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가고 나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새비 아주머니의 사진을 보았다. 두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남편을 기다리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을까. 두번째 삶을 선물받은 기분이었을까. 두려울 정도로 행복했을까. 꿈이라고 의심하진 않았을까. - P99

내가 새비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것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 P99

지우를 배웅하고 오는 길에 나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지우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엉망이지 않았을까 두려워서였다. 눈에 띌 정도로 야위고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 꼴로 친구에게 괜찮아, 나는 괜찮아, 라는 말만 반복하던 나의 모습이. - P106

"재미있었어. 옛날에."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지연이 너는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열 살 때 네가 우리집에 와서 며칠 있었을 때 말야. 같이 바다도 가고."
"저도 기억나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많이 웃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좋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했다고 고백한 게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할머니가 말했다. "네가 날 영영 잊은 줄 알았지."
"할머니."
"어쩔 수 없었던 거 알아. 미선이랑 나랑 사이가 그러니까. 그래도 가끔은, 너를 볼 수 없었던 시간이 원망스럽기도 했어. 그래, 미선이에게 그런 마음이 들었어."
"그럴 만해요." 내가 답했다. "엄마에게는 엄마만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 그랬을 거야." - P109

하루는 학교에서 백정의 딸이라는 놀림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할머니는 길모퉁이에서 울다가 새비 아저씨를 만났다. 당황해서 눈물을 닦는데 아저씨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아저씨는 할머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할머니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귀엽고 소중했는지, 할머니의 엄마가 얼마나 용기 있고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이야기해주었다.
예전에는 부모가 누구인지에 따라 귀한지 천한지를 갈랐다고 아저씨는 말했다. 그러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인들은 양반이고 상민이고 간에 그저 천한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 사람들은 기런 걸 좋아한단다.
아저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 P111

봄이 끝날 무렵에 마당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누런 털에 꼬리에는 검은 털이 조금 섞인 날씬한 수캐였다. 중조모는 개의 이름을 봄이라고 지었다. 봄이는 그 누구보다도 증조모를 잘 따랐다. 섬돌 위에 놓인 증조모의 신에 턱을 괴고 잠이 들었고, 증조모가 밖으로 나가면 겅중대면서 그 옆에서 뛰었다. 증조모는 귀찮다는 듯이 봄이를 옆으로 밀치면서도 결국에는 자리에 앉아서 봄이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증조모가 집을 오래 비울 때면 봄이는 동구 밖가지 가서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증조모를 향해 달려갔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의아한 표정으로 봄이의 등을 쓰다듬는 증조모의 얼굴에는 늘 작은 서글픔이 서렸다. 자기에게 달라붙는 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투정하듯 말하는 중조모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증조모에게는 평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 P112

새비 아주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던 증조모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와 영영 헤어져야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심정이 어떤 것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까요."
"그게 무슨 뜻이니."
"헤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증조할머니랑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서로를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가만히 차를 마셨다. 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끝이 슬프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구나." - P115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 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할머니는 나를 보며 웃었다. - P116

어쩌면······ 희자 아바이를 생각하면 그게 나았을지도 몰라. 차라리 순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희자 아바이가 이렇게 아플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두, 이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욕심이라고 욕해도 좋다. 희자 아바이 말고 내 위주로 생각한다고 욕해도 좋다. 그래두 난 희자 아바이가 살아 돌아오고, 그렇게 살아서 나랑 희자랑 같이 지냈던 시간이 좋았더랬어.
희자 아바이가 히로시마에서 죽었다면 내가 무얼 빌었을까 생각해보면 말이야······ 고저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십 분이라도 희자 아바이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안아보는 거, 내 기걸 원했을 것 같아.
돌아와 고작 몇 년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다고, 마음만 더 아픈 거 아니냐고 말하는 동무들도 있었지. 그런데 삼천아 봐봐라, 한 시간, 한 순간에 비한다면 이 몇 년은 참으루 긴 시간 아니갔어. 나, 희자 아바이가 참 귀해. 기래, 얼마 있으면 희자 아바이가 가겠지. 내 기걸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데두 난 이쪽이 더 좋다. 희자 아바이가 어떤 모습이어두 내 곁에 있잖아. - P120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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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60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그는 의아했고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내를 그렇게 바라봤다. 본데없이 자라서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늘 고개를 빳빳이 드는 모습에 그는 옅은 노여움을 느꼈다. 그런 일로 노여워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 P61

– 맛이 좋아요. 아즈마이.
새비 아주머니가 그런 증조모를 보고 말했다.
자기가 한 밥을 먹고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이었다. 증조모는 그 아이 같은 얼굴을 오래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 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증조모는 새비 아주머니를 잘 알지 못했던 그때부터도 새비 아주머니를 잃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 새비 아주머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더이상 그 말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에게 실망했다며 등을 돌린다면 숨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 P64

‘사람들은 원래 기래.‘ 고조모가 증조모의 마음속에서 말했다. ‘사람한테 기대하지 말라우.‘
‘어마이, 나는 사람들한테 기대하는 기 아니라요.‘ 증조모는 생각했다. ‘나는 새비한테 기대하는 기야.‘
언젠가부터 증조모는 마음속으로 고조모와 이야기를 했다.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소리 내어 고조모에게 말했다. 너무 외로워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던 때였다.
‘새비도 사람이라. 걔라고 무에 다를 기 있나? 내는 너가 상처받을 까봐 걱정된다이. 말이 승한 사람, 무조건 믿지 말라우.‘ 고조모가 말했다.
‘말 때문이 아니야, 어마이. 새비는 달라.‘ 증조모가 답했다. - P65

"읽기 많이 어려우세요?"
"또 구차한 이야기 하게 되네. 눈이 잘 안 보이잖아. 편지는 책보다 더 심해. 종이며 잉크가 바랬으니까 돋보기를 써도 잘 보이지가 않아. 영 뿌옇기만 하구······"
"제가 읽어드릴까요?"
"괜찮아, 괜찮아." 할머니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내일 출근해야지."
"제가 읽어드리는 게 불편해서 그러세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자꾸 나한테 뭘 해주면, 내가 되돌려줄 게 없어서 문제가 생겨."
"할머니는 이야기해주시잖아요."
"네가 들어주는 거지."
"아닌데요."
나는 그 순간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느꼈고, 서운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놀랐다. 몇 번이나 만났다고 이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걸까. - P72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논문이 잘 써지지 않으면 내 존재가 모두 부정되는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나를 다그치던 내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쉬듯 나를 비난하고 비웃던 내 모습이.
[…]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P85

"명희 아줌마 말 진짜야?"
"무슨 말?"
"엄마가 아줌마 어머니 수술비 보탰다면서."
"아."
엄마는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 내 물음에 건성으로 답했다.
"명희 언니라도 그렇게 했을걸. 멕시코 가기 전에 빌려준 돈도 다 갚고 그랬어, 언니가."
"아직도 잊지 못하시는 것 같았어."
엄마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더니 휴지에 코를 한 번 풀고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나는 엄마에게서 등을 돌리고 보조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엄마에게 명희 아줌마는 어떤 의미였을까. 엄마는 명희 아줌마가 멕시코로 떠난 일에 대해서 지나가듯 내게 이야기했었다. 그날의 기온을 말하듯이, 거스름돈이 얼마 나왔는지 말하듯이 아무 감정 없이 이야 기했었다. 나는 엄마를 알지 못했다. 명희 아줌마보다 더, 할머니보다 더, 그리고 어쩌면······ 아빠보다 더. - P88

"그런데 어른들이 할머니한테 나쁘게 했어요? 백정 딸이라고?"
"사람마다 다 달랐는데, 자기 아이들이랑 어울리지 못하게 하던 사람들도 있었지."
"증조할머니랑 중조할아버지는 가만히 있었어요?"
"난 그런 걸 말하는 애가 아니었어."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 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 것 같다. - P94

"우리 아버지가 자기 엄마 아버지를 빼고서 사랑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건 새비 아저씨였을 거야."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날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할머니는 입을 벌리고서 한동안 나를 골똘히 바라봤다.
"얘, 나는 오래전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래, 아마도 어쩌면······"
그렇게 말하다가 할머니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날 할머니와 나는 목성을 봤다. 목성의 흐린 줄무늬를 봤다. 할머니는 아이처럼 감탄하면서 접안렌즈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 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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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고 말고는 너가 정하라우. 군인들이 널 데려가면 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러는 기야. 네 말이 맞다. 내 너를 몰라. 너도 내를 모른다. 기래두 알 수 있는 기가 있잖아. 너가 이렇게 가버리면 내는 불행해질 기야. 되돌릴 수도 없이 고통스러워질 기야. 내를 믿지 않는 것이 옳다. 내는 너가 지금처럼 사람들을 의심하며 살았시면 좋갔어. 내를 온전히 믿구 따라오기를 바라는 기는 아니다. 내랑 개성으로 간다면, 너이 어마이를 돌봐줄 동무를 너이 집에 보낼 기야. 내일 이 시간, 여기로 그 동무와 함께 오갔어. 어마이에게 인사드릴 시간이 필요 하니. - P43

증조부가 당숙의 친구가 하는 방앗간에 일을 구하고 방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증조모는 고조모의 부음을 열흘이나 뒤에 들었다.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더라도 군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당연한 상황을 알면서도 그녀는 당연해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데리고 가라. 그녀의 치마를 꼭 붙들고 있던 엄마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어내던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증조모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 P46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지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 P47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 왔을 뿐이라고.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47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같은 의문의 싹을 다 뽑아버리라는 말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왜 때리는 거지? 왜 내 남편은 치료도 받아보기 전에 그렇게 빨리 떠난 거지? 어떻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 P54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다.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다.
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 P55

나를 백정의 딸이라고 경멸하는 눈빛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화가 난다. 나는 외롭다. 나는 상황이 변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여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경멸받고 싶진 않다.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그녀에게는 희망이라는 싹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뽑아내도 잡초처럼 퍼져나가서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희망을 지배할 수 없었다. 희망이 끌고 가면 그곳이 가시덤불이라도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말대로 그건 안전한 삶이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따라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의 경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얼마나 질기고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을까. - P56

증조부가 데려간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심 깊은 바오로가 세례도 받지 않은 여자에게 미쳐서 부모와 고향을 등졌다는 이야기가 개성의 성당에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증조모는 순진한 남자애를 꼬드긴 죄인이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때 그 사실을 알았다. - P57

– 새 밥을 해왔십니다. 반찬이랑 드시라요.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다. 그녀도 같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밥을 먹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체념이라는 걸 배웠다. 발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걸 남편에게 말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피가 배어든 버선발을 뻔히 보고서도 아프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어쩌다 밥을 쏟았는지, 복구네 아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랬는지 물어주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별다른 말과 행동이 없었던 사람이니까. 남편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내가 군인 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걸까. 그것이 그녀 평생의 의문이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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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가 열아홉 살이었고 혼담이 오고갈 때였다. 증조부는 고조부에게 혼인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 상대가 백정 집 자식이라는 걸 알고 고조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기만 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증조부는 교회당 지붕 아래에서 인간의 귀함과 천함은 타고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하는 행동에 달려 있다고 배워왔던 것이다. 백정 집 여자애가 개나 말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시절에.
어떻게 백정의 자식과 혼인을 할 수 있느냐는 고조부의 말에 증조부는 백정도 천주의 자식이며 인간은 귀천이 없다는 것을 교회에서 배워 알았다고 되받아쳤다. - P33

– 같이 가자.
고조모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 나도 데리고 가라.
병자에게 무슨 힘이 있었는지, 중조모는 치맛자락에서 고조모의 손을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겨우 손을 떼어내자 고조모는 한 동안 침묵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네 딸로 다시 태어나서 에미일 때 못다 해준 걸 마저 해줄 테니. 그때 만나자. 그 때 다시 만나자.
증조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잠시라도 뒤돌아보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십칠 년 동안 살던 집, 누린내가 가시지 않던 집, 똥지게꾼도 상대해주지 않아 스스로 오물을 퍼내야 했던 집. 해질녘 구석에 핀 꽃이 예뻐 바라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야 했던,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 없던 집. 그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길이 천릿길 같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 납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 P34

할머니는 증조부가 중조모에게 왜 미쳤었는지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증조모의 눈 속에는 아이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백정 딸 주제에 뭐가 당당하고 즐거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에는 맞기도 했다. 고개 숙이고 걸어. 감히 양민과 눈을 마주치려 해?
그러나 증조모는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숙이려다가도 저절로 머리를 들게 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리 지어 날아가는 하늘의 새들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았다. 만사를 궁금해했다. 세상이 궁금하고 사람이 궁금했다. - P34

증조부는 처음 열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모습에 어지러울 지경이었고 가슴이 뛰었다. 멀리서 울려오는 경적과 바퀴가 철로의 이음매에 닿아 덜컹거리는 소리를 그는 사랑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는 동네에서부터 두 시간을 걸어 역사까지 갔고 철로를 따라 걸었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면 가만히 서서 열차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피했다. 열차는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 같은 핑음을 내며 지나갔고, 그 진동이 땅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졌다. - P36

이 철길은 몇 리나 이어지는 기라요? 그때, 이상하게도 그는 그 순간을 이전에도 경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곳에서 그렇게, 얼굴이 검붉게 탄 여자애와 서 있었는데, 이어서 기적 소리가 들리고 까치 한 마리가 서쪽으로 날아갔던 것 같은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정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마른 까치가 하늘을 날았다. 철길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 순간이 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직감이었다. - P36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자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백정 여자아이가 양민 남자에게 태연하게 말을 걸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볼 수 있는지, 어떻게 양민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째서 그에게 그 순간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어째서 붉은 볼의 여자애가 그를 바라보던 그때 기적이 울리고 까치가 날았는지, 왜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던 건지. 그애는 백정의 자식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어쩐지 괴로워졌다.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에 그애의 존재를 구겨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로 자신이 그애에게서 받았던 모든 느낌을 부정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는 한없이 쓸쓸해졌다. - P37

그녀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바람을 가르며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모습에 그는 눈길을 빼앗겼다. 억울하고 창피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그저 슬프기만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위협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저애는.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에 빠졌다. - P39

그와 헤어지고 집에 가니 일본 군인 한 사람과 동네 아저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동네 아저씨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장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가면 돈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호강하며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했다. 그제야 그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었다. 양민들의 껍데기까지 벗겨 먹는 일제가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자신에게 그런 좋은 기회를 줄 리 없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어마이가 아프시니, 두고 갈 수 없십니다.
그러자 아저씨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없으며, 나흘 뒤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그날 그녀는 잠들 수가 없었다. 역사 앞에서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걷고 싶으면 걷고,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고 싶었다. 백정의 표지 따위는 집어던 져버리고 세상을 보고 싶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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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티가 바에 팔꿈치를 기대고 앉은 여자와 수다에 빠져 있었다. 암소 꼬랑지처럼 물들인 머리를 화려하게 틀어 올린 여자였다. 티에리는 지칠 줄 모르고 맥주 펌프를 누르며 사람들에게 잔을 돌렸다. 가만히 둘러보면 웃음과 주름살과 그 밖의 모든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여전히 기운이 빠질 정도로 시끌시끌했다. 파트릭은 한 손을 머리카락 속 깊숙이 담갔다. 관자 놀이와 뒷덜미가 흠씬 젖어 있었다. 아이 하나가 테이블에 턱을 고이고 시럽이 담긴 유리잔 속에 갇혀 허우적대는 말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생은 악의 없이 흘러갔다. 뭉친 것이 있으면 악착같이 풀고 언제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 파트릭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 단숨에 비웠다. 배 속에 무시무시한 평화가, 납골당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 P439

스테파니가 허리를 안자, 소년은 바로 출발했다. 오토바이가 지방 도로에 들어서자 소녀가 외쳤다.
"미친놈처럼 운전하면 안 된다, 알지?"
둘은 미지근한 저녁 공기를 가르며 지방 도로의 완벽한 속도를 느끼며 달렸다. 얼마 안 가 스테프의 몸이 떨려 왔다. 허벅지와 배를 타고 속도가 밀려 올라왔다. 커브를 돌 때 스테파니는 몸을 잔뜩 숙이며 양토니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두 눈을 참고 한쪽 뺨을 앙토니의 등에 기댔다. 수줍고 희미한 빛을 지평선에 던져 버리며 시골 풍경 속으로 하루가 점점 지워져 갔다. 둘은 산업 지대와 숲, 들판을 가로질렀다. 달리는 내내 소녀는 소년에게서 나는 시큼한 냄새를 맡았다. 양토니는 술을 마셨고, 달렸고, 땀을 흘렸으며, 지금은 그녀를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 어렴풋이 불쾌한 냄새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냄새가 지표가 되어 주었다. 밤이 스테파니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 P446

앙토니는 발로 문을 닫은 다음, 머리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끼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해서 위로 쭉쭉 밀었다. 엘렌은 앙토니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근이 잎맥처럼 빽빽했고, 승모근은 삼두박근으로 솟구치기 전에 어깨와 만났다. 엄마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인 난폭함에 지나지 않았다. 앙토니의 근육에서 그녀는 언젠가 터져 나올 폭력을 그렸다. 살면서 그런 일을 너무 많이 보아 왔고, 이제 바라는 건 충돌도 후회도 없는 편안한 낙원뿐이었다. - P465

어머니가 두 손에 마카로니 상자를 든 채 뒤로 돌더니, 이번엔 헌신적이고 완벽한 어머니의 표정으로 앙토니를 바라보았다. 덜 고통받으려고 그토록 애썼으나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시간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엘렌은 남들이 일하는 방식, 세계의 상충하는 기능, 평화에 대한 원대한 꿈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 P469

앙토니는 누릴 만큼 누렸다. 넌 미성년이라서 참 좋겠다는 말을 들은 게 몇 번이었나. 말썽만 일으키고, 마리화나 거래에 연루되고, 스쿠터를 훔치고, 장난삼아 시내 담벼락에 낙서를 하며 돌아다니고, 빈둥대고, 학교를 땡땡이치던 시절. 미성년은 이처럼 모호한 미덕을 지녔고 그로 인해 보호받았으나 끝나기가 무섭게 그때껏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잔인한 세상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의 행동이 현실이 되어 얼굴을 강타했고, 두 번째 기회는 오지 않았으며, 사회는 더 이상 인내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 P477

생활이 당황스러울 만큼 단순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선 천 의자에 앉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햇살이 침묵처럼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걸 시에스타라고 불렀다. […]
한낮의 숨 막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그 무감각한 느낌을 하신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는 모로코하고 전혀 달랐다. 프랑스인들은 온몸을 던져 바캉스를 즐길 뿐이었다. 그들의 치밀하게 계획된 나태에는 어딘지 가식적인 데가 있었다. 냉방 시설을 갖춘 슈퍼에서, 해변에서, 아니면 샤워하러 가거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하신에겐 지나치게 꼼꼼하고 성공이라는 목표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겉모습의 이면에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확신이 무슨 위협처럼, 무사안일이란 모름지기 권총의 안전장치가 허락한 일시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웅크리고 있었다. - P486

귀환은 하신을 더욱 놀라게 했다. 가족과 함께 모로코에서 돌아왔을 때 하신은 여전히 두 나라 사이에 끼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코랄리와 A7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전혀 다른 우울을 느꼈다. 길게 늘어진 정체 행렬에서, 주유소에서, 톨게이트에서, 휴게소에서 하신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허락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근본적으로 휴가 때만 벌어지는 대이동, 끝없는 자동차들의 물결은 거대한 통일성을 형성했다.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씁쓸함, 항구에서 보낸 파티의 향수, 플라타너스에 대한 그리움, 반바지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기분 좋은 허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은 학교나 기표소에서보다 더 확실하게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꼈다. 처음으로 하신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P487

스테프는 웬만한 야심과 타협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뒤늦게 나마 사회의 일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학교는 조차장 역할을 했다. 누군가는 학교를 일찍 떠났고, 그런 이들은 벌이가 시원치 않거나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육체 노동자가 되었다. 물론 그중에 백만장자 정비공이나 배관공이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전반적으로 주어진 운명의 길이 그리 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한 반에서 80퍼센트 정도는 바칼로레아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철학, 사회학, 심리학, 환경 경영학 등을 전공했다. 첫 학기 말 시험 결과에 따라 냉혹한 여과 과정을 거치고 나면, 끝없는 구직과 지루한 전쟁처럼 이어질 공무원 시험, 교육 우선 지역의 교사나 행정구역 홍보 담당등 다양하고도 절망적인 직업들을 약속해 줄 초라한 졸업장을 기대할 여지가 생겼다. 그렇게 해서 그들도 가방끈 길고 직장을 잡기 힘든, 머리로는 잘 이해해도 실전에서 할 일이 거의 없는 신랄한 시민 계급의 대열을 살찌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실망하고 분노하고 점점 자기 야심 속에서 무뎌지다가, 마침내 와인 창고를 짓거나 아시아 종교로 개종해 마음을 달래며 새로 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 P515

"불면증의 진행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다른 모든 일의 진행을 정확히 따른다."
-폴 발레리

문득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벌거벗은 이 문장, 너무나 명징한 느낌.
스테프는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많은 행운을 누리며 살아 왔는지 깨달았다. 세계사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배고픔이나 추위, 폭력으로 고통받은 적이 없다. 이상적인 집단(유복한 가정, 요령 좋은 친구, 큰 어려움 없는 학생, 꽤 괜찮은 여자)에 속했으며, 자잘한 보살핌과 늘 찾아오는 쾌락과 함께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미래란 스테파니에게 일종의 무관심한 남자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에일랑주에서 멀리 떠나온 스테파니는 버릇없이 자라 갑옷마저 너무나 얇은 초등학생 수준의 순진한 생각만 트렁크에 담아 왔을 뿐, 기본적인 준비가 안 된 사회 부적응자였다. - P519

통화를 마치고 파트릭은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고 설거지를 했다. 앙토니가 온대서 빈병들을 모아 담고 보니 쓰레기봉투 다섯 개가 꽉 차 컨테이너에 내다 버렸다. 아파트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그러고 나서 창문을 열고 침대에 걸터앉아 가슴팍에 재떨이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웠다. TV는 무음으로 계속 켜 놓았다. 바깥에서는 아름다운 여름날이 흘러갔다. 그런 여름을 수도 없이 보낸 듯했다. 그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투명한 하늘에 아주 드물게 구름이 떠가고, 실구름이 바람의 방향을 알려 주었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그는 유년의 여름들을 기억했다. 개학하기 전 형제들, 친구들과 만들고 놀던 그들만의 세상을. 아르바이트, 여자애들, 오토바이의 흔적을 굵직굵직하게 남기며 여름들은 해마다 이어졌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맞은 여름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삼 주간의 유급 휴가로 축소되었다. 그 휴가들은 거의 언제나 엉망으로 끝났으며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실업과 더 불어 파트릭은 이제 다른 여름을 알게 되었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느린 여름, 애태우는 여름. 그리고 지금, 파트릭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건 안심이자 분노였다. - P535

지금 파트릭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해가 저물면 피콘 맥주를 홀짝이며 쓸쓸 한 저녁을 보내다가 TV 앞에서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 3시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면 허리께로 차가운 막대가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다음 날 그는 간신히 일어났다. 어김없이 밝아 온 또 하루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집에 돌아가는 것 말고는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또 반복이었다. 술 한잔, 고독,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 곱씹기. 그의 의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헐렁해지고 맥주 캔만 하나씩 둘씩 늘어 갔다. 집 안 생활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료한 부분이었다. 이따금 소파에 궁둥이를 꼭 붙이고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손은 두툼하긴 해도 그럭저럭 곱게 남아 있었다. 손등에 검버섯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텅 빈 느낌, 기진맥진한 느낌이었다. 밖에 나가기도,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었다. 어쨌든 파트릭은 거의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두 손에 할 일을 주고 싶었다. 곡괭이 손잡이라도. 그의 두 손은 작업 도구를 만지고 재료를 주무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흥분과 비탄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며 살인 욕구마저 일었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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