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택시 - 매 순간 우리는 원하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지점들을 지난다 아무튼 시리즈 9
금정연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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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가가 자기 책에 유행어 쓰기를 꺼린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유치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물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유행어를 쓰지 않는다고 시간의 풍화작용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책은 그만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한때의 유행어를 책에 쓰기를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 후에 누군가에게 펼쳐질 만큼 충분히 운이 좋다면, 그것은 유치함의 증거라기보다는 한 시대 문화의 단편을 보여주는 자료로 기능할 가능성이 더 높다. 다시 말하지만, 유치함의 증거는 그 외에도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시간과 함께 우리가 조금은 성숙해졌다는 뜻일 테니까.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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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고르듯 살고 싶다 (해피뉴이어 에디션) - 오늘의 쁘띠 행복을 위해 자기만의 방
임진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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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빈 쟁반을 든 처지이면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되었든 내 삶의 온갖 선택 사항들도 이런 마음으로 고를 수는 없을까?
‘아직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쟁반을 든 나‘라는 인물로 한 발 한 발 나긋하고 점잖고 구수한 당당함을 지니고 싶어졌다. (25)

무언가를 계속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다 보니 하루, 한 주, 한 달의 흐름이 참 버거웠다.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개운함 없이 겹쳐지기만 하는 과정이 나를 짓눌렀다. 잘한 것에 대한 칭찬은 없고 느리다는 것에 대한 질책만이 있었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의 일하는 시간까지 단가로 계산되는 삶이었다. 대표는 "너네 월급도 안 나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칭찬받고 싶은 마음은 사치였다. 어쩌면 엄청 고심해서 쓰레기를 만드는 중이 아닐까 하는 생가까지 들었을 때 퇴사를 결정했다. (41)

이렇게 나열하니 우습기도 하고 뻔뻔한 자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인생에 맞추어진 아찔한 고비들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모든 일의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실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서 같은 그림들을 계속 그렸고, 나의 방향성이 보이는 책을 꾸준히 보고 수집하며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 내 이야기로 종종 책을 만들며 결이 맞는 곳과 일을 했더니 어느덧 작업실이라는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일상이 생겼다. 신기하게도 느낌 좋은 낙서, 담백하고 귀여운 그림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기에 꾸준히 일로서 해올 수 있었다. 좋은 세상이다. (63)

어쩌면 사람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차가워진 혹은 먹먹해진 마음에는 조금씩 저어주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음의 문제는 냉장 보관된 청보다 더 차갑게 굳을 수 있기에 단숨에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고, 더디게 나아진다. 그리고 저으며 녹이는 과정이란 일상의 다정한 한마디와 잦은 표현, 그리고 노력하지 않아도 피워낼 줄 아는 표정이 아닐까.
점점 고개를 떨구며 이내 울고 싶어졌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갑게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엄마인 양 쉽게 내뱉고는, 죄송한 마음에 돌아서서 혼자 울기만 하던 내가 늘 미웠다. 간신히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내곤 했다. 고맙다는 말보다는 죄송하다는 말이 쉬워서. 가까운 사람 앞에서는 차가움으로만 설정된 사람인 줄 착각하며, 스스로 부드러움의 버튼을 누르길 머쓱해하는 멍청이가 바로 나다. (90-91)

매사에 ‘내가 더 힘들어‘라는 시선으로만 상대를 바라보는 사람과는 더 이상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그 시선은 너무나 다양하게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다. (113)

서로 노력하지 않아도 슬며시 안 만나게 되는 사이가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무수히 많은 일들을 겪는 동안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되고, 그런 일이 지속된다면 결국은 질리게 된다. 그냥 그런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맞지 않는 둘이었다는 결말.
참 나쁘게도 거짓 가득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에 마음에서 가위를 꺼냈다. 나 혼자만 품고 있던 가위는 아니었을 테다. 서로 각자의 가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115)

언제나 별일 아닌 일로 괴로워해야 했다. 괴로워해야 구성원이 되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들이 큰 문제가 되어 그 네모난 사무실 안의 사람들을 모두 잡아먹던 나날. 집으로 돌아간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다시 그 세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삶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다는 사실. 1년 반이 지나서야 내가 회사에 다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15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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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되는 법 - 두 언어와 동고동락하는 지식노동자로 살기 위하여 땅콩문고
김택규 지음 / 유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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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실망스러운 어조로 "그러면 번역가가 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군요"라고 말할 겁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렇다고 답해야 할 것 같군요. 정해진 사람, 준비된 사람, 문장력과 통찰력이 이미 안정적으로 구축된 사람만이 출판번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번역가는 번역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기 이전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학습과 글쓰기의 오랜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수료한 사람입니다. (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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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허혁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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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이를 악물고 울었다. 울음이 터져 나와 이를 악물 수도 없어서 입술을 앙다물고 울고 또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뒤로 그날 왜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별것 없었다. 내가 대견해서 그렇게 울었다. 가게 팔고 반년도 안 돼 관광차 몰고 시골 아주머니 아저씨들 원 없이 춤추고 놀게 해준 내 자신이 너무 멋져서 그렇게도 울었다. (31)

신념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것들이 뇌과확 앞에서는 모두 소설이었다.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기도 한 높은 베타파가 습관화되어 내 삶을 끌어왔던 것이고, 그 예민함과 날카로움이 다른 사람과 대비되는 나만의 매력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냥 울화병 환자였다. (47)

아버지를 용서하기가 힘들어요. 아버지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로워요. 그날 밤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고 무서워서 울지도 못한 큰아들이 지금 울고 있어요.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술 먹고 저희들을 다 망치셨어요. 동생들도 제대로 못 살잖아요. 아버지가 꼭 아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 바보 천치 농판 등신이에요. (62)

자기 능력의 70퍼센트를 쓰며 사는 사람이 제일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나머지 30퍼센트의 여유 공간에서 인간다운 면모가 나온다고 한다. (81)

최전방 공격수로 나가서 럭비 하듯 공을 찬다. 우리 팀 공격수의 활로를 열어주기 위해 상대 수비수의 시야를 가리거나 진로를 막는 전술이다. 상대편 수비가 나보다 훨씬 빨라서 큰 효과는 없다. 최소한 상대 수비수 한 명은 달고 다녀야 팀 전력에 도움이 될 텐데 씨방새들이 아무도 나를 마크해주지 않는다. (104)

제법 깝치고 추월해가는 직행버스를 따라잡을 때는 그 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시내에서 쌓인 울분을 외곽에서 맘껏 푼다. 승객들의 반응도 의외로 좋다.
"아따 기사님, 운전이 성깔 있네!" (132)

두 가지 경우다. 아무 생각 없이 들고 다니는 학생하고 다 알면서도 들고 다니는 학생이다. 알고도 들고 다니는 학생은 전주 시내버스 기사들이 너무 미워서 일부러 일반 카드를 들고 다니는 나름 정의로운 그룹이다. 전주에는 현재 일부 젊은이와 시내버스 기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기사 아저씨가 모르는 줄 아나 본데 다 알고 있다. 빨랑 카드 바꿔라! (145)

현재의 친절기사 선정 방식은 비록 좋은 의도로 하고 있다 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 전반의 시스템 문제를 들쑥날쑥한 인간의 품성에 기대어 해결해보려는 것은 너무 궁색하다. (160)

하마터면 또 울 뻔했지 뭐야. 미사곡이 길게 흘러나오는데 이 친구 기도 소리가 딱 얹히니까 절묘한 거야. 뭔가 막힌 것을 도려내는 것 같기도 하고, 텅 빈 것을 꽉 채워주는 것 같기도 하고, 면도칼에 베었는데 아프지 않고 오히려 시원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 (191)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뭣이 그렇게 급했던지 한참을 말을 더듬다가 "거시기 가요?" 그러시기에 (거시기는 보나 마나 중앙시장일 테니까) "예, 거시기 가요!"라고 큰 소리로 익살스럽게 답을 해서 버스가 뒤집어진 적이 있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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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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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내게 한때는 땀과 벌레의 계절이었고, 한때는 불면과 실연의 계절이었지만, 사실은 언제나 땡초의 계절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계절을, 그 여름의 열기를, 그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맺혀 있는 땡초를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매운 음식에 대한 나의 광적인 애호에 대해 나는 이보다 더 나은 이유를 찾지 못했다. (112)

비싼 백명란은 한 쌍씩 랩으로 곱게 싸서 유리그릇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먹고 싶을 때 바로 꺼내 사각사각 썰어 다진 파와 참기름을 뿌려 구운 김에 싼 밥 위에 얹어 먹는다. 이때 밥은 아무리 여름이어도 따뜻해야 좋다. 따뜻한 밥 위에 셔벗처럼 섞이는 언 명란 맛이 기가 막히다. 저렴한 파지명란은 깨진 명란을 말하는데, 기왕 깨진 것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진 파에 매운 고추를 왕창 다져 넣고 야무지게 섞어놓는다. 찬 물에 밥 말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조금씩 떼어 먹어도 좋고 달걀찜이나 달걀말이 할 때 한 숟갈씩 넣어도 좋다. 주로 파지명란은 반찬으로 먹고 백명란은 안주로 먹는다. 안주는 소중하니까. (116-117)

한 식구란 음식을 같이 먹는 입들이니,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국의 간이나 김치의 맛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식구만 그런 게 아니다. 친구, 선후배, 동료, 친척, 등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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