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로마에서 지녔던 원시적 가치, 애정과 우정의 지도를 그리는 미묘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건 아니다. 우리가 감명 깊은 글을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맨 먼저 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아끼는 사람에게 소설이나 시집을 선물함으로써 우리는 그 책에 대한 상대의 의견이 우리에게 반영될 것임을 알고 있다.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손에 책을 쥐여주면 우리는 그의 취향과 생각을 추적하고 밑줄 친 부분에 흥미를 느끼거나 암시를 받고 글과 함께 대화를 시작하며 책의 신비로움을 향해 우리를 더욱 열렬히 열게 된다. 우리는 책이라는 언어의 바다에서 우리를 위한 메시지가 담긴 병을 찾는다. - P381
지난 세기 1990년대 어느 날 아침, 마드리드에 아버지와 함께 있던 때가 생각난다.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는 고풍스러운 서점(혼돈과 무질서의 왕국)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서점에서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걸 ‘엿보기‘ 또는 ‘냄새 맡기‘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광산을 파는 일 같았다. 아버지는 팔을 뻗어 책을 살피고 만지다가 책들을 쏟아버리기도 했다. 램프 불빛 아래에 있을 때는 책 먼지가 후광을 발했다. 그는 책더미와 선반을 뒤적이며 행복해했다. 책을 찾는 일이 쇼핑의 즐거움이었다. 1990년대 마드리드의 그날 아침, 아버지는 흥미로운 광물을 캐냈다. 겉보기엔 『돈키호테』였다. 천으로 된 표지에 깡마른 돈키호테가 있었다. 첫 장엔 오래된 방패와 결투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두 번째 장이 나와야 할 자리에서 다른 작품이 시작됐다. 『자본론』이었다. 아버지는 전에 없이 환히 웃으셨다. 세르반테스와 마르크스로 이루어진 2인승 자전거. 그건 이상한 실수가 아니라 지하에서 유통되던 판본이었으며, 젊은 시절의 살아 있는 기억이었으며, 당대의 유령이었으며, 그가 살아낸 환경이자 속삭임이자 비밀이었다. 수많은 기억 조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세르반테스에 마르크스를 접붙인 그 책은 그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이 숨어서 몰래 하던 독서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 P386
3년 전, 《에랄도 데 아라곤》 신문사가 기념 부록의 문화면을 위한 기사를 써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 나는 서점에 관해 쓰기로 했다. 서점의 조용한 방사선에 대해, 거리에서 서점이 생성해내는 자기장에 대해서 말이다. 출발점은 서점에 대한 기억(Memoria de libreria)을 쓴 서적상 파코 푸체(Paco Puche)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렇게 쓴다. "서점이 길거리에 퍼트리며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에너지나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고객의 수, 매출, 상업적 수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시에서 서점의 영향력은 미묘하고 은밀하며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P390
나는 두 도시에서 다섯 명의 서적상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보로가 갔던 서점을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택한 이유는 사적인 것이었는데, 나는 살아오면서 각기 다른 시기에 그들로부터 읽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서점의 문턱을 넘어 무수히 많은 책 속에서 파수꾼처럼 서 있는 서적상을 만나는 게 좋았다. 그곳에선 책장을 넘겨보고 냄새를 맡고 쓰다듬을 수 있으며, 정돈된 책들, 정돈 되지 않은 책들, 성공한 책들, 버려진 고아 같은 책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선반 등반가가 되어 종이와 먼지로 뒤덮인 산맥을 바라볼 때마다 깊이 숨을 들이쉰다. 북적거리는 것 같아도 서점은 넉넉한 공간을 준다. - P391
신비로운 숲 같은 안티고나 서점의 훌리아와 페피토는 자신들이 독서라는 약을 처방하는 주치의 같다고 했다. 집요하고 쾌활한 선원이 조종하는 배의 분위기를 풍기는 신화적인 파리스 서점의 파블로는 "카운슬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관점은 동일했다. 책-약국을 운영하는 일은 독자의 취향과 경향을 이해하는 것이며 독자의 감탄과 열정과 행복 혹은 불만의 이유를 파악하는 일이자 개인의 변덕과 집착의 영역에 잠입하는 일이었다. 또 매일 셔터를 올리고 장시간 일을 해야 하며 등이 아프도록 책을 옮겨야 했다. - P392
사실, 책의 파괴에 대한 역사를 돌이켜보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세상을 보는 기이한 방식(오아시스, 특이한 낙원, 샹그릴라, 로슬로리엔의 숲 등)임을 알 수 있다. 문자는 수 세기 동안 가혹한 박해를 받아왔다. 깃발을 흔드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서점의 창문을 깨뜨리거나 불을 지르는 사람도, 금지하려는 격렬한 열정에 빠진 사람도 없는, 그저 평온한 방문객만 있는 평화로운 시대의 서점이 오히려 낯설다 - P396
아우스터리츠는 마침내 땅도 나침반도 없이 어디서나 길 잃은 쓸쓸한 행인처럼 느껴졌던 이유를 알게 된다. 그날 아침 서점에서부터 우리는 빼앗긴 정체성을 추적하며 유럽의 도시를 헤매는 주인공을 따라간다. 자크는 배우였으며 테레지엔슈 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어머니의 모습을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프라하에선 부모님의 오랜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낡은 사진을 복원한다. 그는 나치의 선전용 다큐멘터리를 천천히 살펴보고 자신의 기억에 상처로 남은 한 여인의 얼굴을 찾는다. 도서관, 박물관, 문서고, 서점을 뒤진다. 사실이 소설은 망각의 영토에 대한 서사이다. - P398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비교할 때(예컨대 책과 태블릿 또는 지하철에서 채팅하는 10대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수녀) 우리는 새로운 것이 더 미래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사물이나 관습이 우리 안에 오래 머물수록 더 많은 미래가 있다. 평균적으로 최신의 것이 더욱 빨리 소멸된다. 22세기에도 수녀와 책은 있겠지만 왓츠 앱과 태블릿은 없을 수도 있다. 미래에도 탁자와 의자는 있을 것이지만 플라즈마 스크린이나 휴대폰은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외선A로 태닝을 하지 않는 시대에도 겨울날 동지를 맞아 파티를 열 것이다. 돈과 같은 발명품은 3D 영화, 드론, 전기자동차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멈추지 않는 소비주의에서 소셜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다양한 경향이 사라질 것이다. - P400
새로운 것이 전통을 제거하고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류다. 미래는 늘 과거를 바라보며 진보한다. - P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