛손질에 그칠 뿐이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끝없이 새하얀 대지가 정말로 깨끗하구나!‘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홍루몽』에 나오는 ‘끝없이 새하얀‘이라는 표현은 이런 광경을 두고 한 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어디까지 가는지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느낌만 남았다.
그녀는 눈부신 구름 위에서 하염없이 떨어졌다. 눈앞의 새하얀색이 회색으로 변하고 계속 진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새까매졌다. 그 어둠은 밑도 끝도 없었다. - P63

누구도 그녀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게 어둠의 심연이며 자신이 이미 그 속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 P64

익숙했던 모든 것이 낯설어지고 오랫 동안 알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당연히 류진위안도 잘 알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갈 곳이었다. 낯익은 사람들이 먼저 가 있는 것도 좋았다. 그가 갔을 때 훨씬 지내기 좋을 테니 슬프지 않았다. 다만 고정적 기준이든 가변적 기준이든, 과거의 기준이 조금씩 소실되거나 변형될 때면 그의 머릿속에서 매듭지어진 줄이 누군가에 의해 뭉텅뭉텅 잘리는 듯했다. 기억 속에 저장되었던 것들이 그 가위의 움직임에 따라 줄기차게 제거되었다. 그건 사람의 속성이었다. 오래된 것들을 떠올리지 않으면 아주 많은 일이 아예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화되었다. 예전에 그의 부하였던 우자밍은 망각이 인간의 몸에서 제일 좋은 본능이라고 말하곤 했다. - P69

그는 갑자기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에 휩싸였다.
마음이 너무 쓸쓸한 탓 같았다. - P72

그에게는 할 일이 없었다. 살아가는 것 그리고 시간과 잘 지내는 것만이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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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때문에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 P36

바람이 불면 창문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옆집에서 코를 골고 잠꼬대하는 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왔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빛이 고즈넉한 방을 샅샅이 훑었다. 식사할 때는 자신이 씹는 소리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모든 게 너무도 적막해 무료함이 더욱 커졌다.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대부분 이었다. 세상이 그녀 혼자 남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녀의 가슴에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 P36

다만 흡족한 기분이 들 때마다 다른 뭔가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주변을 어른거리며 맴도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특히 홍초가 빨간 꽃을 피울 때면 그녀 뒤를 바싹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달아나도 그것들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허공을 이리저리 떠다닐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과거를 기억해내라며 도발하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예전에 느꼈던 두려움이 떠올라 그녀는 눈을 감고 절대 기억해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말려들지 않을 거야. 너희를 잡지 않을 거라고. 과거 따위는 필요치 않아.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 이름이 뭔지도 알 필요 없어. 무엇보다 우리집에 누가 있었는지도 떠올릴 필요 없다고. 나는 다 필요 없어. 내 기억은 우 의사부터 시작하면 돼. 내 삶은 칭린만으로 충분해. 망각에는 망각의 이치가 있다고 우 의사가 말했어.
그 말을 할 때 우 의사는 정말 젊었다. - P39

딩쯔타오는 생각했다. 당신이 내 과거예요. 다른 게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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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이 깊이 사랑한 사람이 두려운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 P13

이 과정에는 한 사람이 빠질 수 없었다. 바로 우 의사, 그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이러한 생사고비와 이러한 사람은 천천히 생각해 볼 만했다. 아주 짧은 과정이었지만 인생의 단맛과 쓴맛이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여인은 자기 인생이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과거를 완전히 버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 P16

모든 망각을 배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망각은 살아남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 P17

여인은 이해가 안 되는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당을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 남편이 다시 말했다. "이건 우리 둘 다 기억해야 해요. 이 세상의 우리는 모두 원죄가 없어요. 당신과 나 모두." - P20

연매장이라는 말이 허공에서 나풀나풀 떠다니는 듯했다. 희미하게 그녀 몸에 달라붙는 것 같다가도 아주 멀리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 무겁고 노쇠한 목소리로 크게 말하고 있었다. 그 음성이 귓가에서 울릴 때마다 그녀는 온몸이 가시에 찔리는 듯 아팠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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