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H의 눈길이 생화 팔찌가 걸려 있는 내 왼쪽 팔목에 닿는다. 그건 웬 꽃이냐고 묻는 듯한 의아한 눈빛. 나는 순간 기지를 발휘해 팔찌를 H의 손목으로 옮기고는 선물이라며 능청을 띤다. H를 떠올리며 산 건 아니지만 어쨌든 꽃은 꽃이니까.
와, 오늘 이건 뭐… 완전히 룸서비스인데?
H는 살짝 감동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꽃향기를 확인한다. 그러고는 눈가에 주름이 가득해지는 특유의 눈웃음을 짓는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을 때만 튀어나오는, 아마도 본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게 분명한 표정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표정. - P102

나는 우리가 매년 방콕을 찾는 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단합대회 겸 포상휴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방콕을 여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만의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점검하며 내일을 약속하려는 게 아닐까. 그동안 우리가 서로를 위해 알게 모르게 애써온 모든 것을 치하하고, 이제껏 잘 지내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고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이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가 계속 우리일 수 있도록.
그러니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함께 방콕을 찾게 될 것인가, 라는 처음의 우문은 이렇게 살짝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함께 방콕을 찾고 싶은가. 언제까지 함께 방콕을 좋아하고 싶은가. 왜냐하면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수동이 아닌 능동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능동이어야 비로소 진심을 다해서, 전력을 다해서 좋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해진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일 수 있을 때까지 방콕을 찾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더는 방콕을 찾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가 더는 우리이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그때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지 않을까.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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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뭘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쓸 수 있는지도 모르겠는 그런 처지여서 뭐라도 쓴 사람 - P79

신호를 기다리느라 발이 묶인 사이, H가 뒤로 돌아서더니 우리가 걸어온 길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고는 앞으로 방콕에 올 때마다 이 길을 걸어보자며 웃는다. 오늘 우리가 한 번 더 걸음으로써 이 길은 조금 더 특별해졌을 테니까. 우리는 그간 당연하다는 듯이 이 길을 걸었으나 그건 결코 당연하기만 한 일은 아닐 테니까.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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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이 많은 수영장에서는 어디가 고장 난 것처럼 부자연스러워지곤 한다. 다른 인종이나 다른 국적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는 그나마 좀 나은 듯한데, 어째서인지 한국인들에게 둘러 싸여 있을 때는 곧잘 움츠러들거나 얼어버린다. 한국인이 내게는 크립토 나이트라도 되는 양 영 맥을 못춘달까.
아니, 실은 그 반대가 보다 정확한 내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신경이 곤두서고 긴장이 높아지는 느낌. 오히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고 생각이 과열되어서 오작동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 - P45

아무래도 나는 내심 이 수영장이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이곳은 남과 나를 비교하며 일희일비하는 내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곳이기를, 타인의 기준이나 기대, 평가 같은 것은 통용될 수 없는 곳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충전의 시간.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그 모든 것과 단절하는 비움의 시간. 나는 그런 것을 기대했던 것 같고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 P48

한국과는 다른 것. 한국을 벗어났음을 실감할 수 있는 것. 한국이 아니기에 비로소 가능한 내가 되어보는 것. 우리는 적어도 여기 있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새로워질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우리를 옭아매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간 살아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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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뒤따른다. 완벽한 침묵. 너무나 조용해서 손에 만져질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침묵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하지만 침묵이 말을 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침묵도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그것은 단지 목소리일 뿐이다. 그 목소리를 다른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소리는 그냥 거기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거기 있는 것은 분명하다. - P49

나는 아주 조용히 서 있다.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 속에서는 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내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 나는 들을 수 있다. 이 또한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나는 듣고 있다, 정적을,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신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소리를.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 P59

이 숲속에 있는 건 나다, 나는 이곳에 혼자 있다. 그렇다, 이 숲속에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너무 피곤하고 춥다. 그래도 주변이 조금 환해지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별이 몇 개 보인다, 별이 많이 보이진 않는다, 곧 노란 달도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이 조금이나마 환해져서 다행이다, 눈앞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모든 것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물론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P61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다. 이 역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웃는다는 건 한계가 있는 법.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모든 일에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숲은 폐쇄된 방이고, 숲속에 있지만, 그 방에는 경계가 없는 것 같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일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그렇다, 이것 또는 저것. 어머니 또는 아버지. 순백색의 존재 또는 검은색 양복의 남자. 내가 이 숲속에 머물든지 또는 이 숲에서 빠져나가든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내 차도 그 자리에 계속 처박혀 있든지, 아니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세상일은 그런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 P70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이건 이해가 아니라 단지 경험만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른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 말이다. 하지만 일어나지는 않고 단지 경험만 하는 일이 가능할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어떤 면에서는 실제고, 우리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한다. - P73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 - P79

우리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되어버렸고, 이제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회색빛이고, 그 빛은 나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은 각각의 회색빛 속에 존재하는 듯하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너무나 강렬해서 빛이라 할 수 없는 빛 속에 들어와 있다, 아니, 이것은 빛이 아니다, 일종의 공백이며 무(無)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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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모를 무거운 침묵이 지속되자, 나는 혹시 출발 전 돈을 깎은 일로 어르신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인다. 100밧이면 우리 돈으로 대략 3300원. 이곳의 생활 물가를 감안해도 적은 금액이기에 도리어 기분이 나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돈이 아닌 기분을 홍정한 셈인데, 그 돈이 왠지 모를 이 싸한 침묵을 감수해야 할 만큼 내게 꼭 필요 했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냥 깎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미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싶기도 하고. - P11

처음부터 500밧을 약속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택시에서 내릴 채비를 하며 생각한다. 어쩌면 어르신은 오늘 밤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립서비스를 한답시고 자꾸 말을 걸어왔을 것이고, 그렇게 시답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졸음이 약간은 가시지 않았을까. - P14

하지만 잠시 후 캐리어를 꺼내주겠다며 차에서 내린 어르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야 말로 오만의 소산이구나 싶어서 면구스러워진다. 나무껍질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과 무거운 것을 짊어진 듯한 구부정한 자세는 어르신의 고단함이라는 게 고작 몇 푼으로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오랜 세월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견고하고 육중한 철옹성 같은 피곤이다. 내가 함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피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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