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머메쉬는 부의 증가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시간 부족의 고통도 늘어난다고 확인했다. 물론 근무와 가사에 들어가는 시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아무래도 벌이가 늘어날수록 시간은 귀해지는 모양이라고 해머메쉬는 썼다. "사람들이 갈수록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불평은 부분적으로 볼 때 쓸 수 있는 시간에 비해 너무많은 돈을 가졌기 때문에 비롯되는 현상이다." 수입의 증가와 더불어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충족시킬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사람들은 시간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이다. "이런 불평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여피족(도시에 사는 젊고 세련된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 - 옮긴이)의 배부른 푸념쯤으로 폄하할지 하는 것은 태도에 달린 문제이다." 해머메쉬의 신랄한 지적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기존의 것을 얕잡아보는 성향도 있다. 새로운 사치가 아무리 흥분이 될지라도, 일단 성공으로 마감한 도전이 주는 감격이 어마어마할지라도...그 어떤 행복이든 우리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심드렁해진다. 우리의 상태를 끊임없이 새롭게 바꾸어가는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허리에 천 쪼가리나 두르고 한 줌의 쌀로하루를 연명하는 금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항상 "더 많이"를 외치는 치명적인 주장을 꿰뚫어보고 다양한 조건을내건 사회의 기만적인 자유 약속에 기대지 않는 게 많은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새겨두자. 우리 인간은 항상 새로운 욕구를 찾아나서는존재인 까닭에 이 새로움의 지배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일만큼은 없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바로 그래서 휴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도 있으리라. 우리의 욕심(자발적인 것이든 설득당한 것이든)의 꽁무니를 끊임없이 쫓아다니기만 할 게 아니라, 때로는 멈추어 서서 순간의 행복을즐길 줄도 알아야만 하는 게 휴식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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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탈리아의 심리학자들이 티롤 남부 지방 산촌 농민들의생활 습관을 연구하고 놀라운 발견을 했다. 농부들을 상대로 일과 여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묻자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냐는답이 돌아온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농부들은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었다. 젖소의 젖을 짰으며, 밭의 잡초를 뽑아 주었고, 사이사이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저녁이면 아코디언 연주를 즐겼다. 뭐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고 무엇이 놀이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된다면 무엇을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산골 사람들은 "지금처럼 똑같이!" 하고 대답했다. 우유를 짜고 풀을 베며 옛날이야기와 음악을 즐기겠노라는 한가로운 표정으로 말이다.

"시간 부족이라는 느낌은 시간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갖느냐에 달린 것이다. 과학 전문 기자 슈테판 클라인stefanklein이 자신의 책 《시간zeit)에서 한 말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신의 삶이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게 분명하다. 자신이 무얼 해야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은 그만큼 덜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더욱 건강했다. 얼마나 많은 일을 어느 정도 시간 안에 처리해야 좋은지하는 물음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업무량의 정도보다는 스스로결정할 수 없다는 게 더욱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근심 걱정에 시달리며 위궤양을 앓는 사람은 항상 바쁜 경영자가 아니라, 쉬지도 않고 이러저런 지시를 해대는 상관에게 시달림을 받는 부하 직원이었다.

자신의 성공 비결을 털어놓으며 산장 주인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등산로를 보세요." 그가 말문을 열며 계곡 아래로 이어지는돌투성이의 길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차를 타고 산장으로 오게 만들려면 벌써 포장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랬다면 산장의 마법은 씻은듯 사라졌으리라. "내 집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면 두 시간의 산행은피할 수가 없소. 대기업 총수가 두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면, 이곳이 낙원처럼 보일 것이고 와인 한 모금 한 모금이 시구절과 같을 거요."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산장 주인에게서 그동안 까맣게 잊었던 여유로움을 되찾고 배고픔과 갈증을 진정으로 해소하는 느낌을 갖는것이다. 바로 그래서 산장 주인의 지인들은 거듭 이곳을 찾는다. "만약 내가 길을 닦아 놓았더라면, 내 치즈 맛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을것이며 내 와인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해댔겠죠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매 식사 전에 두 시간에 걸친 산행을 해야만한다거나 해도 좋은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흐트러지지 않는 주의력을 발휘하는 기술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이를 위해필요한 것은 오직 사고방식의 철저한 전환이다. 항상 더 많이 하고 욕심을 내는 대신, 행복이란 무릇 바로 이 절제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 정말 제대로 맛볼 수 있는가 하는문제는 그 맛봄의 대상에 달린 게 아니다. 오히려 온전히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좌우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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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과 관련된 개념의 차이도 있다. 독일어로 ‘여가는 ‘프라이차이트Freizeit‘다. 우리에게 ‘여가‘는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이라는 뜻이강하다. 그러나 독일어의 프라이차이트는 ‘남는 시간이 아니다. 자유시간이다.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란 이야기다.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있다. 우리에게 여가나 휴식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ree from ‘를 뜻하는 소극적 자유에 가깝다. 그러나 독일의 프라이차이트는 무엇을 향한 자유ree to‘인 적극적 자유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휴식은 적극적 자유의 시간이 된다. 추구하는 삶의 목적과 휴식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이야기다. 휴식이 진정한 삶의 힘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휴식을 누리는 기술은 자유 시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린 게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휴식이란 밀도 있는 순간을말한다. 이런 순간은 시간적으로 몇 시간 혹은 며칠까지 확장될 수있다. 단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여성 사회학자 노보트니의 말이다. 그리고 이 ‘자신만의 시간’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밀도 있는 대화, 음악을 즐기며 맛보는 기쁨, 심지어 긴장감에 넘쳐나는 사업 프로젝트 역시 ‘자신만의 소중한 시간이되어준다. 놀이를 하듯 즐거울 수도, 한껏 심각할 수도 있으며, 목적을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지 탐색하는 것도 ‘자신만의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나와 시간의 일체감이다. "휴식은 나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 사이의 일치14를 뜻한다." 노보트니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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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사랑이 은총도 환상도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됨의 행위일 것이며,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의지와 지혜와 선의로써 맞춰나가야 하는 상태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나누었던 친밀감, 서로를 부끄러움 없이 온전히
신뢰했던" 경험은 우리에게 특별한 행복을 안겨주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일종의 구원을 선사해준다. 나아가 우리가 오랫동안 갈구해온 내적 평화를 맛보게 해준다.

사랑은 복합적인 현상이다. 사랑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힘이자행동이자 결정이자 선물이기도 하다. 불행 또는 징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사랑 때문에 삶의 위기가 올 수 있고, 삶이 불안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안의 시기를 통과할 때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미국의 작가 존 윌리엄스는 그의 소설 《스토너》의 주인공으로하여금 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젊은 시절윌리엄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이를 수 있는 완벽한 존재상태라고 여겼다. 기성세대가 된 후에는 사랑이란 즐거운불신, 친숙한 경멸, 당황스러운 동경으로 다가가야 하는 거짓 총교의 천국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제 그는 사랑이 은총도 환상도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됨의 행위일 것이며,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의지와 지혜와 선의로써 맞춰나가야 하는 상태일 것이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에서 이런 시간 초월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표현한다.
"윌리엄은 그녀가 예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적잖이 충격을 받는 자기 자신에게 자못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기와 그녀가 사귀기 전에는 마치 둘 모두 이 세상에 없었던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독특한 시간 초월의 경험에서 떨어져나온 뒤에는 꾸준히친밀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된다. 사랑이 인간 본연의 고독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한다는점을 인식하는 것도 과제 중 하나다. 인간은 어차피 세상에서 어느 만큼은 홀로서기를 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슷한 기본 욕구를 품고 있지만, 서로 완전히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나 다른 존재다.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사실, 이런 신체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결정, 다른 생각, 다른 가치판단을 하게 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한다.

있는 그대로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는 현재에이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 자연의 힘, 도와주는 사람들에대한 ‘신뢰‘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연결되며, 새로운 것에대한 ‘희망‘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사랑‘의 능력은 성공적인관계를 가능하게 하며, 그 관계 속에서 우리 모두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나아간다. 우리 대부분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몇몇 우회로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단순한 진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은 ‘생명력’, 즉 살아 있음을 향한 동경을 바탕으로 새로워지고 발전해나가는 것이라는 진리를말이다. 하이테크 의학을 탄생시킨 기술문명뿐 아니라 더 높은 존재의 힘을 신뢰하는 문화 역시 어마어마한 생명력에 의존해 있다.
삶의 아주 불안한 시기에도 본능적인 생명력이 우리를 지탱하게한다는 것을 세포 깊숙이까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물결을 거슬러다투지 않고 물결과 함께 헤엄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를 두고 "열두 세대의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 연대를 따지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20퍼센트가 이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실제적인 상상력을 부추긴다. 즉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고, 뉴턴이 자연법칙을 생각하고, 칸트가 범주론을 확립하고, 프랑스혁명이 세상을 휩쓸고, 괴테가 《파우스트》를 쓰고, 2차 세계대전 때 군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들을 파괴하고 원자폭탄이고안되고, 디지털 시대가 시작되는 동안, 라파엘로의 성모는 벌거벗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담담하고 흔들림 없이 세상으로 들어간다고 말이다. 모성애를 보여주는 원초적 장면이라 할까. "가난하고늙은 여인네들, 유럽의 황제들, 대학생들, 대서양을 횡단해온 백만장자들, 교황들, 러시아 군주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 순결한 처녀들과 매춘부들이 이 그림을 보았고, 장군들, 도둑들, 천재들, 방직공들, 전투비행사들, 교사들, 선인과 악인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
마리아와 예수의 슬프면서도 단호한 시선은 마치 그들이 세상의상태를 잘 알고 있으며 기꺼이 세상을 향해 자신들을 내줄 준비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렇듯 시대를 초월한 그림들의 아름다움과 담담함, 섬세함은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도 인간의실존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역설의 철학: 고슴도치의 우아함

혼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과 절망이 종종은 서로 한 뼘 거리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은 정말로 다채로운빛과 어둠, 순간과 영원으로 짜여져 있음을 잊지 않게 한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 뮈리엘 바르베리는 자신의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그런 순간을 묘사한다. 부유한 가정의 영리한 소녀인2세의 팔로마는 그녀의 철학 친구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수위 아줌마 르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난생처음으로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배를 주먹으로 세게 맞은 듯, 숨을쉴 수가 없었다. 가슴은 푸딩처럼 흐물흐물해졌고, 배는 완전히으깨졌다." 이런 상태에서 팔로마는 그때까지 그냥 무심코 내뱉곤했던 inever‘라는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결국 우리는무슨 일이 일어나는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살아간하지만 사랑하다.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할 일은 없을 것처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never라는 말이 정말로 무슨의미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외롭고, 아프고, 정말안 좋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너무나 힘이 든다."

그러고 나서 뭔가가 일어난다. 사실은 아주 소소한 일이다. 그러나 소소한 일 중의 하나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팔로마가 세상을 떠난 르네 아줌마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가쿠로와 함께 아파트 안뜰을 지나는데, 갑자기 누가 에리크 사티의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더구나 영혼의 친구가 병원의 냉동실에 누워 있는데 어떻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갑자기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햇살이 우리의 얼굴을 비추었고, 우리는 위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르네도 이 순간을 좋아했을거야. 가쿠로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왜?
내가 오늘 저녁 흐물흐물해진 가슴과 배로 생각해보니 아마도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절망 속에몇몇 아름다운 순간도 있는 것. 그런 순간에 시간은 더 이상 여느때와 같은 시간이 아니다. 마치 음표들이 시간 속에서 틈새를 열어주는 것처럼, 일종의 멈춤을, 이곳 속의 다른 곳을, ‘never‘ 속의always‘를 열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시간 속의 이런 아주 작은 틈을 거룩한순간 또는 (신의 존재를 느끼는) 신비한 순간이라 부른다. 미국의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그런 순간을 신 없는 종교 체험이라 부른다. 드워킨은 종교성을 특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보다 더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그래서 스스로를 종교적 무신론자라 일컫는다.

아름다움은 사랑처럼 시야에 가려진 시간의 덮개에 그물코를내어 삶을 한순간 다른 빛깔로 빛나게 한다. 카리미 같은 신앙인이나 드워킨 같은 종교적 무신론자들은 모두 이런 초월의 형식을경험한다. 그러나 never‘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이런 ‘틈새‘가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지 못한다. 영원의 틈새는 유한성 앞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준다.
시간과 무한은 서로 호환될 수 없다. 이 둘은 서로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질병으로 자기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난 뒤, 그 친구는 내게 이렇게 써보냈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슬픈 순간이었다. 그러나 가장 심오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그가 직장에 복귀했을 때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직장에서는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에서 슬퍼하는 팔로마는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수위 아줌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르네, 걱정하지 마세요.난 자살을 한다든가, 불을 낸다든가 하지 않아요. 난 아줌마를 위해 앞으로‘never‘ 속의 ‘always‘를 추구할 거예요. 이 세상의 아름다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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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도, 여유를 갖고 주위를 넓게둘러보며 균형을 잡는 힘이다. 한 발 물러서면 시야가 넓어진다.
그렇게 넓혀 놓은 공간에 경직된 당위를 해제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어서고, 근시안적으로 보면 엉뚱해 보일지 모를 해결책을 찾아내는 창의성도 들어선다.

『농담』의 희생자 루드비크는 자신의 유머가 오해되어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 쉽게 말해서 복수를 원했다. 하지만결국 깨닫는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유머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야기하는 불편을 호감으로바꾼다. 하지만 유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차이는 오히려증폭된다. 보테로의 비만을 오해하고 지방을 모두 제거하면 세포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어 죽고 만다. 부적절한 유머를 구사하여 유머가 오히려 상대를 무장시킬 때, 잘못이 잊히길 기다리는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루드비크의 적절한 유머는 잘못된 시공간 속에서 운 나쁜사람을 만나 부적절해져 버렸다. 하지만, 대개는 유머 없는 행복보다 유머 있는 불행이 낫다. 유머 없이 사는 것보다 더 불행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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