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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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회주의 중국에 뭔가를 배우러 간다고 생각했다. 천안문 사태의 진실도 알고 싶었다. 국내 언론들이 사회주의 중국을 폄훼하기 위하여 진상을 조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사회주의의 미래를 확신하는 젊은 청년들을 만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망적 사고였을 뿐이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아직은 건재하리라는 희망. 현실보다 믿음을 우선하는 태도였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 P35

언어가 창작의 연료라면, 그 연료에는 등급이 있다. 나의 동료 작가들을 만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그들이 동시대 최고 수준의 언어로 독특한 화제들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쉴새없이 변하고, 언어에 민감한 이들은 시시각각 낡아가는 언어들을 금세 감별한다. 모국어의 바다를 떠나면 이런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고 언어의 신선도에 덜 민감해진다. - P79

모든 인간에게는 삶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구조, 핵심 플롯이 있다. 어린 날의 나에게 그것은 모험 소설이었고 여행기였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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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원 인간 - 그래픽디자이너는 무슨 일을 하는가?
폴 사어 지음,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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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위를 쳐다보지 말라고, 그러면 관광객 티가 난다고 말했다(마치 아버지 목에 걸린 카메라와 망원경은 전혀 관강객 티를 안 낸다는 것처럼). 그래서 데니스와 제프와 나는 시선을 길바닥으로 향한 채 쓰레기와 함께 바람에 날리는 것들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나 찿아보았다. - P57

박살난 레코드판들을 살펴보며 나는 더그의 어머니가 어떤 레코드판에 얼만큼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서진 파편이 작을수록 그 죄가 더 중함을 의미했다. - P60

지난 세월 스포츠 훈련을 통해 배운 것은, 무언가를 잘하려면 반복과 불편/통증이 필수라는 점이었다. 내가 가졌다고 생각했던 재능이 얼마큼이든 설령 그것이 부족하더라도 나는 끈질기게 노력하는 법을 알았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할 수 있는 한 오래 작업에 몰두했다. 내가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 P99

강의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야 나는 마침내 학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디자인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다른 이들의 작품을 보았다. 이제 나도 내가 보는 것이 내 의견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큰 울림을 준 작품을 따라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물의 성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 P121

학교 과제와 실무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이었다. 고객의 존재는 진짜 마감을 의미했다. 학교에서도 마감 날짜에는 익숙했지만, 커다란 차이점은 학교에서 늦으면 성적이 나빠질 뿐이지만, 업무에서 마감을 못 맞추면 짐을 싸서 나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 P122

6. 나는 어렸을 때 플러퍼너터 샌드위치를 좋아했다. 대학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으면서도 처음 한 디자인은 디자인 이전의 삶에 의지한 것이었다. - P125

그는 몸소 모범을 보였다. 학과에서도 그랬고, 작품으로도 그랬다. 존과의 관계에서도, 삶의 방식에서도 그랬다. 그는 디자이너라는 것이 단순히 직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디자이너는 ‘나‘라는 정체정 자체였다. - P131

볼티모어 시절 극장 일은 꾸준히 했었다. 창의력을 발산하는 창구가 되어 정신건강을 지켜주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극장 포스터 작업이 나의 출구가 되었다. - P164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때까지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내 모습이 빛을 발하는 컴퓨터 스크린을 멍하니 응시하는 좀비 같을 거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냥 거기 앉아 있었다. 그리고 동생이 그 말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형 꼴 좀 봐, 인생을 낭비하고 있네." 그제야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 P202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모든 것을 다 그때와 똑같이 할 것 같지만, 그만두는 방식은 달랐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조언‘에 감사를 표하면서 아무런 사건 없이 미팅을 끝내고 내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다. - P209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빌어먹게도 정말 같은 일이 자꾸 반복된다. 이게 띄엄띄엄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 P214

2004년, 우리 둘의 친구 두 사람이 9월 11일에 결혼했다. 그들은 적어도 그때쯤이면 그 날짜를 자신들의 것으로,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의 것으로 달력에 표시해도 좋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에밀리와 나도 9·11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날을 우리의 ‘기념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날 기념을 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9·11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이다. - P228

디자이너로서 우리는 특정한 한계를 무시하지도, 우회하려 해서도 안 되며, 그 대신 그 제한사항들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 - P231

뉴욕의 큰 출판사들 저 깊은 곳에는 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앉아 지금도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맡은 책이 무엇이든, 편집자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영업팀과 작가와 작가의 에이전시와 작가의 남편과 작가의 반려동물과, IT 사람들 등등을 모두 만족시키려 애쓰며 많은, 아주 많은 옵션들을 디자인하고 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일하지 않는다. - P280

나는 곧 ‘작품을 팔 수 있는‘ (누군가로 하여금 내가 제안한 것을 승인하게 하는) 능력이 나와 내가 존경하는 다른 디자이너들과의 주된 차이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일에 좀 나아졌는데, 시도와 실수(대부분은 실수)를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배운 것이다. - P296

완전히 열린 작업 지침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아트 디렉터는 처음부터 원하는 바를 아주 정교하게 정의하고 명확하게 의사표시를 했고, 그래서 우리가 비교적 짧은 기한임에도 에너지를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면 아직까지 작업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 P311

디자이너로서 나는 일찍이 내가 받은 훈련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더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의 출신이나 성장과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디자인 학교에서 배운 것의 어떤 측면들과 내 성장 배경을 조화시켜 나만의 방식을 찾아야 했다. 세월이 흐르며 내 일에 한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스튜디오 바깥세상에서는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인생이 디자인될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형제들이 술에 취해 한밤중에 전화를 걸고, 나는 그 전화를 끊어버리고, 그런데 그들이 계단을 구르고, 그러다 드로잉 한 점이 벽에 걸린다. 아직도 나는 어쩔 수가 없다. - P331

늦은 밤, 천둥과 번개가 치는 텅 빈 장례식장에서 나는 디자인할 것이 있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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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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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 P15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 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 P25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도 어떻게든 연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처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 지옥 같은 회사를 개선시키고, 성격이 안 맞는 애인과 다투고 다퉈서는 안정적인 관계에 다다르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그런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끊임없이 도망쳤어. 위기의 순간이 오면, 핑글 돌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지. 정말은 위기의 순간이 오기도 전에 도망친 걸지도 모르고. - P62

나는 가끔 건우 선배가 반자본주의 요정 비슷한 게 아닐까 의심하는데, 건우 선배 같은 타입들이 부잣집에 태어나 집안의 재산을 조금씩 사회로 돌려보내며 축적의 고도화를 막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례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 P76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 거야." - P83

21세기에 죽는 사람들은 결국 다 데이터가 될 거란 생각도 했다. - P139

이재에겐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흉내 낼 수 없이 탁월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 그런 사람을 놓치고 모든 걸 망쳐버리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밤마다의 생각은 이재보다 이재의 남편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 친구라서 너무 후하게 생각하는 걸까?" - P209

어쩌면 다들 이재보다도 이재가 이끌고 다니는 공기 같은 것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함께 있으면 심장이 약간 느리게 뛰게 되는 감미로운 공간 장악 능력 같은 것 말이다. 이재의 반경에선 모든 모서리와 테두리가 달라졌다. 둘러싼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준을 떨어뜨리는 희한한 아이였다. 아영은 이재를 좋아했고, 이재와 함께 있는 자신을 좋아했다. 질투하진 않았다. 경윤을 질투하기 전에, 이재의 대학 친구들과 직장 친구들을 질투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 P211

스무살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나를 가장 완벽히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이해를 구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유로웠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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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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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열망은 없었다. 영화감독을 꿈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땐 그냥 모든 게 성에 안 찼고 내가 살고 싶은 이유가 뭔지 찾고 싶었다. 적어도 ‘최선을 다해 찾아봤는데도 모르겠더라‘라는 답이라도 얻으면 죽어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 P116

실패를 해야 그만둘 명분이 있는데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패배감을 가질 일이 다반사라서, 어디서부터가 실패인지도 본인이 정해야 한다.
어렵게 입봉하면 직업란에 ‘영화감독‘이라고 쓸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변함없는 생활고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선배 영화감독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심장이 떨렸다. 불행한 자살만은 아니길 바랐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더 이상 만들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일만은 아니기를. 8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늘 긴장하고 있다. 내가 좇고 있는 목표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면 빨리 그만두겠다, 수시로 다짐한다. - P117

타인의 작품에 대해서 악담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누군가의 글을 보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생이 있었는지를 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악담해도 된다. 그리고 나도 악담할 것이다. 물론 악담을 받으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그래서 나는 일단 나를 단련시키기 위해 진짜 모든 악담을 일일이 찾아 읽고, 악담을 쓴 사람의 성향을 파악해서 내가 그 악담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기 위해 그의 앞뒤 글까지 다 찾아 읽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난 세 달 동안 여기저기 해외를 다니느라 오랜 시간 검색을 쉬었더니 흐름이 끊겼다. 이젠 살도 많이 쪘고 열정도 다했다. 누가 악담을 하든 말든. 모두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든 말든. 행사인지 파티인지 아무튼, 나는 괴롭다.
괴롭다. 정말 괴롭다. - P145

엄마는 자기 전에 ‘편안히 잘 자라‘라는 문자를 지금도 자주 보낸다.
어둡고 긴 터널을 외롭게 지나던 시절이 있었다.
약도 안 듣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혼자 견뎠다.
입은 꼭 다문 채 점점 마르고 새까맣게 변해가는 나를 본 뒤로 엄마는 매일 밤 "편안히 잘 자라" 문자를 보내주었다.
어두운 망망대해 위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때, 엄마의 문자는 그날 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저 문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 P211

자리가 어색하니 다들 입맛이 없었나 고기가 많이 남자 필수는 영어로 "도축한 고기는 남기면 안 돼. 먹기 위해 동물을 죽였기 때문이야" 하더니 책임감을 갖고 남은 고기를 전부 해치웠다. 너무 큰 사람이 너무 많이 먹는 그 모습이 엄마는 그렇게 불쌍하고 마음 아팠단다. - P236

시나리오를 쓰면서 경계하는 점.
나를 무고하고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습관.
어려운 장애물을 대충 피하고 싶은 습관.
인물을 통해 남 탓하고 싶은 습관.
2018.06.15.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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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넷페미史 - 우리에게도 빛과 그늘의 역사가 있다
권김현영 외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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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중의 지지는 언제 흩어질지 모릅니다. 대중의 지지를 추구하다 보면 도리어 그 지지가 사라지기도 하고요. 판을 기획하는 이들이 재미있어하면 대중들은 그걸 눈치채고 따라올 거예요. 영 페미니스트로서 되돌아보면 그때의 경험은 남들이 뭐라든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오히려 유희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돈이나 조직, 지속 가능성이 따라올 수도 있어요. 안 따라와도 어쩔 수 없지만요. (웃음) 최근 들어 텀블벅 등을 활용해서 활동 가능한 기본적인 경제적 조건이 마련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새로운 그룹이 등장하자마자 지속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그런 걸 고민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런 그들에게 입금을 합시다. (웃음) - P72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새로운 여성들은 모두 기존 질서의 효용을 다한 순간 등장합니다. 즉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등장하는 거예요. 신여성이 등장한 이후 세계대전이 벌어집니다. 영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한 이후 한국에서는 IMF가 터졌습니다. 이 여성들이 등장하면 세상이, 한국이 망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성들은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망했을 때 등장할 수 있거든요. 기존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집단이 등장한다는 건, 그만큼 기존 질서의 힘이 약해졌고 기존 질서로부터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 P77

이 조짐을 읽어야 해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뉴 페미니스트가 등장한 이상 우리는 10년 이내에 망할 겁니다. (웃음) 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에게는 10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망조의 조짐을 읽고서 이 시간을 세상을 바꿔보는 기회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여성들의 등장을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징후로 읽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즉, 기존 질서의 효용은 다했고, 우리는 망했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 P77

사실 2005년을 기점으로 10여 년간 페미니즘은 대중운동으로서 말 걸기에 실패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2015년을 기점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그전의 페미니즘과 단절되어 뿌리 없이 등장했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하지만 저는 광대한 네트에서 기억의 조각으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들이 계속 떠다니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영 페미니스트들은 실제로 트위터리안의 얼굴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기도 했고요. 그건 제가 트위터를 통해 페미니스트들과 네트워킹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이기도 해요. - P126

그렇게 페미니즘이 힘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도 회자되었습니다. 이때의 돈은 끝없는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보주의적 자본이라기보다는, 이 사회에서 교환될 수 있는 가치이자 영향력으로서의 ‘파워‘와 동의어라고 봐요. - P130

"페미니즘에는 ‘휴덕‘은 있되 ‘탈덕‘은 없다." 페미니즘의 이름이 산화되어서 사라질 수는 있겠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 언어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언제든 지금처럼 되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권김현영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이 망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거지요. - P132

월경은 여성의 삶을 조건 짓는 기본적인 현상인데, 국민안전처는 여성을 보편 시민으로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더불어서 국가기관이 생각하는 ‘활용도‘의 기준이 어떤 젠더인지도 분명하게 엿볼 수 있었지요. 국가는 여성의 삶에 무관심한 반면에 생리대 시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자본만이 월경에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게 생리대는 취향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거지요. 그러니 온갖 다양한 종류의 생리대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현실이 펼쳐집니다. 물론 생리대의 다양성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국가가 발기한 분야에 자본이 들어와 돈벌이를 하고 여성은 호구가 된 문제를 지적하는 거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한국은 생리대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나라 중 하나입니다. - P140

한 가지만 더 첨언하자면,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저는 세상을 바꾸려면 부수고 싶은 상뿐만 아니라 만들고 싶은 미래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부정적인 사례가 바로 ‘흙수저‘라는 말이에요. 여기에는 금수저에 대한 증오는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상이 없거든요. ‘개저씨‘나 ‘아재‘ 같은 말에는 어쨌든 이런 사람이 되지 말자는 내용이 내재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런 측면에선 후자가 진보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단어인 셈이지요. 물론 미래상이 하나의 단어로만 표현되진 않겠지만요.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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