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만들어진 이유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104
주혜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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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움직임movement이라면, 장소는 정지pause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나면 그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 머물지않고 스쳐 지나가면 장소가 되지 않는다. 스쳐지나간 공간은그저 점과 점의 연결, 거리distance일 뿐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멈췄다는 면에서 이미 장소는 시간을 움켜쥔다.
멈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이 그 공간의 목적이나 특징, 의미나가치를 만들어 낸다. 흔히 ‘장소‘를 ‘의미 혹은 가치가 담긴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말 역시 시간이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라 하겠다.

공간에서의 경험은 감정을 만들고 그것은 공간의 특성과 개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곳을 떠나더라도머릿속에서 꾸준히 재현되는 기억이 된다. 기억에 남은 ‘장소가 된 공간‘은 의미가 있다. ‘여긴 내게 의미 있는 곳이야‘라고말할 때, ‘의미‘는 기억과 감정의 복합체다. 공간이 지닌 물질과 물질의 특성, 그 안의 사람들, 분위기까지, 이 모두를 한꺼번에 느끼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에 기반해 비로소 장소는 인식된다. 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장소가 지닌 특성, 즉장소성이 만들어진다.

결국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은 나와 공간사이에 만들어진 관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지나는 골목이나 이미 알고 있던 곳이라 해도 어떤 사건을 통해나와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곳은 특별해지고, 새로워진다. 익숙하고 흔한 곳에서 낯설고 새로운 면을 찾아낼 때, 그 낯설고새로운 면에 이름을 붙여 볼 때, 나와 그 장소는 관계를 맺게된다.

랠프는 장소의 특성이 ‘팔리는’ 시대가 이윤 창출을 위한 가짜 장소성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파리의 에펠탑이 있고, 내가 사는 도시 쇼핑몰과 백화점은 피렌체, 소호 거리와 샹젤리제 거리를건물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는다. 판에 박힌 이미지에 근거한획일적 공간 구성은 키치kitsch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일깨우려니 어쩔 수 없다. 다 아는 만큼 저속하거나밋밋하고,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이 장소가 무엇인지는 금방알게 해야 한다. 방문객들이 그 장소를 한 줄로 쉽게 기억해야하니까, ‘아, 거기, 뉴욕 센트럴 파크 같은 곳!‘ 이렇게 말이다.
그래야 쉽게 홍보할 수 있다. 방문이 이어져야 그 장소든, 그장소 안의 물건이든 팔 수 있게 된다.

똑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똑같은 방향성으로인식되는 장소는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장소에 꽤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장소에 대한 엄청난 얘기들(여행안내서, 관광 홍보물, 블로그 포스트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등)도쏟아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이 살아 있는 장소는 아닌 것같다. 렐프는 많은 장소들이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이미지로경험되고 있고, 결국 불명료한 배경으로만 있다고 지적하며,
‘장소성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을 주장한다.

‘장소성‘은 콕 집어 비난하기 어렵다. 나와 멀리 떨어져 뉴욕어디쯤 있던 레트로풍 카페는 이제 쉽게 우리 동네 골목으로재배치된다. 노출 콘크리트와 리드미컬한 음악이 흐르는 레트로풍 카페 거리는 충분히 예쁘다. ‘독특하다! 특별한 감성이 있다! 힐링된다!‘고 친구와 웃으며 얘기한다. 즐길 만한 특색을 잘 갖췄지만, 이게 이 공간만의 독특함인지, 이 공간의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진짜 특성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헷갈린다. 이런 불명확함을 만드는 데 소셜 미디어가 한몫했다. 사람들은 공간과 관계 맺기를 멈추고, 그 공간이 제공하는 최상의 순간만 소비하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시하기에 바쁘다.

소셜 미디어 속 장소 전시는 사실 관객 혹은 다음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지금 내 팔로워들이 필요한 것을 예리하게짚어 전시해야 한다. 멋진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해야 한다. ‘인증샷‘과 ‘인생샷‘ 안에는 보여 주고싶은 멋진 장소의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금방 파편화돼 흩어질 뿐이다. 내 사진과 해시태그와 짧은 블로그 글을 본 다음 방문자도 결국 같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전시할 테니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지 못하는 장소는 결국 시들해질 뿐이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LudovicoEinaudi는 지난 2016년 북극해에서 특별한 연주를 선보였다.
‘Elegy for the Arctic‘, ‘북극을 위한 비가‘란 제목의 짧은 피아노 곡이 연주됐다." 연주 직전, 빙하는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린다. 에이나우디는 손을 풀다 말고 그 소리에 깜짝놀라기도 한다. 가느다랗고 애절한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북극의 빙하는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무너진다. 다른어떤 설명이 없어도 이 3분짜리 연주 영상은 많은 감정과 이해와 설명을 들려준다.

전문적이고 어렵고, 비싼 용어들로 만들어진 역량처럼느껴지지만, 사실 우선 필요한 건 ‘가장 솔직해진 나‘다. 나의솔직한 모습과 위치를 아는 것이 지리적 능력에 꼭 필요한 시각을 갖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곳이 좋지, 혹은싫지?‘ ‘왜 저곳에 가고 싶을까?‘ ‘왜 가기 싫을까?‘ ‘왜 여기오면 어떤 단어나 노래, 사람, 냄새 혹은 기억이 떠오르지?‘
‘내가 여기서 하고 싶거나 느끼고 싶은 건 뭐지?‘ 따위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행안내서와 누군가의 블로그 감상문이 강요하는 느낌, 꼭 해야만 한다고 제안된액티비티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을 확실하게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진은 이미 있는 대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ㅣ 사진은 실재를 그대로 옮기기만, 정말 ‘잘 찍어 내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사진에 찍힌 존재 자체가 이미 익숙한 만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진은 색다르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다. 익숙한 존재지만 낯선 느낌을 주는 것, 그래서 두렵고신기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감정을 불러오는 것. 예술가들은그것을 ‘언캐니uncanny‘란 단어로 설명한다. 익숙한 것은 그 뒤에 숨겨진 낯설고 편치 않은 것들과 중첩돼 있다. 이러한 모순과 중첩이 사진을 통해 드러날 때, 사진 속 익숙한 대상은 언캐니해진다. 사진을 통해 장소는 새로워지고 특성을 갖게 된다. 익숙했던 장소에 색다른 감각이, 장소성이 생긴다.

매일 보는 건물과 골목, 공원과 산책길 그리고 사람들을 어떤 시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사진에 담아 내는가에 따라 장소는 새롭게 드러나고 만들어질 것이다. 내가 찍어 올린사진과 글 포스팅이 어떤 팔로워의 ‘푼크툼punctum ‘을 자극할 수 있다. 한 장의 사진과 100자의 글이지만, 읽는 사람에따라 다 다른 푼크툼이 생겨난다면, 100개, 1000개의 장소감이 만들어진다. 그때 하나의 장소는 두껍고 풍성한 장소성을가진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관념적 공간인 도시는 잘게 쪼개진 ‘모에Moe 요소‘로 쉽게 이해된다.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이 캐릭터에서 어떤 요소를 추출해, 자신들의 선호를 표현했던 것이 애초의 ‘모에’였다면, 이제는 그 역이 활발히 생성되어 소비된다. 이미 제시된도시의 모에 요소를 소비하면 그 도시를 다 소비했다고 말할수 있다. 부산에 간 사람은 해운대 해변 혹은 자갈치 시장 회를 소비하면 된다. 이는 부산에서 추출된 대표 특징이자 모에요소다. 대표적인 요소 한두 개만 빠르게 소비하고 즉각적으로 사진을 전시해야 미디어 의례의 충실한 참여자가 된다. 노잼의 도시인 대전을 소비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뿐이니 뜻밖의 장소를 찾지 않아도 괜찮다. 성심당이라는 모에 요소, 그것하나면 충분하다. 노잼인 걸 확인한다는 것과 예쁜 사진을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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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만들어진 이유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104
주혜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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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Relph"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이고,
장소는 곧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한 자기소개 멘트인 것 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출신지에 따른 엄연한 차이가 있다. "안녕하세요, **입니다. 저는 방배동 살아요."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부산에서 왔습니다,‘ ‘대전이 집‘이라고 얘기하는 와중에 서울 사람들은동네 이름으로 자신의 출신지를 얘기하는 섬세함을 보인다.
심지어 아파트 이름을 대는 경우도 있는데, 더 신기한 건 서울사람들은 아파트 이름만 듣고도 어느 동네인지 알아챈다는것이다. ‘대전 산다‘ 라고 하면 아무도 대전 어느 동네 사냐고묻지 않을 텐데, 왜 서울 사람은 꼭 특정 동네를 지칭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걸까.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서울은 크니까. 그렇다, 서울은 크다. 그래서 그냥 서울에서 왔다고 하거나 서울 산다고 하면 부족하다. ‘서울이 다 네 집이냐?‘란 질문을 피하려면 서울 어느 동네라고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서울은 진짜 클까?

하지만 서울은 방배동으로 성북동으로 세검정으로 잘게 쪼개져야 하고 세분화돼 소개된다. 서울은 구와 동네가 각기 개성과 특성을 가진다. 종로구엔 광화문이 있고, 한옥이 지닌 감성과 골목길의 옛 정취가 있다. 심지어 탑골공원의 할아버지들과 80년대풍 상점들은 종로가 만들어 낸 레트로풍 스타일이 됐다. TV 드라마에서 한 번쯤 들어본 "예, 성북동입니다"는 부잣집 사모님의 단골 멘트였고, 성북동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도 성북동을 저택과 외교공관, 갤러리와 연결해상상할 수 있게 했다. 대치동은 대학 입시 학원가로, 성수동은트렌디한 카페 거리로 소환된다. 이렇게 서울은 다채롭고 다양하다. 꼭 여행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소설과 영화에서, 누군가의 블로그 에세이에서, 광고의 배경으로 서울은 언제나탐험의 대상이다. 새로운 서울은 지금도 발굴 중이다.

살고 있는 동네, 도시나 지역이 식성과 억양에 배어 나오고, 그게 꼭 나를 다 설명하는 것 같다. 내가 속한곳이 허접하고 후진 것이라 취급된다면, 아니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아챈다면 난 내가 누구인지 숨기고 싶다.
내가 떠나온 곳을, 동네를, 지역을 부정deny 하고 싶다. 부정 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deny‘의 명사형 ‘디나이얼‘
과 ‘지방출신‘을 붙여, 두려움을 가지고 자기 정체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지방(출신) 사람을 ‘디나이얼 지방출신‘이라부를 수 있지 않을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공간을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
로 정의한다. 존재의 위치와 사건의 발생을 가정한다는 면에서 공간은 가능성을 지닌 빈자리 혹은 여지room 라 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움직임이다. 축구 선수가 ‘공을 패스하면서공간을 넓혀 간다‘고 말하듯이, 공간은 이동하면서, 움직임에의해 새롭게 생기고 확장된다.

공간이 움직임movement이라면, 장소는 정지pause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나면 그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 머물지않고 스쳐 지나가면 장소가 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간 공간은그저 점과 점의 연결, 거리distance일 뿐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멈췄다는 면에서 이미 장소는 시간을 움켜쥔다.
멈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이 그 공간의 목적이나 특징, 의미나가치를 만들어 낸다. 흔히 ‘장소‘를 ‘의미 혹은 가치가 담긴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말 역시 시간이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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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특공대가 보어의 동의하에 보어를 납치해 점령지 덴마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영국으로 이송된 보어는 처칠의 영접을 받은 후 미국으로 건너갔고, 양자역학을 이용해 원자를 조작하는 법을 배운 젊은 물리학자들과 함께 그의 지식을 활용하게 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폐허가 되고 20만 명이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죠.
오늘날 우리는 도시를 겨냥한 수만 개의 핵탄두를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성을 잃으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청년 물리학‘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누가 봐도 분명하지요.

양자의 기묘함은 ‘양자 중첩‘이라고 불리는 현상에서볼 수 있습니다. ‘양자 중첩‘이란, 어떤 의미에서 서로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대상이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에도 동시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전자는 더이상 하나의 경로를 따라가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바로 그런 것이죠. 전자는 여기나 저기 중 어느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둘 다에 있습니다.
전자는 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마치 한 번에 여러 위치에 있는 것 같아요.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한 대상이여러 위치의 ‘중첩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랙은 이 기묘함을 ‘중첩 원리‘라고 부르며 양자론의개념적 기초로 삼았습니다.
한 대상이 두 곳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주의! 우리가 ‘양자 중첩‘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의미는아닙니다. 우리는 한 전자가 두 곳에 있는 것을 결코 볼수 없어요. ‘양자 중첩‘은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있는 세계와, 고양이가 자고 있고 카를로가 자고 있는고양이를 보고 있는 세계로 나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각 세계에 한 명씩, 두 명의 카를로가 존재하게 되죠.그렇다면 왜 나한테는 깨어 있는 고양이만 보이는걸까요? 그 답은 내가 두 카를로 중 한 사람일 뿐이기때문이라는 겁니다. 똑같이 실재하고 똑같이 구체적인또 다른 평행세계에서는 나의 복사본이 잠자는 고양이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는 깨어 있으면서도잠들어 있을 수 있지만, 나 자신은 어느 한쪽밖에 볼 수없습니다. 내가 고양이를 본다면 나 자신도 두 사람이되기 때문이죠.

카를로의 나는 고양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시스템과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평행세계가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세계들은모두 똑같이 존재하고 똑같이 실재하며, 그 세계에는나의 복사본이 무수히 존재하여 온갖 다른 현실을 경험하고 있죠. 이것이 다세계 이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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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일기
권남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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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좋고 따스하게 읽고 있지요. 메뉴하나하나에 달려있는 이야기들로 웃음, 생각, 공감…스쳐지나가는 일상 메신저! 스벅에서 일하시는 작가님, 멋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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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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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수행하지만 서로를 위해서도수행한다네. 우리는 우리와 연결된 모두를 대신해 수행의 길을걷는 것이네."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 세상에 매몰될 때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모색하게 하는 힘은 나자신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존재들로부터도온다. 그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안도하게 된다.

그녀가 싫어할까 봐 아직 귀띔해 주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에너지는 우리가 집중하는 곳으로 흐른다. 어떤 단어에 힘을 실으면 생각의 에너지가 그곳으로 모인다는 것을 심리학 연구가 밝혀 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아픈 것이 싫어." 하고 말하면 마음은 ‘아픔‘에 집중하게 되고, 그때 에너지는 ‘아픔‘ 쪽으로 흐른다.
그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방법은 "나는 건강한 것이 좋아." 하고 말하는 일이다. 이것이 개인뿐 아니라 세상의 에너지 흐름을바꾸는 길이라고 귀가 얇은 나는 어디선가 새겨들었다.

별을 흔들지 않고는 꽃을 꺾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글귀를 나는좋아한다(자랑하는 것 같지만 내가 엮은 아메리카 인디언 연설문집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들고와서명을 요청하면서,
"지난 10년간 읽은 책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좋다."라고 말할 때의그녀가 나는 지난 10년간 본 모습 중에서 가장 좋았다! 이야기가본의아니게 내 책 홍보로 흐른 것 같지만 워낙에 ‘좋은 책‘이니한 단락 더 인용해도 그녀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주고, 슬픔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슬픔을 준다. 기쁨이나 지혜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반영이다." (카이오와족 큰구름이 한 말.)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주위로 끌어당긴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순간, 원하는그것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지 않아 다행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자가 이 글의 주제이다. 생의 마지막에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는지 떠올릴 것이다. 그것이 당신 영혼의 색깔이다. 신은 당신에게 이생에서 무엇을 좋아했는가 묻지, 무엇을싫어했는가 묻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불행했는가보다 무엇때문에 행복했는가를.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과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얼굴에서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 온전히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가지에서 미소 짓지 않는 꽃은 시든 꽃우리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추구의대상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면서 거울 그 자체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아름다움도 동시에 발견한다. 오래된 사원 벽에 적혀 있는 문장처럼, 세상의 아름다운것을 목격하는 순간 사람은 노예가 되기를 멈춘다. 삶이 힘든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마지막 날 카프카는 마침내 베를린으로 돌아온 인형(실제로는카프카가 소녀를 위해 산 마지막 선물)을 손에 들고 소녀 앞에 나타났다.소녀가 놀라며 말했다.
"내 인형과 전혀 안 닮았어요."
카프카는 소녀에게 인형이 쓴 또 다른 편지를 건넸다.
‘내 여행이 나를 변화시켰어‘
어린 소녀는 행복하게 새 인형을 껴안고 집으로 데려갔다. 카프카는 인형의 인격으로 소녀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그녀가언젠가는 결혼할 것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라고 알리면서
다음의 말로 이야기를 맺었다.
‘너도 이해할 거야. 우리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없으면 그때는마음에서 서로를 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을그로부터 몇 달 후 카프카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 해가 지나 어른이 된 소녀는 인형 속에서 카프카의 서명이 적힌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들은 반드시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돌아올 거야.‘

민족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클라리사 핑콜라 에스테스는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부분부터 손을 뻗어 나가는 것이다.
한 영혼이 슬퍼하는 다른 영혼을 돕기 위해 하는 작고 조용한 일은 큰 의미를 갖는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여리던 시절 아버지는나에게 충고를 하나 해 주었는데, 그 충고를 나는 아직도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는 언제나 이점을 명심하거라.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있지는않다는 것을‘ 하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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