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1
은유 지음 / 제철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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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의 진정한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칙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긴장들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있다. _제럴드 하워드, <편집의 정석>에서 재인용 (11)

데이비드 리비트는 소설 <두루미의 잃어버린 언어>에서 이상적인 편집자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하고 수도실의 수도승처럼 좁은 방에 온종일 앉아 마치 참회하는 자와 같이 엄격하게 글을 읽어내려가는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_제럴드 그로스, <편집의 정석>에서 재인용 (139)

˝사실, 편집자로서 진짜 걱정은 이거예요. 제 욕망이 편협해요. 욕망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어쨌든 전 직장인이고 회사에 돈을 벌어다주어야 하는데, 제가 많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지닌 욕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을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한마디로 욕망이 대중적이지 않은 거죠. 작년에 <출판천재 간키 하루오>라는 책을 읽었어요. 자서전인데, 간키 하루오가 베스트셀러를 많이 낸 편집자 출신 출판사 대표예요. 자기가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서 ‘나는 욕망이 다른 사람과 같다. 내가 읽고 싶은 책, 내 콤플렉스를 보완하고 싶은 욕구를 담아 책을 만들면 다들 산다‘라고 그래요. 이걸 읽고 나니까, 아! 내가 이게 안 되는구나! 싶었어요. 제 욕망은 귀촌 같은 것에 닿아 있고(그는 출판사 입사 전 1년 동안 귀촌 실험을 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라왔고, 남자고, 이성애자고, 크게 소외받을 일 없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런데다 부모님은 제 야망을 키우기보다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잘 만족하는 삶의 미덕을 늘 설파하셨죠. 필연적으로 욕구 자체가 잘 생길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어요.˝ (140)

˝이윤 추구가 1번이에요. (웃음) 다른 사람들 욕망에 충실한 자기계발서 같은 책도 내보고, 또 제가 가진 가치나 정서와 묘한 어긋남이 있는 저자라도 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저자라면 같이 책을 내보고 싶어요. 큰돈을 벌어들일 베스트셀러를 만들겠다기보다는 손해 안 보는 책, 회사에 적절한 이윤을 안겨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고요. 책이 팔려야 저 스스로도 일을 제대로 잘해낸 것 같은 생각에 뿌듯하고, 또 회사에서 직원들이 제대로 급여받고, 복지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 대표나 관리자들 말투와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회사 분위기까지 서늘해지고, 노동은 더 고되어지고. 원하는 책, 정말 만들고 싶은 책을 낼 기회도 축소되니까 이윤 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143)

˝이런 요구가 나오는 건 뭘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실 워딩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본인이 확실한 생각이 없다면 알아서 해주세요, 하면 좋겠어요. 뭘 원하는지 분명하지도 않고 디자이너를 믿지도 않고. 그럴 땐 뿌연 과녁을 맞히는 느낌이 들어요. 가끔 ‘사장님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해요. 그러면 인터넷 서점에서 그 출판사가 낸 책을 훑어보면서 감을 잡조. 가장 어려운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에게 믿음을 주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게 느껴지는 경우예요. 상대를 믿고 가느냐, 상대를 평가하는 자리에 본인은 세워놓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져요. 그리고 시안을 보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게 좋아요. 재시안이야 하면 되니까요. 그렇지만 편집자가 책에 대한 콘셉트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어 있을 때는 디자이너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174-175)

˝제작 기한 맞추는 일은 인간관계가 좌지우지해요. 인쇄소, 제본소와의 관계가 중요하죠. 종이부터 확보하고 인쇄소에서 수정을 얼만큼 빨리 해주느냐가 관건이에요. 일정이 급해서 친분으로 먼저 요청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제작자는 편집자나 디자이너와 달리 이직이 드물어요. 보통의 제작자들이 한 회사에서 5년, 길게는 20년, 30년도 일해요. 새로운 걸 개발하는 부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걸 잘 활용하는 부서라 그런 거 같아요.˝ (196)

˝유럽은 농도계가 있어서 측정한 농도가 허용 범위 안이면 잘 나온 인쇄물로 판단해요. 국내에는 농도계로 재서 이 색깔은 몇 프로, 이 정도면 오케이 하는 스탠더드가 없어요. 디자이너든 편집자든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판단하죠. 진한 색을 좋아하는 분은 진했으면 하고, 흐린 색을 좋아하는 분은 흐리면 잘 나왔다고 하고. 주관적인 부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똑같은 기계에 똑같은 인쇄를 해도, 잘한다 못한다 다르게 생각하죠. 그 부분이 아쉬워서, 코리아 스탠더드 색깔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더라고요. 인쇄소나 제본소에서 일하는 기장님들도 교육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2교대로 일하는 이분들이 교육받으러 나가면 기계가 멈춰요. 교육은 힘들겠구나 생각하죠.˝ (202)

그가 제일 일하기 힘든 편집자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마케팅 방향과 아이디어가 편집자와의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검토서, 콘셉트 회의 자료, 보도자료 등 텍스트 자료는 많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대화 끝에 도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편집자가 말이 없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가끔 책 출간과 동시에 탈진되는 편집자들이 있다. 책이 사고 없이 잘 출간되는 게 중요하니까 전력을 다 쏟고 방전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마케팅은 출간 이후부터 시작된다. 편집자와 함께 만들어야 할 콘텐츠가 줄줄이 남아 있다. ˝100퍼센트 힘을 다 쓰지 말고 마케팅팀과 함께할 10퍼센트는 남겨주길 부탁합니다.˝ (233)

박태근은 출판예비학교 1기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냐 취업이냐의 기로에서 일을 택했다. 그가 볼 때 회사는 하나같이 뭘 파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제일 잘 아는 걸 팔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책이었다. 구매 경험도, 사용 경험도 가장 많았다. (248)

출판사는 그날 귀한 발걸음을 하고 갔고 그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만났지만 그중에 20종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알아서 개척해야 할 책이다. (262)

일을 하다 보면 본인이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책이 출판사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럴 때 직업으로서의 정체성을 편하게 내려두고, 그 책이 나와야 될 이유나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책이 나온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 편하고 후련하겠지만 그 책은 쉽게 말하면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책이다. (265)

˝1인출판사나 출판계 종사자를 다루는 방식이, 뭔가 전체 세계에서 특이한 지형에 있는 사람들, 약간의 독립군, 불리한 위세에서 돌파해내는 무엇처럼 묘사되는 거, 저는 별로거든요. 서점에 가면 제 책이 문학동네 책이랑 똑같이 경쟁을 하잖아요. 불리할 것도 없고 유리할 것도 없죠. 그런데 불리함을 기본 설정값으로 해봐야 정신 건강에 도움이 안 돼요. 저는 큰 데만큼은 잘 못 팝니다만 하실래요? 그래요. 웬만한 사람들은 출판 업계가 불황인 거 다 아니까. 나의 책을 딛고 가라, 얘기하는 거죠.˝ (328-329)

가끔 저자들이 본인의 책이 코난북스에 어울리는가 묻기도 하는데 그런 반응을 보일 때 이렇게 응수한다. ˝당신 책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당신이 시그니처다.˝ ˝당신의 책이 코난북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책이 될 것이다.˝ ˝코난북스에서 드디어 탈피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331)

1인출판사라고 해서 억울함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지 말자. 업계에서 특별히 선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악의를 갖고 대하는 사람도 없다. 지업사가 나한테만 나쁜 종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디자이너가 나한테만 나쁜 표지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서점도 마찬가지다. 1인출판사라도 책이 좋으면 올려주고 아니면 말고다. 코난북스는 규모에 비해서 온라인 서점 노출이나 언론 기사를 잘 받는 편이었는데, 이를 경험하면서 ‘출판계는 놀라울 정도로 악의도 선의도 없는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39)

˝이젠 하루에 책이 50부 나가면 내일은 안 나가겠네 해요. 일부러 감정을 잠재웠어요. 기쁨도 슬픔도 없는 침착한 상태. 혼자 일하다 보면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는데 직작 생활 할 때 내부 정치나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거 때문에 힘들었어요. 지금은 가끔 업계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요즘은 뭐가 잘 나가?‘ ‘부자 됐겠다!‘ 순수하게 일 얘기만 하거든요. 일에 가까운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좋아요.˝ (340)

˝좀 위악적으로 말해서 저는 1인출판사인지 모르는 출판사가 좋은 출판사라고 얘기해요. 특히 제가 만드는 교양, 사회과학 인문서 분야에서는 더 그렇죠. 돌베개 책보다 예쁘게 잘 만들면 되는 거예요. 작년에 1인출판사 선배를 만나서, 잘되시죠? 그랬더니 잘 안 돼, 근데 남들이 잘된다고 그래, 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남들이 볼 때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처음에 이 인터뷰 못 하겠다고 한 게, 남루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독자 입장에서 봤을 때 그냥 잘 만드는 출판사에서 만든 책으로 평바다는 거지, 1인출판사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응원해지 위해서 책을 산다는 건 별로예요. 1인출판사를 스스로 마이너리티화하고 싶지 않아요. 각자 자영업자로서, 생계 면에서, 경영 부분에서 본받을 만한 게 있는지, 공감할 만한 게 있는지, 저를 포함해서 1인출판사가 그걸 잘 보여주면 좋겠어요.˝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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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일러스트를 보고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먼저 모모의 생김새가 상상과 달라서. <자기 앞의 생>을 맨 처음 읽은 것은 아주 어릴 때였고,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프랑스 사람=흰 피부+금발이었으니까. 심지어 아랍인인 모모가 백인들에게 차별받는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수시로 나오는데도 무지했던 청소년은 다른 모습의 프랑스 사람을 상상하지 못했고, 그 첫 감각이 아주 오래오래 남아 있었던 것이다 . . . 게다가 이 작가가 포착한 모모의 모습은 귀엽게 웃고 있는 순간(으레 아이 캐릭터에 기대하게 되는)이라고는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거나, 일부러 기괴한 표정을 지어 보이거나, 화가 나서 눈썹을 한껏 올리고 있는 모습들.


두번째로 놀란 건 로자 아줌마가 예쁘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것도 어리석고 어린 자의 편견 때문인데, 여러 매체를 통해 보아오던 주인공, 특히 착한 사람은 너무도 그린 듯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것. 심지어 병에 걸려 죽어갈 때조차 예뻐! 하지만 이 작가는 로자 아줌마를 미화하지 않았고, 어린 모모도 우리도 가장 직시하기 힘든 모습까지 에두르지 않고 표현한다. 거기 새삼 놀라는 내가 아주아주아주 부끄러워질 만큼.


이 책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하밀 할아버지, 롤라 아줌마, 은다 씨, 왈룸바 씨까지 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진짜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아름답게'만 그렸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들에게 등을 돌린 세상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소외시키는 일일 테니까. 그럼에도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건, 그림에 담긴 작가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모모와 로자 아줌마에게는 아주 차가운 세상이지만 노란빛의 수채화로 채운 배경이 꼭 이들을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같았다.


다들 모모를, 로자 아줌마를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있었을지. 나의 모모는 이렇지 않았지만, 이게 진짜 모모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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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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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19)

여성 문제 전문가, 아니 ‘문제 여성‘ 진단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 땅의 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조선 시대에 비하면 여자들 사는 게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인간(남자)의 삶이 중세에 비해 나아졌기 때문에 더는 투쟁하거나 진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없다. 여성의 지위는 같은 시대, 같은 계급의 남성과 비교되지 않는다. 2010년대 여성의 지위는 2010년대 남성의 지위와 비교되지 않고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되며,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되지 않고 노동 계급 남성과 비교된다. (65)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 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그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어.˝ 이 말이 나를 살렸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현재 나의 감정, 고통, 기쁨, 슬픔, 지식, 업적…… 이 모든 것들은 곧 과거의 것이 된다. 그리고 과거는 돌아오지도 않고 반복되지도 않는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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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2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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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는 자기가 밝은색 병에서 밝은색 병으로 계속해서 따라지고 있는 액체, 한 번 옮길 때마다 조금은 흘리고 조금은 남는 액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드와의 우정은 자기에게도 진짜배기,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가장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도 본질적인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자기가 못 볼 때조차 주드는 알아봐주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줬다. 마치 주드가 지켜봐주고 있다는 게 자기를 진짜로 만드는 것 같았다. (23)

울음. 케일럽과의 보낸 시간의 또 다른 잔재. 몇 년 동안 그는 울음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날 밤 이후의 그는 늘 울고 있거나 울기 일보 직전이거나 울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상태 중 하나인 것 같다. (42)

그게 가능할까, 그는 질문했다. 자기가 심지어 윌럼처럼 좋은 사람마저 그런 결과로 내몰게 되지는 않을까? 심지어 윌럼에게마저 일종의 증오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게 기정사실 아닐까? 역사—자기 자신의 역사—가 그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무시할 정도로 그렇게 간절히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 걸까? (46)

하지만 지금 여기에는 그게 있다. 두려운 섹스 그 자체는 없되, 서로를 사랑하고 섹스를 하고 있는 건강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가 아는 모든 육체적 접촉이. (49)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는 잠이 깼고, 반쯤 열린 옷장 문으로 주드가 옷을 입고 있는 걸 봤다. 이건 최근에 생긴 변화였고, 윌럼은 그게 그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주드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봤다. 그와 그가 아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다른 사람 앞에서 옷을 입고, 다른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주드에게는 다시, 또다시 연습해야만 하는 일들이었다. 그가 얼마나 굳게 결심했는지, 얼마나 용기를 내고 있는지 봤다. 그걸 보자 그도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둘 다 모르는 게 많았고, 둘 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물러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둘 다 계속 노력할 것이다. 서로를 믿으니까. 상대방이 그런 고난, 그런 어려움, 그런 불안과 노출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70)

“5분만.” 주드가 말하며 이불 밑으로 들어왔고, 윌럼은 그의 양복을 구기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팔로 그를 안고 눈을 감았다. 이것 또한 그는 사랑했다. 그 순간 주드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게 좋았다. 주드가 애정을 원하고 있고, 그걸 주도록 허락받은 사람이 자기라는 게 좋았다. 이건 오만일까? 자만일까? 자축일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70-71)

“괜찮아.” 주드는 말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팔을 잡은 채 윌럼의 얼굴을 쳐다봤다. “괜찮을 거야, 윌럼.” 그는 고객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 윌럼이 가끔 들었던 그 단호하고 선언적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늘 널 보살펴줄게, 알지?”
그는 미소 지었다. “그럼.” 그에게 위안이 된 건 그런 안심되는 말 자체라기보다 자기도 뭔가 줄 게 있다는 자신감과 능력과 확신에 차 보이는 주드의 태도였다. 그걸 보자 윌럼은 그들의 관계가 결국 구조 작업이 아니라, 그가 주드를 구하고 그만큼 자주 주드도 그를 구했던 우정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81)

그는 윌럼과 하는 두 가지 대화를 다 좋아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일상적 대화를 즐긴다. 늘 큰 문제들—사랑, 신뢰—로 윌럼에게 묶여 있다고 느꼈지만, 작은 일들, 청구서나 세금, 치과 치료 등으로도 묶여 있다는 게 좋다. 몇 년 전 해럴드와 줄리아네 집에 갔을 때 일이 늘 생각난다. 그때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 주말 대부분을 거실 소파에서 담요를 두른 채 자다 깨다 하며 보냈다. 그 토요일 밤 같이 영화를 두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해럴드와 줄리아가 트루로 집 부엌 수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그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너무 지루한 이야기라 세부 사항은 대부분 듣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공동 생활의 역할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른들 관계의 이상적 표현 같았다. (85-86)

‘잘했어.’ 자신의 두려움을 꾹 누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면 전화를 끊은 후 늘 자신을 칭찬해줬다. ‘잘했어.’ (113)

로젠 프리처드는 늘 중요했지만, 케일럽 사건 이후에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됐다. 회사에서 그의 삶은 그가 확보한 사업들과 그가 한 일에 의해서만 평가받았다. 거기서는 과거도, 결핍도 없었다. 거기서 그의 삶은 로스쿨에 갔을 때와 거기서 한 일들에서부터 시작됐고, 매일의 성취, 청구 가능한 한 해 시간들의 장부들, 그가 끌어올 수 있는 새로운 고객들과 함께 끝났다. 로젠 프리처드에서는 루크 수사나 케일럽, 트레일러 박사나 수도원이나 고아원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관련 없었다. 관계없는 사항들이었다. 그들은 그가 창조해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거기서 그는 화장실에 웅크리고 앉아 자해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련의 숫자였다.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오는지를 나타내는 숫자 하나, 그가 청구한 시간들의 숫자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숫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독하고 있는지 표시하는 세 번째 숫자,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보상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네 번째 숫자. 그건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감탄하면서도 가엾어하는 친구들에게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118)

그렇다, 그는 행복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로. 자신도 알다시피, 그는 단순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사람인데, 어쩌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된 것이다. (146)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역겨운 이야기들을 들을 것이다. 그는 세 번 양해를 구하고 욕실에 가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아무리 귀를 막고 주드의 입을 막아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고 싶어도 용기를 내어 들어야 한다고 다짐할 것이다. 주드가 그를 마주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주드의 뒤통수를 본다. 자기가 안다고 상상한 사람이 자욱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너져 잔해가 되고, 그 근처에는 숙련공들이 그를 다른 소재로, 다른 모양으로, 몇 년 동안이나 서 있었던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다시 제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보일 것이다. 이야기는 끝도 없이 계속되고, 그 길에는 오물들이, 피와 먼지와 병과 비참함이 널려 있을 것이다. 주드가 루크 수사와 함께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마치면, 윌럼은 다시 물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아주 가끔이라도 섹스를 즐겼는지. 그리고 몇 분이 지난 후에야 주드는 아니라고, 싫다고, 늘 그랬다고 대답하고, 그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진짜 대답을 들었다는 데 안도할 것이다. (167)

“아니야. 아냐, 윌럼. 난 충분히 했어. 더 이상은 필요 없어.” 그는 한 대 맞은 것처럼 이 말의 진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 것이다. 그들은 다시 자겠지만, 이번에는 그의 꿈은 끔찍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모텔 방의 그 남자들 중 하나로 나오는 꿈을 꾸고, 자기가 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는 악몽을 꾸며 깨어날 테고, 이번에는 주드가 그를 달래줘야 할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토요일 오후이고, 그들은 목요일 밤부터 옷장 안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샤워를 하고 뭔가 뜨겁고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을 먹고, 부엌에서 바로 서재로 가서, 윌럼이 그동안 내내 지갑 안에 간직하고 있던 로이만 박사의 명함을 순식간에 마법처럼 내밀고 주드가 로이만 박사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걸 들은 후, 거기서 침대로 가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 질문하길 두려워하며 누울 것이다. 그는 주드에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라고 하길 두려워하고, 주드는 그에게 언제 떠날 거냐고 묻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떠난다는 건 이제 필연적인 수순처럼, 그저 실행의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68)

당신은 틀렸어. 모든 걸 다 주는 관계는 없어. ‘어떤’ 것들만 주는 거라고. 누군가에게서 바라는 것들을 다—예를 들어, 성적으로 잘 맞는다거나 대화가 잘 통한다거나 경제적 지원이라거나 지적 관심사가 잘 맞는다거나, 상냥하거나, 충실하다거나—생각해보고 그중 세 개만 택해야 하는 거야. ‘세 개’, 바로 그거야. 아주 운이 좋으면 어쩌면 네 개를 가질 수도 있겠지. 나머지는 딴 데서 찾을 수밖에 없어. 원하는 걸 다 주는 사람을 찾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잖아. 현실세계에서는 남은 인생에서 그중 어떤 세 가지를 가지고 싶은지 파악하고, 그걸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야. 그게 진짜 인생이라고. 그게 함정인 걸 모르겠어? 계속 모든 걸 다 찾으려 하다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거야. (212)

심리치료와 치료사들은 절대 판단하지 않을 것(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사람한테 이야기하면서 비판받지 않는다는 건?)을 약속하지만, 모든 질문들 뒤에는 어떤 결함에 대한 인식을 향해, 자기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문제의 해결을 향해 부드럽게, 하지만 무정하게 미는 손길이 있다. (214)

“넌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야. 내 가장 소중하고 오랜 친구. 해럴드 스타인과 줄리아 앨트먼의 아들. 맬컴 어바인과 장-밥티스트 마리온, 리처드 골드파브, 앤디 컨트랙터, 루시엔 보이트, 시티즌 반 스트라튼, 로즈 애로스미스, 일라지어 코즈마, 페드라 드 로스 산토스, 헨리 영들의 친구지.
넌 뉴요커고 소호에 살아. 예술협회와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해.
넌 수영을 잘하고, 베이킹도 잘하고, 요리도 잘해. 책을 많이 읽고, 목소리가 아름다워. 더 이상 노래는 안 하지만. 피아노도 정말 잘 치지. 넌 예술품 수집가야. 내가 다른 곳에 가 있을 때는 근사한 문자들을 보내줘. 넌 참을성이 많고 관대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남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모든 면에서 제일 똑똑해. 모든 면에서 제일 용감하고.
넌 변호사야. 로젠 프리처드 앤드 클라인의 소송분과장이지. 넌 네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해.
넌 수학자고 논리학자지. 몇 번이나 날 가르쳐보려 애썼어.
넌 끔찍한 취급을 받았는데, 그걸 다 극복했어. 넌 언제나 너였어.“ (269)

윌럼은 끝도 없이 이야기하고 주문을 외워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낮에—때로는 며칠 후에—그는 윌럼이 했던 말을 조각조각 떠올리고 마음 깊이 간직한다. 그가 했던 말만큼이나 하지 않은 말들, 그가 그를 정의하지 않은 방식 모두를 소중히 간직한다. (269)

어렸을 때는 서로에게 줄 게 비밀밖에 없었다. 고백이 유통화폐였고, 폭로는 친밀함의 형식이었다. 친구들에게 자기 사생활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는 건 우선은 신비, 다음에는 일종의 쩨쩨함, 진정한 우정을 막을 인색함으로 간주되었다. (292)

이제야 그는 이유를 알고 울기 시작한다. 자기가 형편없이 보답한 모든 사람들의 친절에, 자신의 외로움에, 계속 살아가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래도 삶이 계속 결국 계속된다는 증거에 왈칵 눈물이 난다. 그는 쉰하나고, 윌럼이 죽은 지는 8개월이었다.
리처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옆자리에 앉아 그를 안아준다. “이 말이 도움 되진 않겠지만,” 그가 마침내 말한다. “나도 너를 사랑해, 주드.” (328)

때로 그는 생각한다. 난 더 잘하고 있어. 난 괜찮아지고 있어. 때로는 불굴의 의지와 활기로 충만해 잠을 깬다. 오늘이 그날이 될 거야, 그는 생각한다. 오늘이 정말로 괜찮아지는 첫날이 될 거야. 오늘이 윌럼을 덜 그리워하는 날이 될 거야. 그러다 무슨 일이, 아주 간단한 일이 생겨버린다. 옷장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옷이 걸리지 않을 외로운 윌럼의 옷걸이를 보기만 해도 그의 야심과 희망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는 또 한 번 절망에 빠진다. 때로 그는 생각한다. 할 수 있어. 하지만 이제 점점 더 깨닫는다. 난 못 해. 살아갈 새로운 이유를 매일매일 찾겠다고 그는 자기 자신과 약속했다. 어떤 이유들은 조그맣다. 좋아하는 맛, 좋아하는 교향곡, 좋아하는 그림, 좋아하는 건물, 좋아하는 오페라와 책들, 다시 가는 곳이건 처음 가는 곳이건 보고 싶은 장소들 같은. 어떤 이유들은 의무들이다. 그래야 하니까. 할 수 있으니까. 윌럼이 원할 테니까. 어떤 이유들은 크다. 리처드 때문에. 제이비 때문에. 줄리아 때문에. 그리고, 특히, 해럴드 때문에. (347-348)

주드가—너를 만나고, 나를 만나고, 그를 사랑한 우리 모두를 만나고도—자신에게 가르친 모든 것들을 여전히 철석같이 믿으며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 내 인생도 결국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럴 때면 난 늦은 밤 아래층에 내려가 <주드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윌럼> 앞에 서서 너한테 이야기하지. “윌럼.” 난 네게 물어. “너도 이런 기분이 들어? 주드가 나와 행복했다고 생각해?” 주드는 행복할 자격이 있었어. 행복을 보장받는 사람은 없지, 모두 다 그래. 하지만 주드는 행복할 자격이 있었어. 하지만 넌 내게가 아니라 내 뒤의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을 뿐이고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아. 그럴 때면 내세 같은 걸 믿고 싶어져. 우리한테 다리가 아니라 꼬리가 있어서 바다표범처럼 대기 속을 헤엄쳐 다니는, 공기 자체가 무수한 단백질과 설탕 분자로 이루어진 자양물이서 그저 입만 벌리고 흡입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조그만 빨간 행성 같은 곳, 다른 우주. 너희 둘은 거기서 함께 대기 속을 떠다니고 있을 거야. (426)

아니면 주드는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지. 요새 우리 옆집 바깥에 앉아 내가 손을 뻗으면 가르랑거리는 저 회색 고양이일지도, 어쩌면 다른 이웃이 잡고 있는 저 강아지일지도, 몇 달 전 뒤에서 뭐라 하며 쫓아오는 부모님은 아랑곳 않은 채 기쁨에 겨워 깩깩거리며 광장을 뛰어다니던 그 걸음마쟁이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한 저 철쭉 덤불에 갑자기 피어난 꽃일지도, 저 구름, 저 파도, 저 비, 저 안개일지도 몰라. 주드가 죽었다거나 어떻게 죽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을 믿으며 죽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그래서 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친절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주드를 봐.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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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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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자기실현의 시대다.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닌 일에 눌러앉는다는 것은 의지박약에, 고결하지 않은 선택이다. 언제부터인가 운명 같은 것에 굴복한다는 것이 고상한 게 아니라 비겁함의 징표가 됐다. (67)

그는 대학의 객이었고, 대학원의 객이었으며, 이제 뉴욕의 객, 아름답고 돈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온 객이었다. 그런 것들이 타고난 자기 몫인 척하려고 애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73)

근본적으로, 가장 부끄러운 점은 이것이었다. 섹스에 대한 빈약한 이해도, 불충스러운 인종적 관점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못 한다거나 돈을 못 번다거나 자율적 존재로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력도 아니었다. 밤에 그와 동료들이 사무실에 앉아 모두 각자의 야심찬 꿈의 건축물에 깊이 몰두해 있을 때, 다들 있을 법하지 않은 건물들을 스케치하고 계획하고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매일 밤, 다른 사람들이 창조하고 있을 때, 그는 모방을 했다. 여행하면서 본 건물들, 다른 사람들이 꿈꾸고 건설한 건물들, 자기가 살았거나 들어가본 건물들을 그렸다. 이미 만들어진 건물들, 개선할 생각조차 없이 그저 흉내만 내면서 다시, 또다시 만들었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상상력은 사라졌고, 모방꾼이었다. (100-101)

그는 여전히 약점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옹색한 깐깐함을 증명하는, 사람들 앞에서 애써 가장하고 있는 인간이 될 능력은 근본적으로 만회할 길 없이 부족하다는 걸 증명하는, 차고 넘치는 파일에 증거가 하나 더 보태진 것이다.
하지만—다른 수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기가 이 인기 없는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서, 자신의 방공호 저장품에서, 학위나 직업과 똑같은 만족과 안전함을 느낀다는 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니면 이렇게 부엌에 혼자 있는 순간들이 명상과도 같은 순간이라는 걸, 그와 세상, 그와 세상 사람들과의 모든 상호작용을 촉발하는 사실과 진실의 수천 개의 조그만 굴절과 오염들을 미리 계획하며 허우적허우적 전진하길 멈추고 정말로 편안히 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무에게도, 심지어 윌럼에게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몇 년에 걸쳐 자기 생각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친구들과 달리 그는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의 기벽의 증거들을 공유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비록 친구들의 기벽을 공유하는 건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었지만.(131)

아무도 없다는 걸 그는 깨달았다. 방은 그의 것이었다. 마음속 짐승—홀쭉하고 꾀죄죄하고 여우원숭이처럼 반사신경이 뛰어나고, 미래의 위험에 대비해 늘 축축한 검은 눈으로 주위 풍경을 살피며 언제나 달아날 태세가 되어 이는 상상의 짐승—이 긴장을 풀고 바닥에 늘어졌다. 이런 순간이 그가 대학 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따뜻한 방 안에 있었고, 내일이면 세끼를 먹고 싶은 만큼 먹을 테고, 그사이에는 수업을 듣고, 그를 해친다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킬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근처 어딘가에는 룸메이트들—친구들—이 있었고, 아무 비밀도 누설하지 않고 또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고,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또 하루를 더 집어넣었다. 그건 늘 잠잘 자격이 있는 성취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또 하루를 살아갈 준비를 하며 눈을 감고 잠들었다. (147-148)

“세상은 나를 잊어가네 / 수많은 시간을 낭비했던 세상이.” 그 곡은 어느 예술가의 삶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절대 예술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잊고,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것, 다른 장소, 조용하고 안전한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개념, 탈출하고 싶으면서도 발견되고 싶은 뒤얽힌 갈망을 거의 본원적으로 이해했다. (164)

하지만 아무리 많이 원하고 아무리 많이 갈망해도, 그는 여전히 해럴드를 친구로 생각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때로는 두 사람 사이를 희망적으로 부풀리면서 친하다고 상상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됐다. (중략) 그래도 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이번 달이 끝일 거야, 그는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 그달 말이 되면 생각했다, 다음 달이야. 다음 달이면 나랑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는 언제라도 준비된 자세로 있으려고 애썼다. 그게 틀렸다는 게 증명되기를 갈망하면서도, 실망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했다. (195-196)

“주드에게.” 해럴드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필요없긴 해도)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 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 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199)

하지만 네가 그러고 있을 동안, 주드는 나를 봤어. 그때 주드의 표정이라니. 그 순간이 아니고서는 아직도 그 표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안에서 뭔가가, 마치 너무 높이 쌓아 올린 축축한 모래탑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주드를 위해, 너를 위해, 나를 위해서도. 주드의 얼굴을 보며 난 나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어. 다른 사람을 위해 그런 걸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우아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표정을! 주드를 봤을 때, 난 제이컵이 죽은 후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의 의미를, 뭔가가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어. 늘 지나치게 감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나는 그게 감상적일지는 몰라도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때 알았던 것 같아. (234-235)

훗날 그는 그 일을 일종의 지레받침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관계 사이의 경첩 같은 걸로 돌이켜보곤 했다. 제이비와의 우정은 물론이고 윌럼과의 우정에 대해. 20대의 어느 순간,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도 순수하고 깊은 만족감이 들어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애정도 완벽한 그 순간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아도 되도록 그 주위 세상이 그냥 멈춰버렸으면 하는 때들이 있었다. 하지마 한 박자 후에는 모든 게 움직이고, 그 순간은 고요히 사라져버린다.
이 일 이후 제이비가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영원히 줄어들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 같고, 너무 최종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믿게 된 사람들이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하게 됐고,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런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래도 인생은 쉼 없이 나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실망시킨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적어도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 하나는 있었기 때문이다. (262)

해럴드를 믿을 수 있을까? 가장 어려운 건 지식을 찾는 게 아니야. 예전에 그가 하느님을 믿기가 어렵다는 고백을 했을 때 루크 수사는 그에게 말했다. 가장 어려운 건 그걸 믿는 거야. (294)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앞으로 그는 해럴드가 공언한 애정을 시험하고 또 시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한결같은지 보려고 약속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절대 해럴드와 줄리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아무리 그렇다고 생각해도 그는 그러지 못하고 결국엔 그들이 그에게 지칠 거라고 늘 확신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결국 끝나고 나면 그걸 돌이켜보면서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된 구체적 사건도 확실히 알게 될 테니까. 그러면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뭘 더 잘할 수 있을지 다시는 궁금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지금 그의 행복은 완전무결하다. (310)

“그리고 대학에 갔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친구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만났어. 그 친구들이 내게 가르쳐줬어. 정말이지 모든 것을. 그 친구들이 나를 만들었고, 진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지금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내가 보기에, 우정의 오랜 요령은 너보다 더 나은 사람들—더 똑똑하다거나 멋진 사람들이 아니라 더 친절하고 더 아량 있고 더 관대한 사람들—을 찾는 거야. 그리고 그 친구들이 네게 가르쳐주는 것들에 감사하고, 친구들이 너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아무리 나쁜—혹은 좋은—말이라도 경청하려고 하고, 그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게 제일 힘든 일이야.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기도 해.” (311-312)

하지만 사실은 둘 다 왜 그런 파티에 계속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그 파티들이 네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얼마 없는 기회였기 때문이고, 때로는 네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다 꺼지다시피 한 모닥불에 불쏘시개 더미를 떨어뜨려 우정을 계속 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모든 게 다 그대로인 척하는 그들만의 방식이었다. (327-328)

최근 그는 상호의존성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생각했다. 그는 친구들과의 우정이 좋았다. 그리고 그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상호의존적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스물일곱일 때는 훌륭한 일이 서른일곱에는 왜 소름 끼치는 일이 된단 말인가? 왜 우정이 친족관계보다 못하단 말인가? 왜 심지어 더 낫지 않단 말인가? 그건 두 사람이 섹스나 육체적 끌림이나 돈이나 아이들이나 재산이 아니라 오로지 계속 같이 가자는 공동의 동의, 결코 성문화할 수 없는 결합에 대한 상호 간의 헌신에 의해 묶여 날마다 계속 함께 있는 것이다. 우정은 상대방의 더딘 불행을, 길고 긴 지루함을, 간간이 찾아오는 승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다. (332-333)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그는 결코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 윌럼에게 말한다. ‘내 진짜 모습을 네게 보여주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야.’ 이제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는 여전히 그린 스트리트에 혼자 있다. 그리고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상상 속에서 윌럼은 녹음이 우거진 어딘가—애디론댁 산맥, 버크셔 지방—에 위치한 집에서 산다. 그는 행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아마도 1년에 몇 번은 그린 스트리트에 있는 그에게 놀러 오고, 그러면 그들은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런 꿈에서 그는 늘 앉아 있어서 자기가 걸을 수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윌럼을 보면 늘 기뻐하고, 헤어질 때면 혼자서도 잘 알아서 할 수 있다고, 걱정 말라고, 그에게 감사기도라도 하듯 확신을 준다. 자기의 필요와 외로움과 소망으로 윌럼의 목가를 망치지 않을 기운이 있다는 게 그는 기쁘다. (379)

다음 날 일찍 일어났을 때, 그는 아직 소파에 있었고,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고, 몸에는 아직 이불이 덮여 있었다. 주드는 반대쪽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 내밀하고 비밀이 많은 주드의 방식에 마음 한구석 늘 모욕감을 느꼈지만, 그 순간만은 그저 감사와 경탄의 마음뿐이었다. 그는 옆의 의자에서 너무나 그리고 싶었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복잡한 색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감을 섞었는지 떠올리게 되는 그 오묘한 색깔의 머리를 곰곰이 들여다봤다. (405)

공집합의 공리는 영0의 공리입니다. 그것은 무(무 한자)라는 개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영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있다고 말합니다. 무가치, 무항목. 수학은 무라는 개념이 있다고 가정하지만, 그것이 증명되었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좀 철학적이 되어보자면—오늘 우리 기분은 그렇습니다—우린 삶 자체가 공집합의 공리라고 말할 수 있죠. 삶은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납니다. 두 상태가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두 경험 다 의식하지는 못하죠. 비록 삶으로서 경험될 수는 없지만, 두 상태는 삶에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무의 개념을 가정하지만,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월터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직접 공집합의 공리를 증명했다고, 영의 개념을 증명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다른 그 무엇도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으리라는 걸 전 압니다. 고매한 정신은 고매한 끝을 바라고, 월터는 가장 고매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가 너무나 사랑했던 공리의 답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421)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우정을 끝낸다는 게 얼마나 느리고 슬프고 어려운 일인지 전혀 몰랐다. (429)

침묵은 보호책으로 시작됐지만, 세월이 가는 사이 거의 억압적인 것, 그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조종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나가고 싶어도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두꺼운 얼음벽과 천장과 바닥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조그만 물방울 안에 떠 있는 상상을 한다. 출구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에겐 장비가 없다. 작업을 시작할 도구도 없어서, 그는 손으로 속절없이 매끄러운 얼음 표면을 할퀸다. 자기가 누군지 말하지 않으면, 더 바람직하고 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 그는 이상한 사람, 동정, 심지어 의심의 대상이 된다. (438)

그는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친구들의 연인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었다. 그건 고양이가 개 울음소리를 탐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러워한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라는 종족에게는 그냥 이질적인 일이니까. 하지만 최근 사람들은 마치 그게 그가 가질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원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행동했고, 그게 어느 정도는 애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마치 조롱처럼 느껴진다. 그건 그에게 10종경기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똑같이 무디고 잔인한 말이다.
누군가 자기에게 명령하고, 그의 결정들에 실망하고, 그에게 기대를 갖고, 그를 소유하는 책임을 떠맡을 정도로 관심을 가진다는 건 감동적인 일이다. (443)

너무 외로워서 때로는 육체적으로 느껴진다. 축축하고 더러운 빨랫감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이 느낌을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마치 원한다는 결정이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든 부분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을 안다.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 것인데, 그는 이제까지 앤디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보여준 적 없다. 그건 적어도 10년은 옷을 벗고 본 적 없는 자기 육체와의 대면을 의미할 것이다. (447)

하지만 그와 그의 친구들은 아이가 없고, 그 부재 속에서 세상은 그들 앞에 마구잡이로 펼쳐진다. 그 수많은 가능성에 숨이 막힐 정도다. 아이들이 없으면, 성인으로서의 지위는 절대 튼튼하지 않다. 아이 없는 어른은 혼자서 성인기를 창조하고, 그건 종종 유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불안정한 상태, 영원한 회의의 상태이기도 하다. (452)

그는 자기가 얼마나 둔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그 둔감함과 경계심 덕분에 어떤 공간에서도, 어떤 모임에서도 가장 흥미롭거나 도발적이거나 반짝거리는 사람이 될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그 덕에 지금까지 안전하게, 불결함과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인기를 보냈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너무 격리시킨 나머지 인간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누구와 함께 있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 이제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틀리고 윌럼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게 그에게 영원히 금지된 경험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자기 생각보다 덜 역겨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국 상처를 안 받을 수도 있다. (461)

윌럼에게 정상이라는 걸 증명할 필요가 정말로 그를 더 정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절대로, 언제까지나 자기에게 상처 주지 않을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들수록 스스로가, 자신의 의존성이, 자신의 약함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요구에는 끝이 없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난 세월 동안 그를 도와줬으며, 왜 도와줬나? 왜 그는 그걸 허락했나? (566-567)

그는 윌럼이 의자에 기대앉아 그를 쳐다보며,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 하지만 절대 질문을 허락받지 못했던 수백 가지 질문들 중 무엇을 고를 건지 고심하는 모습을 봤다. 그러자 눈물이 고였다. 자기가 이 우정을 이렇게 치우치게 만들어서, 그가 달아날 때도, 근원을 밝힐 수 없는 문제들로 도움을 요청할 때도 한 해 또 한 해 윌럼이 너무나 오랫동안 그의 옆을 지켜줘서 눈물이 났다. 새 인생에서는 친구들에게 덜 요구하겠다고, 더 베풀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친구들이 무엇을 원하든 줄 것이다. 윌럼이 정보를 원하면 받게 될 거고, 그 정보를 어떻게 줄지 궁리하는 건 그에게 달린 일이다. 그는 상처 받고 또 상처 받겠지만—모두가 그렇다—노력하려면, 살아 있으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 준비해야 했다, 이게 삶이라는 거래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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