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고원 위로 날아올라 박쥐의 몸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박쥐의 감각을 통해 내려다보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림자처럼 보일까? 전율하는 덩어리처럼 보일까? 아니면 소음의 근원처럼 느껴질까? • • 사실 박쥐들과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나 역시 세상을 다른 구역에서 거꾸로 보고 있었다. 땅거미를 좋아하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의 생활에 적합지 않다는 점도 박쥐와 비슷했다. - P201
학교에서 귀가하던 나는 그날따라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사실 내가 왜 우회로를 택했는지 잘 모르겠다.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묘하게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런 장소들이 있다. 그 ‘무언가‘ 중 하나가 아마 ‘두려움‘이 아닐까? - P203
자연 친화적인 드라이브보다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저 높고 튼튼한 유형의 SUV 자동차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의 커다란 바퀴는 흙길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오솔길을 손상시킨다. 또한 강력한 엔진은 강한 소음을 유발하고 다량의 배기가스를 배출한다. 나는 그 차주들이 분명 멍청한 인간들이며, 큰 차를 소유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자람을 보완하고 싶어한다고 확신했다. - P204
훗날 빠르게 움직이는 행성이 불현듯 보이지 않는 어떤 지점을 통과하면서 여기, 아래쪽에 사는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징후들이 이런 우주적 사건들을 암시해 주었는데도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솔길 위에 놓인 나뭇가지를 밟기도 하고, 냉동실에 맥주를 넣어 놓고는 제때 꺼내는 걸 잊어버린 누군가로 인해 맥주병에 금이 가기도 하며, 야생장미 덤불에서 붉은 열매 두 개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전부 이해한단 말인가?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자 위에 행성의 배열, 나아가 우주 전체가 깃들어 있다. 온도계, 동전, 알루미늄 숟가락, 그리고 도자기 컵, 열쇠, 휴대폰, 종이 한 장과 펜, 내 회색빛 머리카락 중 하나의 원자에는 생명의 기원이, 그리고 세상에 그 시작을 부여한 우주적 재앙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 P208
숲은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가장 넓고 깊고 따뜻한 은신처였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거기서는 나의 가장 골치 아픈 증세, 그러니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마음껏 흘러내린 눈물이 내 눈을 씻어 시력을 밝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건조한 눈을 가진 사람보다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 P214
알고 보니 평범한 그루터기 하나도 피조물들의 왕국이었다. 그 안에 복도와 방, 통로가 만들어지고, 곤충들의 귀한 알들이 보관되었다. 유충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들이 나무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에 감동받았다. 그들은 나무라는 거대한 미동(微動)의 생물체가 본질적으로 매우 연약하고, 사람들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한 채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나무에게 맡겼다. - P222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 - P223
"이 물질을 나무토막에 문지르면 암컷 딱정벌레들이 알을 낳기 위해 달려듭니다. 주변의 모든 지역에서 바로 이 통나무를 향해 모여드는 거죠.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요. 몇 방울만 뿌리면 돼요." "사람들은 왜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냄새를 안 풍긴다고 누가 그랬죠?" "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데요."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이봐요, 당신은 결국 인간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계속 믿고 있나 보군요." - P225
대체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함께 생활하며 수십 년을 함께 보내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잠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밀치기도 하고 상대의 얼굴에 숨결을 내뱉기도 하면서 어떻게 한 침대에서 자는 걸까? 물론 내가 그런 경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동안 나는 천주교 신자와 한 침대를 썼다. 하지만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 P225
하지만 일을 마친 뒤, 작약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는 그의 집 마당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으려니 온 세상에 고운 금빛 층이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했나요?" 보로스가 느닷없이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한순간에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혔다. 내 눈앞에서 지난날의 기억이 넘실거리듯 펼쳐졌다. 기억 속의 모든 것은 실제보다 훨씬 좋고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나이대 사람에게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고 진심으로 귀속되어 있던 장소의 대부분이 더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장소들, 휴가차 들렀던 시골, 첫사랑을 꽃피웠던 불편한 벤치가 있는 공원, 오래된 도시와 카페, 집 들이 이제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설사 외형이 보존되었더라도 알멩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고통스럽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마치 투옥 상태와도 같다. 내가 보고 있는 지평선이 바로 감방의 벽이다. 그 너머에는 낯설고, 내 것이 아닌, 딴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금, 여기밖에는 없다. 모든 앞날이 미지수이고, 도래하지 않은 모든 미래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신기루처럼 불투명하다. - P229
그에게도 증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건강하다는 것은 불확실한 상태이기에 좋은 징조가 아니다. 조용히 병을 앓는 편이 낫다.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을지는 알 수 있으니까. - P235
"당신은 종교적인 사람인가요?" 나는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그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무신론자예요."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 P2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