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뭔가 놓치고 있다거나 뒤처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보통 그런 느낌은 곧 사라졌다. 가끔 클레어몬트에 사는 부모님이 전화를 걸어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정했느냐고. 혹은 내면의 진취성을 북돋아줄 수 있는 책을 보냈는데 잘 받았느냐고 물어도 쉬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내 일을 좋아했다. 내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마야와 함께 있는 한 그저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다른 사람의 예술에 소소 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도 자신이 가는 길의 일부라고, 마야는 언젠가 내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 P52

나는 잔을 내려놓고 마야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야가 떠나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아마도 그때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이미 가버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내 인생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 P58

이런 점진적인 멀어짐은 그해 여름 내내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그것을 물리적으로 감지했다. 이제 방안에는 다른 기운이,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마야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뒤쪽 배경 어딘가에서, 멀리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그날 밤 침대에 함께 누워 있을 때 마야가 내게 말했다. "내 말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라도 해봤냐는 거야."
"해봤지." 나는 말했다.
"했다고? 정말?"
"당연하지." 나는 말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 P58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자주 편지를 쓰던 시기도, 몇 달간, 때로는 일 년 넘게 아무런 연락 없이 지낸 시기도 있었다. 그 세월 내내 마야는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거나 그림을 그만둔 이유를 말한 적이 없고 나도 묻지 않았다. 마야에게 그 시절은 단지 인생의 다른 부분인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나와 함께한 인생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현재의 인생과 다른 거라고. - P64

요즘은 예전처럼 마야를 자주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다가도 생각이 날 때는 라이어널의 스튜디오에서 그 수채화들을 발견한 날이 떠오르며, 그날 밤에 그랬듯이 지금도 그 누드화 속 인물이 정말로 마야였을까 궁금해진다.
그게 정말 마야였다면, 라이어널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직장에서 일찍 돌아온 마야가 그의 스튜디오에 들러 작은 목제 이젤 뒤에 앉은 라이어널 앞에서 옷을 벗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카페에서 일하던 그 오후에 그들은 무슨 대화를 했을까? 수채화 속 여자가 정말로 마야였다면, 아마도 라이어널이 주지 못했을 그 무엇을 그녀는 그에게서 얻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내게서는 무엇을 원했을까? 라이어널에게서 원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마야와 나는 우리 인생의 두 해에 가까운 나날을 밤마다 나란히 누워 함께 잤는데 지금도 나는 내가 마야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궁금하다. 혹은 마야가 나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 P64

"아까 강연에서 그 여자가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나. 그거 있잖아,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와 맺는 관계를 기준으로 판단된다는 말, 그리고 진정한 자아와 조응하 는 행동이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는 말. 하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 자기 몸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 P87

"그러니까, 내 몸이 더는 내 것이 아닐 때 진정한 자아는 어떻게 되느냐고." 내털리는 말을 이었다. "내가 옷을 입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머리를 스스로 빗을 수 없게 되면?"
"당신,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나는 말했다.
"난 지금 굉장히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거야, 데이비드."
그런데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잖아."
"듣고 있어." 나는 대답하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두려운 거야. 이해해. 나도 두려우니까."
"그런데 요점은 바로 그거야." 내털리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나는 전혀 두렵지 않거든." - P88

그 모든 이후의 일들보다 더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무대 위의 내털리를 보면서 위대함이란,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이란 이런 것임을 깨닫던 순간이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마치 몸의 연장인 양, 팔의 일부인 양 움직이던 활을 바라보던 기억, 공연중 이따금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사라지는 듯하던 내털리, 오르내리는 박자에 맞춰 호흡도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어떤 순간에는 꿈이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환히 밝아지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 내밀하고 황홀한 느낌에 취해 나는 내털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공연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연장에 불이 켜지고 객석의 청중 모두가 기립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모두가 계속 선 채로 몇 분 내내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 P90

나는 최근에 내털리가 겪는 증상—어지럼증과 균형감각 이상—을 생각했다. 두 가지 다 파킨슨병과 연관된 증상이라는 사실을 우리 둘 다 알고 있고 의사도 ‘염려스럽다‘고 인정했다. 주초에 의사는 검사—혈액 검사 몇 가지와 MRI—를 더 해보자며 내털리를 불렀고 이제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 P92

그때 나는 스튜디오로 조금 더 가까이, 하지만 내털리는 나를 볼 수 없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맨발 아래 시원한 땅이, 등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마당에 짙은 어둠이 깔려 강렬하게 빛나는 스튜디오의 조명 외에는 온통 캄캄했다. 나는 더 다가갔다. 내털리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흔들거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내털리가 나를 볼지, 이번 한 번만이라도 문으로 다가와 나를 안으로 들여줄지.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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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이렇게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심야의 윤리적 딜레마, 그것도 우리 중 하나가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니—나는 그들에게 호응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정당화가 되느냐 아니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두 인간과 그들 각각의 가족에게 일어난 아주 슬픈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 말고는 그다지 할 얘기가 없다. - P14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나는 늦은 밤 이 의자에 앉아 나 자신에게 종종 그런 질문을 하고 술을 홀짝이며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벽 바로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더욱 거대한 부재의 울림이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이 늘 있었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 P21

최근에는 이런 일이 의례처럼 되어버렸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히 채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꿈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 P24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 P26

니코틴 중독의 구덩이로 다시 빠져 버릴까봐 항상 두렵긴 하지만, 그때 내가 한 생각은 그게 아니었고 울기 시작한 이유도 그게 아니었어. 왜 울기 시작했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 왜냐면, 당신도 알겠지만, 난 울지 않는 사람이잖아. 아마 오륙 년, 혹은 더 오랫동안 한 번도 운 적이 없을 거야. 그래서 눈물을 불러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말로 모르겠어. 어쩌면 요즘 우리 생활의 압도적인 피로가, 그간의 정신없던 하루하루가 마침내 내 뒷덜미를 잡아서일까, 아니면 오루호가 독한 술이어서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추위와 미닫이 유리문 너머에서 깊이 잠든 당신 모습, 그것이 주는 어떤 상실의 감각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단순히 그렇게 오랜만에—그제야 깨달았지만, 사 년 만이었어—담배에 불을 붙여놓고는 연기를 들이마시기도 전에, 담배 연기를 폐 속으로 빨아들이기도 전에,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이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당연히 그 담배에서는—지금껏 흘러온 시간만으로도 쿰쿰해지고 마르고 쪼그라든 그 담배에서는—내가 기억하는 맛이 전혀 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 P27

누가 알겠어? 더 이상한 일들도 벌어지잖아, 안 그래?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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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상의 투사였을 뿐, 체제의 암살자나 외국인의 하수인이 아니었소이다." 그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게.
아니면 울적한 표정으로.
"지금은 사람들이 다들 날 욕하지!" 그리고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매번 자신은 아니라고 현재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은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과거에 자기들이 저질렀던 짓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 말라고 암시하는 것 같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파시스트였다고, 법원의 어떤 판결도 그 진실을 절대로 지울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 P255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그랬을까? 그날 밤, 그가 깨어 있었다면 왜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걸까? 두려웠을까? 하지만 정확히 누가, 무엇이 두려웠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전혀 바뀌지 않았다. 다만 그뒤로 그는 망원경에 더 집착했고, 그 맞은편 보도를 감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십자 말풀이나 수수께끼그림 맞추기를 얼마나 잘 하는지 보여주려고 예전처럼 위에서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낄낄대고 혼자 중얼거렸다. 미친 걸까? 병이 도졌는지 몰랐다. 그런 처지에서 그녀 또한 천천히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결혼을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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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들 브루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인종 차별의 실질적 효력에 대해 아버지는 착각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는 여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작동된 덫으로 인해 어떤 도피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유일한 길은 분명히 아무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희망 없는 미래로 데려갈 그런 길이기 때문에, 차라리 불쌍하게 자기를 낮춰서 이 여행의 동반자들이 그러하듯, 외로이 몽상에 잠기거나 절망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자위하는 죄수처럼 슬프고도 비참한 망상에 사로잡히는 편이 더 나았다.
브루노는 여전히 발끝으로 걸으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두 개의 차광 덮개 중 하나를 살짝 열고 뿌연 유리와 덧창 문의 창살 사이로 내다보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몇 시간 후에는 높이 쌓일 것이며, 온 도시 위로, 감옥과 게토 위로 답답한 정적을 드리울 것이다. - P198

"감옥은 진정한 학교예요." […]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체력이 약해지거나 소모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에요. 나는 나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은 운명에 감사해요. 외로움과 집중, 자기 자신 말고는 달리 친구가 없다는 점은 은혜로운 일이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의 성향에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때로는 거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감방의 네 벽 사이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지요. 1930년 감옥에서 나올 때, 나는 내 36호 실을(우연의 일치지요? 내 동생의 집 번지와 똑같아요) 정말 우울한 마음으로 떠났어요. 마치 나 자신의 일부를 거기에 버려둔 것처럼 말이에요. 그 벽마다, 구석마다, 사소한 물건들마다 고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요. 사실 눈물을 흘린 곳, 고통을 겪었던 곳, 희망하고 저항하느라 자기 안에서 많은 능력을 발견하게 된 곳이 바로 가장 애정을 느끼는 곳이에요. 예를 들어, 당신 자신을 봐요. 당신은 같은 종교인 사람들과 함께 떠날 수 있었고, 당신이 겪어야 했던 일을 고려하면 그럴 권리가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다른 선택을 했어요. 여기에 남아 싸우고 견디기를 원했어요. 그리고 이제 당신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어른이 된 이 땅, 이 오래된 도시는 이중적으로 당신의 것이 되었어요. 당신은 이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 P212

젊은 연인은 오십여 미터 앞에서 가고 있었다. 남자는 자전거에 올라탔고 균형을 잡기 위해 이따금 오른손으로 여자친구의 어깨를 짚었다. 브루노는 줄곧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구 일까? 이름이 뭘까?" 입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고 닿을 수 없는 존재 같았다. 저기 저들이 바로 인류의 표본이고 원형이다! 그는 절망적인 사랑과 증오로 눈을 반쯤 감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들의 피는 그보다 좋은 피였고, 그들의 영혼은 그보다 좋은 영혼이었다. 틀리지 않다면 아가씨의 머리칼은 뒤로 붉은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남아 있는 약간의 햇살은 온통 그 리본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있고, 바로 그들이 된다면! - P217

"당신 말을 듣기 잘했군요. 성벽 위에서는 정말 놀라운 석양을 감상할 수 있어요." 클렐리아 트로티가 평온하게 말했다.
브루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다시 한번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혼자 말하듯이. 마치 자신의 꿈을 뒤쫓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고독에, 격리된 자의 영원한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전율했다.
아마도 언젠가 그녀는 브루노 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그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은, 혹시 올 수 있다고 해도, 분명 아직 멀리 있었다. - P218

이방인이 지나가고,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빙긋이 입귀를 올려 가만히 바라본다. 하지만 하루 중 어떤 시간이 되면 그들의 시선은 기묘하게 한곳에 붙잡히고 심지어 숨죽이기까지 한다. 지방 도시의 나른함과 게으름이 상상의 대학살에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순진한 이방인의 발길이 무심결에 뇌관을 건드려, 갑작스러운 지뢰 폭발로 보도의 포장석이 정말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상상한다 한들 말이다. 아니면 1943년 12월 어느 날 밤, 바로 그곳 델라보르사 카페의 주랑 아래에서 저 보도 위로 시민 열한 명을 쓰러뜨린 파시스트의 신속한 기관총 일제사격이 부주의한 행인에게도 똑같이 그 짧고 끔찍한 춤을, 역사가 몇 년에 걸쳐 기리고 기린 이탈리아 내전의 첫 희생자들에게 시체 위로 쓰러지기 직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틀림없이 추게 했을 그 경련과 발작의 춤을 추게 할 것처럼 상상한다 한들 말이다. - P222

방심한 이방인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곧 대화는 약해진다. 눈을 고정하고 숨을 죽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총살이 있던 그 보도를 이용할 사람은 자신이 삼가면 좋을 행동을 하게 되리라는 걸 깨달게 될까? 그는 마침내 여행안내서에서 머리를 들 것인가, 들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이 순간 보이지 않는 피노 바릴라리의 얇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역설적인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올 것인가, 내려오지 않을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사건을 기다리는 것은 때론 지랄 맞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특히 불확실한 운동경기의 결과를 기다리게 되는 것과 똑같다. - P223

이야기는 매번 피노를 향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기대한 게 바로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제 노상 약국 위층 아파트 창문가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앉아 있었고, 감히 데스테 성 해자의 보도를 따라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오만하고 동시에 뻔뻔 한 눈빛으로—사람들은 그렇게 확언했다—뚫어지게 노려볼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행복한 눈빛으로! 그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마치 그의 핏속에서 몇 년 동안 음흉하게 잠복해 있다가 마침내 불시에 나타나 다리를 빼앗고, 창백한 삶을 무언가 분명한 것, 자기이해가 가능한 것, 존재 충만한 것으로 전환 시킨 그것이 매독이었던 것 같았다고. 보아서 알겠지만, 그는 강해지고 심지어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결혼 후 해질녘에 두어 번 아내와 팔짱끼고 조베카 대로를 지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인, 구명대에 매달린 조난자 같던 때와는 어쨌든 사뭇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자, 봐요, 젊은 시절 작은 실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셨나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여기, 보여요?‘ 그리고 촉촉하게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그늘조차 없었다. 일말의 어둠도. - P228

상황이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건, 로마 대로 한복판이나 델라보르사 카페 주랑 아래에서 마주 치는 극소수의 생존 유대인들이나(반대로 유대인들은 다시 다 게토에 틀어박혀 어울리지 않는 의례적인 경건함에 만족 해했지만!), 아니면 가장 열성적인 일부 반파시스트 시민들의 얼굴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공적인 비극이 발생 했을 때만 델라보르사 카페에 들렀는데, 실제로 이제는 마치 흉조를 알리는 새들처럼 늘 그곳에 죽치고 앉아 있어서 거의 매일 보게 되었다. 습관적인 무관심의 가면 아래 그들이 모든 구멍으로 내뿜는 사악한 만족감은 장님이 아닌 이상 모두가 볼 수 있었다! - P230

물론 사람들은 그 외까지, 그 외의 모든 것까지 상상했다.
데스테 성 해자의 난간 옆에 세 무리로 나뉘어 쓰러진 열한 명의 사람들을 보았고, 델라보르사 카페 주랑과 맞은편 보도 사이의 공간에서 오가는 검푸른 셔츠의 부대원들, 일제사격 직전에 약간 한쪽에 떨어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시아구라를 향해 "살인자!"라고 외친 파노 변호사의 절망적인 찡그림, 그 대단한 달빛, 자정부터 갑자기 불어온 바람과 함께 도시의 모든 돌멩이를 유리나 석탄 조각처럼 빛나게 만들었던 그 믿을 수 없이 밝은 달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노 바릴라리, 파노 변호사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지막 순간 어린애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이제 그 위에서, 그 장면 바로 위 창문 뒤에서 목발에 의지해 떨고 있던 피노는······ 오랜 기간, 1943년 12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천천히 거슬러올라가기 위해 치렀던 전쟁 기간 내내 그랬을 것이다. 집단의 상상력은, 언제나 매번 그곳 그 끔찍한 밤으로 돌아가야 했고, 오직 피노 바릴라리만이 가장 높은 지점에서 볼 수 있었던 총살당한 열한 명의 얼굴을 눈앞에 하나씩 떠올려야 했을 것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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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오후의 햇살과 정적, 멀리서 메아리치는 총성이 이따금 그 정적을 깨트리고 있는 마치니 거리는 공허하고 황량하고 손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한시 반부터 머리에 신문지 베레모를 쓰고 조그마한 비계에 올라 유대교 회당 정면, 먼지 가득한 벽돌에 이 미터 높이로 고정시켜야 하는 대리석판 옆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원래 농부였다가 전쟁 때문에 도시로 이주해 미장이 일을 해야 했던 그의 존재는 곧바로 햇살 속에 사라졌고, 곧이어 자기 자신도 그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8월의 태양에 어떤 방식으로든 맞서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뒤이어 다양한 몸짓과 색깔로 그의 등뒤에서 돌 포장길 한쪽을 뒤덮은 약 간의 행인들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 P109

공포나 증오가 있으면 합리적인 생각을 못하는 법이다. - P117

대로변 쪽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 앞에는 한가로이 노닥거리며 파르티잔 십여 명이, 입구의 계단에 앉아 있거나, 맨 다리 사이에 기관총을 걸치고 있거나, 맞은편 방대하고 풍성한 정원의 경계선을 이루며 길게 뻗은 높은 담장에 바짝 대놓은 지프차 의자에 누워 있거나 했다. 하지만 그들 외에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두꺼운 서류뭉치들을 팔로 안아서 옮기느라 모두 활력적이고 단호한 표정으로 계속 오고 가곤 했다. 절반은 그늘지고 절반은 햇살이 비치는 거리와 오래된 귀족 저택의 열린 현관 입구 사이에서, 요컨대 위 아래로 강렬하고 생생하고 즐겁기까지한 분주한 활동이 이어졌고, 도로의 자갈 포장을 스치듯이 낮게 나는 제비들의 지저귐 소리가, 일층의 철창 두른 대형 창문들을 타고 끊임없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타자기의 탁탁거리는 소리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P118

그는 부헨발트에 있었고, 유일하게 거기서 돌아왔다! 수많은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견뎌내고, 수많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그의 처분을 기다리며 모두 경청하기 위해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만약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지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어줬을 것이며(그렇게 늦게야 그를 알아 보고, 실제로는 또다시 그를 거부하고 배제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심지어 머리 위 데스테 성의 시계가 두 번 울리면서 벌써 부르고 있는 점심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선의를 증명하고, 그 끔찍하고 결정적인 기간 동안 자신들의 관념이 겪은 변화를 뒷받침하려는 듯, 조잡한 천으로 만든 바지, 소매를 걷어올린 널찍한 겉옷, 넥타이 흔적도 없이 목 위로 열린 옷깃, 꼼꼼하게 광택을 내지 않은 신발, 샌들 신은 맨발, 그리고 당연히 수염, 그들 모두가 기르고 있는 수염을 과시하면서 모두가 다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네, 많이 바뀌었군? 세상에나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됐어, 이렇게 살도 쪘고! 하지만 봐, 우리도 바뀌었지. 세월은 우리도 뚫고 지나갔어······‘ 그러면서 의심할 바 없이 진지하게 제오의 검토와 판단에 자신을 맡겼고, 또 진지하게 그의 굽힐 줄 모르는 거부에 괴로워했다. […] 말하자면 좋든 나쁘든 바로 그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무서운 악몽들로 가득한 오랜 잠처럼 이제 핏속에서 끝나가는 시대하고는 다른, 비할 바 없이 더 나은 시대가 시작되려고 한다는 확신이었다. - P126

파자마 바람인데도 땀에 푹 젖은 제레미아 타베트는 검은색 대형 식탁 한쪽에 앉아서, 또다시 미심쩍고 당황한 듯 손가락 끝으로 잿빛 수염을 비틀었다. 파시스트 행동대원의 고전적인 염소수염은 페라라의 늙은 파시스트 중 그 혼자만 하고 있었다. 그게 만용인지 경솔함인지, 아니면 적정선의 타협에서 나온 교활함인지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다. 제오는 그 염소 수염과 퉁퉁한 손이 시선을 모았기에, 그가 건네는 권유는 옅은 웃음과 함께 머리를 가로저어 피하면서, 광적인 집착으로 파란 눈을 고정시켰다. - P133

진실로 낮의 햇살은 권태, 정신의 완고한 잠,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권태로운 쾌락"이다." 하지만 마침내 황혼의 시간이, 평온한 5월 황혼의 빛과 그림자에 똑같이 젖어드는 시간이 내려오면, 조금 전까지 완전히 일상적이고 무관심하게 보였던 사람들과 사물들이, 갑자기 여러분에게 진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갑자기 난생처음 자기 자신과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다(그리고 그 순간에 여러분은 마치 섬광에 얻어맞은 것 같을 수도 있다). - P153

여러 건축물이 모여 있고 드넓기 그지없는 페라라 시립 공동묘지를 아름답다고, 위안을 줄 만큼 아름답다고 규정한다면, 우리로선 이탈리아에서는 애도하지 않고 죽음을 다룰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말에 대응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다는 듯이, 어쩔 수 없이 찜찜해하면서 습관적으로 웃음 짓게 될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뻗은 작은 길인 보르소 거리, 길 양쪽에 대리석 공방들과 꽃가게들이 모여 있고 나란히 자리한 두 커다란 개인 정원의 울창한 나뭇잎들이 길게 뒤덮고 있는 그 거리 끝에 다다르면, 갑작스레 나타나는 체르토사 수도원과 바로 옆 공동묘지의 전경이 언제나 축제와도 같은 즐거운 인상을 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 P157

그런데 그녀는 누굴까? 누구 딸이지? 갑자기, 돌발적으로 아가씨의 머리를 묶은 붉은 리본에 마음을 빼앗긴 브루노는 계속 생각했다. 자신이 소년이었고 그녀는 어린아이였을 그 전쟁 시절이 그녀에게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수 있을까? 이제 이탈리아 어디에서 든 청소년들이 미국 잡지 화보에 나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틴에이저 같을 수 있는 것일까? - P168

그러니까 등뒤에 남기고 떠났던 낡고 조그마한 세상이 저기 그대로 있구나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밀랍으로 복제한 듯 저기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있구나. 하지만 클렐리아 트로티는? - P170

로비가티는 신발 밑창에서 잘라낸 가죽처럼 단단한 손바닥으로 노끈을 둘둘 감아 정확하게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입안에는 언제나 작은 못을 한 움큼 담고 있었고, 그의 혀와 입술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필요에 따라 밖으로 하나씩 내밀었다. 신발 한 짝을 무릎 사이에 바이스처럼 아주 단단하게 조인 채 지칠 줄 모르는 자동 동작으로 거기에 망치질을 해댔다······ 정말 훌륭하고 대단해! 브루노는 이렇게 생각했다. 로비가티의 힘과 자의식은 바로 그런 손의 노고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그의 크고 검은 손,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그 손의 분주한 움직임은 대화할 때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단 한 번의 망치질로 두꺼운 가죽에 박히는 못이 때로는 어떤 대화보다 그에게 더 유용한 것 같았다. - P180

자기가 하는 일이 아주 초라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 내가 그렇게 확신하는데 어쩌겠어요. 하지만 그 직업 덕택에 어렸을 때부터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재기간 내내 전혀 굴종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요. 그런데 브루노 씨, 구두장이 일은 흥미로운 측면이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인간 활동에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어요.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그 비밀을 파악할 수 있으면 돼요.
가시가 돋친 말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브루노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슬픔을 조금씩 잊었고 결국 거의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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