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중략)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므로,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망치‘ 가 필요하다. 망치의 핵심적 기능이 쳐서 깨는 것이므로, 니체의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다" 와 신영복의 "공부는 망치로 하는 것이다" 를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면이해가 쉽다.
삶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기다림이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내딛는 한 걸음이며, 그 한 걸음을 내디디려면 바로 전까지 자신이 익숙해 있던 삶의 방식과 사고의 틀을깨야 한다. 이때 망치는 자신을 깨서 바꾸기 위한 수단이자 용기 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내 고통이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뿐이다." 라는 말과 정확히 맞닿아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삶과 관련한 질문은 누가 하느냐로, 당연히 사람이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빅터프랭클의 생각은 달랐다. 질문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삶이며, 우리는 질문을 받는 자이기 때문에 "삶이 시시각각 던져오는 물음에, 즉 ‘삶의 물음‘ 에 답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라는 것이다.
그는 "산다는 것은 바로 질문을 받는 것" 이며, "삶에 책임지고 답변하는 것" 이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행동을 통해 답변하는 것, 구체적인 삶의 물음들에 행동함으로써 또는 창조하는 작품으로써 답"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때 자신의 구체적인 삶이 던지는 질문에는 ‘거기‘ 에서 살아가는 각자의 몫일 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도함께 강조했다.

산다는 것 자체는 질문 받는 것이며 대답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자기 고유의 현존을 책임지고 답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이제 주어진것이 아니라 부과된 것으로 나타난다. 삶은 매 순간의 과제이다. ..... 헵벱의 말로 표현 하면 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이다.

홍세화의 《결:거에 대하여》에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위험한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위험한 일"
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저자의 생각이 아니라 저자가 읽은 책에서 인용한 글로, 지금까지 말과 개념의 의미를 함께성찰한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해진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과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 의 개차이가 바로 이해되는가? 자유를 빼앗기는 것보다 자유
‘개념‘ 을 빼앗기는 것이 훨씬 더 치명적인 아픔으로 느낄 수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릇을 빼앗기면 다른 그릇으로 대신할 수 있지만, 내용물을 빼앗기면 빈 그릇을 손에 쥔들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

내가 만난 훌륭한 일의 명인(名人)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Heart)이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손(Hand)의 소유자라기보다는 훌륭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은 자기의 옆에 무엇이든 비뚤어져 있거나 덜 된 일이 있으면 우선 마음이 불편해합니다. 이 불편해하는 마음은 대상을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망 속으로 받아들이는자세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존재론적인 문화를 극복하는관계론적 철학은 바로 따뜻한 가슴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없는 것입니다.
-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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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을 녹음한 일은 영광이고 행복이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빠져들기회가 내게 주어졌으니까. 여행을 하면 폭포에 빠져몸을 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詩에 빠져도 나를 반들반들하게 닦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몇 달 동안 나는 호메로스의 리듬에 맞춰 숨 쉬었고, 시의 운각韻脚을들었으며, 전투와 항해를 꿈꾸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더 잘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현실도 해설해주었다. 이건 고대의 기적이다. 2,500년 전 에게해의 자갈밭에 던져진(혹은 상륙한)한 시인이, 몇몇 사상가가, 철학자들이 세상에 내놓은가르침이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무뎌지지않았다니!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아직 되지도 않은 상태에 대해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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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까지다. 최소한 배고픔과 관련해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까지다. 한 공기의 밥으로 그가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두 공기의 밥, 세 공기의 밥, 나아가 한 가마의 밥을 그에게 먹여서는 안 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순간, 그는배고픔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고통에 빠져들고 마니까. 사랑은 ‘한공기의 밥‘과 같은 것이다.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사랑했다!" 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는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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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 점수라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 가족들 앞에서 의기양양해졌다는군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아들은 기쁨으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합니다.
열세 살 아들의 기쁨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늘 울고 있다는 『토지』 속 일본 할머니의 슬픔은 또 무엇이랍니까. 아마도 이들의 기쁨과 슬픔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논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둘다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낯선 할머니, 철없는 아들이라지만 그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의기쁨과 슬픔을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쁨과 슬픔은 나와 네가 공감할 수 있다는 증명이며, 그래서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증명입니다. 이와 같은 공감이 더 촘촘하게 우리들을 에워쌀 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참 좋은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런 세상을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인연이 모두가 그와 같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이 극락이지 극락이 어디 따로 있겠나."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늘 울고 계신다는 할머니, 세상 모든 슬픔에 공감했던 그분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사람을 살렸고, 사람들에게 극락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었다고 말입니다.

... 욕망이나 의지, 결단과는 상관없이, 그림을 아무리 열심히 그리더라도 그의 생활은 점점 더 가난해질 수도 있고, 훌륭한 화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명의 세월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스스로가 그림 그리는 것을 긍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가난과무명의 세월까지 긍정하는 것, 즉 첫 번째 긍정으로부터 생겨날모든 결과까지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 두 번째 긍정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두 번 긍정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가난해도 좋고 무명으로 끝나도 좋다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방법은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등등의, 인간으로서 겪는 불행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 긍정의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지나가는 불행과고통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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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란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는 나의 무능이다. 즉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이 단어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원죄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요, 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고,
애가 어떤 형태를성령은 이 움직임의 상호성이요 역동성 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내가 상대방을 향한 순수한(엄정한 의미에서 순수) 움직임이지못하게 만드는 것이 원죄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사랑을 표현함과 동시에 상대방에 대하여 나의 독립성을 강조할 수 있겠는가. 그런 태도는 명백히가능하지 않다. 사랑한다는 것은 종속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세상 끝까지 당신을 따라갈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고 싶다.
아무튼 모든 인간의 공동체에는 ‘나는 당신들에게 종속되기원한다.‘라는 암묵적인 말이 함축되어 있다. 왜 이 순간 그토록 많은 공동체가 생겨나고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가? 이런 상호 종속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 사랑에서 사랑한다는 것이 종속되고자 하는 바람이라면, 사랑이 충만하게 체험되는 하느님에게는 얼마나 더 당연하겠는가?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잊지 말고, 사랑의 영역에서 떠나지 말고 생각해 보라. 하느님이 오직 사랑이실 뿐이라면 그분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종속적인 존재요, 무한한 종속성이신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종속되어 있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는 슬픔에 잠길이다. 아들이 돌아오면 그는 기쁨 가운데 있을 것이다(참조: 루카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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