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01 | 202 | 20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양승권 지음 / 페이퍼로드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퀴가 제대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바킷살이 바퀴 가운데로모이는 곳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집에는 창문이있어야 빛을 받아들일 수 있고 환기시킬 수 있다. 머리가 복잡한사람들은 방 안의 가구를 최소한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이는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누군가가 나에 대해 비판을 할 때 곧바로 반응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배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모욕에 매번 반응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잠시 멈추거나 비우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 역설적인 농담이지만 "밥을 굶으면 기분이 좋아 죽는다"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니체의 능동적 망각‘이나 장자의 ‘잡념을 버리고 무아의경지에 들어선 상태는 명상과 비슷하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제2장 자기실현’람들은 생기를 되찾고자 정기적으로 은둔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무의식의 자원을 활용한다. 명상은 사회적 번잡함을 약화시키고 내 속에 잠재해 있는 순수한 생명력을 불러올 기회다.

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잘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전진 밖에 모르는삶은 사람을 웃지 못하게 한다. ‘물러남‘은 다시금 생기를 되찾기 위한 ‘치유‘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잠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의 깊은 내면에 침잠하면 새로운 경험이 정신속에 들어와 현실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균형을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퇴화‘는 단지 여러 가지 문제로부터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새로운 힘을찾아낼 기회를 가지라는 뜻이다. 이 새로운 힘은 현실을 발전적으로 재구성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세속적인 번잡함을 비워내고 자신의 깊은 내면에 고요하게 침잠하면, 현실은 나의 참모습을 북돋아 주는 방향으로 재조정된다.

이란에서는화려한 무늬로 촘촘하게 짠 카펫에 일부러 흠을 하나 남겨놓는다고 한다. 이것을 ‘페르시아의 흠‘ 이라고 부른다. 또한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완벽한 구슬들 틈에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는다고 한다. 전혀 흠결이 없는 목걸이에는 영혼이 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돌담을 살펴보면, 돌과 돌 사이를 촘촘히 메우지 않고 일부러 엉성하게 빈틈을 둔채 그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게 한다. 겉으로는 금방 무너질 것같지만 이 돌담은 여간한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풍연심 風憐心’이라는 말이 있다. "바람은 마음을 부러워한다"라는 뜻으로, 『장자』의 「추수」에 나오는 우화다. 옛날 전설적인 동물 중에 발이 하나밖에 없는 동물이 있었다. 이 동물은 발리 100여 개나 되는 지네를 매우 부러워했다. 그 지네에게도가장 부러워하는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발이 없는 뱀이었다.
발이 없어도 잘 돌아다니는 뱀이 부러웠던 것이다. 반면 뱀은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는 바람을 부러워했다. 그저 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에게도부러워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가는눈이었다. 그런데 이런 눈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으니,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음이었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내가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모르는 채, 그저 자신에겐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타인을 부러워한다. 살아가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부러움’에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인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은 SNS로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모양인데 난 그게 못마땅해요. 외로움은 사람만이 느끼는 일종의 천형 같은 건데, 그걸 감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발칙해요. 감히 휴대폰 하나로외로움이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가소로워요.
외로움이 얼마나 소중한 감정인데 말이에요. 나는 거짓으로 외로움을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 ‘한현우의 커튼 콜: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는 인간 김창완‘, 「조선일보 (2012. 5. 5.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신은 하나의 덫이지만, 그 덫은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깊게 만들어 주고, 동시에 가볍게 만들어 줄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온 힘을 바치는 일은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파괴하는 일이 되어선 안 됩니다. 헌신은 먼 훗날 언젠가 현재의 자신을 돌아봤을 때, 나를 잠시 포기하는 이 시간이언젠가 더 큰 나와 만나는 길이었음을 확신하는 전망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밝고도 기쁜 약속의 목소리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을 학대하고 파괴하는 데까지 몰아붙이는 헌신은, 이미 헌신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분노의 표출에 가까울 뿐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모두 헌신이라는 말의 무게감, 그 말을 실천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한다면,
언어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언어를 배반할 뿐입니다. 헌신은 세상에서 지극히 오염되기 쉬운 관념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가치를 품고 있는 미덕이라 믿고 있어요.
오직 그것이 한 사람을 무겁게 만들지 않을 때에만, 한 사람의영혼을 공기처럼 가볍게 만들어줄 수 있을 때에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는 설령 내가 좀 더 아프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가를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착한 마음을 믿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크리스티안 생제르는 "타인은 나를 가둔 덫으로부터나를 해방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헌신이란 어떤 순간 나에게소중한 타인을 위하여 나를 자발적으로 덫에 가두어 두는 일이며, 그것이 더 넓은 차원에서 나를 해방시키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믿는 미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전히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놀라운 측면인것 같습니다. 무언가가 끼어드는 바로 그 순간에 으레 생겨나게 마련인 저 거칠고 조악한 면모들이, 혹은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방해물처럼 여겨지던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 안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계기들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그 반대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삶이 지니고 있는 가장 뛰어난 능력일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악에 물든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악은 어디에서나 찾아오고, 또 어디로든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마법이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매 순간 서로를 보며 경악해야만 했을지도모릅니다. 그랬다면 모두가 이미 "악한 상태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하나의 사실, 즉 우리 모두가 한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만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비밀입니다. 악함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종잡을 수 없는 법이며, 따라서 누구도 무언가를 가리켜 악에 물든 "상태에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려는 순간, 거기에는 이미 더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가 거쳐 왔던 경험들을또 저는 삶의 진정한 진일보는 결코 급작스럽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해 삶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일보의 순간이란 늘 소리 없이 나타나는 법이며, 저 자신이 고요하면서도 절실하게, 지난날 제가 가장 내밀한 의미에서 스스로의 과제로 삼았던 여러 사물들에 천착할 때 비로소 다가오는 셈입니다.

"만약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우리로서는 끝내 붙잡을 수없는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면,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만약 우리가 결코 사랑에 이를 수 없고, 확신을 가지고 결정을 내릴 수 없으며, 죽음 앞에 무력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릴케의 모든 작품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시도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그의 답변은 언제나 명료합니다. 모든 삶은 (릴케의 초기작에 제시된 표현을 빌자면) "살아지는 것이며, 따라서 삶은 숙고와 성찰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되거나 측량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릴케가1915년 11월 8일에 로테 헤프너Lotte Hepner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인류가 지난 수천 년 동안 몰두해 왔던 질문에 대한 간결한 답변입니다. 그러나 릴케는 한편으로, 그토록 간단한 답변에조차 다다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여러 어려움들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며, 의식과 성찰 없이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데에 관심을 쏟고, 개개의 상황이나 감정에 굴복하며, 무언가가 일어나게끔 놓아두기 보다는 우리가 마주하는 사물과 사람들에 일일이 반응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삶이 아닐까요?
여러 보잘것없는, 불안한, 작디작은, 그리고 부끄러운 하나하나가 마지막에가서는 하나의 커다란 전체로 거듭나는 것 말입니다. 삶이란 아마 우리가 이해하거나 의도할 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가능성과 실패가 한데 뒤섞여 만들어 내는무언가일 것입니다."

릴케는 1913년 12월 9일 시도니 나드헤르니 폰 보루틴Sidonie Nádhermy von Boru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삶이 드러내는 저 이해 불가능성을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일종의 거리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삶이란 언제나 계속해서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마련이고, 또한 이따금 우리가 삶을 이해했다고 착각할 때마다, 삶은 오히려 그 거리를 더욱 벌리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던 모든 것이 별안간 멈추고 틀어지는 바로 그때, 우리는 삶 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들어섰다는 것을, 이질적인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릴케가 이해하고자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삶의 이중성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삶은우리 앞에 완전히 열린 채 주어져 있으며, 그저 그것을 살아가는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완전한 열림 속에서, 삶은 도리어 매 순간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각각의 순간속에서 삶이 제공하는 완전히 새롭고 생경한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붙들고 있었던 허망한 이해를 과감히 던져 버릴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01 | 202 | 20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