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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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 P185

—칙칙해지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 P192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 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 P210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앞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 P233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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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지음, 장영은 엮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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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이상 몇 가지 주의로 이혼은 내 본의가 아니요, 씨의 강청이었나이다. 나는 무저항적으로 양보한 것이니 천만 번 생각해도 우리 처지로 우리 인격을 통일치 못하고 우리 생활을 통일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울러 바라는 바는 여든 노모의 여생을 편하게 하고, 네 아이의 양육을 중분히 주의해 주시고 나버지는 씨의 건강을 바라나이다. - P203

동기는 여하한 것이든지 훨씬 열어젖힌 세계는 이상히도 좋았고 더구나 무구속하고 엄숙하게 지켜 있는 마음에 어찌 자유스러운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되겠는가. 나는 확실히 유혹을 받았고 나는 확실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우리는 황무한[거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방향와 밀봉 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여하하든지 나의 진보 과정상 감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 P207

씨여 사상적 방황이란 그다지 못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치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하여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 - P270

나는 꼭 믿는다. 내 <모 된 감상기>가 일부의 모 중에 공명할 자가 있는 줄 믿는다. 만일 이것을 부인하는 모가 있다 하면 불원간 그의 마음이 눈이 떠지는 동시에 불가피할 필연적 동감이 있을 줄 믿는다. 그리고 나는 꼭 있기를 바란다. 조금 있는 것보다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꼭 단단히 살아갈 길이 나설 줄 안다. 부디 있기를 바란다. - P271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혜석이 말년에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여겼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행복의 기미를 찾아 그를 변호하고 싶었던 나는 잠시 낙담했다가, 바로 이것이 핵심임을 깨달았다. 나혜석의 삶이 결국 어떠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혜석밖에 없다는 것.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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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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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기와 분노하기는 내 특기였다. 지난 10년의 시간을 반으로 가르면 한쪽에 자책이 있고 다른 한쪽에 분노가 있었다. 내 뇌를 반으로 갈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 P22

나는 내 딸이 까만 게 신기하고 좋다. 목소리가 굵고 뚜렷한 것도 좋다.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좋다. 토끼가 아프면 곰에게 문병을 가게 하면서 노는 것도 좋다. 버섯을 싫어하는 것도 좋고 날벌레는 보면 우는 것도 좋다. 바다를 그릴 때 갈매기를 같이 그리는 것도 좋고 저녁을 먹고 나면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다. 나는 내 아이가 안 좋을 때보다 좋을 때가 더 많다.
어떤 날, 나는 아이가 왜 좋은지를 계속 나열해본다. 그래야만 하는 날이 있다. - P39

아이는 한 해 두 해 커갈 때마다 그맘때의 나를 데려왔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땐 일곱 살의 내가, 아홉살이 되었을 땐 아홉 살의 내가 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기억들이,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지난 10년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 P56

윤 서방은 바람도 안 피우고 도박도 안 하며 술도 많이 안 먹고 나를 때리지도 않는다. 그런 남편한테 뭔가를 더 요구하면 나는 손쉽게 좋지 않은 여자가 될 수 있다. - P67

결혼을 하기 전에 나는 결혼을 하면 내 원가족한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안 보고 내 아빠의 형제들을 안 보기 위해선 결혼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몰랐다. 나에게 남편과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내 남편과 아이에겐 처갓집과 외갓집이 있는 게 정상이 되리라는 걸, 정상이 아니기 위해선 정상인 척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몰랐다. 결혼을 하는 순간 내 원가족과 더 철저히 묶이리라는 걸 몰랐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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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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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거주한 지 두 달이 지나자 그리 자주 사전을 참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점차 들었다. 외출해도 사전은 가방 안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결국 사전을 집에 두고 다니게 됐다. 그게 큰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해방감을 맛본 동시에 상실감도 느꼈다. 적어도 조금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7

내 어휘는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늘어난다. 그렇게 단어들이 나타났다가 잠시 함께 있더니 종종 예고 없이 날 버리고 떠난다. - P48

나는 어려서부터 느꼈던 기쁨을 다시금 맛보았다. 누구도 읽지 않을 노트에 단어를 적어 넣는 기쁨 말이다. 나는 문장을 다듬지 않고 투박하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그리고 계속 불안한 상태다. 맹목적이지만 진실한 믿음과 함께 나 자신을 이해받고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 P54

나를 자극한 것, 날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하게 하는 것, 간단히 말해 나를 반응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을 때 그걸 말로 표현해야 한다. 글쓰기는 삶을 흡수하고 정리하는 내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못하면 난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 글쓰기의 용광로에서 변형되지 못한 채 다시 말해 순화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은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계속 지속되는 말들만이 실제인 듯하다. 실제 하는 말들은 우리보다 높은 가치, 힘이 있다. - P75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말에만 속했다. - P75

자신의 언어와 떨어져 살면 자신은 텅 비어버린 듯한데 몸은 무겁게 느껴진다. - P104

삼각형은 복잡한 구조이고, 역동적인 형태다. 세 번째 꼭짓점이 다투기만 하던 오랜 짝인 벵골어와 영어의 역학 관계를 바꾸었다. 나는 싸워대던 그 불행한 커플의 산물이었지만 세 번째 꼭짓점은 그 관계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세 번째 꼭짓점은 내 갈망, 내 노력에서 생겨났다. 오롯이 나로부터 비롯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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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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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치명상을 입을 만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같거나 다른 색깔을 가진 크고 작은 일들과 몇 가지 상황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얕봤던 것 같다. 사실은 그것들이 전부 인생의 얄궂은 규칙에 따라 배치된, 저 멀리서 바라보면 ‘우울증‘이라는 글자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카드섹션 같은 것이었다는 건, 그 시기에서 빠져나와 멀리멀리 걸어가던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고서야 알았다. 원래 카드섹션이라는 게 그 한복판에 서서 눈앞에 있는 카드 낱장들을 하나하나 볼 때는 대체 이게 뭘 가리키는지 별 의미도 연관도 없어 보이니까. - P47

누군가를 붙잡고 울며불며 고통을 호소하는 건 너무 뻔해 보였다. 안 그래도 비참한데 뻔하기까지 한 건 싫었다. 그냥 그때는 이렇게 힘들어도 티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어른다운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그 기분이, 세상에게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어렸다. 매우 어렸다. 빈 주머니에 그런 쓸데없는 똥자존심이라도 욱여넣어야 할 정도로. ‘감춤‘으로써 그것은 나만 아는 은밀한 성장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 P48

그 사람이 집 안에 숨겨두거나 남겨둔 모습 말고 그가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선별한 모습, 딱 그만큼까지만 알고 대면하고 싶은데, 집 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개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 나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 P80

누가 지금의 내 모양새를 본다면 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겨우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하지 폭탄주를 마셨을 뿐이라고 상상이나 할까? 중립국의 폭탄이라고 너무 방심했다. - P129

누군가 술기운을 빌려 나에게 꺼내놓는 말들을 소중히 담아놓는 쪽이었다. 때로는 그 말이 우리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고 갈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이스‘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게 고여 있는 것보다는 어느 쪽으로라도 흘러가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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