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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아 그래, 이런 감정들이 있지, 하고 읽을 때는 담담했는데 막상 옮겨적으려고 다시 펼쳐봤다가 아주 많이 울고 말았다. 228쪽의 문장들을 보면서는 좀 당황했는데, 먹는 행위에 대한 내 불편한 감정이 저렇게까지 정확한 언어로 표현된 것을 이제껏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오고, 어른이 나오고, 또 어른이 아이였던 시절이 나오니 읽으면서 나는 또다시 아이일 때로 돌아갔고, 그때의 내 마음을, 그때 내가 짐작했던 엄마의 마음을 떠올렸는데, 언제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그때를 소환하지 않고 온전히 지금 이곳에 있는 나로 있을 수 있을까. 스스로 부모가 되지 않는 한 정말 그런 식의 도약은 오지 않는 것일까.
척주 해변도, 예방의약과 송인화 과장님도 아주 반가웠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아홉번째 파도>에 나왔던 누군가가 또 어딘가를 지나쳤을까. 시간이 있을 때 다시 한번 찬찬히 찾아보고 싶다.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 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을 더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두렵고 피곤해서, ‘그냥 산다‘ ‘이렇게 살다 죽겠지‘ 생각하면서. ‘사는 낙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 - P86
수미는 술을 마실 때 자신이 감각하게 되는 것들을 좋아했고, 그것들을 오직 술을 마실 때만 감각할 수 있는 자신을 싫어했다. - P160
기정이 아닌 곳에 와서야 근래 자신과 나 사이에 오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사람처럼 수미는 내가 보냈던 경멸과 분노를, 불안과 실소를, 명명할 수 없는 숱한 울퉁불퉁한 감정들을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실어올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수미한테 더 정확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휴게소에서 했던 것보다 더 깊이 찌를 수 있었다. 수미가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참는 게 보였다. 알 것 같았다.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여자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 P204
눈앞에 아무리 맛없는 것이 있어도 사람들과 있을 때는 무조건 복스럽게 먹는다. 깨작대면 안 된다. 눈을 번득이게 하는 허기나 욕구 따위, 이 세상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얼굴로 복스럽게. 없던 복도 굴러들어올 것 같은 얼굴로. 몰래 맛있는 걸 먹고 나면 엄마한테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맛없는 걸 복스럽게 먹고 나면 나한테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나는 설사를 자주 했다. 나에게 먹는 행위는 늘 죄책감과 연결되어 있었다. - P228
엄마가 방학 때마다 일주일에 한번 나를 만조 아줌마한테 맡긴 건 엄마의 부탁이 아니라 만조 아줌마의 제안이었다. 숨 좀 쉬라고 그랬지. 나리도 나리 엄마도. 만조 아줌마는 말했다. 이나리와 이나리 엄마한테 동시에 가지고 있던 어떤 연민에 대해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을 담고 있던 이나리라는 여자아이의 눈빛에 대해서, 쓰이고 또 쓰이던 마음에 대해서. 수미는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 P281
수미가 공방에 찾아와 그런 일화들을 하나씩 쏟아놓으면 어떤 날에는 어떤 날에는 화가 났다. 그만 좀 하라고, 자책 말고 이젠 좀 다른 걸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자기혐오의 연장선에서 니 딸을 혐오해왔던 시간에서 이제 벗어나라고, 너의 혐오와 자책에서 이제 니 아이를 보내주라고, 다른 아이를 구한 것처럼 너의 아이도 구하라고. - P303
하지만 나는 수미의 그 토로들이 수미가 겪고 넘어가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지난봄처럼 그 시간을 부서뜨리기만 하진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음이 수없이 헤집어지더라도 나는 수미와 서하가 겨우내 서로를 충분히 겪길 바랐다. 두려움을 껴안고서라도 바라보길 바랐다. 수미가 실감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내 공방 문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다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 보라고. 서하는 해변에 가려 한다고. 마음을 접어버리지 않았다고. 너한테 계속 자기 자신을 얘기하고 있다고. 너한테 순응하지 않았다고.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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