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과 관련된 개념의 차이도 있다. 독일어로 ‘여가‘는 ‘프라이차이트Freizeit‘다. 우리에게 ‘여가‘는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이라는 뜻이강하다. 그러나 독일어의 프라이차이트는 ‘남는 시간‘이 아니다. ‘자유시간‘이다.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란 이야기다.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있다. 우리에게 여가나 휴식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free from‘를 뜻하는 소극적 자유에 가깝다. 그러나 독일의 프라이차이트는 ‘무엇을 향한 자유tree to ‘인적극적 자유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휴식은 적극적 자유의 시간이 된다. 추구하는 삶의 목적과 휴식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이야기다. 휴식이 진정한 삶의 힘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몇 년 전 이탈리아의 심리학자들이 티롤 남부지방산촌농민들의생활 습관을 연구하고 놀라운 발견을 했다. 농부들을 상대로 일과 여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묻자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냐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농부들은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었다. 젖소의 젖을 짰으며, 밭의 잡초를 뽑아 주었고, 사이사이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저녁이면 아코디언 연주를 즐겼다. 뭐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고 무엇이 놀이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된다면 무엇을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산골 사람들은 "지금처럼 똑같이!" 하고 대답했다. 우유를 짜고 풀을 베며 옛날이야기와 음악을 즐기겠노라는 한

감칠맛이 난자신의 성공 비결을 털어놓으며 산장 주인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등산로를 보세요." 그가 말문을 열며 계곡 아래로 이어지는돌투성이의 길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차를 타고 산장으로 오게 만들려면 벌써 포장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랬다면 산장의 마법은 씻은듯 사라졌으리라. "내 집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면 두 시간의 산행은피할 수가 없소. 대기업 총수가 두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면, 이곳이 낙원처럼 보일 것이고 와인 한모금 한 모금이 시구절과 같을 거요."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산장 주인에게서 그동안 까맣게 잊었던 여유로움을 되찾고 배고픔과 갈증을 진정으로 해소하는 느낌을 갖는것이다. 바로 그래서 산장 주인의 지인들은 거듭 이곳을 찾는다. "만약 내가 길을 닦아 놓았더라면, 내 치즈 맛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을

산장 주인이 그의 손님들에게 선물한 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뭔가 모르게 허전함을 해소해주는 행복감이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는 손님들에게 순간의 오롯함을 맛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 같은 행복의 순간에서 우리는 일상의 근심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순전한 인생 그 자체‘를 사는 느낌을 갖는다.
우리의 주의력은 분산되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이런 체험은 두뇌에 깊이 각인된다. 그래서 며칠 뒤 다시 같은느낌을 맛볼 수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매 식사 전에 두 시간에 걸친 산행을 해야만한다거나 해도 좋은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흐트러지지 않는 주의력을 발휘하는 기술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이를 위해필요한 것은 오직 사고방식의 철저한 전환이다. 항상 더 많이 하고 욕심을 내는 대신, 행복이란 무릇 바로 이 절제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 정말 제대로 맛볼 수 있는가 하는문제는 그 맛봄의 대상에 달린 게 아니다. 오히려 온전히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좌우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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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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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가묘수예요. 생산 현장이나 노동 현장을 증발시키고 소비 현장만을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스마트폰은 우리 몸에 이식된 체제의 칩chip과도 같아요. 이 칩을 거치지 않고는 세계와 접속할 수 없게 된 거예요. 결국 국가나 자본이 검열한 정보는 우리에게들어오지 않죠. 이처럼 스마트폰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우리에게안겨주기보다는 체제가 보았으면 하는 검열된 세상만을 보여줘요.
무서운 일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사치품이필수품이 되는 자본주의적 운동을 통제할 수 있느냐의 여부죠. 스마트폰 기능을 향상시킨다, 앱을 개발한다, 통화료를 없앤다, 배터리용량을 늘린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멈춰 세울 것인가의 문제인 거예요.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는 혁명이 가능하려면 두가지 과정이 필요할 거예요. 첫째, 필수품이라고 믿는 상품이 사실은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해야죠. 둘째, 사치품은 필수품이 아니니 가급적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하지만인간에게 사치품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정말 끊기 힘든 거예요. 이사치품을 쓰는 순간만큼은 당신은 고귀한 사람이고, 눈에 띄는 몇안 되는 도드라진 사람이 되는 거예요. 본능적으로 자본주의에 적응한 사람들, 새로운 제품과 소수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제품에 민감한

허영vanité이라는 말은 ‘비어 있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어요. 허영虛榮은 ‘비어 있다‘는 뜻을 가진 ‘허‘자에 ‘꽃이 피다‘, ‘영화‘라는 뜻을 가진 ‘영‘자가 붙어 있잖아요. ‘영‘ 자는 나무에 불이 붙은 형태인데, 단풍을 연상하면 돼요. 그러니까 불이 붙은 것처럼 화려하게물든 나무가 있는데 속은 텅 비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허영의 동물이에요.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면 좋아하고, 지적이라고 하면 좋아하고, 부유해 보인다고 하면 좋아하고, 미소가 예쁘다고 하면 좋아하고, 남이 하는 칭찬에 그냥 붕괴되잖아요. 그러니까 지적인 척도 하고, 부유한 척, 고상한 척도 하는 거예요.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도 《팡세Pensées, 1670》에서 그랬잖아요.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간의 허영에 비판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도 훌륭한 저자라는 영예를 얻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해요. 허영을 지적했다는 칭찬을 받고자 하는 허영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거죠. 파스칼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인간이 무의식적인 허영의 노예라고 말하는 거예요.

소비의 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소비를 하는 이유는 그 물건의 사용가치 때문이아니라 그 제품을 샀을 때의 만족도 때문이죠. 제품을 광고하는 연예인이나 모델들이 성능에 대해서 설명을 하나요? 풍요롭고 쾌적한삶의 이미지들을 사는 거죠. 일종의 사치품을 구매하는 거란 말이에요.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을 두고 새로운 상품을 사니, 결과적으로 보면 중고 시장이 커져 있는 거죠. 새로운 상품이 마구 쏟아져나오고, 버리고 사고 버리고 또 사니까. 집집마다 충분히 사용가치가 있는데도 방치되어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아요.

파스칼의 팡세》는 굉장히 재미있어요. 앞부분은 철저하게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요.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고, 그저 허영 덩어리라는 거죠. 인간을 이성적인 사유주체로 봤던 데카르트와는 반대였어요. 파스칼은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보지 않았고, 그저 무의식적 충동과 허영에 지배되는존재라고 봤어요. 그래서 <팡세>의 후반부는 이런 인간은 구원될 수없기 때문에 신을 믿어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을 지적인 사유 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죠. 그러니까 조금 재미가 없어요. 파스칼은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신성을 긍정하지 않는근대인들의 허영과 부조리함을 섬세하게 들춰내요. 그 모습들이 지금과 별 차이가 없어요. <팡세>를 보면 인간의 잔인함, 이기적 욕망,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어요.

손주가 할아버지 스마트폰 조작을 가르치잖아요. 아이가 더 잘난 거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젊은 세대를 좋아해요. 노인들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삶의 지혜를 되묻는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몇 번의 계절을 느꼈으며, 이 사람이 몇 번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이 사람이 몇 번의 헤어짐을 겪었는지 아는 거죠.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처음 이혼을 앞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젊은 세대는 노령 세대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죠. 스마트폰으로검색하면 되니까요. 블로그도 좋고 유튜브도 좋아요. 수많은 정보를아주 쉽게 얻을 수 있죠. 문제는 그 정보들이 표피적이고 선정적이고, 심지어 자극적이라는 거예요. 블로거들이나 유튜버들은 고뇌에빠진 사람들을 유혹해 조회 수를 높이려고 하는 거죠.

게임이라는 말의 어원 아세요? 파스칼의 《팡세》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나와요. 프랑스에서 근대사회가 발달하고 도시에 부르주아 귀족들이 많이 생기잖아요. 파스칼이 살던 17세기에 상류층 계급의 수가 늘면서, 지금 골프 치는 것과 비슷하게, 나는 귀족입네 하면서 여우 사냥을 즐겼어요. 그런데 여우가 한계가 있잖아요. 여우를 너무 많이 잡아서 거의 전멸하는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여우 가죽 옷을 입힌 농노의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았어요. 그리고는 아이들을 사냥하는 거죠. 그것을 ‘게임‘이라고 한 거예요. ‘사냥감‘이라는 뜻으로요. 농노의 아이들을 출발시키고 개를 풀어서 사냥을 했어요. 그러면 아이의 피가 묻은 여우 가죽을 가지고오는 거예요. 피 흘리며 죽어간 아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요.

앞 세대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황망한 경우를 많이 겪을 수 있어요. 그러니 기성세대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젊은 세대에게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죠. 역사를 꼰대라고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역사도 있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도 있어요. 선생이라는 존재도 그런 거죠.

우리는 기계만큼 합리적이고 정확하지 않구나, 결국 기계만이 전문가가 되고 우리는 아무리노력해도 전문가가 될 수 없구나, 결국 기계가 우리를 대신하겠구나, 뭐 이런 절망감을 갖는 거예요. 인간은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돼요. 하나의 분야만 잘하고 수많은 분야에 미숙하다면 우리는 불구가되는 거예요. 컴퓨터만 잘 다루고 다른 일, 예를 들어 음악 감상이나연애, 음식 만들기를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매력 없는 사람인가요. 알파고는 바둑 전문가의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에요.
바둑 전문가하고 싸우고 있는데, 답이 없는 거죠.

전문가가 많아지는 사회에서 노숙자가 생겨요. 어떤 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 어떤 전문가가 있다고 해보죠. 이사람은 해고되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어요. 그러니 노숙자가 되는 거예요. 옛날 농경사회에는 노숙자가 나온다는 건 불가능했죠. 모든 일을 두루두루 잘했으니까요. 대도시 생활에서 노숙자가나온단 말이에요.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기능적 절름발이가되는 거예요.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효율적인 착취를 위해 우리를유혹해요. 인간적 불구, 즉 전문가가 되면 더 부유해진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체제의 작은 부품이 되려고 해요. 그래서 대학에들어가고, 전공을 선택하고, 학위를 받는 거잖아요. 분업의 논리는굉장히 위험한 논리예요. 이것을 어떻게 없앨까, 하는 것도 우리가고민해봐야 돼요.

뭐든 할 수 있죠, 열심히 하면. 그런데 나머지는 포기해야 되는거예요. 자기를 부품화하면 그 부품이 꽂혀 있는 전체에 대해서는보수적일 수밖에 없죠. 그 전체가 변한다든가, 아니면 버려지거나하면, 그에 따라 부품도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요. 전문가들, 나아가직장인들이 근본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분업에 길들여진 사람이 분업 체계를 옹호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 맞춰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요. 나머지 것을 버리고 전문화되면 될수록 너는 회사에 잘 팔릴 거야라고 강요하고그렇게 믿으면서 말이죠.

보수는 선거 때가 되면 마치 배우자에게 가짜 반지를 사가지고 와서 ‘여보 사랑해, 앞으로 잘해봅시다‘ 하는 식인데, 처음에는 속았다가 나중에 알고는 등을 돌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진보는 ‘여보,명품 가방 하나 갖고 싶어‘ 하면 ‘당신 속물이야? 세상이 이런데명품 얘기를 해‘ 하고 혼을 내요. 처음에는 맞는 말이어서 주눅들었는데, 알고보면 자기는 명품시계 차고 다니고, 비싼 음식 먹고다니는 식이에요.

김남주 시인이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말한 것처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어요.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에요. 그러니까 일제 때 면서기를 한 ‘어떤 관료‘가 미군정 때는 군주사, 자유당 시절엔도청과장, 공화당 시절엔 서기관을 하고, 민정당 시절에 청백리상을받을 수 있는 거죠. 그 관료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근면 성실했기 때문이에요.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와 다름없었고 근면 성실한 관료였어요.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죄는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말해요.
사유한다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건데, 그게 부재한 거예요. 그들은 한 번도 공복이었던 적이 없었던 거예요.

반대로 우리 시대 노예는 다르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본이나 국가가 원하는노동력이 되고자 하니까요. 과거 강제로 사로잡혀 노예가 된 사람의목에는 나무판이 달렸죠. 그리고는 노예시장에 끌려 나왔어요. 그나무판을 노예의 목에 건 것도, 그 나무판에 노예의 특징을 적은 것도 모두 노예 주인, 혹은 노예 상인이었어요.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다르죠. 자신의 목에 스스로 나무판을 걸고,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기록하니까요. 바로 이것이 스펙, 즉 스페시피케이션 specification이에요. 상품 명세서죠.

미성숙한 사람은 자신만 생각하죠. 나의 고통, 나의 불리함, 나의 불행, 나의 고독, 그리고 나의 배고픔만이 중요한 거예요. 반면 성숙한 사람은 타인의 불행, 타인의외로움, 타인의 헐벗음, 한마디로 타인의 고통도 아프게 느껴요.

‘강남좌파‘, ‘청와대 좌파‘, 혹은 ‘여의도 좌파‘의 본질은 ‘좌파‘에있는 것이 아니라, ‘강남‘이나 ‘청와대‘나 ‘여의도‘에 있어요. 그들은명령하는 소수 지배계급, 무위도식해도 부를 불릴 수 있는 지주나자본계급의 자리를 욕망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그들이 표방한 ‘좌파‘나 ‘진보‘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죠.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모든 권력을 피지배자나 노동계급에게 되돌려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어쩌면 ‘강남좌파‘라는 표현보다’진보팔이‘라는 말이 더 맞을 듯해요. 국민이나 노동계급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기 자신이나자기 가족이었으니까요. 진보를 팔아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던 거예요.

중요한 것은 ‘왕‘과 ‘지주‘, ‘자본가‘ 그 자체에대해 숙고하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나쁜 왕이 있다고 해보죠. 국민들을 함부로 동원하고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왕이에요. 그런데 만약 그 왕이 왕위에 있지 않고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필부로 살고 있다고 해보세요. 그 사람이 어떻게 강제 동원과 수탈을 자행할 수 있겠어요.(웃음) 그러니까 형식이나 구조가 중요한 거예요. 이 점에서 좋은 왕은 나쁜 왕보다 국민들에게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죠. ‘좋음‘이 ‘왕‘이라는 구조적 부정의, 즉누군가 폭력 수단, 정치 수단, 나아가 상징 수단을 독점하는 억압구조를 희석시키니까요.

최악은 세상이 막연히 좋아질 거라고생각하는거예요. 두 번째는 절망하는거고,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분노하고 바꿔버리는거예요. 내가사는세상이 이렇게 더럽게똥을 싸질러 놓았는데, 아무도 내 앞에 있는똥을 치워주지 않아요. 스스로 치워야 돼요.

산을 비유로 들죠. 정상이 약자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강자에복종하지 않는 자유인을 비유할 수 있다면, 산 밑은 권력과 자본에휘둘리는 사람들에 비유될 수 있어요. 옛날에는 산 꼭대기에 있느냐, 산 밑에 있느냐의 양자택일로 사람들을 평가했어요. 지금은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긍정해요. 밑에 있지만 산을 지향하고 있으면 산에 있는 사람이랑 진배가 없다고 생각해요. 잘 나들어가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빨리 안 된다고 조바심을 낸 거죠. 지금은 천천히, 우리 다 죽으면 어때, 천천히 자유인이 되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되지! 이런 식의 여유가 생긴 거죠. 지금은 강연을 할때나 집필을 할 때 별다른 조바심이 없어요. 제 말이나 글을 일종의지뢰라고 생각하니까요. 청중들과 독자들의 마음에 지뢰를 매설하는 거죠. 언젠가 그들이 살아가면서 자극을 받아 터지기를 기다리는거예요.

비트겐슈타인이나 나가르주나는 결론을 내지 않아요. 이거야,
하고 말하지 않아요. 하나 하나 엑스만 쳐요. 지적으로 날카롭게만드는 거죠. 그런데 바닥에는 그 정신이 있는 거예요. 클리어clear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클리어는 스마트하다는 것과 달라요. 클리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희론이 사라지는 상태, 선글라스 같은 잘못된 편견, 잘못된 생각, 이데올로그적인 생각, 잘못 배운 것들이 사라져서있는 그대로 볼 때. 높은 산에 올라가서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 쪽으로 구름이 끼어 있잖아요. 그런데 일순간에 확 걷힐 때가 있어요.

바위에 앉아 지친 몸을 달랠 때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수줍게 피어오른 들꽃들도, 인간의 시선을피해 조심스레 움직이는 고양이들도, 코로나19 창궐로 이제 마스크마저 익숙해져버려 서글픈 놀이방 아이들도…………. 그러나 내 눈에 가장 선명하게 들어온 것은 조심조심 느릿느릿 산책하는 할아버지나할머니들이었다. 일부러 그리 걸으시는 것이 아니다. 근육량이 줄어들고 관절이 불편해서다. 그분들도 나처럼 걷는 것이 힘들다. 횡단보도의 깜빡거리는 신호등도 그분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젊은이들같으면 가볍게 건널 수 있는 거리도 웬만하면 피한다. 걷기가 힘드니 다음 신호를 기다릴 생각이신 거다. 차도에서 보도로 올라가는10센티미터 정도의 턱도 그분들은 정말 암벽을 오르는 듯 너무 힘들게 오르신다. 이때 나는 피식 웃곤 했다. 내 몸 상태가 그분들과 별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철학자로서는 다행스런 자각이다. 나이 든다는 것, 노쇠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런 몸으로 걷고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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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들어보면 별일 아닐지도 모르겠다. 막상 해보면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돈이 많아야 한다거나 힘이 세야만 한다는 등의자격도 필요치 않다. 오래 때를 기다리거나 애써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각자 나름 할 수있겠다.

하지만 여기, 작은 반전이 있다. 인간이란 때론 불편함이나 귀찮음을 뛰어넘어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존재라는 것. 만약 이 단어‘가 마음속에 있다면 말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스핑크스의짓궂은 수수께끼를 닮은 저 문장의 비밀을 활짝 열어 주는한 단어는....
일찍이 송창식 아저씨가 절절히 목놓아 부르신 노랫말로 대신해본다.
싸랑이야아아....
사랑이야아아아아아

‘베어 그릴스‘라는 영국인 탐험가가 있다. 그는 극한 환경 속에서 인간이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야생 동물은 물론 곤충, 애벌레를잡아먹거나 동물의 배설물 속까지 뒤져 끼니를 해결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이 ‘인간의 음식과 아닌 것‘이라고 그어 놓은선도 결국 정답은 아니구나 싶었다. 창의성을 극도로 발휘하며 ‘정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거부할 때 인간의 생존력도 극한까지 올라간다는 걸 그는 몸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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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을 견디는 방법 중 하나는 나만의 ‘주기설‘을 믿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는 나름대로 주기랄 게 있어서 이 주기에 따라 인생에 새로운 기회가 온다고 믿는 식이었다. 내가 믿던 것은 ‘2.5년 주기설‘이었는데, 2.5년마다 내인생이 갱신되면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물론기존에 그런 가설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었고 내 멋대로믿은 내 삶에 대한 미신적인 태도였다.

아이는 딜레마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세상에 이것 아니면저것이라는 이분법만 있는 게 아니라, 제3의 방법이 있다는걸 알아간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 대부분이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수정해서 할지가 중요하다는 걸 배운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밥을 먹어야 한다면, 아이스크림을 먹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밥 먹고 나서 먹으면 된다는걸 납득하고 이해한다. 삶의 거의 모든 욕망이라는 것은 타협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어쩌면 절망의 시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미쳐버린 세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간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모든 시대에는 저마다의 절망이 있으며, 모든 인생에는 어딘지 미친 구석이 있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그런 시대나 사회를 자기만의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통과해야만 한다. 그럴 때 자신을 지켜주는 건 그 모든 것을 대하는 자기만의 기준과 태도일 거라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살아오면서 나 또한 늘 ‘너는 잘못 살고 있어‘라고 속삭이는 세상의 말들을 들어왔다. 때로 그런 목소리는 누군가가 직접 내게 건네는 목소리였고, 때로는 내면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목소리가 옳을 때도 있었지만, 우리 시대를 건너기 위해서는 그 목소리에 굴복하기보다는 싸워야 할 일이 여전히 더 많다고 믿는다. 이 책이 그런 당신의 싸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본다.

인생이란 오직 자기만의 이익과 행복, 편안함을 좇는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충분한 통념이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티끌만 한 행복도 타인을 위해 양보할 생각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 인생 중 아주 일부에라도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이 아닌 다른 의미를 둘 여지가 있다면, 그 여지를 미래의 아이들에게 열어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후 세대의 희생에 발 딛고 있기때문이다. 생태적 위기, 부동산 버블현상, 양극화, 국가 부채증가, 각종 연금이나 기금의 고갈, 차별과 혐오의 문화 같은것들은 모두 후대에 미뤄둔 폭탄과 같다.

살아가면서 의무가 하나 있다면 바로 우리가 저질러놓은이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가지는게 아닐까 싶다. 그들을 문 앞에서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나는 그것이 삶에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 중 하나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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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nie 2023-01-26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헐..인생이란 오직 자기만의 이익과 행복, 편안함을 좇는것이 통념이 되었다니...개탄할 노릇이네요. 저렇게 살면 남는게 하나도 없는데...자기의 이익만을 좇아서도 안되고 행복이 최우선 목표가 아닙니다. 행복은 부산물이지요. 그리고 편안함을 쫓는것이 최고선인줄 알고 살았는데 그게 독이었음을 50이 넘어서 깨달았는데...이런것이 통념이라...이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습니다.
 

사랑과 자유가 왜 같은 것인지 사랑을 해보면 알아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아는 거죠. 부모님 말을잘 들었던 사람이 맹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알고 살았는데, 어느날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구속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데 일정 정도 부자유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거예요. 어쨌든 사랑을 하면, 8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하는 규칙을 어기기 시작해요. 그리고 독립을 하려고 해요.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가능한 거예요. 자유로운 주체로서 상대방을 만나고 싶은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생기면 내가 자유로운 상태인지 자유롭지 않은 상태인지를 알아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하고 싶은데 생계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1, 2년간 모은 돈을 배낭여행 하는 한두 달에 쏟아붓잖아요.

자기 자신을 위대하게 보지 않으면 돼요. 스스로 배워야 되고, 세상에 대해서 평가 내리고 생각한 대로 떠들고 다니지 말아야 되고,
자신이 항상 작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그 태도만 유지하면 돼요.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고맙게 여기는 태도는 기본이고요. 벽돌을 올리는 사람의 힘 자체가 얼마나 센 것인지를 알아야해요. 이삿짐 나르는 사람을 돈 주고 부릴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이 없다면 이사를 할 수 있겠어요?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냉장고 하나도 혼자서 못 들어요.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착취하는 구조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있어야죠. ‘고생하셨어요‘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돼요. 내가 돈을 주고 배달을 시키니까 저 사람

말이나 텍스트에 사로잡히면 안돼요.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예요. 문자로 쓰인것만이 전부가아니잖아요. 이 세상에서가장 어려운 책은 배우지 못한 어머니아버지라는 책이고, 우리는 그것을 잘읽어내야 해요.

그래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화낼 때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대학까지 나왔고, 배웠다는 놈이 그거 가지고 화를 내고, 역정을 내고, 어미를 구박하고 타박하냐?‘ 진짜 맞는 얘기예요. 대학 가서 잘못 배운 거예요. 배웠다는 것은 표현을 잘 읽어내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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