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티가 바에 팔꿈치를 기대고 앉은 여자와 수다에 빠져 있었다. 암소 꼬랑지처럼 물들인 머리를 화려하게 틀어 올린 여자였다. 티에리는 지칠 줄 모르고 맥주 펌프를 누르며 사람들에게 잔을 돌렸다. 가만히 둘러보면 웃음과 주름살과 그 밖의 모든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여전히 기운이 빠질 정도로 시끌시끌했다. 파트릭은 한 손을 머리카락 속 깊숙이 담갔다. 관자 놀이와 뒷덜미가 흠씬 젖어 있었다. 아이 하나가 테이블에 턱을 고이고 시럽이 담긴 유리잔 속에 갇혀 허우적대는 말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생은 악의 없이 흘러갔다. 뭉친 것이 있으면 악착같이 풀고 언제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파트릭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 단숨에 비웠다. 배 속에 무시무시한 평화가, 납골당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 P439
스테파니가 허리를 안자, 소년은 바로 출발했다. 오토바이가 지방 도로에 들어서자 소녀가 외쳤다. "미친놈처럼 운전하면 안 된다, 알지?" 둘은 미지근한 저녁 공기를 가르며 지방 도로의 완벽한 속도를 느끼며 달렸다. 얼마 안 가 스테프의 몸이 떨려 왔다. 허벅지와 배를 타고 속도가 밀려 올라왔다. 커브를 돌 때 스테파니는 몸을 잔뜩 숙이며 양토니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두 눈을 참고 한쪽 뺨을 앙토니의 등에 기댔다. 수줍고 희미한 빛을 지평선에 던져 버리며 시골 풍경 속으로 하루가 점점 지워져 갔다. 둘은 산업 지대와 숲, 들판을 가로질렀다. 달리는 내내 소녀는 소년에게서 나는 시큼한 냄새를 맡았다. 양토니는 술을 마셨고, 달렸고, 땀을 흘렸으며, 지금은 그녀를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 어렴풋이 불쾌한 냄새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냄새가 지표가 되어 주었다. 밤이 스테파니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 P446
앙토니는 발로 문을 닫은 다음, 머리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끼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해서 위로 쭉쭉 밀었다. 엘렌은 앙토니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근이 잎맥처럼 빽빽했고, 승모근은 삼두박근으로 솟구치기 전에 어깨와 만났다. 엄마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인 난폭함에 지나지 않았다. 앙토니의 근육에서 그녀는 언젠가 터져 나올 폭력을 그렸다. 살면서 그런 일을 너무 많이 보아 왔고, 이제 바라는 건 충돌도 후회도 없는 편안한 낙원뿐이었다. - P465
어머니가 두 손에 마카로니 상자를 든 채 뒤로 돌더니, 이번엔 헌신적이고 완벽한 어머니의 표정으로 앙토니를 바라보았다. 덜 고통받으려고 그토록 애썼으나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시간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엘렌은 남들이 일하는 방식, 세계의 상충하는 기능, 평화에 대한 원대한 꿈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 P469
앙토니는 누릴 만큼 누렸다. 넌 미성년이라서 참 좋겠다는 말을 들은 게 몇 번이었나. 말썽만 일으키고, 마리화나 거래에 연루되고, 스쿠터를 훔치고, 장난삼아 시내 담벼락에 낙서를 하며 돌아다니고, 빈둥대고, 학교를 땡땡이치던 시절. 미성년은 이처럼 모호한 미덕을 지녔고 그로 인해 보호받았으나 끝나기가 무섭게 그때껏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잔인한 세상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의 행동이 현실이 되어 얼굴을 강타했고, 두 번째 기회는 오지 않았으며, 사회는 더 이상 인내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 P477
생활이 당황스러울 만큼 단순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선 천 의자에 앉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햇살이 침묵처럼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걸 시에스타라고 불렀다. […] 한낮의 숨 막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그 무감각한 느낌을 하신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는 모로코하고 전혀 달랐다. 프랑스인들은 온몸을 던져 바캉스를 즐길 뿐이었다. 그들의 치밀하게 계획된 나태에는 어딘지 가식적인 데가 있었다. 냉방 시설을 갖춘 슈퍼에서, 해변에서, 아니면 샤워하러 가거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하신에겐 지나치게 꼼꼼하고 성공이라는 목표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겉모습의 이면에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확신이 무슨 위협처럼, 무사안일이란 모름지기 권총의 안전장치가 허락한 일시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웅크리고 있었다. - P486
귀환은 하신을 더욱 놀라게 했다. 가족과 함께 모로코에서 돌아왔을 때 하신은 여전히 두 나라 사이에 끼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코랄리와 A7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전혀 다른 우울을 느꼈다. 길게 늘어진 정체 행렬에서, 주유소에서, 톨게이트에서, 휴게소에서 하신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락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근본적으로 휴가 때만 벌어지는 대이동, 끝없는 자동차들의 물결은 거대한 통일성을 형성했다.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씁쓸함, 항구에서 보낸 파티의 향수, 플라타너스에 대한 그리움, 반바지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기분 좋은 허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은 학교나 기표소에서보다 더 확실하게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꼈다. 처음으로 하신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P487
스테프는 웬만한 야심과 타협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뒤늦게 나마 사회의 일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학교는 조차장 역할을 했다. 누군가는 학교를 일찍 떠났고, 그런 이들은 벌이가 시원치 않거나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육체 노동자가 되었다. 물론 그중에 백만장자 정비공이나 배관공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전반적으로 주어진 운명의 길이 그리 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한 반에서 80퍼센트 정도는 바칼로레아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철학, 사회학, 심리학, 환경 경영학 등을 전공했다. 첫 학기 말 시험 결과에 따라 냉혹한 여과 과정을 거치고 나면, 끝없는 구직과 지루한 전쟁처럼 이어질 공무원 시험, 교육 우선 지역의 교사나 행정구역 홍보 담당등 다양하고도 절망적인 직업들을 약속해 줄 초라한 졸업장을 기대할 여지가 생겼다. 그렇게 해서 그들도 가방끈 길고 직장을 잡기 힘든, 머리로는 잘 이해해도 실전에서 할 일이 거의 없는 신랄한 시민 계급의 대열을 살찌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실망하고 분노하고 점점 자기 야심 속에서 무뎌지다가, 마침내 와인 창고를 짓거나 아시아 종교로 개종해 마음을 달래며 새로 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 P515
"불면증의 진행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다른 모든 일의 진행을 정확히 따른다." -폴 발레리
문득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벌거벗은 이 문장, 너무나 명징한 느낌. 스테프는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많은 행운을 누리며 살아 왔는지 깨달았다. 세계사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배고픔이나 추위, 폭력으로 고통받은 적이 없다. 이상적인 집단(유복한 가정, 요령 좋은 친구, 큰 어려움 없는 학생, 꽤 괜찮은 여자)에 속했으며, 자잘한 보살핌과 늘 찾아오는 쾌락과 함께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미래란 스테파니에게 일종의 무관심한 남자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에일랑주에서 멀리 떠나온 스테파니는 버릇없이 자라 갑옷마저 너무나 얇은 초등학생 수준의 순진한 생각만 트렁크에 담아 왔을 뿐, 기본적인 준비가 안 된 사회 부적응자였다. - P519
통화를 마치고 파트릭은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고 설거지를 했다. 앙토니가 온대서 빈병들을 모아 담고 보니 쓰레기봉투 다섯 개가 꽉 차 컨테이너에 내다 버렸다. 아파트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그러고 나서 창문을 열고 침대에 걸터앉아 가슴팍에 재떨이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웠다. TV는 무음으로 계속 켜 놓았다. 바깥에서는 아름다운 여름날이 흘러갔다. 그런 여름을 수도 없이 보낸 듯했다. 그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투명한 하늘에 아주 드물게 구름이 떠가고, 실구름이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었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그는 유년의 여름들을 기억했다. 개학하기 전 형제들, 친구들과 만들고 놀던 그들만의 세상을. 아르바이트, 여자애들, 오토바이의 흔적을 굵직굵직하게 남기며 여름들은 해마다 이어졌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맞은 여름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삼 주간의 유급 휴가로 축소되었다. 그 휴가들은 거의 언제나 엉망으로 끝났으며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실업과 더 불어 파트릭은 이제 다른 여름을 알게 되었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느린 여름, 애태우는 여름. 그리고 지금, 파트릭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건 안심이자 분노였다. - P535
지금 파트릭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해가 저물면 피콘 맥주를 홀짝이며 쓸쓸 한 저녁을 보내다가 TV 앞에서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 3시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면 허리께로 차가운 막대가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다음 날 그는 간신히 일어났다. 어김없이 밝아 온 또 하루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집에 돌아가는 것 말고는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또 반복이었다. 술 한잔, 고독,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 곱씹기. 그의 의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헐렁해지고 맥주 캔만 하나씩 둘씩 늘어 갔다. 집 안 생활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료한 부분이었다. 이따금 소파에 궁둥이를 꼭 붙이고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손은 두툼하긴 해도 그럭저럭 곱게 남아 있었다. 손등에 검버섯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텅 빈 느낌, 기진맥진한 느낌이었다. 밖에 나가기도,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었다. 어쨌든 파트릭은 거의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두 손에 할 일을 주고 싶었다. 곡괭이 손잡이라도. 그의 두 손은 작업 도구를 만지고 재료를 주무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흥분과 비탄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며 살인 욕구마저 일었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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