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무위에 지쳐 우울과 위기감을 느끼는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직장이 출판사나 의상실이나 신문사이기만 하다면 기꺼이 바닥을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여자들은 줄을 섰다. 그런데 저 정신 나간 시레가 루실에게 일을 시키고 월급도 줄 기세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오직 무위뿐이었는데 말이다. 삶은 어리석었다. - P205

그는 남자들 특유의 아름다운 낙관으로, 루실이 한 달에 두 벌 정도의 원피스는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당연히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들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몸매가 좋은 만큼 완벽하게 어울릴 게 분명했다. 또한 택시를 탈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도 만나고, 정치며 세상 전반에, 그리고 다른 것에 조금은 관심을 가질지도 몰랐다. 물론 퇴근했을 때 자기 소굴에서 웅크리고 있는 짐승 같은 그녀, 오직 독서와 사랑으로만 살아가는 그녀가 없는 것은 아쉽겠지만, 한편으로는 희미한 안도감이 느껴질 터였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현재만을 살며 미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정체된 삶에 경악하고, 나아가 어렴풋한 분노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그도 인테리어의 일부, 한 요소일 뿐이고, 언제든 상황이 변하면 필시, 가차없이 불태워질 것만 같았다고 할까. - P206

루실은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좋아한다고 믿는 것일까? 그녀는 이미 앙투안에게서 가학적인 면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무고하고도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루실은 정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가 테이블 건너에서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충동적이고 다정했던지 루실은 그가 자신을 꿰뚫어 보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와 볼을 맞댄 채 미소 지었고, 그들은 함께 그녀를 어처구니없어하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것에 안도했으나, 한편으로는 그에게 놀아난 것 같은 기분에 어렴풋한 원망을 품었다. - P207

앙투안에게 디올 드레스는 30만 프랑이고, 그녀는 지하철이라면 질색이며, 구내식당이라는 말만으로도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루실은 자신이 본질적이고 극단적인 속물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가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문득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돌아보자, 그에게 미소를 되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아이들처럼 주먹구구식 셈을 했고, 장관들처럼 예산을 짰다. 그는 흔히 남자들이 즐기듯 숫자놀음을 했다. 상관 없었다. 어쨌든 창안자가 앙투안인 이상, 그녀의 삶도 이 공상적인 등식에 맞춰야 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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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사이엔, 심지어 가장 감미롭고 다정한 순간에도, 불안하고 난폭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그들은 더러 이 불안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혹여 그들 중 누군가의 가슴에서 이 불안감이 사라진다면 그건 동시에 사랑도 사라졌다는 의미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인식했다. - P186

상대의 진실만큼이나 꾸민 모습, 나아가 반 거짓말까지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 보고 좋아하는 사랑의 단계였다. 상대가 그런 모습까지 보여 주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신뢰의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 P189

앙투안은 이따금 의문스런 눈초리로 루실을 힐끔거렸다. 루실의 게으름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있는 엄청난 능력, 행복할 수 있는 재능 – 그토록 텅 비고, 무위하고, 그날이 그날인 날들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 이 그에게는 때로 괴이하다 못해 거의 끔찍하게 느껴졌다. 앙투안은 루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그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렇듯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런 끝도 없는 무위를 루실에 대한 열정으로 견디는 것과 달리, 루실에게는 이런 삶의 방식이 그녀의 뿌리 깊은 천성에 보다 근접해있으리라고 느꼈다. 마치 불가해한 짐승, 처음 보는 식물, 만드라고라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 P192

그들은 점차로 서로의 몸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으로 거의 학술을 정립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오류가 많은 학술이었다. 상대의 쾌락을 배려하는 데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자신의 쾌락 앞에서 무력하고 허술해지며 흐지부지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난 30년간 서로를 모른 채 살아올 수 있었다는 걸 믿기지 않아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며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93

그렇게 꿈처럼 8월이 흘렀다. […] 거리엔 가느다란 빗줄기가 힘없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앙투안은 빗물이 미지근하리라 짐작했다. 어쩌면 눈을 뜬 채로 조용히 울고 있는 루실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짭짜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루실이나 구름에게 이 눈물의 이유를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여름이 끝났고, 그것은 그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P193

돈의 유일한 매력이라면 바로 이 모든 걸 피하게 해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 짜증, 그리고 다른 것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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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를 육체적으로는 소유했으나, 인간으로서는 완벽하게 놓쳤다. 물론 그들은 함께 웃었고, 웃음은 사랑의 고유한 특성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프레카틀랑에서 눈물이 차오른 루실의 눈을 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를 엄습했던 그 기이한 향수를 되새기면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이 쾌락으로 맺어지고, 웃음으로 맺어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고통으로도 맺어져야 했다. 그녀가 그와 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는 그에게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을 터였다. 떠나버렸으므로. - P170

어떻게 두 달 동안 둘이서 그토록 행복했으면서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어떻게 그토록 비관적이고 이기적이고 분별없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후회했고, 그래서 몰래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보름 동안 그녀 생각만 했는데도, 정작 그녀는 그가 자기를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는 그, 앙투안의 뿌리 깊은 어리석음 때문에 불행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속히 그녀를 찾으러 가야 했다. 가서 모든 걸 설명하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하리라. 그녀를 품에 안고서 용서를 구하고, 몇 시간이고 키스하리라. - P172

칸 역에 도착 하니 침대칸이 남아있었다. 밤새, 그들의 뒤엉킨 얼굴들 위로 열차의 울부짖음과 조명 빛들이 어른거렸다. 더러 열차가 철컹거리며 기차역에 정차할 때면, 철도원이 쇠막대로 바퀴 상태를, 파리로 향하는 그들의 여로를, 그들의 운명을 점검했다. 속력은 그들의 쾌락을 증폭시켰다. 열차가 미친 듯 질주하면, 고이 잠든 벌판에 대고 이따금 격렬한 신음을 쏟아내는 건 바로 그들이었다. - P177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할 줄. 또한 그가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완벽할 줄. 모든 것이 그녀가 짐작하던 대로 전개되었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절망감이 그녀 안에서 그에게 사랑받았다는 희미한 자부심과 뒤섞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이렇게, 이 커다란 아파트에 홀로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는데··· - P181

루실은 신비롭고 기이한 병의 포로가 된 기분이었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렇게 부르기가 망설여졌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비판적인 두 존재가 그 지경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그 지경으로 단단히 밀착되어서,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기에 단지 ‘사랑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터무니없게 여겨졌다. 그녀는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충만함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실은 언젠가, 어느 훗날엔, 이 충만함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 어찌하면 좋을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행복했고, 두려웠다. - P184

두 사람은 어긋나고 위태했던 공동의 과거 속을 달렸던 반면, 평화롭고 영구적일 수 있을 공동의 미래를 꿈꾸지는 않았다. 루실은 계획들과 평범한 삶을 앙투안보다 더 두려워했다.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홀린 사람들처럼, 펼쳐지는 현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이 서로에 대한 허기가 충족되지 않은 채 한 침대에 누운 그들을 비추며 바라보았고, 저녁이면 지는 태양이 열기가 가신 부드럽고 비할 데 없는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순간순간 그들은 지극히 행복해서, 더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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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어쩌면 비비안하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 아이 집에 자꾸 가서 그때마다 덧창이 닫혀 있는 걸 보다 보면 그 아이가 덜 보고 싶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는 비비안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는 데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단단히 매달렸고, 그런 까닭에 시간이 약이란 말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 P179

날씨가 더웠다. 여기 계곡에선 여름이 곧 물러가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여름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느긋하게 머무르면서 편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꼭 나처럼, 앞날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 P189

나는 산을 오르면서 엄마 생각을 했고, 엄마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며 찌직찌직 전기가 튀는 엄마의 포옹을 상상했다. 눈물이 방울져 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신 울지 않겠다는 내 다짐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 P191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부끄럽다. 나는 비비안이 미웠다.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아니, 그게 사실이었다. 나는 비비안을 사랑한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그 아이를 증오했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그 아이를 마크레 녀석만큼이나 미워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석보다 더 미워했을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마크레 녀석은 적어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언제나 나를 놀리고, 깎아내리고, 때리고, 다른 애들 보는 데서 나를 모욕했다. 그야 뭐 늘 있는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하루는 사랑하는 척하다가 이튿날엔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 P204

나는 이 모든 걸 받아들였다. 모르는 것보다, 내 머리에 감당하기 어려운 뭔가를 이해하라고 억지를 쓰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았다. 내가 비비안을 배반한 거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 때문이란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왜냐하면 뭐든 언제나 내 잘못이었고, 그런 것엔 이골이 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은 마치 내 낡은 초록색 벨벳 파자마처럼 편안했다. - P215

나는 내가 아이 시절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 모든 건,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했다. 비비안의 우정뿐 아니라 그 아이의 짜증까지도 사랑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 두 가지는 모두 비비안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다 아름다웠다. 그러니 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 P215

처음엔 동굴로 가려는 건가 싶었지만, 비비안은 나더러 제자리에서 맴돌라고 하지 않았다. 어딜 걷고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높은 고원을 감싸는 어둠뿐이었는데, 그 어둠이 어찌나 짙던지 번개가 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우리 두 사람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밤에는 심지어 어둠을 가르며 걷는 우리 두 사람조차 진짜로 존재하긴 하는 건지, 행복하기 위해 서로를 만들어 낸 건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자연스럽게 들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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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갈래?"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런 초대를 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고, 한편에서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어머니가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저 수영 팀이에요."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팀이라."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맞다. 물론 그래야지." 그런 다음, 그것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영원히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테라스로 통하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 P33

나는 늦게까지 수영 연습을 했고, 차우네 식구들과 저녁을 먹었고, 늦은 밤에 혼자 해변을 산책했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와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아버지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 한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버린 책임을, 소식 한 자 없이 지나가는 그 세월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에게 전가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려는 듯이 보였고, 나는 남은 생을 밖에서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저녁마다 어머니와 데이비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리면서—걱정이 됐다. - P35

내 거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영화의 프리미어 시사회 날 밤에 찍은 사진이 있다. 그들은 뉴욕의 어느 소극장 밖에 서 있고, 아버지는 위쪽으로 보이는 마르키의 불빛을 가리키고 있다. 아버지는 슈트 차림으로, 어머니는 긴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본 내 기억 속 유일한 때다. 그들은, 그 둘은,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고, 자신들이 아직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맞서, 서로를 감싸안은 모습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 P45

휴스턴은 예전의 휴스턴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살아서 오일 붐을 기억하고 있다.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 마을은 하룻밤 사이에 도시가 됐고, 마을은 예전의 것들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더이상 그 시절을 낭만적으로, 일부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는 바라보지 않지만, 이따금은 그 시절이, 대기에 흐르던 그 에너지와 그때의 낙관과 희망이 그립다. 내가 좋아한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세상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걸어들어 와, 당신 눈빛이 마음에 든다며 백 달러짜리 지폐를 내밀 수도 있었다. 그다음날 밤에는 누군가에게 백 달러짜리 지폐를 건네는 사람이 당신이 될 수도 있었다. - P51

"당신은 자연스러워." 그날 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진짜야."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뜻인가?"
"비현실적이기도 해. 좋은 의미로." - P53

일 년 후 우리는 같이 살게 되었고, 다시 일 년 후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결혼식 날 밤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점을 분명히 알아둬. 왜냐하면, 좋든 싫든, 당신은 이제 내게서 떨어질 수 없으니까."
"그거 협박이야, 약속이야?"
"둘 다지." - P54

"있잖아, 폴." 그녀가 말한다. "가끔씩은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아. 그건 죄악이 아니잖아."
"뭐가 죄악이 아니야?"
"행복한 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건 죄악이 아니야." - P57

대학 때 이후로는 대마초를 피워보지 않았는데, 부엌 식탁에서 대마초를 얇게 펴 마는 동안 아마도 캐런은 평생 이런 것을 피워본 적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녀가 내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기리라 생각하며 수영장으로 나가 불을 켠다. 그런 다음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 담뱃불을 붙이고, 잠시 후 수면 위에 반듯이 누워, 별들 아래서 유유히 떠다닌다. 중력 없이, 짝도 없이, 길을 잃고서. - P66

나는 방문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기들 삶의 어떤 시기에는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고 상상해본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내 방문 앞에 서서, 내가 한 번도 데이트해보지 못한 온갖 여자아이들에 대해서 친구들과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 P68

대신, 내 아내는 우울해 보인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녀가 자기 자신의 삶에 너무나 낙담하고, 지치고, 모든 환상이 깨진 나머지, 다른 누구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P72

나는 마흔여섯의 나이에 대마초를 피우는 습관이 들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희극적이며, 굉장히, 정말 굉장히 슬프게 느껴지는 일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 P76

"내 인생은 끝났어요." 탤벗이 말한다. "나는 열여덟 살인데 내 인생은 끝났어요."
"스탠퍼드 말고도 학교는 많아."
"나한테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나의 의식 상태가 변질돼 있지 않다면, 나는 뭔가 친절한 말을, 이 아이를 위로해줄 만한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탤벗을 보며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편입할 수 있잖아. 줄곧 그런 제도가 있었어."
"네. 아마도요." - P79

나는 그가 내 대답에 보여주는 관심이 고마웠고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차분하면서도 사려 깊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 P90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인이지요." […]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 P92

그에게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가슴속에서 따뜻한 일렁임을 느꼈다. 그것은 내 또래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열뜬 흥분과는 또다른 종류의 감정, 좀더 부드럽고 보다 포괄적인 온기였다. 나는 그가 내게 숨김없이 질문하는 것과 내가 이야기할 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는 나를, 내가 상상하기에 자신의 동료를 대할 것 같은 태도로, 성인으로, 대등한 사람으로 대했다. - P93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 자기를 넘어서는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 이해하지 못 할 수준, 하고 그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도, 보어조차도, 그 지점에 도달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 P94

나는 팔꿈치를 괴고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순간이면 그의 얼굴은 언제나 더없이 온화하고 순해 보였고, 그러면 나는, 기숙사 방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가 언젠가 내가 결혼할 남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과는 아주 다른 감정이다. 나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남은 생을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가정을 일구고 그의 곁에서 늙어갈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런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란 것을, 불행하지 않을 수 있으리란 것을, 나는 알았다. - P99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나와 함께 있는데도 취할 만큼 나를 믿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봐야 단둘이 보낸 두번째 시간이었고, 우리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는데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편안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 와인을 마시고 웃으면서 조그만 부엌에서 그의 곁에 앉아 있을 때, 내 마음이 은밀하게 떨렸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 P101

나는 어떤 일도,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어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나누는 모든 말들은 그 바깥의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소녀 시절 품었던 환상, 아버지의 친구분들이나 학교 선생님들—그러니까 항상 나이가 많은 남자들—이 연루된 환상에 대해 고백할 때면 로버트는 미소를 짓곤 했다. 나는 그때 이미 내 안에 어떤 충동이 있었고, 그런 상사 편의 열병을 고백함으로써, 그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용할 수도 있었을 그 기회를 잡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소녀 시절의 성적 로망을 듣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P106

그것이 로버트가 내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 이상 나아갈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희로써 의도된 종류의 희롱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단지, 자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일부는 그가 그 순간에 뭔가를—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해주길 바랐지만, 그가 나를 안으려는 의도를 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나는 로버트가 우리 관계에 대해 나처럼 죄의식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을 다음 단계로 가져가는 것에 대한 그의 양면적인 감정은, 그로 인해 훗날 내가 자신에게 분개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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