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의 핵심이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보는 유심론적 태도를 경계한다. 행복의 핵심은 ‘좋은 경험‘에 있다. 그 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고, 기쁨과 같은 좋은 감정을 안겨줄 수 있는 경험말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좋은 경험을 찾아내고 이를 늘려가는게 중요하다. 행복은 기본적으로 기쁘고, 기다려지고, 하고 싶은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경험이란 놀이와 유사하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행복한 건 잘 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더라도자신만의 놀이를 즐기고 발달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잘 놀아야만 활기가 생기고 재충전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잘 놀때 행복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오티움은 ‘무위無爲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걸 말한다.

낮은 단계의 무위는 억지로 무언가를 안 하는 것이지만 높은 단계의 무위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을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을하는 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채우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억지로 애를 쓰지 않는 것,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을 넘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활동은 우리를 짓누르는 책임이나 의무도 아니고, 늘 따라다니는 보상이나 결과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현대인의 여가에서 중요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에있다. 자, 이제 오티움을 정의해보자. 오티움은 ‘내 영혼에 기쁨을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말한다.

1994년 이후 스탠퍼드대학의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센Laura L.Castenscen과 동료들은 수백 명의 노던 캘리포니아 거주민들의 정서상태를 평가했다. 그 결과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든 이들은당면한 사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흥분을 해도 재빨리 균형의상태로 돌아왔다. 카스텐센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은 남아 있는 시간이 적어질 때, 즉 인생의 끝에 점점 더 가까워질때 감정적으로 의미 있는 목표에 초점을 두려고 한다. 반면 남아있는 시간이 많을 때는 지식 획득에 초점을 둔다." 즉,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두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나이든 사람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지만 그 자체가 삶에 대한 태도를 전환하도록 돕는다. 질병, 상실, 죽음, 수입과 역할의 감소 등부정적인 현실 앞에서 마냥 우울하고 절망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 집중하고 남은 시간을 더욱 깊이 있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와의 짧은 재회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에게 치유란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활기를 되찾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고, 능동적 여가 활동은 그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삶을 마치 경주라고 생각하는 듯해요.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 중에서

행복을 미루면 행복의 감각은 녹슨다. 행복을 미루는 것이 자동적인 습관이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애초에 생각했던 어떤 조건이나 기준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행복을 미루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오늘을 희생하면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졌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과 놀이 중에 노는 것부터 한다면 그 사람은 철이 없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 우화에서 개미는 정상적 인간이고 베짱이는 비정상적 인간이다. 물론언제 어디서든 주류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기꺼이 베짱이로 살아갈 것을 선택한다. 골수 베짱이들은 당장 굶어죽더라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개미인가? 베짱이인가? 둘 중에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익숙하다. 자신도 모르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고 든다. 그러나 의문을 품어보자. 우리는 왜 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자. 하루는 개미로 살고, 또 하루는 베짱이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반나절은 베짱이로 살고 반나절은 개미로 살 순 없을까? 혹은 평일은 개미로 살고, 주말은 베짱이로 살 수는 없을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은퇴 후 시간을 쪼개서 미리 앞당겨 쓸 수는 없을까?‘ 예를 들어, 은퇴 후 시간이 20년이라면 그시간 중에 1~2년을 미리 쓰고 조금 더 은퇴를 늦추면 뭐가 문제일까 싶었다. (물론 이는 일반적인 직장인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으로 인해가능한 생각이었음을 양해드리고 싶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 될 게도 내가 그린어 말리려고 해도 제대로 쉬고 싶다는없었다.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제대로 쉬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이분법에서 벗어나니 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삶의 큰 변화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값진 것은 안식년 동안 몸의 감각이 깨어나면서 삶의 현재성을 되찾은 것이었다. 행복을 미루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일 일은생각하지 말고 오늘만 행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삶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 숙제처럼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을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뛸 수밖에 없다. 지금 일이싫다는 이유로 당장 사표를 쓰고 하고 싶은 일을 찾으러 다닐 수는없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낮에는 개미에서밤에는 베짱이로, 혹은 평일은 개미에서 주말은 베짱이로 이중의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의 몇 시간 혹은 주말의 한나절은 자유 시간이 있다. 이 시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석연치 않은 문제에 매달릴수록 형편은 더 나빠집니다. 분석을 거듭할수록 불평거리는 더 늘어납니다. 깊이 파고들수록 상황은 더 심하게 꼬여만 갑니다. 은밀한 불만으로 끌어들이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정죄와 자책, 독선과 자기 거부 등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아주 고약한 방식으로 상승 작용을 합니다. 꼬임에 넘어갈때마다 자신을 거부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일단 불평불만이라는 광막한 미로에 발을 들여놓으면 순식간에 길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세상이 자신을 몰라주고, 거부하며,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불평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며 전혀생산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동정심을 자극하고 간절히 소망하는무언가를 얻을 욕심에 푸념을 늘어놓으면 백이면 백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매사 불만스러워하는 상대와 어울리는 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자기부정적인 이가 늘어놓는불평에 대처할 묘수를 터득한 이는 흔치 않습니다. 비극적인 건 한번 불평을 내뱉고 나면 머잖아 가장 두려운 상황에 몰린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내 힘으로 일으킬 수 없는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날 길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심리적인 깨달음으로는 거듭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치료는 오직 위로부터 하느님이 손을 내밀어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순종적이고, 성실하고,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일하고, 자기희생적이라는 건 누가 봐도 좋은 자질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원망과 불평이 바로 그 칭찬할 만한 태도들과 단단히결합되어 있으니 정말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 탓에 절망감에 빠질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으로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는바로 그 순간,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힙니다. 마음을 비워야겠다고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을 끌어모으는 데 집착합니다. 맡은 일을 멋지게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바로 그 순간, 왜 남들은 나만큼 헌신하지 않는지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유혹에 넘어간 이들을 은근히 부러워합니다. 고결한 자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원한에 사무친 불평꾼이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허약한 나의 진짜 모습과 마주칩니다. 나에게는 원한을 완전히 뿌리뽑을 능력이 없습니다. 원망과 분노는 내 속사람이라는 토양에 너무 단단히 박혀 있어서 그것을 힘껏 잡아당긴다는 건자신을 파괴하는 행위 같은 느낌이 듭니다. 도덕적인 장점들을다치지 않으면서 원한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내 안의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탕자의 비유는 형제를 선과 악으로 갈라놓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선한 이는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어른은 형과 아우를 모두사랑합니다. 버선발로 달려나가 두 아들을 맞아들입니다. 두 자식을모두 한 상에 앉히고 더불어 기쁨을 나누길 바랍니다. 동생은 모든허물을 용서하는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큰아들은 멀찍이 물러서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몸짓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아직까지는 분노와 원망을 떨쳐버리고 아버지가 베푸는 치유의 손길에 자신을 내어맡기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의내면에서 어둠을 몰아내주기를 바라면서도 자유롭게 선택할 여지를 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암흑 속에 머물 수도 있고,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사랑의 빛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거기에 계십니다. 주님의 빛이 거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용서가 거기에 있습니다. 창조주의 무한한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모두 사랑했다. 아버지는 저마다 뜻하는 대로 살 자유를 주시지만, 받아들이지도 않고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는 자유를 부여하실 수는 없다. 당시의 관습과는 달리 이 아버지는 자식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울러 아버지의 사랑과 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 역시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인생사를 어떻게 매듭지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이야기가 올바르게 마무리되는 데 따라 아버지의 사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다만 그 자신의 존재와 성품에 따라 좌우될 뿐이다. 변화가 생길 때마다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그대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인 데이비드 화이트에 대해서는 나와 미하엘 쉬나이더가일찍이 함께 주목했었다. 그는 "씩씩하게 상처 입을 수 있음(robust vulnerability)" 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이 개념에 대해 독일어 권에서는 심리분석가이자 유명 저자인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가 "억세게 상처 입음(robusteVerletzlichkeit)"이라고 말했지만, 이 개념의 중점은 "상처 입기 쉬운(verletztlich)"이 아니라 "상처 입을 수 있게 존재한다(verletztbar)"이기 때문에 "씩씩하게 상처 입을 수 있는 능력" 이라는 번역이 그 의미에 더 잘 부합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원적 관점들과 감수성, 느낌, 사유, 감각 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일상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독일어의 결정하다(bestimmen)‘라는 동사 안에Stimme(목소리, 의견)‘라는 어근이 들어 있다.-역주) 우리가 부모를실망시킬 때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셈이다. 자기 결정적 인간으로서 부모와 적절한 관계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경계선을 그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하는 삶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게나, 이기적으로 자신의 의지만을 관철하려 들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줄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 염려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필요와 갈망에 대해서 예민하게 깨어 있는 감각은 필요와 갈망을 모두 얻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다.

실망은 우리의 기대와 희망을 말해준다.
기대와 희망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 마음에 무엇이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