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胃)로 가는 것들은 위로가 된다. 나는 아랫배도 부르고 윗배도 부를 때까지 무리해서 먹고 마셨다. 대식가라 불릴 재능은 없었지만 과식가라 불릴 만한 열정은 있었고, 그 기질은 술 앞에서도 그대로 발휘됐다. 술집에는 술이, 끝없이 나오는 술이 있었다. 마시는 것도 좋았지만 취하는 건 더 좋았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 때도 술을 마시면 완행버스에 오른 것처럼 느긋한 리듬으로 인생을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었다. - P12

그가 보여주는 방향을 한 잔 한 잔 따라가다 보니 나 역시 나만의 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실줄 아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도 덩달아 깊어졌다. 지금은 나 역시 확신한다.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나와 술의 가능성을 동시에 얕보는 일이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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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사람이냐 개냐가 아니라 에티켓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겠죠.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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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어린애처럼 엉엉 목놓아 울기 시작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담 넬슨이 죽은 뒤 누군들 울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마담 넬슨의 장례식 땐 그저 소리만 크게 울었을 뿐이다. 마치 내가 엄청난 고통이라도 받은 듯이 말이다. 이 세상에 버려진 고독의 고통 말이다. 세상은 우리가 없어도 얼마든지 완벽하니까 말이다. 마치 이 갑작스럽고 비이성적인 절망이 이성적인 슬픔에 붙어서 내 소중한 삶에 내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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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건 부자들한테 탕진된다니까. 그녀가 만일 자신을 초대한 남자와 같은 굉장한 부호였다면, 브라이튼 파빌리언(인도식으로 지은 궁전― 옮긴이) 같은 것을 집으로 만들고 싶어했을 것이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웃게 하고 부자가 부자가 되게 만든 이들에게 보내는 빈부 상호간의 선물 말이다.
반대로 그녀는 대공의 궁전을 비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가난은 가난한 자들에게 탕진되지. 최고로 멋진 것을 벌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은 돈 없는 부자일 뿐이야. 그런 최고로 멋진 것을 돌보는 데에는 부자와 똑같이 쓸모가 없고, 또 부자들만큼이나 현찰 다루는 능력도 없는데다, 정말 부자랑 똑같이 항상 그 돈을 환하고,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에다 탕진한다니까. - P364

창밖에는 밤이 오고 있으며, 공개 처형대 위에 스며든 무시무시한 핏자국 무늬처럼 해가 기울고 있는 곳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하고 황량한 공간이 스쳐지나간다. 이 대륙의 절반에는 곰과 별똥별과 하늘을 모두 담아 꽝꽝 얼어붙은 얼음을 핥아 목을 축이는 늑대만 살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은 온통 먼지 덮개를 쓴 듯 하얗다. 그 먼지 덮개는 마치 가게에서 들여오자마자 멀리 치워놓아 절대로 사용하거나 만지지도 않을 것 같다. 무섭다! 그리고 이 원형 파노라마 같은 끝없는 풍경 속에 이 부자연스러운 장관은 레이스 커튼이 달린 말끔한 창틀 속에서 시속 30킬로미터로 펼쳐지고 있었다. - P385

우린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한번도 벗어난 적 없는 쭉 뻗은 선로에 굼뜬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즐기는 이 모든 따스한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오성급 호텔의 안락함 속에서 알 수 없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외줄타기의 꿈을 꾸는 줄타기 곡예사 같다. 지독한 겨울의 한가운데와 이 적대적인 지역을 통과해가는.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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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가 만들어내는 기쁨은 자신이 견뎌야 하는 모욕과 비례해 커지게 되어 있어요." 부포가 보뜨까로 술잔을 다시 채우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광대는 예수의 이미지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럴 수 없기도 하네요." 냄새나는 주방 한구석에서 부드럽게 빛나던 성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고, 그 구석에서 밤이 바퀴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왔다. "멸시받고 거절당한 속죄양들의 굽은 어깨에는 군중의 격분이 쌓여 있고, 소재가 쌓여 있지만, 그 자신이 웃음의 주제인 거죠. 우리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우린 그런 주제가 되도록 선택받은 거요." - P235

우리를 고용한 사람들은 우릴 영원히 즐겁게 노는 존재라고 생각하죠. 우리의 일은 그들의 기쁨이 되어주니까, 그들은 우리의 일이 우리에게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을 놀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생각과, 우리의 놀이를 일로 여기는 우리의 생각에는 언제나 깊은 간극이 있죠. - P236

우리는 속세의 모욕이라는 끝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저 아래에 계속 머물러야 할 운명이니까.
‘인간의 아들임을, 우리 광대들도 인간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 P237

"우리에게 한가지 특권은 있지. 내쫓기고 무시당하는 우리의 신분을 뭔가 근사하고 귀중하게 만들어줄 아주 중요한 특권말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창조해낼 수 있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든다니까." - P240

나처럼, 우리처럼, 또 젊은 친구, 자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만드는 일은 극소수에게만 허용되지. 어떤 크레용으로 칠할까를 놓고 즐겁게 망설이다가 바로 그 선택의 순간에 말이야. 내가 어떤 눈을 가질지, 어떤 입을 가질지는.…….완전히 자유라고. 그러나 일단 그 선택이 이루어지면 난 그에 따라 영원히 ‘부포‘라는 존재가 되는 형벌을 받는 거야. 영원한 부포, 부포 대왕 만세! 어디선가 어떤 아이가 나를 놀랍고 신기하고 괴물 같은 존재, 그리 창조되지 않았다 해도, 애들에게 더러운 세상의 더러운 삶의 방식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필요한 무언가로 기억하는 한 영원하겠지! - P241

"그렇지만," 부포가 말을 이었다. "나는 과연 내가 창조해낸 부포인가? 아니면 내가 내 얼굴을 부포의 얼굴로 보이게 만들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 아닌 다른 자아를 창조해낸 걸까? 그리고 이 부포의 얼굴이 없다면 나는 누구지? 자,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내 분장을 다 지워낸 그 아래는 그저 부포가 아닌 거야 텅 빈 부재. 텅 빈 공허라고." - P241

"때로는." 그록이 말했다. 이 얼굴이 어디선가 육체에서 분리된 채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 얼굴을 취할 광대를 기다리면서, 얼굴에 생명을 줄 광대를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알 길 없는 분장실 거울 안에서, 마치 더러운 연못에 있는 물고기처럼 거울의 심연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된 얼굴 말이에요. 이 얼굴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찾아 자신이 반사된 모습을 초조하게 살피는 사람을 발견하면, 물고기는 말없는 깊은 심연에서 솟구쳐 올라올 거예요. 식인물고기가 당신의 존재를 통째 삼키고 대신 다른 것을 주고자 기다리고 있는 거죠......"
"하지만 오랜 동료인데다 백전노장인 우리라면." 그릭이 말했다. "분장하는 데 뭐 하러 거울이 필요하겠어요? 아니 필요없어요. 나한테 필요한 거라곤 내 오랜 옛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뿐이죠. 우리가 우리 얼굴을 함께 만들 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서로의 샴쌍둥이를 간과 폐장을 나누어쓸 만큼 강력한 유대로 묶인 가장 가깝고도 친근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릭이 없으면 그록은 불완전한 음절, 프로그램에 적힌 오타 아니면 광고판 위의 간판장이가 하는 딸꾹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지요.
내가 없다면 그록도 마찬가지지요. 오, 젊은 친구, 5월 초하루 양반, 그릭과 그록이 만나서 두 개의 무익함을 공유하기전까지, 하나의 얼굴 즉 우리의 얼굴을 위해 각각의 텅 빈 얼굴을 내버리기 전까지 우리의 무능한 존재를 물어버리기 전까지, 무능함의 변증법에 따라 그것이 각부의 총합 이상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과거 우리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어찌 말할수 있겠습니까. 무능함의 변증법이란 바로 이거죠. 무 더하기 무는 무한이다. 단・・・・・・더하기의 속성만 알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변증법의 방정식을 도출한 까닭에 속을 볼 수 없는 분장 아래서도 만족감으로 빛났다. 그러나 부포는 아무것도 도출해내지 못했다.
"허튼소리." 그는 걸쭉한 트림을 쏟아내며 말했다. "미안하오. 그러나 녀석들, 내 오랜 친구들, 무에서 나올 것은 무라오. 그것이 무의 영광이지."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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