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 P12

평소라면 이쯤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겠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문득 누군들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에 마음의 준비가 되기는 하는 걸까 싶었다. - P18

사빈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여자들을 좋아 했지만 그의 눈에는 다들 게을러 보였다. 그 여자들은 절대 오지 않을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거나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건장해 보이는 여자조차도 달리 더 나은 일이 없다는 듯 한가롭게 우유를 따랐다. - P20

두 사람이 같이 보내는 시간은 다시 달콤해졌다. 첫 말다툼이라는 장애물을 넘었기에 평소보다 더 달콤했을지도 몰랐다. - P28

"난 이런 식일지 몰랐어, 그뿐이야." 카헐이 말했다. "그냥 당신이 여기 같이 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아침에 같이 일어난다고만 생각했지.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래." - P35

카헐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진실에 불편할 정도로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그녀가 입을 닥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헐은 농담을 해야겠다고,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이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은 채 그 순간이 지나가 버렸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여자가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의 문제였다. 눈을 가리고 있던 낭만이라는 베일이 걷혀서 당신을 들여다보고 읽을 수 있게 된다. - P37

거실로 돌아온 카헐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역시나 정말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었다. 케이크를 마시다시피 먹고 샴페인을 느긋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마시다 보니 케이크와 샴페인이 다 떨어졌다. 겪어본 적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거의 끝나가는 하루를 지워주지는 않았다. 잠이라도 잤으면 좋았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 P43

카헐은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 P44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웃기다고 할 만한 소리가 들렸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저녁을 태우고 사랑이 식은 여자는 덜 익은 요리를 내놓는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 - P46

어딘가에서 읽은 끝에 관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쁘게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 P48

오는 길에 두 번이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잠깐 눈을 붙였지만 섬에 들어오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온전히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해변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칠흑 같이 까만 길까지도 생기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높고 든든한 산과 헐벗은 언덕, 그리고 저 아래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선명하고 기분 좋게 철썩이는 대서양의 존재를 느꼈다. - P53

돌아오는 길에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그녀는 집으로 곧장 가는 대신 남쪽으로 차를 돌려 집이 거의 없고 덤불도 하나 없는 애틀 랜틱 차도를 따라 차를 달렸다. 겨울에 이런 동네에 살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덤불을 꺾고 해변의 모래를 흩날리는 거센 바람, 안개와 가차 없는 비, 갈매기의 차가운 비명. 마침내 겨울이 끝나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할까. - P58

언젠가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별거 중인 남자와의 사랑이 식었던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떠올랐다. 그는 자기 기분을 반대로 말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말하면 진실이 되리라는 듯이, 또는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는 듯이. - P64

그녀는 그동안 알았던 남자들을, 그녀에게 청혼을 해서 그때마다 승낙했지만 결국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청혼을 왜 받아들였을까 약간 의아했다. 그녀는 돌아누워서 집 주변 덤불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오늘 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여자에게 가끔 필요한 것, 즉 칭찬이었다. 뻔뻔스러운 거짓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칭찬을 자기가 먼저 요구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나이에 말이다. 아무 것도 배우질 못한 걸까? - P78

공기가 그녀의 폐를 찔렀다. 하늘에서 구름이 충돌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구름을 보았다. 그녀의 기분에 걸맞게 세상이 거짓말 같고 터무니없는 빨간색으로 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85

"학교 다닐 때 수녀님이 지옥은 영원하다고 했어요." 그녀가 송어 껍질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고 물었더니 수녀님이 말했죠. ‘지구상의 모든 모래를 생각해 봐. 모든 해변과 모래 채석장, 해저, 사막을 말이야. 그 모래가 전부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렴. 거대한 요리용 타이머 같은 데 말이야. 일 년에 모래가 한 알씩 떨어진다고 했을 때 영원은 세상의 모든 모래가 모래시계 속에서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생각해 봐요! 우린 모두 겁에 질렸죠. 아주 어렸거든요." - P97

낮의 빛이 다 빠졌다. 황혼이 하늘을 물들이고 대낮의 빛을 어둠으로 바꾸려고 꼬드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 걸으면서 일요일의 고요함을 느끼고 얼음장 같은 바람 때문에 나무가 긴장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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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은 내향적이며 자아를 깊이 성찰한다. 사람들은 제비꽃이 겸손해서 숨는다고 말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제비꽃은 자신의 비밀을 포착하기 위해 숨어 있다. 그 거의—없는—향기는 억제된 영광인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찾아봐 달라고 요구한다. 제비꽃은 향기로 소리치지 않는다. 제비꽃은 말할 수 없는 가벼운 것들을 말한다. - P93

겁이 난다. 하지만 내 심장은 뛰고 있다. 이해를 허락지 않는 사랑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한다. 단 하나 확실한 건 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라는 존재의 한 형태이고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한 형태라는 것: 그것들이 내가 지닌 가능성의 한계다. - P108

나는 죽을 것 같은 기쁨 속에 있다. 달콤한 탈진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이란 미래에 대한 탐욕을 느끼는 일이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 척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사랑 속에서 산다. 하지만 갈망을 안은 채 기억을 되새기는 건 다시 한번 작별을 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 P108

나는 생각을 넘어 하나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걸 말들로 쪼개는 일은 거부한다—표현할 수 없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은 것은 결국 내 비밀들 가운데 가장 은밀한 것이 된다. 나는 내가 생각을 쓰지 않는 순간들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순간적인 상태다. 도달하기 어려운, 완전히 은밀한, 생각을 빚어내는 말들을 더 이상 쓰지 않는 상태. 말들을 쓴다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해롭고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이 아닐까?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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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게 되리란 걸 믿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차가운 신선함 속에서 보글거리고 있으니까. 매 순간이 있기에 내 삶은 아주 길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 직전인데 태어날 수는 없는 상태인 듯한 느낌 속에 있다.

나는 세상에서 고동치는 심장이다. - P56

나는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시간의 폭음을 듣는다. 그것은 소리 없이 형성되고 있는 세상의 소리다. 내가 그걸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시간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있다‘, 그것이 세상이다.
시간 없는 세상. 이제 내 의식은 가벼워졌다. 그것은 공기다. 공기는 장소도 시간도 갖지 않는다. 공기는 모든 것이 존재할 비非장소이다. 내가 쓰고 있는 건 공기의 음악이다. 세상의 형성. 그것은 앞으로 천천히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이미 그랬던 대로 될 것이다. 미래는 앞에, 뒤에, 그리고 양옆에 있다. 미래는 늘 존재했던 것이고 늘 존재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진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건 독해가 아니라 존재하기를 위한 것이다. - P58

문득, 살기 위해 질서가 필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야 할 패턴은 없으며, 패턴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태어난다. - P59

나는 여전히 ‘그‘나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선보이는 건 ‘저것‘이다. 저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다. 탄생과 죽음. 탄생. 죽음. 탄생, 그리고—세상의 호흡 같은 것. - P59

나는 내 알려지지 않은 부분 속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태어나면 ‘그‘ 혹은 ‘그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일단은, 지금 나를 지탱하는 건 ‘저것‘이며 그건 곧 ‘그것‘이다. 자신으로부터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 내는 건 매우 중대한 일이다. 나는 자신을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한다. 우리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완전한 어둠 속을 걷기. 그건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은 산고와도 같으니: 어떤 것이 태어난다. 그것 자체가. 그건 마른 돌멩이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그 중심부는 부드럽고 살아 있는, 필멸하는, 위태로운 그것이다. 기초 물질의 생명. - P72

지금은 하나의 순간이다. 당신은 그걸 느끼는가? 나는 느낀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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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로운가? 무언가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 아니면 내가 그걸 붙잡고 있나? 또 이런 것도 있다: 나는 모든 것과 결합해 있기에 완전히 풀려날 수 없다. 게다가 한 인간은 곧 모든 것이다. 지니고 다닐 수가 없으므로 지니고 다니기에 무겁지 않은 것: 그것이 모든 것이다. - P51

나는 처음으로 사물들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다. 내가 사물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건 자신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다. 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나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나의 거짓 힘을 불신한다. - P52

나는 태어날 때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내 비극의 원천이다. - P54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순수하다. 당신이 이 고독을 느끼기를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은 창조의 안개 속에 있다. 명료한 어둠, 빛나는 어리석음. - P55

거울이 등장하기 전, 인간은 호수에 비친 그림자 말고는 자기 얼굴을 알지 못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모두가 자신이 가진 얼굴에 책임을 지게 된다. 지금 나는 내 얼굴을 볼 것이다. 맨얼굴. 세상에 내 얼굴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 없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충격을 받는다.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결코는 불가능을 나타낸다. 나는 결코를 좋아한다. 그 반대인 언제나도 좋다. 결코와 언제나 사이에서 이들을 매우 간접적이면서도 내밀하게 이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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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말은 피상적으로만 들으라. 그러면 의미의 결여에서 하나의 의미가 탄생할 것이다. 내게서 높고 밝은 삶이 불가사의하게 탄생하는 것처럼. 말들의 무성한 밀림은 내 느낌과 삶을 빽빽하게 뒤덮고,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내 바깥에 남아 있는 내 것으로 변형 시켜 버린다. 자연은 뒤덮는다: 자연은 나를 완전히 옭아맨다. 그것은 섹스처럼 살아 있다. 바로 그것: 살아 있다. 나 역시 격렬하게 살아 있다—그리고 방금 사슴을 먹어 치운 호랑이처럼 주둥이를 핥는다. - P37

나는 거칠게 살아 있다. 죽음이 말한다, 자신은 떠난다고. 나를 데려간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나는 죽음과 함께 가야 하기에 헐떡거리며 몸서리친다. 나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 존재 안에 자리 잡는다—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죽음은 관능적이다. 나는 죽은 사람처럼 키 큰 풀들을 헤치며 푸르스름한 풀 빛 속을 걷는다: 나는 금으로 빚어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이며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수북이 쌓인 뼈들뿐이다. 나는 느낌들로 이루어진 지층 맨 밑바닥에 살고 있다: 나는 가까스로 살아 있다. - P38

하지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두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있다. 있다.

나는 그 핵심에 있다.

나는 아직 있다.

나는 살아 있는 부드러운 중심에 있다.

아직. - P41

나는 숨을 쉰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벌거벗은 굴은 어떻게 숨을 쉴까? 굴이 숨을 쉰다고 해도 나는 그걸 볼 수 없다. 내가 볼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나를 가장 감동케 하는 건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내가 볼 수 없는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진한 타액으로 가득한 어느 완전한 세계를 발 앞에 두게 된다. 진실은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생각해 봐야 소용없다. 나는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그런데도 나는 그것으로 산다. - P48

내가 어렸을 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 아직 답을 얻지 못한 그 질문들이 지금까지도 슬픔 속에서 메아리친다: 세상은 스스로 만들어졌을까? 그렇다면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어떤 장소에서? 그게 신의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졌다면—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지금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을까? 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 P49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조금 겁이 난다. 자유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 자체는 독단적이지 않으며 제멋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엮여 있지 않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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