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대상과 나 사이의, 사랑과 비슷한 상호작용이다. 내가 준비되었을 때에만 찾아오는 관계 맺음이다. 길들여야 할 것은 여우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길들인 후에야 아름다움은 나를 찾아온다.
고등학교 학기 말, 미술 선생님이 내 스케치북을 찬찬히 살펴보신 적이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장 한 장 넘기시고는, "아이쿠, 도저히 안 되겠구나. 스케치북 도로 가져가렴."
당연히 미술 실기 점수는 형편없었다. 그림은 지금도 전혀 못 그린다. 내 맘에 드는 그림을 찾아 감탄할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을갖추게 된 것은 아내와의 만남 덕분이다. 그림 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취미를 함께하고자,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서양미술사』를 밑줄 그어 가며 공부하듯 읽었고, 인상파 화가를 중심으로 화보집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아니 글쎄, 내게도 그림을 보는 취향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 그림이라고 다 같은 그림이 아니었다. 내 맘에 들어 넋 놓고 계속 보게되는 그림들도, 다른 이가 아무리 명화라 해도, 내게는 영 별로인그림들도 생겼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아름다움은 결국 누적된 체험의 결과다. 준비된 사람만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각자의 누적된 체험이 다르니, 아름다움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