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 동안 이러한 만찬을 수천 번 열었고, 낯선 사람, 친구, 동료 들이 모여 죽음이라는 불편해 보이는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매번 만찬은 똑같은 제안으로 시작된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먹기 전에 이제는 우리 곁에 없지만 각자의 삶에 긍정적인영향을 끼친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사람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괜히 중간에 바꾸지마세요. 제일 처음 떠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고인의이름과 그분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이야기한 다음, 초에 불을 붙이거나 그분을 위해 건배하세요. 우리 모두 배가 고프니까 각자 1분 정도만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자기계발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쏟아붓고 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더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매달 다이어트를하고 크로스핏 센터에 등록한다. 심리 치료를 받고 명상을 배우고 재테크를 한다. 그런데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늘 사로잡혀 있지만, 모든 변화가 죽음과 회생을 포함한다는 사실은모른다. 변화와 죽음의 관계를 보여 주는 예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가장 단순한 예로 겨울로 바뀌는 가을과 봄으로 바뀌는 계울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노력을 기울여도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데 번번이 실패하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사실이 모든 개인적 변화의 지렛목인 것이다. 우리는 삶을 개선하려 할 때 죽음의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개선하기 위한 대화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이 많은 그늘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것이고, 우리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죽음은 삶에 활기를 주는 달콤함이자 비극이다. 또한 마침내 성장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내면에서 사라져야만 하는것들의 작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죽음의다양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유롭고 자율적인삶을 살려면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 현 시대에는 우리가 죽는방식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우리가 사용하는 말(더 정확히 말하면, 피하는 말)만 봐도 심각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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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의 주춧돌은 사람 키보다 커서 돌기둥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돌기둥이 아니라 엄청 긴 주춧돌이다. 가장 높은 기단부 역시 ‘경복궁에 있는 건물들이다. 기단부의 높이를 보면 건축주의 권력 양을 측정할 수 있다. 실제로 왕족은 돌을 3단으로 쌓은 기단을 만들 수있었고 양반은 2단 이하로 만들어야 했다. 권력의 위계를 구분하기 위한 조선 시대 건축 법규인 것이다. 기단은 재력을 나타내는 척도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부잣집은 성북동, 한남동의 경사 대지에 높은 축대를쌓은 집들이다. 현대 도시에서의 축대는 조선 시대 때 기단이라고 볼 수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비, 기단의 높이, 권력, 건축 공간에 대해서 잘 그려 낸 사례다. 영화를 보면 가난한 송강호 가족은 비가오면 물이 차는 반지하에 살지만,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카메라가 옮겨지면 집들이 모두 거대한 축대 위에 올라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있다. 심지어 주인공 남자는 그 집 대문을 열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마당과 현관문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축대가 높았다.
과거에 무거운 돌로 기단을 만들 만큼 재력이 없었던 일반인들은 기단없이 주춧돌만 두고 집을 지었고, 비싼 기와를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가을에 추수하고 남는 볏단을 재활용해서 지붕을 덮었다. 볏단은 기와보다 가볍기 때문에 볏단으로 지붕을 마감하면 지붕을 받치는 나무 기둥도 굵은 재료를 쓸 필요가 없다. 자연스레 주춧돌도 작은 것을 사용하면 된다. 같은 면적의 건축물이라도 초가지붕을 가진 건물보다 기와지붕을 가진 건물의 건축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기와집이 부의 상징이 된 것이다.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행동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강수량 차이로 인해서 서양은 독립된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 하는 사회가 되었다.

밀 농사를 짓는 서양에서 수학이라는 논리 위에 객관적이고 절대적인가치관이 만들어져 가는 동안, 벼농사를 짓는 동양에서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상대적인 가치관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이 사실은 앞서 벼농사 지역의 사람들은 요소들 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는다는 실험 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문화권은여러 가지 분야에서 차이점을 보이는데, 우선 이상향의 공간적 개념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살펴보자. 서양 기독교에서의 이상향은 천국이며천국은 우리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이는 마치이데아에 절대로 가지 못하는 동굴에 묶인 사람과 같다. 절대적 공간은있지만 인간은 갈 수 없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동양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은 다르다. 무릉도원 설화는 이렇다. 진나라 때 어느 어부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지나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낙원 같은 마을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나온 후 다시 찾아가려고 했더니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양에서의 이상향은 우리와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만 다만 찾기 어려운 장소일 뿐, 우리가 절대로 갈 수 없는 세상은 아니다. 선악에 대한 가치관에서도 차이점이 보인다. 서양 문화에서는 선악의 가치관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 같은 법은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같은 명확한 독립적인 명제로 선善을 규정한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선악의 결정을 관계에 의해서 설명한다. 동양에서는 절대적인 선을 믿지 않는다.

중용의 개념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쉽게 말해서 눈치 봐서 가운데에 서라는 말인데, 벼농사 사회의 공동체내에서 튀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요즘도 이런 덕목을 최고로 내세운다. 우리 사회는 뛰어나지만 튀는 것보다는 무능하더라도 무난한 것을 더 좋게 보는 사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용이 되려면 좌와 우의 거리를 젤 필요가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간쯤에 ‘선‘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와 우의 관계 속에서 선을 찾는 것이다. 이는 동양 사회가 상대적인 가치와관계를 중요시했음을 보여 준다. 동양에서 최고의 덕으로 이야기되는
‘중용‘은 절대적 선의 개념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서 변화하는 선의 개념이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동양에서 도덕의 가장근본이라고 생각하는 ‘효孝‘는 부모와 자녀라는 두 사람 간의 상대적인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충忠’은 임금과 신하라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선이다. 동양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선을 찾으려 했다. 부모자식의 관계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관계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즉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동양에서는 그 관계 속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했다. 이는 집단 노동 방식으로 벼농사를 지으면서 만들어진 가치관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비움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긍정적인 의미를내포하고 있다. 동양에서 비움은 창조의 시작이다. 비움에 큰 가치를둔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일단 손에 잡히는 물질적 존재가 가득 차게 되면 오히려 성장의 잠재력이 소진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잘 나타난다.

진흙을 이겨서 질그릇을 만든다. 그러나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빈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게문[戶]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있는 것[有]이 이로움[利]이 된다는 것은 없는 것[無]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 11장, 남만성 역)

바둑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기원전 2300년경 초대 중국 황제 요堯가 자신의 두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체스나 장기가 말과 코끼리등이 등장하는 유목 사회의 전쟁을 상징적으로 만든 게임이라면 바둑은논밭을 확장하고 경작하는 농경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만든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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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보면 농업 문명이 같은 위도상의동서 방향으로는 빠르게 전파되고, 남북 방향으로는 느리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남북 방향으로 이동하면 위도가 달라지면서 기후가 바뀌게되고, 기후가 바뀌면 어렵게 발견한 농사 가능한 종자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동서 방향 이동은 같은 위도상으로 같은 기후대상에서의 이동이기 때문에 옆에서 농사가 가능했던 종자를 그대로 쓸 수 있기에 농업 전파의 속도가 빠르다. 우루크는 북위 33도에 위치하고, 아테네는 북위 37.5도, 시안은 북위 34도에 위치한다. 우루크와 비교해서시안은 위도상 1도 차이가 나는 반면 아테네는 4.5도 차이가 난다. 게다가 우루크에서 아테네에 가려면 가운데에 지중해가 가리고 있어서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반면 우루크에서 시안은 육지를 통해 동쪽으로수평 이동하면 된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론을 적용하면 동쪽으로 수평 방향으로 전파된 농업의 전파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래서 그리스와 중국은 같은 시대에 위대한 사상가가 나올 정도의 비슷한 발전 수준이었지만 거리로 따지면 시안이 아테네보다 최초의 메소포타미아 문명도시에서 두 배 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서양의 사상가들과 동양의 사상가들은 같은 시기에 뿌리를 내렸지만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서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두 문화의 ‘생각의 유전자‘는 다르게 만들어졌을서양은 개인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십계명‘ 같은 절대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다.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일상에서 적용하면 말이되지만 전쟁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법칙이다. 그럼에도 서양의 법칙은상황과 상관없이 절대적인 명제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서 동양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중용‘ 같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경우에 따라서 행동에 대한 가치가 결정 난다. 두 문화권은 건축공간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서양의 건축은 벽 중심의 건축을 하면서내부와 외부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공간의 성격을 갖는 반면, 동양은 기등 중심의 건축을 하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성격의 공간을갖는다. 이 두 문화는 공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두고 발생한 문화다.

밀과 벼는 재배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이 재배 방식의 차이가가치관의 차이를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벼농사 지역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밀 농사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그 이유는 버지니아대학 토머스 탈헬름Thomas Talhelm 교수의 논문 『벼농사와 밀 농사에 따른 문화적 차이의 증거Emerging Evidence of Cultural Differences Linked to Rice Versus WheatAgriculture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벼농사는 비가많이 오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많은 물을 다뤄야 하기에 치수를 위한 토목 공사가 많이 필요하다. 물을 담는 작은 저수지인 ‘보‘를 만들어야 하고 모내기도 집단으로 모여서 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저수지나 다른 사람의 땅에서 사용한 물을 내 논으로 내려 받아서 사용하고다시 그 물을 물길을 내어서 이웃의 땅으로 전달해 주어야 한다. 벼농사에서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물을 함께 힘을 합쳐서 공동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반면 밀 농사는 씨 뿌리는 모습부터 다르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함께 줄을 맞추어서 모를 심지만, 밀 농사 지을 때는 땅 위를 혼자 걸어다니면서 씨를 뿌린다. 집단으로 모여서 일하는 경우가 적다. 밀은 맨땅에서 자라고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고, 비가 집중호우 없이 적당히 고루 내리는 지역에서 농사짓기 때문에 관개수로를 만들 필요도 없다. 밀농사는 벼농사에 비해서 서로 협력할 필요도 없고, 모여서 살 필요도 적다. 자연스럽게 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관개수로 토목공사를 하고 집단 모내기를 하면서 벼농사를 짓던 사람에 비해 개인주의적인 성격이만들어지게 된다. 벼농사 지역의 이혼율이 밀 농사 지역보다 매우 낮은이유도 이와 같은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럽 여행을 가면 자연 속에오두막이 띄엄띄엄 있는 평온한 시골 풍경을 볼 수 있는 반면, 동양의시골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다. 농사 방식은 마을의 풍경도 다르게 만들었다. 노동 방식이 문명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이다.

여러분은 원숭이, 사자, 바나나‘라는 단어를 두 그룹으로 묶으라면 어떤 것끼리 묶겠는가? 탈헬름 교수는 농사 품목이 가치관을 결정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재미난 실험을 진행했다.
그는 중국 한족 학생 1,162명을 상대로 ‘기차, 버스, 철길‘ 세 가지 중에서 같은 종류끼리 묶으라는 문제를 냈다. 중국은 대륙이 크기 때문에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비가 많이 내려서 벼농사를 짓고, 북쪽으로 가면 비가 적게 내려서밀 농사를 짓는다. 이 실험에서 중국 내 밀 농사를 짓는 지역 출신의 학생은 기차와 버스를 하나로 묶은 반면,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학생은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는 비율이 높게 나왔다.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사람들은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를 생각하면서 개체 간의 ‘관계‘에집중해 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었고, 밀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관계가 아닌 각 개체가 가진 성질의 공통점을 찾아서 교통수단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버스와 기차‘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같은 역사적 배경과 같은 유전자적 특징을 가진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농사 품종에 따라서 가치관의 차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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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와 재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은 세속적인 관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추구하는 목표에 고상함과 저열함의 차이가 있고, 그래서 군자와 소인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비유를 하자면, 누구는 동전 몇 푼을 훔치고, 누구는 황금 같은진귀한 보배를 훔치는 것의 차이가 있더라도, 도둑질이라는본질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크고 작음의 차이가 그리 큰 것일까요? 절도는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닌물건을 자기 것으로 만든 행위입니다. 가치의 크고 작음에는차이가 있겠지만, 적은 돈을 훔친다고 해서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사물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세속에 따라 본성을 잃는 사람을 일컬어 도치된 사람이라고 한다.
-「선성」

문제는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현대의 세계가 미증유의 풍부함으로 차이의 즐거움을 즐길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 있습니다. 문제는 "신기한 것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見以思遷"
는 인간 본성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은달라지기 마련이지요.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쫓아가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본질을 잃을 수도 있겠지요.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작은 공간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는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짧은 시간만을 굳게 믿는 까닭이다. 곡사에게는 도를 말할 수 없다. 구구한 가르침에만 속박되기 때문이다.
「추수」

이 비유들은 "곡사에게는 도를 말할 수 없다. 구구한 가르침에만 속박되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과 대비를 이룹니다. 아마도 이 주장을 펼치기 위한 준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곡사(曲士)‘는 식견이 부족하고 편협하게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사람이지요. 『장자』에서는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도」에서는 ‘변사(辯士)‘를 자신의 주장만을 끝끝내 고집하는 사람(一曲之士)‘이라 여겼고, 「천하」에서는 ‘두루 살필 줄 모르는(不該不遍 사람이 곡사라고 했습니다. 곡사가 도리에 밝지 못한 것은 그가 받아들인 지식과교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는 동시에 사실 다른 사물들을 부정하기 마련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편안히 머물며 변화에 순응할 수 있다면, 희로애락이라는 갖가지 감정에 대한 집착 또한 그 마음을 침범할수 없다.
—「양생주」

진실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모두가 너무도 슬피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노인이 아이를 잃은 것처럼, 젊은이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마도 노자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노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올 때가 되어서 이 세상에 왔고, 갈 때가 되어서 자연스럽게간 것입니다. 만약 오고 가는 때에 언제나 편안하면서 자연의이치에 순응한다면,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도 그렇게 마음속깊이 파고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순응‘은 여기서 특별히생사와 연관되어 이야기됩니다. 장자는 생명의 과정에 불가항력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생명이 올 때도 우리는 주도적으로 나설 방법이 없으며, 생명이 떠나갈 때도 마찬가지로 주도적으로 나설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것도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그 대상을 이해하고 이해의 기초 위에서 평정을지키면서 그 오고감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다고기뻐하고 간다고 슬퍼하는 마음속의 감정적 반응이 아무런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둔다면 결국 해가 될 뿐이죠.

기쁨과 노여움은 굳이 얼굴에 나타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의 눈에 들어야만 의미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즐거움은마음에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으며 마음속의 세계를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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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덕이 뛰어나면, 그 외형은 잊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잊어도 되는 것을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 그야말로진짜 ‘잊음‘이라 할 것이다.
-「덕충부」

사람의 외형은 타고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이 외형적인모습은 수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적인 수양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마음가짐과 노력 여하에달려 있지요. 이 두 가지 표현이 밖으로 드러나면, 하나는 외모의 아름다움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기질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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