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찾아보다 알게 된 것. 무엇보다 영적인 측면을 우선시하는 준처럼 당시 작가의 아내도 점성술과 수정구슬점처럼 초월적 세계에 골몰했고 작가는 과학에 의지하며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와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이제껏 이 작품 속에서 작가를 대변하는 인물은 당연히 본인과 비슷한 나이대이며 주인공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람,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작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화자 제러미이리라 생각했는데 버나드 역시 그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작가의 삶과 직결해 이해하는 것은 유치한 독법이라 해도.)
언어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심정적 동의가 필요치 않은 과학/이성의 세계와 달리 영성의 세계는 이해의 단계라는 것이 없이 몸소 체험해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인데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긍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 얕은 경험으로는 그런 것 같다. 한마디로 이러니저러니 해도 후자가 훨씬 알기 어렵다는 것인데,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회고록의 대상이 두 사람 다일지라도 분명 준에게 관심의 무게가 자연히 더 실려 있고, 제러미도 버나드도 그녀를 해석해보려 노력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것이 본인의 아내를 이해해보려 애썼던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퍼진다. 준을 이해하려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리 버나드가 그 '불합리성'을 비난했을지라도 작품의 목적이 그녀를 조롱하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준의 이야기를 그녀가 직접 이야기하게 했기 때문에.
작품의 주된 포인트는 이런 것이 아닌 것 같지만 별수없이 자꾸만 눈이 간다. 이것이 나의 한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20페이지가 조금 되지 않는 머리말 전체와, 작품 말미의 몇 페이지는 최근 읽은 어떤 글보다 더 마음을 때렸다.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두번째 읽었을 때, 두번째보다 세번째가 훨씬 좋았다. 네번째는 더 좋겠지.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다는 정서적인 공허함은 내게 지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애착이 없고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의심 많은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이성적인 호기심이라는 쓸모 있는 회의론으로 무장하거나 모든 주장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서도 아니다. 내게는 대단한 대의도, 항구적인 원칙도, 이렇다 할 근본적인 사상도 없었고, 진심으로, 열렬히 혹은 조용히 옹호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도 없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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