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손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의 지형에 자취를 남겼기에 만약 정말로 세상이 그를 잊으려면, 어마어마한 지각변동이 일어나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기이한 지식의 망각은 집단 기억의 깊고 자발적인 퇴색으로 탄생할 피치 못할 암흑기의 귀환을 처음 알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남편과 살면서 나는 그의 명성이 무로 돌아가려면 문명이 몰락하는 수밖에 없다고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대단해서 한 인간의 성취라기보다 신이 일으킨 발작의 흔적, 별 볼 일 없는 신이 세상을 갖고 놀다가 쏟아놓고 간 창조물에 더 가까웠다. - P245
조니에 관해서는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다. 천상의 존재가 지상에 내려오는 것은 정반대 존재들의 행복한 만남도, 물질과 영혼의 기쁜 합일도 아니다. 그것은 강간이며, 폭력적인 잉태이다. 갑작스러운 침략이자 훗날 희생으로 정화되어야 할 폭력. 조니가 생물학에 손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가 그걸로 무얼 하게 될지 진지하게 걱정했었다. 수학이나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이라는 영역은 여전히 논리의 손길 바깥에서 우리가 길들일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우연과 혼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생물학적 존재들은 정신없이 복잡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이해 못할 리듬 안에 갇힌 채, 경이로운 무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그와 같은 조화로 형성되고 움직인다. 고통스럽지만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이 단순한 진실이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어떤 대상을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그는 격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 P247
인간이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리라는 남편의 낙관은 철저히 매니악과 같은 컴퓨터 능력에 기댄 것이었다. "안정적인 과정은 예측하고, 불안정한 과정은 통제해야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조니의 말을 믿었다. 그는 어떤 것에 관해서든 틀리는 법이 없었으니까. - P255
조니가 인사불성으로 취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아주 요란한 모임에서도 용하게 제정신을 유지했다. 밤낮으로 술을 마시면서도 정신을 놓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아래에서 잠든 그는, 커다란 머리 때문인지 물뇌증을 앓는 아기처럼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나의 소꿉친구가 이제 죽음을 향해 붕괴하고 있음을, 아니길 바라지만, 아마도 광기에 빠져들 운명임을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슬펐으나, 한편으로는 약간 마음이 놓였고 그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래, 야노시도 결국 인간이었다. 천재이지만, 우리처럼 취한 바보이기도 했다. - P274
"우리는 둘 다 성질이 더러워. 그래도 덜 싸워보자. 나는 내 끔찍한 성질머리의 한계 안에서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당신 이 행복했으면 해. 최대한 많이, 최대한 자주." 아빠는 클라리와 막 결혼했을 때 이런 편지를 적어 보냈다. "당신은 당신에게 모질었던 삶을 두려워하지······ 당신이 산들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뒤에 몰려오는 폭풍을 감지하기 때문이고······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 당신을 괴롭히고 아프게 했지! 그래도 부디, 제발, 조금만 나를 믿어주길······ 그게 아니라면 자애로운 중립이라도." 아빠의 잘못이라고 판명된 일들에 대한 사과와 클라리에게 구하는 용서는 편지의 단골 주제였다. 클라리가 보기에 아빠는 올바르게 행동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왜 함께 있으면 싸우는 걸까? 난 당신을 사랑하는데. 내가 그렇게 넌더리 나게 싫은 거야? 그냥 서로를 용서하자!" - P281
아빠는 거의 마지막 순간 까지도 이성과 뛰어난 능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른 모든 생각을 몰아냈다. 아빠는 생각하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려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따라서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품위를 전혀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아빠는 죽음이란 게 남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인 양, 그래서 자신은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 그렇게 죽음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어린애처럼 굴었다. 아빠의 의식은 뛰어넘을 수도, 그 너머를 바라볼 수도 없는 한계에 부딪혀 움츠러들었고, 아빠는 거칠게 반항했다. 여러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지만, 흐려지는 정신으로 고통받는 아빠만큼 힘겨워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아빠의 병세가 빠르게 나빠질 것이며 결국 목숨을 앗아가리란 것을 이미 다들 알고 있던 무렵,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 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지." 아빠는 대답했다. - P283
아빠는 자기 연구에 관해 말하는 대신, 기괴하고 충격적인 요구를 하나 했다. 유일무이하진 않더라도 금세기 최고의 수학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그랬다. 아빠는 무작위로 숫자 두 개를 고른 다음 두 숫자의 합을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갑자기 소싯적 유머 감각이 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웃어넘기려 했으나 아빠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지난번 방문, 그러니까 한 달 전쯤만 해도 아빠의 정신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기본 산술이나 겨우 할 만큼 천재성이 퇴보하고 만 것이다. 아빠의 광대하던 지적 능력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아빠를 아빠답게 했던 능력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깨달음이 천천히 아빠를 압도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표정이 아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태어나 본 것 중에 제일로 가슴 저미는 모습이었다.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던 나는 숫자 몇 개를 겨우 더듬더듬 내뱉었다. 2 더하기 9는, 10 더하기 5는, 1 더하기 1은. 그러다 끝내 울며 병실을 뛰쳐나갔다. - P286
"현존하는 무시무시한 핵전쟁의 가능성이 더 끔찍한 것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네.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우리가 설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어. 마침내 우리는 지구의 유한한 실제 크기가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했네. 기술이 무르익어 찾아온 위기지. 지금부터 다음 세기 초반까지 세계에 불어닥칠 위기는 이전 양상보다 훨씬 더 심각할 거야. 언제, 어떻게 끝날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언젠가 인류의 관심사가 달라져 지금과 같은 과학적 호기심이 멈추고 전혀 다른 것들이 인간 마음을 차지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주 약간은 위안이 돼. 결국 기술은 인간의 배설물일 뿐 대단한 ‘무언가‘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거든. 거미줄이 거미의 일부이듯 기술도 우리의 일부일 뿐이니까. 하지만 기술은 갈수록 빠르게 진보하면서 불가피한 특이점으로, 우리가 아는 인류 역사가 더는 지속되지 못할 티핑 포인트로 나아가고 있는 듯해. 이제 진보는 이해를 초월할 만큼 빠르고 복잡해질 걸세. 기술력은 언제나 양면성을 가진 성과이고, 과학은 지극히 중립적이어서 어떤 목적으로든 쓰일 수 있는 통제 수단을 제공할 뿐 모든 사안에 무관심하지. 어떤 특정한 발명품의 비뚤어진 파괴력이 위험을 초래하는 게 아니야. 위험은 원래부터 내재해 있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은 없어." - P2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