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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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에 비이성적으로 높은 기준을 세워 놓고 페미니즘에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 달라고, 혹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내려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만 같다. 페미니즘이 우리 기대에 못 미치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정죄한다. - P13

프리켓은 이제부터 강간 이야기를 할 때 아예 프레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부터 강간 문화가 아니라 ‘성기를 소유하고 휘두르는 남자들이 느끼는 비이성적인 자신감‘인 ‘성기문화‘라고 불러 보자는 것이다. - P38

탁월한 여성 작가들이 많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더 많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출간해야 한다. 여성들이 당신의 출판사나 언론에 글을 잘 기고하거나 발표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묻고 혹 불편하더라도 답을 구하려고 애써라. 여성 작가들에게 더 손을 뻗어라. 그 여성이 당신의 청탁이나 부응에 응하지 않는다면 다른 여성들을 찾아라. 계속 그렇게 하라. 남성 작가들의 책과 여성 작가들의 책이 같은 비율로 리뷰를 받는지 확인하라. 재능 있는 여성들을 수상 후보에 올려라. 당신의 분노를 잘 처리하라. 편견을 잘 다루어라. 젠더 문제를 무시하려 드는 이들에게 저항하라. 노력하고 노력하고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 우리가 더 이상 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노력하라. - P49

남성 독자층이 우리가 따라야 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탁월함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만약 남성과 기득권이 탁월함을 인정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면(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 과실을 떠안지 말고 그 기준을 떠나보내야 한다. 남성 독자층을 우리의 목표로 삼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 P52

책의 선택 기준이 그렇게 편협하고 깊이가 없다면 그 사람이 무지한 것뿐이다. 우리 여성 작가들이 어떤 종류의 책을 쓰건, 우리 책이 어떤 식으로 마케팅이 되건 그런 독자들의 무지까지 뜯어 고쳐줄 수는 없다. - P53

책 읽기가 내 첫사랑이었고 앞으로도 나의 영원한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책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싸우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걱정하느라 독서의 순수한 기쁨을 잃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P54

작가는 독자들이 껍질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게 만들어 줄 수가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 P75

나는 안전한 세상을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나는 용감하지 않지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게 될지는 안다. 나는 앞으로도 모든 걸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 안에도 자유가 있다. 그 자유 덕분에 나는 두려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할 것이다. 나는 과거에 철저하게 무너졌었으나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할 수는 있다. 가끔은 나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데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니야.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인고의 시간들은 내 글에서 울림이 된다. 나는 ‘꿋꿋하게 견디기‘라는 주제에 어쩌면 심할 정도로 매혹된다. 삶이란 산다기보다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 P75

작가 리본이 이 캐릭터에게 부여한 인간적인 단점들을 끝까지 끌고갔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세상의 기준에 영합하지 않은 작가는 스미지가 죽어 간다고 해서 갑자기 깨달음의 순간을 갖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짓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우리에게 스미지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더 문학성 있고 설득력 있는 작품이 되었다. - P91

우리가 몸에 집착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이 몸이 인생을 헤쳐 간다. 몸은 고통과 쾌락을 가져온다. 우리를 보좌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기도 한다. 몸이 우리를 배신하기도 하고 우리의 몸이 다른 이들에게 배신당하기도 한다. (...) 나는 자기의 몸과 자기 자신을 아주 약간이라도 싫어하지 않는 여성을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다. - P103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 P130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이룬 성공을 축하하고 특권도 인정한다. 다만 이쯤에서 만족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앞으로 더 해야 할 일이 많음을 잊지 않고 싶을 뿐이다. 여전히 권리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여성들을 모른 척하고 지금 갖고 있는 것에 위안을 찾고 싶지 않을 뿐이다. - P136

우리는 그저 어떤 소재를 똑바로 쓰고 재미있게 쓰고 웃기게 쓰는 데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P143

여성들은 이전에도 피임이나 낙태 제한에 반대하기 위해 지하 조직을 만들었으나 이제 다시 한 번 그 지하 조직을 만들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정치가들이 이렇게 여성을 무시하고 있으니 우리 역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여성의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 P209

여성이 어떤 식으로건 "나는 남자랑 하고 싶어서 피임약 먹어." 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 여성이 피임약을 이용하는 이유가 피임약이 원래 발명된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테니 설명하라고 요구하다니 이보다 더 퇴행적인 일도 없다. 피임약은 임신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P217

"전 세계에서 오로지 미국에서만 사망한 흑인 청년이 자기 살인 사건에 피고로 설 것이다." - P251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 P262

당신의 특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당장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 그에 대해 미안해하고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당신 특권의 범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그들은 당신이 눈곱만큼도 모르는, 한 번도 겪지 않고 겪을 필요 없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그 특권을 더 큰 사회적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 P284

어떤 이십 대 초반의 흑인 청년들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 안 되는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 P343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트위터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다 쓴다. 블로그에 내가 요리한 음식을 올린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에 나가고 싶고, 이렇게 하면서 더 좋은 여성이 되고 싶다. 나의 현재와 과거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내가 어디에서 비틀거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전부 다 털어놓고 싶다.
어떤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하건 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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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마음 - 나를 키우며 일하는 법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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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등바등 열심히 해봐야 아이고 소용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잘하고 싶다(열심히와는 다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반가워진다.

네, 저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건 더 큰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는 좀 다른데, 두려운 상황이 점점 줄어들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편안하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P10

한때는 내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한다고 착각했고, 어떤 때는 내가 하는 일이 너무도 무의미하고 심지어 부끄러운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괴롭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일의 바깥에 내 좌표를 놓고 나서야, 그 일이 세상의 다른 모든 일과 그리 다르지 않을 만큼의 의미와 무게로, 어떤 과장이나 비하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주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하찮지도 않으며, 어떤 구석은 재미있고 좋으며, 어떤 구석은 짜증스럽고 부끄럽기도 한 그런 일로. - P28

‘경험이 적은 여성‘ 컨설턴트였던 나에게 ‘제 선생‘이라는 호칭과 함께 날아온 그 질문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격려나 칭찬보다도 임파워링empowering한 것이기도 했다(이보다 더 정확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나에게 이 질문은 ‘네게 이 질문에 답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는 메시지였다). - P32

내 이야기에 대한 편집권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을 위한 배려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필요하다. "차별받은 적 없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내가 겪은 차별뿐 아니라 세상에 버젓이 존재하는 차별까지 지워버리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 P36

성장은 과정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이고, 잘 수행된 과정은 세상이 성공이라고 정의하는 결과를 담보하지는 못해도 성장만을 가져다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수행의 과정에 지적으로 집중하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의식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자신이 무엇에서 나아졌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걸 발견한 사람은 거기에 ‘성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 P41

과거에는 그럴 법했던 이야기가 더는 통하지 않는 그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왕이면 더 좋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계속 고쳐 쓸 수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 P84

줄어든 선택지에도, 그 선택지 앞에서 단기적 최적화를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되는 것에도 구조적 압력이 작동한다. 어쩌면 그 선택들이 지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의 선택들과 선택의 결과들을 서사화하는 방식만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온전한 선택이며, 그게 곧 삶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과거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개인의 상상력을 결정짓는다. - P87

사적인서점이라는 현재는 정지혜 님이 자신을 ‘북 디렉터‘라고 칭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임대료 얼마인 공간에서라면 한 달에 몇 권은 팔아야 먹고살 수 있다는 불가피한 셈법과 책을 향한 자신의 셈 없는 애호를 타협시킬 방법을 찾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 P92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건 곧 자기 자신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굳이 ‘기특‘이나 ‘불쌍‘ 같은 우회로를 선택할 이유는 없지요. - P98

나는 애호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겹겹의 우주가 있다는 걸 ‘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 그리고 나의 그 우주 안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 - P107

과잉의 노력을 쏟아 붓는 시간을 셀프착취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크건 작건 스스로 목표를 정하면, 고용주와 나 사이의 제로섬 게임 바깥에 내 일의 또 다른 층위가 생겨난다. 과잉의 노력을 쏟아 붓는 것은 고용주에게 필요 이상의 노동력을 갖다 바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내 삶에서 개인적 충만함을 위한 기울기를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가파른 기울기의 짜릿함을 맛본 사람은 다른 경험에 직면해서도 그런 기울기를 추구한다. 가파른 기울기는 즐거움의 총량을 늘린다. 즐거움은 탁월함의 다른 이름이다. 무엇이 즐거운지는 나만이 정할 수 있고, 탁월함 또한 그렇다. - P173

일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대상인데, 일을 잘하는 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것과 별개의 문제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당장 눈앞의 사람을 친구로 만들려고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잘한다는 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그냥 무던한 사람, 좋은 친구가 아니라 정확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 P186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상을 만인의 만인을 향한 아레나로 보느냐, 혹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커다란 학교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성장하거나, 성장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실수하거나 넘어지거나 되돌아가는 것이 더 장기적인 계획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내가 넘어질 때 당신이 기다려주고, 당신이 넘어질 때 내가 기다려주겠다는, 장기적인 신뢰와 환대를 주고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학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 P222

나에게 ‘책임‘은 나를 앞으로 나가게 밀어붙여주는, 너무 달콤하고도 강력한 기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일으킨 동기가 사그라질 때, 나를 끝까지 길 위에서 버티게 해줄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힘 중 가장 좋은 것이 내게는 책임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깨우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자발적 동기는 믿지 못하지만 나의 책임감은 믿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기 위해 책임을 맡는 방식을 취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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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리더 - 젊은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임유진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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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이해하고 싶은 사람, 궁극적으로는 제대로 살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것이 '노력과 연습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더더욱'. 기꺼이 노력하고 연습하겠다는 그 희망 섞인 다짐 앞에서 나도 마음을 단정히 하게 되었던 시간.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재미가 없다,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이 일어나길 원했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작품선정의 실패라기보다 대화의 실패다. (72)

스스로가 누구/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아내고, 적이 아닌 사람을 착각해서 후려치진 마세요. 빌어먹을 진짜 권력에 저항하라는 것,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아마추어 같은 실수는 꽤 저지르기 쉬운데요,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저도 항상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불길 속에 섰을 때, 사방에 그 불길을 번지게 하기 전에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꼭 멈춰서 잘 들으셔야 합니다. (76)

그러나 나는 상상한다. 방 안에 앉아, 아버지를 잃은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을 작가의 어떤 시간을. 9 ㆍ11이라는 무참한 사건과 비통함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개입으로서 글을 쓴 작가의 마음을.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갑작스럽게 잃은 사람들에게 그가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방식으로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하며 말들을 다듬었을 작가의 그 긴 시간을. 자신의 그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장들은 그냥 글일 뿐일지 모른다며 좌절하기도 했을 작가의 마음을. 그러나 그렇더라도 상심한 사람들에게 무엇이라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작가의 다짐을. (95-96)

그러나 이것은—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애쓰는 것—우리가 단순히 누군가에게 베풀고 줘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죽음에 대한 대가로 ‘얻는‘ 것이다. (120)

"Doing what you love means dealing with things you don‘t."—소녀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우리 삶을, 우리의 일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을 매순간 좋아하기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싫은 순간, 그만하고 싶은 순간은 당연한 조건이다. 이 악 무는 괴로움과 고통스러움은 피해야 할 것도 어디 처박아 두어야 할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모두가 직면하는 삶의 조건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조금 안심하게도 더더욱 괴롭게도 한다. (144)

팝콘과 버터구이 오징어를 씹으며 콜라를 들이켜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 영화 30초, 1분에서 연출자가 담고자 했던 것을 보지 않으면(혹은 거기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바로 내 앞에 앉아 재잘대는 친구의 말 역시 들을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부모님이 홀리듯 던진 말의 뉘앙스, 그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 버린 ‘할말있음‘과 ‘여운‘을 결코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작가가 공들여 묘사해 둔 방의 생김새나 역사의 맥락을, 길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읽지 않고 넘기거나 혹은 거기서 멈춰 버린다면, 우리는 점점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149-150)

잘 읽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 의미를 살짝 숨겨 놓았다면, 애써 찾아내고도 싶다. 노력과 연습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하고 싶다.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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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이슬아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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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초라해 보일 때 괜히 엄마를 미워해보는 것은 딸들이 자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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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
손열음 (Yeoleum Son)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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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어느 꼭지에서 소개된 Alkan이라는 음악가의 <이솝의 향연>이었다. ‘특히 그 모든 것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쓴 듯한 매끄러운 텍스처’ ‘고유의 악마적인 시상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앞뒤가 없어 훨씬 더 공포스러우면서도, 뭔지 모를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는 광기란 과연 무엇일까.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못할 정도의 감탄스러운 기교와 재미란. 그것이 궁금해 찾아본 영상에서는, 나로서는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지만 그 음악 자체보다도 그것을 전달하는 손열음이라는 피아니스트에게 홀릴 수밖에 없는 뜨거운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연달아 보게 된 Bolcom이라는 음악가의 <뱀의 키스> 역시. 김연아 선수의 연기를 처음 보던 때와 비슷한 종류의 충격. 언젠가는 이 피아니스트의 연주 영상에 대한 감상을 짧게라도 남겨보고 싶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집중하는 사람 특유의 입을 쫑긋쫑긋 오무리는 순간이 정말 귀엽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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