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후기 - 결국 책을 사랑하는 일
오경철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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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해둔 문장들을 모아놓으니 근자에 내가 무엇에 대해 곱씹고 있는지 새삼 알겠다. 

다른 시기에 보면 다른 부분에 책갈피를 꽂아놓겠지.

돌아가지 못한 것은 그 일에 생계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은 버겁지 않을 때가 없었고 나는 소통 자체에 의지를 잃어버릴 때도 많았다.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만드는 일이 적어도 내게는 설득력 있는 상호 관계를 맺지 못했다. 원고가 책이 되어가는 과정에는 애호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표면적으로 편집은 책을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책을 지지고 볶으며 책이라는 제품을 제조하는 일일 뿐이다. - P30

출판사에 입사해 편집자가 된다는 것은 기업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출판사도 여느 기업들처럼 제일의 목표는 이윤 창출이다. 기업의 일원으로서 편집자는 자신이 만든 책이 시장에서 매출을 일으키고 이익을 내길 바란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일이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반드시 편집이라는 일의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일, 그 일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 대체로 그렇듯 버겁고 고되다. 무언가를 애호하는 마음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좋아서 하는 일은 대개 소용에 닿지 않는다. 직업이란 그런 일이 아닐 때가 많다. - P30

나는 이 일을 오래 했다고 할 수 있지만 뼛속까지 편집자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버릇처럼 자꾸 물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책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질문을 누그러뜨려보기도 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 가까운가, 책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 가까운가?‘ - P31

나는 내가 읽은 책들 덕분에 편집자가 되었고 내가 읽은 책들과 책장에 나란히 꽂아둘 만한 책들을 만들었다. 간혹 그렇지 않은 책들을 만들어야 할 때면 내 일에 자신이 없어지곤 했다. - P131

다만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본의든 아니든 독자와 시장의 존재를 냉철하게 의식하지 않는 무분별한 기획이다. 주지하듯이 세상에 좋다고 하는 책은 하고많다. 하지만 책은 모종의 가치를 부여받을 때 비로소 세상에 존재할 진짜 이유를 얻는다. 책에 가치를 부여해 그것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것은 편집자가 아니라 결국 독자다. 그리고 독자는 편집자의 어렴풋한 기대 속이 아니라 시장에 있다. - P224

‘좋은 책은 팔리지 않아도 좋은 책이다‘라고 생각하는 편집자가 있는가 하면 ‘좋은 책은 팔리지 않아도 좋은 책일까?‘라고 생각하는 편집자도 있다. 어미 하나가 다를 뿐이지만 두 생각 사이의 거리는 보기보다 먼 것 같다. 뉘앙스만 놓고 보아도 전자는 고지식하고 후자는 유연하다. 예전에 나는 ‘좋은 책은 팔리지 않아도 좋은 책이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요즘은 ‘좋은 책은 팔리지 않아도 좋은 책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두 생각은 동전의 양면 같기도 하다. 사실 나는 두 생각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책을 만든다. 기획이라는 일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편집자라면 아마도 대부분 그러지 않을까? 편집자는 책으로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책의 성과로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니 말이다. - P236

기획이라는 일은 설득의 연속이다.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돈이 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언제나 이익보다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큰 일이다). 자신의 기획을 추진하기 위해 편집자가 본인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하는 사람은 대부분 같이 일하는 편집자들이다. 아직 원고를 장악하는 힘이 턱없이 부족한 편집자의 기획안에 쉽게 설득될 동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획을 위한 시간은 창창하다. 그 전에 일단 편집자가 되고 볼 일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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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정멜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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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취 중독이었다. 언제나 역량보다 큰 일을 끌어안았고 그것을 무사히 끝냈을 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을 아는 사람. 그렇다고 매 순간 즐겁게 일을 한 건 또 아니었다. 나는 늘 지나치게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욕심은 더 많았던 사람. 어떠한 달성감이 없는 상태의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 결과와 보람 없는 시간을 보내도 나 자신이 의미없지 않다고 힘줘서 말할 수 있을까. - P86

모니터 앞에 앉아 창밖에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빛을 보면서, 저 명암들을 흘려보내는 게 눈물 나게 아깝던 날에는 수없이 자문해보기도 했다. 사실은 나의 내부에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어떤 불순물이 고여 있길래 뭘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인지.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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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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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 P44

그게 룰이었다. 일터로 가장을 보러 오는 사람은 그가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일하고 먹고 마시며 돈을 버는지를 봐야 했다. 그렇게 버는 돈으로 그들이 먹고살았고, 살고 있으니까. 한영진은 그렇게 배웠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시장에서 부모에게,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그걸 배웠따. - P59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P73

어머니가 너무 때리면 벽 너머에 네가 있다는 걸 생각한다고 순자가 말한 적이 있었다. 더 때려봐 어디 죽여봐 내가 깩소리를 내면 순자가 듣는다 순자가 듣고 있다 순자가 듣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죽을 것 같다가도 무섭지 않고 이상하게 배짱이 생긴다고 말하던 순자. - P124

이은일. 기록으로는 그 아이가 죽지 않은 채로 살아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아이도. 깊은 수풀 속 어딘가에 남은 조그만 집터처럼 거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채 방치되어 있던 이름들이 그 서류 한 장에 남아 있었다. - P132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 P138

수십년 살림으로 손이 굳고 곱았는데도 뜨거운 것에 닿으면 여전히 뜨겁다는 것이 이순일은 성가시면서도 경이로웠다. - P141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 P142

안나가 거기서 살았다면 다르게 살았을 거라고, 안나는 한국에서 덜 외롭고 더 행복하게 살았을지 모른다고 노먼은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안나는 안나의 삶을 살았어, 여기서.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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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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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너무너무 많이 흔들렸다. 소설이라는 것에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기관이 내게도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들.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권여선의 문장들만 생각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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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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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심취한 두 사람의 관계는 1년 반 남짓 지속됐다. 이후 콜리지는 증폭된 혼란에 내면을 잠식당한 반면, 워즈워스의 내면에는 자부심이 거의 확고하게 자리잡으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몰두하던 시간도 끝이 났다. 2년 가까이 유지돼온 각자의 모습, 서로에게서 온전한 기쁨을 만끽하던 두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알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 속에세 자기 최선의 자아를 느끼는 게 더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 P27

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은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공포, 분노, 치욕—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함께 있을 때 자신의 가장 깊숙한 부끄러움까지 터놓고 직시하는 일만큼 우리를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콜리지와 워스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상대에게 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 P28

"난 내가 뭘 안 원하는지밖에 몰랐어. 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 하나가 있거든, 그래서 항상 생각을 해, 이 가시만 빠지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을 해보겠다고. 한데 막상 그 가시가 빠지고 나면 또 텅 빈 기분이 되더라고. 그러다 금세 또 새로운 가시가 옆구리를 파고들지. 그러면 또다시 그 가시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할 수가 없는 거야. 도무지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어." - P31

사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힘겹게 횡단하다 국경이 맞닿는 곳에서 이따금 만나 서로에게 정찰 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다. - P59

프로이트의 주요 발견들은 무의식에 대한 발견과 탐색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주용한 건 우리가 누구나 평생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장하길 원하는 동시에 성장하지 않길 원하고, 성적 쾌락을 갈구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며, 우리 자신의 공격성—분노, 잔혹성, 타인을 모욕하려는 욕구—을 혐오스러워하면서도 그 원천이 되는 울분은 좀처럼 해소하려 들지 않는다.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의 원천인 동시에 안도감의 원처니다. 프로이트가 환자들을 대하며 가장 치유하기 어렵다고 여긴 것도 치유되길 거부하는 마음이었다. - P80

이것이 볼턴에게 "미쳐 돌아가는 일들이 줄줄이 밀려드는 와중에도 뚜벅뚜벅 걸어나가본 적이 있는 가장 고독한 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외로움이었다. - P104

다음 순간 볼턴은 역설적인 상황을 맞닥뜨린다. "세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혼자 됨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
볼턴 역시 프로이트가 알았던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 심리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P105

됐고,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으로서—그래, 처음부터 끝까지—다해야 할 유일한 도리가 의식을 명예롭게 간직하는 일이라고 할 때, 자기 정신을 활용하는 걸 세상 제일가는 기쁨으로 여기며 의식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평생 분투해온 그가 이제 그 유구하고 결연한 노력을 무시—아니지, 폐기—하게끔 조성된 환경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 P116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 원피스 절단 사건을 끄집어낼 때마다, 엄마도 매번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부정했다. 쭉 그 상태로, 나는 계속 엄마를 믿지 않고, 믿지 않고, 또 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별안간 믿게 됐다. 오십대 후반이 된 나는 어느 쌀쌀한 봄날 오후에 23번가 시내 횡단 버스를 타고 가다 9번 애비뉴 정류장에서 내렸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반백여 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내가 기억하는 그런 식은 절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생각했다. 나는 내 울분을 제조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지만 왜? 하물며 소중한 인생에 내처 그걸 붙들고 있었다. 대체 왜? - P122

기억할 수 있는 시점 이후로 평생, 나는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상태라는 게 들통날까 봐 두려웠다. 원하는 일을 하면 기대에 못 미칠 게 분명했고,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가봤자 거절당할 게 뻔했으며, 암만 매력적으로 보이게 꾸며봤자 그저 평범해 보일 것이었다. 계속 움츠러들던 영혼은 그렇게 손상된 자아를 둘러싼 모습으로 굳어져버렸다. 나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지못해 그럴 뿐이었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은 있어도 두 걸음을 옮긴 적은 없었으며, 화장은 했지만 옷은 되는대로 입었다.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할 줄 아는 건 몽상으로 세월 흘려보내기였다. 그저 ‘상황‘이 달라져서 나도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것.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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