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신중해져서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 믿기 위해 계속 의심하는 삶이라니. 그냥 믿음 없이 사는 게 낫겠다, 하고 반은 농담으로 버무린 그 말이 이후 삶의 방식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한참 살았는데 요즘 자꾸 간절히 믿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믿음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들이 삶을 추동하는 모양이다. 그렇구나. 믿음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믿고 싶은 것 없이 사는 건 힘든 거였어. - P175

웃음으로 가릴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제일 어쩔 줄 모르겠다 싶은 곳이 병원 응급실과 장례식장이다. 눈물로 가릴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러니까 웃자. 병원에 다녀왔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카페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다. 라테를 가져다주는 서버에게 고맙습니다, 인사할 때는 마스크 안에서도 활짝 웃는 입이었다. - P182

욕을 먹고 사과하고 용서받으며 배워야 하는 것도 있다. 서로가 짐작하는 관계의 불 완전성 여부는 공격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 P183

외로움은 일반적인 생의 조건이고 결혼 유무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다. 양갈래 혹은 그 이상의 갈림길 앞에서 혼자의 외로움이 여럿의 괴로움보다 견디기 쉬워서 한 선택들이 지금 나를 여기에 데려다놓은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게 외로움이 아닌 건 아니다. 늙어도 외롭지 않다거나 살수록 인생이 더 재미있고 즐겁다는 말의 진짜 의미와 효용에 닿기도 전에 인간은 죽는다. 존재세(존재해서 내는 세금)적인 관점에서 보면 혼자도 외롭고 늙어도 외롭고 살수록 외롭다. 게다가 외로움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악의 조건은 아니다. H와 L과 내 머리가 같이 움직인다. 끄덕끄덕. ‘혼자라는 상황에 대한 천편일률적 오해가 쌓아놓은 벽들이 더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수많은 너를 찾는다. 잡는다. 곁에서 꼬물거린다. 외롭지 않으려고가 아니라 계속 외로워야 해서. 외롭게 돌을 던져야 해서.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일 끝에 결국 외로움이 답이었다. - P190

무언가를 두려워 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을 발생시키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비하는 즉각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반드시 취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망각이나 외면이 효과가 좋았다. 어떻게 저렇게 얼렁뚱땅 말도 안 되게 살 수 있지, 에서 ‘저렇게‘에 해당되는 삶이었다. 이유를 게 없었다. 이유가 없다는 건 여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불편함은 참는 거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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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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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건조하고 강렬하고 황량하고 찬란하고 비극적인 문학 작품. 전체적으로 암울한 느낌이면서 어쩜 이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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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있소, 헤라르도 씨
페드로 파라모가 돈을 건네며 말했다. - 돈이란 다시 되살아나는 게 아니니, 잘 간수하시오.
- 하긴 죽은 사람도 다시 되살아나지 않더군요.
그는 여전히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못하고 덧붙였다. -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 P159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날은 거꾸로 어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지에는 마치 지축을 붙들어 고정시킨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흡사 어둠을 들춰내는 오래된 대지의 꿈틀거림 같은 소리였다. - P165

신부는 그 자리에서 당장 물러나고 싶었다. 성유를 뿌리고 ‘자, 이제 모든 게 끝났습니다.‘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한 여인의 회한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성호를 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회의가 일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후회나 고해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 P173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깜빡 잠이 들었다가도 헛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런 게 내게 남은 유일한 소일거리란 말인가." 이어 그는 목소리를 높여 중얼거렸다. "머지않았어, 머지않았다고." - P178

순간 그는 혼자서 쓸쓸하게 누워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마당의 침상 위에 눕혀놓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쿠카, 그녀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암말처럼 생생히 살아 숨쉬던 아내였다. 잠자리에서 코를 비비고 입술로 깨물던 여자였다. 태어나자마자 죽긴 했지만 그의 아들을 낳아준 여자였다. 시력이 좋지 않고 몸에 냉기가 흐르는 체질에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었기에, 아니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름조차 모르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왕진을 다녀가는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불하기 위해 나귀까지 팔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쿠카, 그녀는 찬 이슬을 맞으며 차디찬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동이 트는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달려오는 햇살도, 상큼한 아침 바람도, 아무것도 보고 느끼지 못한 채. - P184

그는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던 날, 나는 당신을 쳐다보느라 눈이 멀 정도였어. 당신의 얼굴에 달빛이 스며드는데, 넋을 잃을 수밖에. 달빛이 보드랍게 스쳐 간 얼굴, 별빛이 만든 무지개 빛깔로 촉촉한 입술, 밤의 물결에 투명하게 드러나던 당신의 육신. 수사나, 수사나 산 후안······."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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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느낀다.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곳을······.
나는 레몬이 익어가던 계절을 떠올리고 있다. 2월의 바람에 꺾인 저 산의 고사리 꽃대가 마르기 전, 오래된 정원을 그윽하게 채우던 레몬 향기를.
2월의 아침에 산에서 내려오던 바람을, 나는 기억한다. 구름이 산골짜기 밑으로 데려가 줄 때까지 푸른 하늘에 몰려 있는 동안, 아침 햇살 사이로 불어오던 바람을, 대지 위로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렌지 나무를 심술궂게 흔들어대던 그 바람을.
그사이 참새들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쪼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나비들을 쫓아 나뭇가지 사이를 넘나들던 참새들을.
2월의 아침은 푸른 하늘과 바람과 참새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열리고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 P117

아무도 오지 않았어. 차라리 그게 나았는지도 몰라. 죽음이란 사물이 하나인 것처럼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니까. 슬픔이란 어느 누구도 함께 찾아 나서는 게 아니니까. - P119

빗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 나는 네게 말했어.
- 나가봐.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에서 지워버릴 거야. 그러니 돌아가라고 해. 장례 미사 치를 돈 때문에 왔다고? 어머니는 일전 한 푼 남기지 않았다고 전해.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구천을 떠돌 거라고? 후스티나, 우리에게 그런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누구라는 거지? 내가 미쳤다고? 그래, 나는 미쳤어. - P119

바람이 불고 있었다. 며칠을 두고 내린 비가 그쳤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들판에는 여린 옥수수 이파리들이 바람을 피해 바싹 몸을 숙인 채 엎드려 있었다. 밤이 되자 덩굴나무와 지붕을 뜯어낼 기세로 달려들던 바람이 격노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하늘에 드리워진 먹장구름을 밀어 내고 있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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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주석에는 할아버지가 번역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 P220

내게 할아버지는 다정다감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었는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회상했다. 수도원을 나오면서 신앙을 버린 탓이었는지 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격이었다고. 그러다가 내 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성격이 바뀌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손자와 손녀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가 달라진 것이라고 추측 했다. 내가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직했을 때,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 P222

성리학적 이념으로 숨막히던 그 시절에 알렉산더대왕과 다리우스 3세가 등장하는, 서쪽 끝에 매달린 나라 이야기를 읽으니 따분한 한양 생활에 지친 젊은이들이 얼마나 신이 났게. ‘여아가 항행하여 무화하면 기식우지진부재리오‘라면 리마두의 그 책에 나오는 문장으로, ‘만약 내게 항상 행복만 있고 불행이 없다면 어찌 벗의 참되고 거짓됨을 알 수 있으리오‘라는 뜻인데, 그 몇 년 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이승훈이며 이벽이며 정약용 형제들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바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지. 추국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한때의 벗이었던 그들이 서로를 부인하고 고발하는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어. 그때 다산은 삼십오 년 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날 무렵의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못했겠지. 하지만 유배에서 돌아와 죽음을 앞둘 때의 다산은 분명 삼십오 년 전의 자신을 생각했을 거야.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 P223

알렉산더대왕이 지위를 얻기 이전에는 나라의 창고가 없었다. 획득한 재물을 모두 사람들에게 후히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알렉산더대왕에게) 필적할 만한 나라의 왕은 부유하고 융성했으나, 창고를 채우는 데에만 힘썼다. (그가) 알렉산더대왕을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의 창고는 어디에 있는가?"
알렉산더대왕이 말했다.
"벗의 마음속에 있다." - P225

"바로 그거야.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 P231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의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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