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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어느새 너무 많이 울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까지 눈물 콧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일단 참고 보는 사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 삼천과 지연에게서 나를 봤다면 주제넘은 소리겠지만, 그들의 좋은 면을 외면한 채 어느 일면만을 본 결과겠지만 어떤 말들은 내가 좀더 어렸던 시절 진료실에서, 상담실에서 조이는 목구멍 너머로 토하듯 겨우 뱉어낸 바로 그 말들과 정확히 일치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를 나는 지나왔는가? '그 시절'이라는 과거의 이름표를 붙인 것을 보면 맞는 것도 같고, 책을 읽던 자리에 잔뜩 쌓인 휴지를 보면 아닌 것도 같다. 시간이 좀더 지나고 언젠가 이 책을 다시 펼쳤을 때는 “쓰레기통”이 된 삼천과 지연의 마음보다 그 옆의 새비와 지우가, 그들이 나눠준 마음이 더 눈에 들어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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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를 가장해 나를 읽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 눈앞의 글에 집중해, 라고 생각하지만.
너는 너를 다그쳤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너에게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었다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을 거야. 아빠도 말했잖아. 넌 큰사람이 될 수 없을 거라고. 남편도 얘기했지. 네가 이룬 모든 것은 운일 뿐이라고. 그러니 넌 더 단련되어야 해. 이런 취급에는 이미 익숙해졌잖아.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P86
엄마는 일평생 내게 기대하고, 실망했다. (...) 나는 엄마의 그 작은 기대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엄마를 철저히 실망시켰다. 엄마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번번이 상처받기보다는 내 일에서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아는 일을 내 가슴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식은 엄마가 전시할 기념품이 아니야.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엄마의 바람이 단지 사람들에게 딸을 전시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 P135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P156
희자에게 글을 쓰다보면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수록 마음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글을 쓰는 동안 분명해졌는데, 그건 할머니의 일상을 위협할 뿐이었다.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 P220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 P257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고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P258
예전 같았으면 먼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통증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지우도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강한 척하느라 아픔을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그랬다. - P264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기를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 P278
어린 나는 차마 엄마와 살을 맞대지 못한 채 강이저처럼 곁에서 서성거리며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가 소파에 앉아서 깜빡 잠이 들면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 엄마의 온기가 섞인 냄새를 맡았다. 엄마가 손가락 하나의 거리에 있는데도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가 유일하게 나를 만져주는 시간은 내 머리를 땋아줄 때였다. 나는 일찍 일어나서 빗을 들고 엄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 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엄마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런 일들을 잊지 못한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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