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는 말한다. 그 검은곰을 생각하다 보면, 남는 질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

이 광활한 우주는 마음이 없다. 조물주는 모든 것을만물에 맡길 뿐, 사사로이 간섭하지 않는다. 이 무심한 세상에서 반성하는 마음을 가진 희귀한 존재로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묻는다. 나무의 침묵에 대고 발톱을 날카롭게가다듬은 뒤,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하러 갈 칠흑처럼 검은곰을 생각하며 묻는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세상에는 악이 버섯처럼 창궐하고, 마음에는 번민이 해일처럼 넘치고, 모든 것은 늦봄처럼 사라지는데, 어떻게 이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가.

내내 <벌새>는 한국의 건물이나 교량 안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벌새〉는 성수대교붕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지를 탐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온 일상이 일견 깔끔해 보여도 사실 폐허임을 꼼꼼히 증명한다. 상처받은자존심으로 일그러진 가장, 폭력으로 얼룩진 남매, 거짓과 관성 속에서 나날을 이어가는 부부, 교육목표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학교, 그 모든 삶의 국면에서 버티고 있는사람들의 표정마저 모두 폐허임을 상기시키는 긴 여정을거쳐, 성수대교는 비로소 무너진다. 그리하여 관객들은성수대교가 하나의 부실한 물리적 구조물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상징하는 폐허임을 납득하게 된다. <벌새>를 본다는 것은 이 사회가 폐허가 되는 과정을추적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폐허였는데, 아 폐허였구나하고 새삼 깨치는 과정에 가깝다.

부서진 성수대교는 말한다.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고, 과거에 무엇인가 돌이킬수 없이 부서져버렸다고, 현재는 상처 없이 주어진 말끔한 시간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의 잔해라고, 그러나 그 현재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폐허를 돌이킬 수는 없으나 폐허를 응시할 수는 있다고,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고, 성장이란 폐허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폐허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라고. 마치 W. G. 제발트의 소설이그러한 것처럼, 〈벌새〉는 우리를 폐허 속으로 데려가고,
그 폐허 속에서 우리는 영지 선생님이 태우는 담배 연기처럼 고양된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영화의 주인공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산다. 패터슨은 패터슨시 출신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한다. 버스 드라이버인 패터슨을영화배우 애덤 드라이버가 연기한다. 이러한 반복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 반복이 패턴을 만들고, 패턴이 패터슨의 일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패턴은 일상의 행동에 작은 전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달아놓는 일이기에, 삶은패턴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빛나게 된다. 이 반복과 패턴이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리듬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낸다. 그 규칙적으로 작동되는 세계 속에서 당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전해온다. 그 신호에 반응하는 마음이야말로 일상의 어둠에서 인간을 잠시 구원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정처 없이 무너져내릴 때, 졸렬함과 조바심이 인간을 갉아먹을때, 목표 없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자기 확신이 그만무너져내릴 때, 인간을 좀 더 버티게 해줄 것이다.

나도 패터슨처럼 일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 산책을 하고, 샤워를 한 뒤, 페이스북에 그날밤에 들을 음악을 올리고, 그날 갈무리한 책과 영상을 보다 잠든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달걀을 삶는다.
타원형의 껍질 안에 액체가 곱게 담겨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정도로 달걀을 잘 익힐 수 있다. 오래도록 이 일상을 지속할 수있기를 바란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오는 초조함도, 목표를 달성했기에 오는 허탈감도 없이, 지속할 수 있기를바란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사라질 내 삶의 시를 쓸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패터슨은, 아침 6시 조금 넘어 일어나,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출근하고, 근무하고, 퇴근하고, 동네 바에 들러 한잔한다.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씻고, 잠자리에 든다. 그 일상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흔히영화라고 하면, 대개 이러한 일상 활동 끝에 발생하는 극적인 일이나 과잉된 감정을 다루기 마련이지만, <패터슨>은 일상의 반복 그 자체를 다룬다. 그 반복되는 일상은 어떤 절정으로도 시청자를 인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상은 조용히 진행되는 예식처럼 잔잔히 아름답기에, 시청자는 몰입해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일상에의 몰입감, 그것이 이 영화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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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환기시키는 이 그래픽 서사에서저자는 나치 독일의 무거운 역사와자신의 가족사를 둘러싸고 분투한다."
"이 작품에는 ‘기억하고‘ ‘되돌아보고‘ ‘바로잡고‘ ‘바로 세우려는‘ 쉼 없는 노력,역사의 전모를 파악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다."

"잠들지 못하는 양심"
세계 속에서 독일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놀라운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전후 2세대 독일인의 내면 풍경을 처음 엿볼 수 있었다. 전후 2세대의 내면세계가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이 세대가 68혁명 이후 이루어진 교육개혁에 의해 탄생한 첫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우슈비츠 교육‘이라고 불리는 과거청산 교육을 받은 최초 세대에게 나치 과거가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전후 2세대 독일인에게 ‘독일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작품은 새로운 세대 독일인의 정체성 문제를 깊이 탐색하고 있다. 정신적 고향을 상실하고 과거의 시간을 부정해야 하는 독일의 젊은 세대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오늘을 사는 독일인에게 가장 예민한 정체성 문제를 이 작품은 추적한다. 그리고독일인으로서 부정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프게 묻고 있다. 단아한 다의성의 언어가 주는 깊고 처연한 여운이 독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머문다."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독일의경우 68혁명 이후 과거청산이 상당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우리의 경우 지난 한 세기동안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는 ‘기이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식민시대의과거와 냉전시대의 과거라는 이 ‘이중의 과거청산‘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독일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책이다.
세계 어느 나라 독자보다 한국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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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에 따르면 "과거청산"이란 "과거에 종결점을 찍고 가능하면 그것 자체를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을 진지하게 정리하고, 밝은 의식으로 과거의 미몽을깨부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과거청산에충실한 작품이다. ‘진지한 정리‘를 통해 ‘밝은 의식‘으로 ‘과거의 미몽‘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의 반복을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본다. 그는 "주체로의전환"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그러한 비행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든 메커니즘을 인식해야하고,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메커니즘을 보여주어야 하며,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을일깨움으로써 또다시 그렇게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죄는 살해당한 자에게있지 않다. 죄가 있는 것은 오직 아무런 소신 없이 증오와 공격적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낸사람들이다. 그러한 무소신은 극복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외부로 돌리지말아야 한다. 교육은 비판적인 자기성찰을 위한 교육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아도르노의 이러한 교육담론에 의해 1970년대에 이루어진 교육개혁의열매라고도 볼 수 있다. 노라 크루크가 가족사를 통해 과거와 만나는 태도는 바로 아도르노적의미의 ‘과거청산‘의 모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라 크루크가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진지하게돌아보는 과정은 그 자체가 독일의 과거청산 교육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반증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집요한 추구가 이 책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작고 사소한 것‘
에 있다. 역사를 지배자들의 ‘정의 권력‘(Definitionsmacht)에 내맡기지 않겠다는 것, 사적진실을 통해 공적 해석의 폭력에 맞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이 아름다운 책에는 있다.

정체성은 잡으려 하면 할수록 달아나는 그림자와 같다. 과거로의 여정을 통해 정체성의 근원에접근할 수록 노라 크루크의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점 더 희미해진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만존재하는 나라, 국기도 국가도 없고, 국민이라고는 단 한 사람뿐인 나라에서 온 스파이 같다."
크루크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이르게 된다.
독일인으로서 부정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작품은 아프게 묻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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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넌 그런 거 아니야.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간표를 알려주고,동기들이 나를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내비게이션은 상대가 원할 때만 켜야 합니다. 초대받지 않은 조언을 하는 건 적을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말도있거든요. 그런데 선배는, 상사는, 윗사람들은 초대한적 없는 후배에게, 부하에게, 아랫사람에게 자꾸만 찾아와서 조언합니다. 물론 아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잘되기를 바라니까요. 실수하거나 실패하지 않고 좀 더 빠른길로 안전하게 가기를 바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하지만 켜지도 않은 내비게이션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라떼 타임’이 되는 법입니다. "라떼는 말야."

"나는 모든 걸 미룬다." "죽는 날도 미뤄보자!"
"나는 다리를 늘 꼬고 있다." ⇒ "네 덕분에 정형외과가 돈을 버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다." "많은 사람의 생계를네가 책임지는구나."
"나는 잠이 많다." "네 피부가 그래서 좋구나."
"나는 너무 충동적이다." "화끈하네."
"나는 방 청소를 안 한다." "방에서 보물찾기할수 있어서 재밌겠다."
"나는 돈을 아낄 줄 모른다." ⇒ "와, 너 돈 많구나.나랑 친구 할래?"

부장님은 업무를 지시할 직원만 생각하며 말을 하면될까요. 그럼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까요. 글쎄요. 저에게 묻는다면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말을 할 때는 누가 듣는지부터 생각해야지‘라고 마음먹은 후에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잘 알아들을지 고민해보는 겁니다.

20대 80 법칙,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즐겨 입는 옷의 80퍼센트는 옷장에 걸린 옷의 20퍼센트다. 백화점하루 매상 중 80퍼센트는 그 백화점 단골인 20퍼센트손님이 올린다. 근면하게 일하는 개미는 20퍼센트에불과하고, 이들이 나머지 80퍼센트 개미들을 이끌어나간다. 이런 거요.

토끼 당신은 지금 이 달리기에서 20에 속하는 거예요. 그러니 답답하고 속이 터져도 80인 거북이를 이끌면서 속도 맞춰 함께 가는 수밖에요. 그런데 인생이 꼭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토끼나 거북이의 생도 그럴거예요. 지금 이 들판에서는 토끼 당신이 유리하지만,바닷속에서 달려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상상조차 할수 없겠지요. 벌써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지 않나요. 바닷속에서 달리기, 아니 헤엄치기를 한다면 거북이가20, 당신이 80일 거예요. 거북이가 당신을 등에 업고천천히, 하지만 안정적으로 헤엄치며 가겠지요.

세월이 흐르면 토끼 당신이든 당신보다 훨씬 더 빨리 뛰는 얼룩말이든 모두 노인이 된답니다. 노인은 누구나 80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 전까지 20으로서 열심히 살아오고 다른 이들을 이끌어온 덕분에, 이제 20이된 젊은 세대가 80이 되어버린 당신을 이끌어줄 거예요. 세상은 그런 겁니다.
그러니 토끼 당신, 거북이를 데리고 경주 같은 거 하지 말고 함께 가면 어떨까요. 불평불만 접어두고 걸어가봅시다. 쉬엄쉬엄, 그렇지만 꾸준히.

이런 걸 ‘자이가르닉(제이가르니크) 효과’라고 한답니다. 완성된 작업보다 미완성 작업을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제이가르니크가 증명해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네요. 일단 작업이 마무리되면 사람들은 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중단한 채로 두면 그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대요.

지금 마무리를 미루고 있는 건 당신이 게으르거나무책임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90퍼센트는 완성했으나 마지막 10퍼센트를 남겨두고 있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밥을 먹든 잠을 청하든 그 10퍼센트는 늘 당신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까요. 고민하고 생각하고 돌아보고 되짚어보고, 그러다 보면 하이라이트가 될 마지막 10퍼센트가 불현듯 떠오를 겁니다. (사실 저도 지금그러고 있어요.)

"신비한 전설의 돌이 있는데, 그 돌을 찾으면 네 앞에 놓고 고통과 비밀을 전부 말하렴. 돌이 들어줄 거야.
어떤 비밀이든 들어줘. 무엇을 말하든 들어주지. 그러다 어느 날 돌이 쩍, 하고 갈라지는 날, 모든 고통이 그순간 사라지고 너는 구원받을 거야. 용서받는 거란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다던 그 말처럼 여인은의식이 없는 남편을 앞에 두고 날마다 이야기를 합니다. 밖에서는 총성이 들리고 폭탄이 터집니다. 무서우면 더욱더 많은 말을 합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 언니대신 시집오게 된 이유, 남편이 밖으로 도는 동안 겪었던 시집살이, 두 딸을 키우면서 있었던 일화, 마침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독백은 고백이 되고, 고백은 구원의 돌이 되어줍니다.

이 영화는 말하기의 힘을 보여줍니다. 혼자였지만,
의식을 잃은 남편 곁에 앉아서 스스로는 혼자라고 느끼지만, 매일 꾸준히 무엇이든 말을 하면서 여인은 자신을 찾습니다. 자아를 회복하고 자존감을 느끼는 거죠. 독백의 힘, 혼자 말하기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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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인입니다 - 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대하여
노라 크루크 지음, 권진아 옮김 / 엘리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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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mat[‘haima:t] 여성명사 (복수형 없음)출처: 독일 브로크하우스백과사전
"사람이 즉각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되는... 상상 속 또는 실제의 풍경이나 지역 개념을 정의하는 용어. 이 경험은... 세대들 가로지르며 가족과 기타 제도,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전해진다. 일상적 용례에서, 하이마트는 또한 사람이 태어나 정체성과 성격, 정신구조, 세계관 등을 주로 형성하게 되는 초기 사회화를 경험하는 장소를 지칭한다(또한 풍경으로 인식된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이 용어를... 침잠의 공간, 특히 지나치게 단순화한 본보기를 심리적 지향점으로 삼아 그와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침잠의공간과 연관시켜 사용했다."

그림 형제의『독일어 사전』에는숲, 그러니까 Wald라는 단어가 들어간 명사와 형용사들이 천 개도 넘게 실려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은 ‘숲의 고독Waldeinsamkeit‘ ‘숲의 어둑함 Waldfinsternis‘
"살랑거리는 숲에 둘러싸여 waldumrauscht‘이다. 1852년 독일계 유대인 작가 베르톨트 아우어바흐는 "살롱에서는 프랑스어를, 숲에서는 독일어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1936년 올림픽 기간 동안, 금메달리스트들에게는 견실함의 상징인 독일 오크나무 묘목이 수여됐다. ‘히틀러 오크‘라고 불린 이 묘목들 중 일부는 아직까지 미국에 살아 있다.
1938년 제국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숲"에 유대인 출입금지령을 내리는 것에대해 고려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전후배상금의 일부로서, 독일 숲들에서 대규모 벌채를 단행했다. 1983년 독일어 사전에는 ‘숲의 소멸 Waldsterben‘이라는 단어가 최초로등재되었다. 실존주의적 고뇌의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아무리 열심히 봐도,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불편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잃어버린 나의 고향, 하이마트를 찾을 유일한 방법은 뒤를 돌아보는 것,
추상적인 수치심을 뛰어넘어, 너무나 묻기 힘든 질문들, 내 고향,
그리고 아버지의 가족과 어머니의 가족에 대한 질문들을던지는 것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나와 그들이 살던 마을들로발길을 돌리는 것. 내 어린 시절, 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빵부스러기를 따라가며, 그것들이 내게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기를 바라는방법밖에는 없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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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세상이 변해야 나도 살기가편한 게 맞지만, 남의 탓을 하거나 사회구조탓만 하는 것은 좀 무책임한 태도라고 봐요.
내가 원하는 사회가 있다면 ‘나부터’실천하는 것이 책임성 있지 않겠어요?다른 말로 하면, 나 속에서 세상을 실현하고싶다는 개념이죠. 내가 살면서 나를 확장한모습이 세상이 되도록 하면 내가 원하는삶이 곧 사회에 구현되는 셈이죠.
그래서 ‘나부터‘ 할 수 있는 만큼해보자는 생각이죠."

"학력 지향 사회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과그다음 중요한 것 등등 위계가 있어요.
그래서 얘는 공부는 못해도인성은 착하니까‘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위계 속에 두고 아이들을 바라보죠.
그러나 아이들을 각각 하나의 존재라고생각을 하면 그 존재가 가진 모든 역동성이다 옳은 거잖아요.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부러운 거는 프랑스가 갖고 있는 영화제도예요. 그들은 조그마한 영화사들이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게 해주고, 사람들이 자기 동네의 조그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줘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다 사라질 동안 온 국민의 관심은 누가 프랑스 칸의 황금종려상이나 미국 아카데미상을 받느냐 마느냐에 쏠려 있죠. 대통령도 그런 거 받으면 축전을 보내고 아이돌과 함께 유엔에 나가고, 국민들은 그걸 보고 기뻐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러는 동안에 한국 영화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일 큰 피해를 보고 있거든요. 정말 십수년 동안 좋은 영화사와 저희 동료들이 다 사라졌어요. 성실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고 있어요.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죠. (이은)

"하루 세끼 늘 밥을 차리는 사람들은그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며,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에요. 밥상 차리는 건누군가를 위해 자기 시간을 들여희생하면서 봉사하는 일이죠.
각 가정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남자들도 집안일을 나눠 하는 게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율수업날인 이날 학생 각자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대강당 한편에 있는 피아노를 치거나,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등등 자기가 하고픈 ‘공부’를 하는 것도신선했습니다. 그 정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진짜 놀란 것은 6학년 교실에서였습니다. 지면에 쓸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서 교장 선생님이 교내 여기저기를직접 찾아다니면서 "괜찮은 사람은 운동장에서 잠시 같이 사진을 찍자"면서 협조를 구할 때였습니다. ‘제 눈에는’ 놀라운 광경이 있었습니다. 장판 바닥으로 된 교실에서 담요를 대충 걸치고 누워 자는 학생도 있었지만, 교장이 와도 누구도 그를깨우거나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교장도 마찬가지로 ‘쟤는 왜 자느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교실에서 나오면서 "자율수업도 수업인데 일어나라고 왜안 했어요?"라고 물었더니 "그 학생은 지금 휴식이 필요한지도 모르잖아요. 모든것을 자율적으로 하는 아이들이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이들 표정이 정말로 밝게 빛나는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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