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게일 허니먼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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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게 어떤 일을 하는지―택시 운전사, 치위생사―물으면 나는 회사에 다닌다고 말한다. - P13

한 인간관계를 합법적으로 공식화하는 그 행위를 하게 되면, 친구나 가족, 직장 동료가 필수적으로 그들의 부엌살림 수준을 고급으로 만들어줘야 하는 건지 나는 그저 이해가 되지 않을 따름이다. - P61

내 손톱은 늘 깨끗하다. 깨끗한 구두처럼, 깨끗한 손톱은 자존감의 기초다. 나는 세련되지도 않고 패션 감각도 없지만 늘 깨끗하다. 적어도 그렇게 해야, 떠받들어지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차지할 때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다. - P161

나는 누군가가 짧은 점심시간 동안 나와 같이 있는 걸 좋아할 수 있다는 것, 적어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거의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일이 한 주에 두 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믿음이 더욱 커졌다. - P274

누군가 안부를 물으면 잘 지내요, 라고 말해야 한다. 연 이틀간 아무하고도 대화를 하지 않아서 간밤에 울다 잠들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잘 지내요, 가 대답이다. - P340

나는 내 인생이 잘못 흘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아주 잘못 흘러왔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었다. 아무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지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엄마의 방법은 잘못되었다. 나도 그것은 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내게 인생을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지난 세월 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나는 그저 더 좋게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나 자신이라는 퍼즐을 풀 수가 없었다. - P346

밝은 색깔 산딸기가 보석처럼 박혀 있고 초콜릿 가니시가 뿌려져 있었다. 레이먼드가 특별히 나를 위해 골라온 평범한 사치였다. - P409

"어떻게 하면 되죠?" 내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 좋아지고 싶은 욕구, 살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절박하게 말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죠? 내가 나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죠?"
닥터 템플이 펜을 내려놓고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그러고 있어요, 엘리너. 당신은 스스로 평가하는 것보다 더 용감하고 강해요. 그렇게 계속해나가면 돼요."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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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동자 안의 지옥 -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
캐서린 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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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꼭 읽고 싶었던 책인데 반가운 소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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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책 만드는 법 - 원고가 작품이 될 때까지, 작가의 곁에서 독자의 눈으로 땅콩문고
강윤정 지음 / 유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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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분야의 독자가 아니었던 나의 취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들어야 하는 책이 어떤 책인지, 누가 왜 사서 읽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합당한 판단을 하는 사람,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편집자였습니다. - P12

처음엔 이 과정의 지난함에 쉽게 지쳤다. 넘어야 할 산으로만 보였다. 내 생각엔 내 생각이 맞으니까. 그러나 공동의 목표는 이 원고가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이 사랑받는 책이 되는 것. 이제는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 명분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도 배우고, 상대에게 설득당하면서도 배운다고 생각한다. 그편이 정신건강에 좋고 일을 유연하게 해 나가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 성향이 각각 다른 작가와 매번 새로이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니까. 잊지 말자. 작가는 내 뜻을 관철시켜야 하는 상대가 아니다. 편집자는 작가의 러닝 메이트다. - P38

교정교열 한 내용을 작가가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다음 문제이다. 우선 내 앞에 교정지가 있다면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 P42

설령 작가가 언짢아할지라도 내 작업물이 ‘틀린’ 것은 아니니 위축되거나 잘못했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국내문학의 교정교열 내용의 최종 판단은 대개 작가가 한다. 원고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저작권자인 작가에게 있다. 그러니 교정교열을 보며 마음에 걸리거나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과감하게 표시하여 작가가 고민해볼 여지를 많이 남기는 게 좋다. - P44

요컨대 독자는 책의 내용을 모른 채 책을 집어 구매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제목은 책의 만듦새에 참 중요하겠다. 내용보다 먼저 읽는 글이 바로 제목이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금 더 과하게 얘기하자면 ‘내용보다’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편집자에게는. 좋은 원고를 쓰는 것이 저자의 몫이라면 그것을 독자가 집어 들고 싶은 책으로 만드는 것이 편집자의 일이니까. - P68

어떤 경우에는 내가 디자이너의 스타일에 맞추고, 또 어떤 경우에는 디자이너가 내 스타일에 맞춰준다. 내가 그리는 책의 꼴이 명쾌할 때는 디자이너가 나에게 맞춰 줬으면 싶고,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는 디자이너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 줬으면 싶다. 물론 매번 뜻대로 되진 않는다. - P81

이럴 땐 서점에 간다. 표지 시안을 들고 책이 놓일 매대로 가는 것이다. 그러고 매대 전체를 눈에 담아 본다. 시안 한 장을 들고 볼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여러 시안을 올려 놓고 매대 전체를 사진 찍는다. - P91

단순히 내 눈엔 그게 더 예뻐 보인다 같은 말로는 좁힐 수 없는 문제의 해답을 이 책이 궁극적으로 놓일 공간에서 찾아보는 것. 꼭 한번 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 P93

일단은 눈에 보여야 산다. 제일 먼저 띠지를 버리는 독자도 많다. 그러나 그것으로 띠지의 역할은 충분하다. 띠지를 둘러 표지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완성도’란 무엇인가 한 번쯤 생각해 보자. - P94

그러므로 이 책의 표지 문안 가운데 편집자인 내가 쓴 카피는 딱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표지 문안인데 어떻게든 카피를 만들어 넣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 카피를 모두 걷어 내 보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확신이 든다면. 본문에서 고른 문장 역시 편집자의 선택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문학작품은 그 작가의 문장만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잊지 말고, 그것을 잘 고르고 배열하는 데 더 집중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 P115

아무리 근사한 책이라도 독자가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이럴 때 편집자가 하기 쉬운 선택은 다음과 같다. 마케팅을 아쉬워하고, 회사의 규모와 그에 따른 홍보비 책정을 아쉬워하고, 독자의 눈이 어둡다고 아쉬워하고, 출판 시장이 영세하다고 아쉬워하는 것. 그러나 아쉬움과 원망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또한 여러분도 나도 알고 있다. - P134

기획 단계에서 편집자는 아이템 하나를 쥐고 분야, 저자군, 예상 독자, 시장을 다방면으로 분석한다. 어떤 책은 머릿속으로 굴렸을 땐 그럴듯해 보였으나 ☞그 책을 쓰기에 적합한 저자가 없거나 ☞읽을 사람이 적거나 ☞시장에서 유사 도서의 판매가 예상보다 안 되었던 것으로 판명 나 일찌감치 버려진다. ☞잘 쓸 만한 저자가 있고 그 저자가 섭외 가능하며 ☞예상한 기간 내에 집필이 가능한 책, ☞독자에게 유익하며 ☞가능한 한 많은 독자의 관심이 가닿을 만하나 책, ☞그러면서도 내가 속한 출판사의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책이라는 다섯 가지 울타리를 크게 쳐 둔 뒤, 그 안에서 ‘누가/왜 지금/다른 책이 아닌 바로 이 책을 읽을까’에 대해 답을 적어 나간다. 그 답이 가장 객관적이고 분명한 기획이 좋은 기획, 책이 될 만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 P152

내가 맡은 책이 내 취향과 안 맞는 책이라는 건 전혀 문제도 되지 않고 문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원하는 책만 할 수 없고 그건 연차가 낮을 때에 더욱 그렇죠. 어떤 원고를 맡았건, 그 원고에 오류가 없도록 다듬고 좋은 점을 발견해 그것이 묻히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하는 것만 고민해도 벅찹니다. 물론 그 책을 만드는 동안 덜 즐거울 순 있습니다.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취미가 아니고 일이니까요.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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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직업 - 독자, 저자, 그리고 편집자의 삶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이은혜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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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목은 진작 실천해야 했던 것들이라서, 어떤 대목은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어서 좀 아팠다. 업계 동료들에게만 표출할 수 있는 불만(?) 같은 것을 활자로 보고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것도 창피하지만 고백한다...

타이완의 작가 탕누어는 출판사 편집자들을 굉장히 신기한 존재로 묘사한 적이 있다. 편집자들은 2000권밖에 안 팔리는 책들을 줄줄이 생산해내는데, 여기엔 "어떤 가치에 대한 신념이 확실히 존재하고 그 가치가 그들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2000부가 요즘에는 1000부로 줄었으니, 고쳐 말하면 편집자들은 ‘1000권밖에 안 팔리는 책을 줄줄이 생산해내는’ 기이한 존재다. 그것을 두고 ‘고귀하다’고 평가해주면 요즘은 반은 칭찬으로, 반은 비웃는 소리로 들린다. 부는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요구되는 세속의 진리인데, 부는커녕 자기 밥벌이도 못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적이게도 편집자는 출판의 지속성을 위해 종종 좋은 책들이 무덤 속으로 향하도록 방치한다. - P29

지성, 전문성, 근면성, 인내심을 갖춘 팩트체커들은 실제로 만나면 얼음처럼 차가울 것 같지만 오히려 유연하고 이해심이 많아 놀라움을 자아낸다. 왜 그럴까. 타인의 오류를 지적할 때면 상대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부드러워야 하며, 또 인간이라면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오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류를 인정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 일을 배우고 있다. - P102

당시에는 독자를 저자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놓고, 이제 와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게 떳떳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나도 이런 치부를 드러내고 싶진 않지만 출판사의 보도자료란 대개 이런 식으로 쓰이며, 책의 단점은 발설되지 않은 채 편집자의 마음속에만 남는다.
이것이 왜 안 좋은가. 독자를 약간 속인 것이 가장 큰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판 편집자는 이런 마케팅 공식을 따라야 하며, 저자보다 앞에서 자기 목소리와 평가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편집자 개인을 위해서는 그리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책 홍보 글을 쓰면서 자기 생각을 그에 따라 조정해가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 P143

편집자는 속으로 말한다. ‘우리는 수공업자가 아니며, 예술가도 아니다. 소싯적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수많은 인문/사회과학서를 섭렵하며 코즈모폴리턴으로서의 비평적 삶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기획한 진지한 책들은 판매가 잘 되지 않아 현실 감각 없는 무능한 편집자가 될 뻔했고 그 기분은 비참했다.’ - P153

책의 계약 기간(유효기간)은 5년밖에 안 되고 요즘 신간들은 6개월(심지어 한 달) 안에 승부를 봐야 하므로 눈앞의 현실에 집중하는 편집자의 계산은 나름 현명하다. 5년 뒤를 생각하라고? 그건 우리가 잘해낼 수 없는 일이다. 미래의 출판 방향이 어떨 것 같냐고? 독자를 잘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알까. 다만 오늘의 성공 없이는 내일도 없다. 그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는 이유다. - P153

편집자는 칼 같은 판매자의 마음을 견지하기도 하지만, 일할 때도 머릿속은 독자라는 자아와 분리되어야 함을 잊은 채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향해 내달린다. 시장에서의 퇴출을 목격하고도, 연민/정의/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 마케터의 마인드는 한쪽으로 미뤄두게 된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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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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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목들에서는 마음이 아주 많이 동요되었고, 아직도 그런 이야기에 크게 흔들린다는 것에 아늑하고도 가벼운 낭패감이 들었다. 가벼운 낭패감인 이유는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몇 부분에서는 발표한 해를 보고, 그러니까 캐럴라인 냅이 그 글을 썼을 때 몇 살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안도하기도 했는데, 아직 나는 그 나이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 문제를 극복하지 않아도 될 몇 년의 유예시간을 받은 것 같아서다.

내가 고립되고자 하는 충동에 본격적으로 굴복하기 시작한 것은 약 2년 전 술을 끊은 뒤였다. 이전까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술로 무디게 누그려뜨려왔던 감정들이--두려움, 오래된 상처와 실망, 너무 오래되거나 갓 생겨난 터라 그 근원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던 슬픔--그때 온 기세로 돌아와 들이닥쳤다. 그러니 내가 고분고분 웅크리기 시작한 것은, 고립의 목소리가 너무나 유혹적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 충동에 탐닉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 아니면 자기 파괴적인 일인지 헷갈린다. - P24

내 시간을 내 맘대로 보내고, 생활 규칙을 알아서 정하고, 내 취향을 맘껏 탐닉할 자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하고도 소통하거나 협상하거나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나의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스스로 구축하는 설계자라는 사실이 안겨주는 주기적인 작은 성취감. - P43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타인과의 접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적 행동마저도--누구를 만나서 커피를 마신가더나, 외식을 한다거나--엄청나고 무섭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려고 시도하는 것 못지않게 버거운 일로 느껴진다. - P48

나는 나이가 들수록 우정에 좀 더 냉정해졌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친구 관계를 좀 더 쉽게 끊게 되었고, 좋은 우정과 그저 그런 우정을, 기능하는 우정과 망가진 우정을 좀 더 빨리 구별하게 되었다. - P69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애정이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사랑받으려면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네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 P94

내가 그런 언쟁에 대해서 놀라는 점은, 가벼운 짜증이나 약간의 의견 차이를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파국적 결과가 올 수 있다는 듯이 그런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자들의 관계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작동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자친구들 사이의 친밀감과 따스함과 애정은 최초의 중요한 유대감이었던 어머니와의 유대감에 필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능가할 수도 있는 듯싶다. 우정에는 우리가 어머니와 나눴던 친밀감보다 더 평등하고 어쩌면 더 풍성할지도 모르는 친밀감을 안겨줄 가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 멋진 친구가 나타난 순간 우리 내면에서는(가장 진정한 의미에서의) 슈퍼맘이라고 적힌 스위치가 탁 켜지고, 우리가 한때 가졌다가 잃었거나 처음부터 갖지 못했던 감정들에 대한 갈망이 불붙는다. 그것은 완전한 신뢰와 솔직함, 흔들리지 않는 충실함과 애정, 감정적 동조라는 환상이다. - P100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 내게 벌어진 일과 그에 대한 내 감정을 세부적으로 적어서 활자로 고정해두는 행위가 내게는 늘 유용했다. 그것은 꽃을 책에 끼워서 압화로 간직하는 일, 혹은 추억의 기념품을 특별한 상자에 보관하는 일과도 좀 비슷하다. 일단 세부를 보존해두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덜고서 다른 일로 삶을 채우며 나아갈 수 있다. - P141

이제 나는 어머니가 외부적인 문제들로 투덜거렸던 것은 자신에게 더 깊은 불안을 안기는 문제을--자신의 건강을, 변함없는 슬픔을, 두려움과 회한을--투덜거리기에는, 특히 딸에게 투덜거리기에는, 너무 내밀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이라서였음을 안다. 어느 정도는 나도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그 밑에 깔린 불안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 반응으로 불쑥 짜증과 죄책감을 느끼곤 했던 것은, 아마 어머니의 괴로움을 직면한 나 지신이 무능하고 혼란스럽게 여겨져서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불안에 괜히 내가 불편한 것,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고 느끼지만 방법을 모르는 데 대한 답답함, 어머니의 불안이 가라앉고 모든 것이 저절로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아마도 유아적인) 마음. - P148

나는 젊었고, 외로웠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일 텐데, 화나 있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스스로를 굶겼다. - P158

이것은 내 행동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내가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결코 충분히 갖지 못할까 봐 겁먹었다는 사실, 음식은 그 사실을 끔찍하고 강력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을 통제하는 것은 그런 갈등을 표현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에게 화나 있었다. (...) 하지만 그 화를 표현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대신 그것을 몸에 걸치기로 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됐는지 보여? 내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불행한지 보여? 나는 사람들이 겁났고, 실망할 것이 겁났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는 식욕뿐 아니라 감정적 욕구와 성욕까지 모든 욕구가 겁났다. 그래서 그것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의지로 없애버리기로 다짐했다. 욕구가 없다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일도 없으니까. - P166

우리는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화낸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어떤 절망과 단절을 겪었는지, 그들이 우리를 키운 방식이 왜 이렇게 꼬여 있었는지, 이 모두에 대해서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혹은 왜 그 일이 가능해지는지, 부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서 가장 아픈 모서리들이 깎여나가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분이 돌아가신 뒤 내가 얼마나 멀리 나아왔는지를 떠올렸다. - P192

술을 끊는 일은 기차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좀 비슷하다.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일어나서,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가 잦아들면,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잔해를 보며 서 있게 된다. 저 기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 누구지? 이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이것은 겁나는 시기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인 건 맞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고. - P199

회복의 기쁨 중 하나는 내가 술을 끊으면 닫힐 거라고 생각했던 문들이 사실은 술을 끊음으로써 열린다는 것을 느려도 착실하게 알아가는 것이다. - P222

마취제 없는 삶은 격렬한 운동과도 좀 비슷하다. 각자 선택했던 중독의 대상이 없는 채로 고통스러운 반복하여 겪다 보면, 결국에는 감정의 근육이 길러진다. 우리가 술을 마셔서--혹은 굶어서, 먹어서, 도박을 해서, 살을 찌워서--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다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 제대로 한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한다. - P224

한편으로 나는 이런 질서에서 좀 더 문제적인 충동이 가하는 부담을 느끼는데,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이 점이다. 이런 행동에는 큰 두려움이 담겨 있고, 심한 경직성이 담겨 있고, 외적인 요소들을 조작함으로써 내면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거의 본능적인 충동이 담겨 있다. - P266

정리벽이 있어도 보통 혼자 사는 한은 괜찮다. 자신의 사적인 경계선 안에서 그 충동을 탐닉하여, 맘껏 줄 세우고 박박 닦고 하는 동안에는. 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생활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할 때, 그래서 인간관계라는 요소가 방정식에 첨가될 때다. 그리고 이 인간관계란 알다시피 무척 지저분할 수 있다. 누가 내 집에서 공간을 어지럽히면, 나는 마치 그 공간이 내 내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양 심하게 위협당하는 기분이 든다. 누가 내 조리대를 어지럽히면, 그는 내 삶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누가 내 부엌을 헝클어뜨리면, 그는 내 감정을 헝클어뜨리는 것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비합리적이란 건 안다. 그리고 나도 애쓴다. 비와 쓰레받기를 들고 남을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려고 애쓴다. - P268

춥고 어두운 밤, 무거운 담요와 코트, 햇빛이 아니라 난로 불빛이 주는 안전한 기분이 감싸이고 싶은 갈망을 아직도 느낀다. 이것은 은신을 바라는 마음이다. 여름은 왠지 너무 노출되는 것 같다는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슬픔의 저류는 차가운 날씨에 더 잘 녹아든다. 그런 날씨여야 슬픔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바깥세상으로부터도 숨기기가 더 쉽다. - P294

이제 나와 운동의 관계는 더 풍성하고, 더 복잡하고, 덜 자기파괴적이다. 예전에는 방정식이 단순했고, 관계가 일차원적이었다. 운동은 내게 칼로리를 소비하는 일일 뿐이었다. 따라서 무조건 많이 할수록 더 좋았고, 몸이 아픈 건 개의치 않았다. 사실 나는 조깅이 싫었다. 지루했고 괴로웠다. 하지만 나는 괴로움이야말로 핵심이라고 여겼고, 괴로움을(육체적 외로움과 정신적 괴로움 둘 다를) 견뎌야만 나 자신에게 다른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어떻게 해서든 자격을 따내지 않고서는 내가 먹을 자격이(혹은 쉴 자격이, 혹은 자신을 괜찮은 인간으로 여길 자격이) 없다고, 어떤 것이든 즐길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 P310

밥은 만약 자신이 형제에게 직설적으로 화낸다면 관계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혼자 속으로만 걱정하지만, 밥이 지금까지 지켜온 침묵도 비록 조용한 방식일지언정 덜 파괴적이진 않은 방식으로 이미 관계를 좀먹었다.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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