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낙원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 도피적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닛이 말한 낙원은 현실로부터 도피한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도피한 현실의 가장 어두운 곳에 남겨진 이들이 만든 공동체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귀중한 자산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후 영생을 얻어 누리기를 꿈꾸는하늘의 낙원은 그것이 설령 인간에게 주어질 때조차 신의 능력이고 신이 보인 배려이다. 그러나 신이 보살핌을 거둔 곳, 즉 지옥에서 낙원이 생겨난다면 이는 오로지 인간이 인간에게 보인 능력, 인간이 인간에게 품은 희망, 인간이 인간에게 베푼 배려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철학의 거처랄까 사명 같은 것을 떠올렸다.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자발적으로, 얼음이 덮인 높은 산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가 말한 얼음이 덮인 산정은 범속한 것들이 찾아올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다. 그러기에 그곳은 세상의 가치평가와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그 평가 속에서 추방된 것들을 발견하고음미하는 가치전복의 최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철학에 관한 섬뜩한 상징‘으로 인도의 비시바미트라 왕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혹독한 자기 고행에서 얻은 힘과 자신감으로새로운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비시바미트라 왕. 그의 이야기에니체는 이런 문장을 덧붙였다. "언젠가 새로운 천국‘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세우기 위한 힘을 그 자신의 지옥속에서 발견했다

‘철학의 정신‘은 그런 고행과 금욕의 외투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있었다고 니체는 말했다. 이는 많은 철학자가 가슴에 품고 있는 도피 욕망, 즉 번잡한 곳을 떠나 조용히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참된 철학자가 높은 산정과 얼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지금의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은 지옥에서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음을, 아니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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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자기 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순종과 금기의 명령들, 오랫동안 그녀에게 무능력과 불가능을 주입하던 내면의 목소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느꼈다. 장애라는 것이 일상에서 겪는 불가능과 그때 일어나는 포기의 정서라면, 밤하늘의 별은 그녀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단번에뒤집게 했다. 한마디로, 그녀에게 불가능은 가능이 되었고 무능력은 능력이 되었다. 별을 본 후 그녀는 자립생활을 위해 곧바로 기숙사를 나와 버렸다. 이전에는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밤하늘의 별이 그녀에게 준 것은 천체에 관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일깨움, 각성, 용기였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에 대한 참 좋은 정의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단 하나의 지식이나 정보도 달리 보게 만드는 일깨움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철학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철학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난한 이들이 껴안을 수 있는철학이며, 가난한 이들이 철학자에게 선사하는 철학에 대한 좋은정의라고 생각한다.

솔닛은 그가 본 공동체들을 ‘낙원‘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떠올리는 낙원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대개 낙원이란, 기껏해야 ‘영원한 휴양지‘ 이고, 우리가 무엇인가를더 만들어 갈 필요가 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솔닛따르면, "지옥에 세워지는 낙원은 늘 문제와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난다.
지옥에서 세워지는 낙원은 현장에서 만들어진다. 이 낙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힘과 창조성을 쏟아붓고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과 얽혀 있는 순간에도 뭔가를 창조할 만큼 자유로워진다. 지옥 속에서 세워지는 낙원들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춤‘,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 이일치한다.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 ~‘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을 고상한 미사여구 정도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힘들고 힘든 시절, 바로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을 놓아버리고 있다. 신문을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래서 떠올린 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가진 원초적 선물이 필요하다. 곁에 있어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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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폭력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폭력에 대한 혐오가 근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폭력은 그저 변화무쌍할 뿐이다. 사회적 구도가 변화함에 따라 폭력의 양상도 달라진다. 오늘날 폭력은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정면 대결성에서 바이러스성으로,
노골성에서 매개성으로, 실재성에서 잠재성으로, 육체성에서 심리성으로,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이동하며, 그리하여 피하皮下로, 커뮤니케이션의 뒤편으로, 모세관과 신경계의 공간으로 물러난다. 그리하여 폭력이 사라진다는잘못된 인상이 생겨난다. 폭력은 자신의 반대 형상인 자유와 합치를 이루는 순간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다. 군사적 폭력은 오늘날 익명화된, 탈주체화된 시스템적 폭력에 자리를 내준다. 이러한 폭력은 폭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사회와 하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폭력의 위상학》은 우선 부정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 즉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 친구와 적 사이의 이원적긴장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거시물리적 현상으로서의 폭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폭력은 보통 표현적으로, 폭발적으로, 육중하게, 공격적으로 표출된다. 태고 시대의희생과 피의 폭력,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는 신들의 신화적 폭력, 처형을 명하는 주권자의 폭력, 고문의 폭력, 가스실의 무혈 폭력, 테러리즘의 바이러스성 폭력이 모두여기에 속한다. 거시물리적 폭력은 좀 더 섬세한 형태로,
이를테면 언어폭력으로 구현될 수도 있다. 상처를 주는언어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정성의 원리를 기초로 한다. 그것은 명예를 훼손하고 신뢰를깎아내리며, 위신을 떨어뜨리고, 존중을 거부한다. 언어폭력은 부정성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스팸화,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과잉 정보, 언어와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거대한 더미에서 오는 긍정성의 폭력과 구별된다.

폭력은 피하皮下로, 커뮤니케이션의 뒤편으로, 모세관과 내면적 영혼의 공간으로 물러난다. 폭력은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직접적인 것에서은밀한 것으로, 육체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으로, 호전적인 것에서 매개적인 것으로, 정면대결적인 것에서 바이러스적인 것으로 변화해간다. 대결 대신 오염, 공개적인 공격 대신 부지불식간의 전염이 이제 폭력의 작동 양식이 된다. 이러한 폭력의 구조적 변화가 오늘날 점점 더강력하게 폭력 사건의 성격을 규정한다. 테러리즘도 파괴적 힘을 한데 모아 정면 공격을 꾀하기보다 비가시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바이러스적으로 분산시킨다. 21세기의 전쟁 양식인 사이버 전쟁도 바이러스적으로 작전을 펼친다. 바이러스적 방식은 폭력을 보이지 않게 숨기고, 불명확하게 만든다. 범인도 자기를 가린다. 공격하기보다 전염시키는 디지털 바이러스는 범인을명확히 가리키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바이러스적 폭력도 여전히 부정성의 폭력임은 분명하다. 그것의 본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 친구와적의 이원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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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카뮈의 말대로 인간은 경멸할 것보다 감탄할 것이 훨씬 많은 존재다.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삶에 직면한 인간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깨어진 세계에서의 부조리한 현실을 생명의 현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요, 존재에의 기쁨을 선사하는 희망을 실현하는 존재다. 희망을 지닌 인간은 창조적 능력으로 삶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으며,
‘되어가는 존재‘로서의 ‘나‘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마르셀(G. Marcel)에 따르면 희망은 "우리의 영혼을 만드는 옷감이며1), 나의 존재가 무의미한 절망으로 끝날 수 없다는존재의 요구를 표현하는 의지와 관련된 말이다. 이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나의 존재가 다시 생기를 찾고 생명으로 전환하는 창조적인 내적 활동을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가 빚은 혼란과 고통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에의 힘인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삶의 모순과 역설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스스로 책임지고, 자신의일상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다.

방역의 문제와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만 난무할뿐 정작 사망자와 그 가족들의 슬픔과 관련된 공감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 개인의 죽음을 사적 영역으로만 다루고있는 한국 사회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들을 애도하는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코로나 희생자들은 하루 사망자 수치에 더해지는 숫자로만 이해될 뿐, 그들이 병상에서느꼈을 고립감과 외로움에 대한 공감은 없어 보인다. 미국뉴저지 주지사가 코로나19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반기(半旗)‘를 달도록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코로나 사망자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한 작은 방식입니다"라고 말한기사를 보면서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전염병의 많은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전국 시청에서조기를 내걸고 1분간 묵념을 하거나 지역 신문에 코로나희생자들의 사진과 이름을 싣고 그들을 애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국 사회도 코로나로 사망한 감염자들을 배제하고 낙인찍고 타자화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고통과 아픔이 사회적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애도를 통해서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건강한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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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과제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을 정리하고,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다르게 살기 위한 예비과정" 으로서 "그날그날시간의 인내를 가르쳐주는 일상의 겸손한 지혜에 호소하는 하나의 발견술적 역할(eine heuristische Rolle)을 담당하게 된다.

평범한 삶의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내몰리면인간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대처방식을 찾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응급상황에서는 구호처럼 일단 숨통부터 틔워야 한다. 그러나 상처가 깊고 경험의 흔적이 오래 남을수록 응급조치로 충분하지 않다.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대처능력으로서의 기본적인 기술적 능력이 요구되겠지만, 더 나아가 불편함과 제약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행복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의 확립을 요구한다.

내면적인 불안은 외부로 표출되어 무기력을 경험하고 과민반응을 일삼기 일쑤다. 때로는 정신적인 충격과 불안이 엄습하여 실존을 동요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안정적인 정신적 삶을영위하는데 필수적인 지혜로서 ‘마음의 비축‘도 필요하다.
마음의 비축을 위한 목록은 일단 구성원 각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 이 목록작성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내용은 자기 자신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발타사르 그라시안(B. Gracian)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 소질, 독창력, 판단, 욕구에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과 같은 것이다. 그는 "누구도 스스로를 미리 깨닫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자가 되지 못한다"고역설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에 매몰되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불편함이 바로 불행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겠지만 불편한 일들이 반복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느낄 것이다.
그래서 불편함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평소에 불편함을 감수하며 신축적인 몸틀‘을 형성하고자 노력해야한다. 타자를 만나는 것은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다. 인간성에 대한 이해 노력은 그 자체가 관용과 화해의 몸짓이며, 인간성을 향해 도약하는 결단이다.

삶의 기예란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행복의 장소가 삶의 실행 자체 뿐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허무의 문턱에 서 있는‘ (veribilis innihil) 인간은 "먼 길을 지나왔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하므로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다."행복은, 스스로를 완전히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분명히하는 자기에게 달려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체념에 있지 않아야 한다면 그것은 단지 저항과 장애에 직면함으로써 생겨나는 강렬한 삶의 감정에서찾아져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강한 주체, 특히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능력, ‘준비자세‘를 전제로 한다. 사르트르의표현처럼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은 저항과 장애를여러 곳에서 만나지만 "그런 저항과 장애는 인간에게 그것으로 있는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또 그것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그래서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적절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대처하는 것, 즉 "준비하는 것이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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