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얘기하기 가장 어려운 컬렉션은 당연하게도 나의 컬렉션이다. 나는 지금 그것들을 모두 붙잡고 있지는 않다. 나는 그저 수천 개의 물건을 소유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수많은 물건 중 대부분은 이제 한갓 추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나는 지금도 계속해서 찾고 발견하고 획득한다. 획득은 노름꾼이 주사위를 굴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 이유로 가장 중요한 행위다. 나는 컬렉션으로 투기를 한다거나, ‘장식‘을 하겠다는 생각을 결코 해본 적이 없다. 나에게 수집은 필요불가결한 동시에 완전히 무용한 일이다. - P94

시간이 흘렀다. 나는 종종 대중보다 앞서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더없는 만족감을 느꼈지만, 그것들의 가격이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기도 전에 다 팔아야만 했다. 이것이야 말로 무언가를 다시 사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팔아야만 하는 가난한 컬렉터의 운명이다. - P103

그 컬렉션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가장 크고 비싸지만, 가장 의미 없는 컬렉션은 결국 박물관에 소장되거나 재단으로 향한다. 그러한 컬렉션은 애처롭게도 오직 컬렉터의 재산이나 허영심을 반영할 뿐이다. 최상의 컬렉션이란 안목과 취향, 시대를 대변한다. 리스본의 칼루스테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 컬렉션을 비롯한 몇몇 컬렉션 은 실로 다채롭고 완벽하여,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나이와 함께 머릿 속에 붙어버린 환멸과 지혜의 결합은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보물과 함께 땅속에 묻혔던 불쌍한 군주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졌고 보물은 약탈당하지 않았는가. - P105

1986년 웨스트 딘에 있던 작품들이 팔리기 전 며칠 동안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베라르의 해변에 매혹된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내게 낙찰되었을 때 너무나도 놀라웠다. 이러한 유형의 구매는, 미처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번지 점프와 같은 흥분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그림을 구매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획득과 소유의 전율은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이제 그 그림은 내 좋은 친구 자크의 집 벽에 안전하게 걸려 있고, 나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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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는 증오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고독에는 그 정도로 명확한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에는 반대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일까. - P291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그래서 나는 행복은 그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그래서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1951)에서 이렇게 말했을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 나는 행복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신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 P292

비판이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은, 비판을 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 비평가들의, 사명이다. 훌륭한 사명이지만 모두의 사명일 수는 없다. - P324

26세의 칼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手稿)》(1844)에서, 돈이 인간관계를 비틀어놓지 않은 상태를 가정해보라고, 그때의 교환은 어떨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일 때,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인간적인 것일 때, 그럴 때 당신은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오직 신뢰와만 교환할 수 있다. 당신이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 P344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 P350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당신은 축소 조정돼왔다. 그러면서 당신은 쉬워졌다. 이 변화의 와중에 당신이 뭔가를 점점 잃어왔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 하면서 느끼게 되는 바로 그것, 그 ‘다름‘ 말이다. 철학 책에 자주 나오는 용어대로라면, 타자의 타자성(他者性, otherness) 말이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본의 아니게 점차 축소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온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당신을 만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음성조차 듣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라는 글자와 대화를 나누면 되는 것이다. - P353

아름답게 고유한 이야기들이지만, 공통점을 억지로라도 말해 볼까. 못 하는 일이 하나씩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이 말의 폭력성을 용서해주길)에게 더 큰 무능력이 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동전치기를 잘 못하고(두한), 한글을 못 읽고(봉구), 총을 못 든다(선재), 다시 강조하자.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동전치기를 잘 못하는 두한이 자책하자 철웅이 소리를 지른다. "원래 그런 건데, 네가 뭐가 미안해!" 그래,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사람들. 귀가 있는데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세 이야기 모두에 나온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길을 묻는 두한을 사람들은 외면한다. "미안해, 못 알아듣겠네." 봉구가 자신의 무죄를 해명할 때 경찰은 잘 안 듣는다. "이 양반, 치매인가?" 선재의 경우는 아예 말할 엄두조차 못 낸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이 세상은 ‘얼음 강‘이어서 귀가 없기 때문이다. - P367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 - P367

물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작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고기.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물)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엇비슷한 일상과 그것의 권태로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그것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가? - P369

흔히 인문학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월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 P370

컴퓨터가 그렇듯이 인간에게도 초기설정이라는 것이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자신이라는 렌즈로 만물을 보며 해석하도록 되어 있는 경향"이 그것.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 P370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 - P371

고갈되지 않는 열정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 P374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는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곤란을 겪고도 배우지 않는 이는 가르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양화(陽貨)〉 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물론 최악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일 것이다. - P375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 P378

과연 우리 사회에서는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니, 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기는 한가? 다들 그 불공정한 피라미드의 윗자리에 올라가기만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김두식 교수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2010)에 따르면, 국립대 교수들이 모여 앉아서 "철도공사 직원들이 우리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니 기가 막히지 않냐?"(194쪽)라며 한탄했다 한다. 저자의 반문이다. "철도공사 직원이 국립대 교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게 도대체 뭐가 잘못된 일일까?" 그리고 덧붙인다. 그게 그렇게 불만이라면, 우리나라 최대기업 등기이사들의 평균 연봉이 78억이라는 사실에는 왜 분개하지 않는가. - P380

그렇다면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하리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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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선생의 평론집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2011)이 출간되었다. 기왕 말을 꺼냈으니 제대로 된 서평을 써야 도리일 텐데 그럴 형편이 못 된다. 특별히 오래 머문 대목이 있다. "오늘도 수많은 문학론·시론·소설론 들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계속 묻고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대개가 어떤 정답을 이미 전제하고 출발하거나 쉽게 정답에 도달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을 제대로 물을 때 정답이란 없다." (39쪽) 왜 정답이 없는가. 누군가 쓰고 또 누군가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문학‘ 개념이 탄생하기 때문이라는 것. 저 문장의 더 두터운 본래 맥락과는 별개로, ‘쓰기와 읽기‘라는 행위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 P174

그리고 ‘읽기‘에 대해. 그는 ‘무용한 독서‘의 소중함을 말하는 와중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들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우리가 보낸 순간·시》, 287쪽)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후배로서 선배의 결론은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까? 읽고 쓰는 일만으로 우리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P175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 2012)의 저자인 파커 J. 파머는 "정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을 받는다"라는 헌사로 책을 시작한다. 정치가 영혼을 구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비통한 자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일이어야 한다. - P190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痛覺)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이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 P191

권력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예언이란 한낱 점치는 일 따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진실을 발설하는 일이며, 그 예언의 실현 과정 속에는 예언자 자신의 역할이 이미 포함돼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 P195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 P202

최근 한 성소수자 군인이 영외에서 합의하에 행한 성행위를 군 당국이 문제 삼아 결국 그는 실형을 선고받았고 법정에서 졸도했다. 이제 성소수자 군인은 군대를 가지 않아도 처벌받고 가도 처벌받는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호모포비아들은 차치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안타깝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다‘라는 입장을 말하고 있으니 시기상조 리스트는 또 한 줄 늘었다. 세계 최강군인 미군은 군인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재도 가하지 않으며 동성애자인 장성까지 있는데 왜 우리는 시기상조인가, 동성애자들에게도 국민성이 있어서 우월한 미국은 돼도 열등한 한국인은 안 되는 것인가. - P206

지난 대선 토론 때 논란이 된 동성 결혼 합법화 문제 역시 그렇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에서 제작한 자료집에 따르면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나라는 영국, 미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포함 23개국(2018년 기준 26개국)이며, 시민 결합 제도를 통해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까지 포함하면 총 44개국이 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은 왜 이 같은 관용과 성숙의 지표에서는 44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나라여야 할까.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물질적 진보 말고 정신적 진보의 수준을 보여주는 거의 모든 지표에서 세계 순위 하위권에 속한다. 그 처지를 벗어나는 일도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 P207

애초부터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이 대통령을 ‘호위‘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무엇을 이용한다.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우기 위해서는 이용할 무엇이 필요하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할 때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삶은 얼마나 충만해지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태극기 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적 축제일지도 모른다. - P211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 따르면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인간은 그냥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고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라는 것. 한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 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31쪽) 우리 사회가 장년층·노년층을 사회적 인정의 장에서 배제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삶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거대한 발전소를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기만 할까. ‘사회적 인정‘의 영역에서도 복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는 날들이다. - P211

메릴 스트립은 먼저 ‘할리우드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현장에 있는 여러 배우들의 출신 지역과 성장 배경을 다정한 어조로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단지 예닐곱 명만을 언급했을 뿐인데도 그 면면은 다양했다. 차이를 차이 자체로 존중하는 그 호명만으로도 이미 뭉클했다. 그 호명의 끝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할리우드는 다양한 아웃사이더와 외국인들로 들끓는 곳입니다. 이들을 다 내쫓으면 미식축구와 격투기 외에는 볼 것이 없겠죠." 트럼프의 배타주의를 비꼬는 그의 말에 박수가 쏟아졌다.
[…]
그러므로 그의 연설이 ‘권력이란 무엇인가‘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선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제 지위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할 것입니다." - P213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 P217

대한민국에서 ‘보수‘란 무엇이었던가. 최근 출간된 사회학자 김종엽의 저서 《분단체제와 87년체제》(창비, 2017)의 한 대목에 서 저자는 ‘보수와 진보‘ 대신에 ‘보수와 민주‘라는 명명법을 택하고 그 이유를 밝힌다. "구별의 두 항은 각각 상대가 아닌 것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즉, ‘보수와 진보‘라는 구별에서 보수는 ‘진보가 아닌‘ 것이 되지만, ‘보수와 민주‘라는 구도에서 보수는 ‘민주가 아닌‘ 것으로 제자리를 부여받는다는 것. "이렇게 구별하면 분단체제 아래서 보수가 민주적 법치를 온전하게 수용하지 않는 집단임을 보여줄 수 있다." (95쪽) - P220

영화가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진 않으리라. 문학도 마찬가지다. 피해서는 안 되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 최근 나는 한국 사회의 끔찍한 본질을 집요하게 재현하는 한 소설가에게 지지를 표명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기도 했다.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에서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2016년 4월 23일 자) ‘본질의 장악‘의 부산물이자 ‘인지의 충격‘의 유발자로서의 고통, 그것은 옳다. - P226

절망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오래 반복되면 기묘한 향락이 된다. 우리는 허황된 희망과도 싸워야 하지만 즐거운 절망과도 싸워야 하지 않을까. - P228

블랑쇼를 펼치니 그는 ‘잠들어 있음‘과 ‘깨어 있음‘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둘이 모순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블랑쇼는 이 관계를 변증법적 으로 전복한다. "잠은 밤을 가능성으로 변모시킨다. 깨어 있음은 밤이 오면서 잠이 된다. 잠을 자지 않는 자는 깨어 있을 수 없다. 깨어 있음은 항상 깨어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왜냐하면 깨어 있음은 ‘깨어남‘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 387쪽)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남‘이라는 사태를 체험할 수 없다는 것. 잠을 잘 수 있고 또 자는 사람 만이 깨어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런 역설이 성립한다. 항상 깨어 있으면 진정으로 깨어날 수 없다. - P232

나는 인간이 더 인간다워지기 위해 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보지만, 신이 더 신다워지기 위해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P247

시인이 단지 어떤 것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나는 수전 손택이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에 서 소개한 일화를 떠올렸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비난받던 미국의 한 흑인 시인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의 사회적 발언을 지지하는 것과 어떤 시인이 특정한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후자는 어떤 문화적 폭력의 은밀한 시작일 뿐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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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흙이요, 명성은 수증기이며, 종말은 잿더미로다. - P121

로멜리는 추기경들을 둘러보았다. 의자는 넓게 네 줄로 나뉘었다. 현명한 표정, 따분한 표정, 종교적 열정이 가득한 표정······. 추기경 한 명은 아예 잠이 들었다. 아마도 옛 공화국 시절, 토가 차림의 고대 로마 원로들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여기저기 유력 후보들도 눈에 띄었다. 벨리니, 테데스코, 아데예미, 트람블레이······. 서로 떨어져 앉았지만 다들 자기 생각에 몰두한 듯 보였다. 문득 콘클라베가 너무 부족하고 자의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던가? 성서 어디에도 근거가 없었다. 성서를 아무리 읽어도 주께서 추기경을 만들었다는 구절은 보지 못했다. 성 바오로가 주님의 교회를 생명체로 묘사했는데, 저들이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 P127

성모 교회에 봉사하는 동안,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입니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리스도조차 종국에는 확신을 두려워하시지 않았던가요?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El, Eli, lama sabachtani).‘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쳤죠. 우리 신앙이 살아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신앙도 필요가 없겠죠. - P132

나를 적으로부터 지키소서(Munire digneris me) - P146

바로 옆방에서 우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따금 웃음소리도 들렸다. 지금은 확실해졌다. 옆방 주인은 분명 아데예미다. 콘클라베의 어느 누구도 목소리가 그렇게 깊지 못했다. 소리로 보아 지금은 지지자들과 만나는 중인가 보았다. 이따금 커다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로멜리는 거부감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말로 교황 자리가 손안에 들어왔다고 믿는다면, 저렇게 기대감에 들떠 있는 대신 지금쯤 두려움에 떨면서 어둠 속에 누워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오만함을 나무라기도 했다. 최초의 흑인 교황은 분명 세계적으로 대역사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역사의 도구로 쓰신다는 데 그 기쁨을 드러낸다 한들 누가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 P175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죠. 예하께서도 설교하실 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의심이 없으면 신념도 없다고? 저도 경험한 바가 있어 감명이 깊었는걸요. 정말 아프리카에서 저처럼 지냈더라면 누구든 주님의 자비를 의심했을 겁니다." - P182

폰티피컬 라테란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과정을 공부할 때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을 읽었다. 당시 배운 내용이 군중을 다양한 범주로 나누는 일이었다. 겁에 질린 군중, 의욕을 잃은 군중, 반항하는 군중 등등. 사실 성직자 그룹에도 유용한 기술이다. 이 세속적 기술을 적용한다면 콘클라베는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군중으로 읽힐 수 있다. 성령의 집단 충동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니 왜 아니겠는가? 라칭거를 선출했을 당시에도 그랬듯 콘클라베는 소심하게 변화를 거부할 수 있다. 어떤 콘클라베는 무모해서 보이티와 같은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이번 콘클라베와 관련해 로멜리가 걱정하는 바는, 카네티의 소위 분열하는 군중으로 점차 변질되는 것이다. 혼란스럽고 불안정해 쉽게 유혹에 휘둘리는 것이다. 이 경우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 P235

"오명 하나 없는 후보가 어디 있어야죠. 어떤 교황은 과거 히틀러 유겐트 일원으로 나치를 위해 싸우고, 공산주의자, 파시스트와 결탁 했다고 비난받은 교황들도 있었죠. 끔찍한 성 추문 보고서를 감춘 적도 있고······. 그렇게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만일 단장 예하께서 교황청 소속이라면 분명 누군가 슬쩍 추문을 흘렸을 겁니다. 대주교라면 한두 번 실수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사람이기에 약점은 있습니다. 이상을 추구하지만 늘 이상적일 수는 없죠." - P249

다른 추기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판유리 문 너머 근위병 하나가 수녀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출근하는 길이겠지만 아직 어스름 녘이라 얼굴을 알아보기는 불가능했다. 그저 움직이는 그림자가 길게 줄을 선 것만 같았다. 그 시간이라면 세계 어디서나 볼 법한 광경이 아닐까? 어느 곳이나 가난한 이들이 아침을 여는 법이니까? - P293

시간문제일 뿐 비밀이 다 그렇지 않은가. 루카 복음서에 나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예견하신 바 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 P296

"내가 올바른 일을 했을까요, 엑토르? 추기경 생각은 어때요?"
"양심을 따르는 이는 절대 잘못하지 않습니다, 예하. 결과가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잘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행동을 이끄는 이정표는 당연히 양심이어야죠. 주님의 목소리를 제일 잘 듣는 곳이 바로 양심이니까요." - P300

이제는 모두들 더 잘 알게 되었다. 약점과 결점까지 모두. 칸트의 얘기 한 줄이 문득 떠올랐다. ‘심성이 비뚤 어지면 올곧은 행위는 불가능하다.’ 교회는 비틀린 재목으로 만들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하지만 다행히 주님의 은혜 덕에 재목은 자리를 잡고 2000년을 버텨냈다. 필요하다면 교황 없이 2주일은 더 버틸 수 있다. 문득 동료들을 향한 근본적이고도 기이한 애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저들의 약점까지도 사랑스러웠다. - P313

투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전날 밤 사건이 많았던 터라 자리에 앉자마자 지쳐 잠들어버린 것이다. 바로 앞에서 펄럭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깼더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고 그는 턱을 책상에 대고 있었다. 메모지 하나가 접힌 채 책상에 놓여 있었다. ‘그 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마태오 8장 24절.‘ 뒤돌아보니 벨리니가 상체를 숙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으나 정작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맞은편 추기경들도 성서를 읽거나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검표원들이 제단 앞에서 테이블을 세팅하는 것으로 보아 투표도 끝난 모양이었다. 로멜리는 펜을 들어 인용문 아래, ‘자리에 들면 자나 깨나 여호와께서 이 몸을 붙들어주십니다. 시편 3장‘이라고 휘갈겨 적은 후 다시 돌려주었다. 벨리니는 그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멜리가 그레고리안의 옛 제자이고 대답을 잘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P315

‘주여, 가능하다면 다른 이에게 성배를 넘기소서.’ 그런데 기도는 외면당하고 독배가 주어지면? 그 경우 거절하기로 각오는 했다. 1978년 천 번째 콘클라베에서 루치아니도 그렇게 했다.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는 것 또한 이기심과 비겁이라는 중죄에 해당하기에 결국 루치아니도 동료들의 간원을 받아들였으나 로멜리는 끝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주께서 자기인식의 재능을 허락하셨다면 당연히 사용할 의무도 있지 않을까? 교황으로서의 고독과 고통과 고난이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건 교황이 성스럽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성스럽지 않은 교황이라니, 불경도 이만저만한 불경이 아니리라. - P321

일곱 번째 투표는 상서로워야 했다. 일곱은 성취와 완성의 숫자가 아니던가. 주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휴식을 취한 날. 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그리스도의 완벽한 신체를 상징한다고 했다. - P329

"힘내게나, 레이. 이 엄청난 걸작을 봐. 기막히게 예언적이지 않은가? 그림 끝에 어둠의 장막 보이지? 예전엔 그저 구름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까 연기가 틀림없구먼. 어딘가에 불이 났어. 가시권 너머일 텐데 미켈란젤로가 감추려 한 걸 보니······ 폭력, 전쟁, 갈등의 상징일까? 그리고 베드로가 고개를 똑바로 들려고 애쓰는데······ 자네도 보이지? 지금 거꾸로 처박힐 지경인데 왜 저러고 있을까? 지금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굴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안간힘을 써서 자신의 신앙과 존엄성을 보이려는 게지. 세상은 문자 그대로 뒤집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유지하고 싶은 걸세." - P338

로멜리는 의자에 기대앉아 생각지도 못한 일을 고민했다. 그런데 마태오 10장 16절에 이렇게 적혀 있지 않던가? ‘뱀처럼 현명하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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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묘하게도 로멜리는 저 늙은 야만인에게 향수를 느꼈다. 어쨌든 함께 살아남은 두 사람이 아닌가. 둘 모두에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콘클라베인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참석자 대부분 과거 한 번도 콘클라베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만일 추기경단이 젊은 교황을 선출한다면, 거의 대부분 다시는 구경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저들은 지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깊어갈수록 더 많은 추기경들이 가방을 들고 비탈길을 올라왔다. 이따금 혼자이기도 하나 대개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었다. 로멜리는 이 희대의 역사에 많은 이들이 고무해 있음을 보고 감동했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얼마나 다양한 인종을 대표하는지 보라. 이 넓디넓은 우주 교회에서 문화도 지형도 다르게 태어났건만, 이렇게 주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함께 모이다니! - P61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딘가 특별하면서도 고귀한 추기경 무리가 등장했다. 교황청의 추기경 24인. 영원히 로마에 살며 교회의 주요 부서를 운영하는 이들이다. […] 그래서 로멜리가 다른 추기경들과 마찬가지로 따뜻하게 환대한다 해도, 전 세계에서 찾아온 추기경들과 달리 이들한테서 경건한 모습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선한 사람들이기는 하나 이미 너무 많이 겪었기에 무덤덤해진 것이다. 로멜리 자신도 영적 상처를 입고 그런 식의 일탈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 바 있었다. 죽은 교황도 종종 추기경들을 다그쳤다. "마음 단단히 먹게, 형제들이여. 허영과 호기심, 악의와 험담의 죄들, 사악한 방해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네. 절대 굴하지 말게나." 교황이 죽던 날 벨리니가 해준 얘기가 있었다. 교황 역시 교회를 향한 믿음을 잃었다고······. 로멜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얘기였기에 어떻게든 마음에서 몰아내려 애썼지만······ 교황이 말한 교회란 분명 이들 관료일 것이다. - P63

천박한 자들은 늘 모든 것을 알려고 들지만,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로는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었다. - P77

"잠깐만요, 정말 그래야 할까요?" 그가 속삭였다.
"아닐 이유는?"
"성하께 정말 이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세요?"
"조심하세요, 친구. 그런 발언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성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어요. 그분의 바람을 존중할 의무뿐이죠."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은 교리 문제입니다. 임면권까지 무결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교황의 무류성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는 잘 알아요. 하지만 이 문제는 교회법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라면 나도 추기경 못지않게 일가견이 있답니다. 교황령 39절은 아주 구체적이죠. ‘추기경 선거 인단이 사전에 즉 신임 교황이 선출되기 전에 도착한다면, 선거가 어느 단계이든 상관없이 참여하도록 허락할지어다.‘ 저 양반은 합법적인 추기경입니다!" - P87

"중동의 기독교는 이미 입지가 위태롭습니다. 예하께서 추기경이신데 로마까지 직접 나타나신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위험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 때문에 고민도 많이 했죠. 그래서 여기 오기 전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에, 아무튼 선택을 하셨으니 그 문제는 넘어가죠. 하지만 이곳에 오신 이상, 어떻게 바그다드로 돌아가실 생각인지 암담하기만 하군 요."
"당연히 돌아가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제 신앙의 결과를 받아들일 겁니다."
"추기경님의 용기와 신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하의 귀국은 외교 마찰을 빚을 테고 그렇게 되면 예하의 결정과 무관하게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예하의 결정과도 무관하겠죠. 예하, 제 결심은 차기 교황을 위한 것입니다." - P88

베니테스가 어찌나 놀란 표정을 짓던지 잠시 한 번도 식사 기도를 해보지 않았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마침내 그가 "물론입니다, 예하.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라며 인사를 받고는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다. 추기경들도 따라 했다. 로멜리도 눈을 감고 기다렸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로멜리가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할 때쯤 목소리가 들렸다."오, 주여, 우리를 축복하소서. 이제 우리는 주님의 너그러우신 선물을 마주했습니다. 또한 이 음식을 함께하지 못 하는 이들을 축복하소서. 오, 주여, 우리가 먹고 마실 때, 굶주리고 목 마른 이들, 아프고 외로운 이들, 그리고 오늘 밤 우리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를 도와줄 수녀들을 잊지 않도록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 P99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선교사–사제가 왜 그렇게 교황 성하의 마음을 끌었는지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신을 만나고 싶으면, 안락한 제1 세계 교구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가장 절박한 곳으로 가야 한다. 그분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든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질지어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삶을 버리면 구할 것이니라······.
베니테스는 정확히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교회의 장벽을 통해서라면 결코 이곳에 이르지 못할 사람.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을 사람. 그래서 사회적, 사교적으로 늘 어색한 사람. 그렇다, 저렇듯 특별한 성직 수여가 아니라면 어떻게 추기경단에 속할 수 있었겠는가. 로멜리는 비로소 그 모두를 이해했다. - P101

로멜리는 거대한 암흑의 무저갱을 그려보았다. 구덩이는 하늘에서 그에게 집어 던진 조롱의 목소리들로 어지러웠다. 의심이라는 이름의 신성한 계시.
절망. 절망. 절망. 로멜리는 《묵상》을 집어 벽으로 던졌다. 책은 벽에 부딪혀 탁 소리를 냈다. 코 고는 소리가 잠시 그쳤다가 다시 이어졌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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