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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읽고 싶은 소설들..

 

 

 

나는 밀란쿤데라를 좋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감정을 숭배하는 소설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나는 그의 발언에 놀랐다. 소설은 어떤가 하고 읽어봤더니, 정말 잘 쓰더라. 도스토예프스키의 화자는 감정적으로 작중 인물들을 왜곡하고 비꼬는데, 쿤데라는 화자를 내세우지 않고 작가가 직접 개입한다. 담담하다. 작가랑 인물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지 않는 것 같기도.

그 쿤데라가 추천한다. '스스로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한 점도, 신기하다.

 

 

 

 

 

 

문단에서 금기시 된 사건을 소재로 글을 쓴 작가의 배짱이 대단하다. 양철북도,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한 데 얽혀 큰 서사를 이루어낸다. 그의 글로 버무려낸, 그 사건이 듣고 싶다.

 

 

>출판사 책소개 <

 

 

이념과 수치(數値) 속에 감춰진 죽음의 표정들, 단 한 측면만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는 역사 왜곡 위험 등에 대해 경고하면서, 역사의 거시적 차원과 그 알맹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필립로스가 쓴 미국의 목가를 읽고, 작가에게 반했다. 개인차원의 일을 역사적 차원의 일과 연결시키는 능력이 잘 발현된 소설이라 생각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포착해내는 관찰력을 배우고 싶다.

 오늘을 사는 나는 내가 어느 흐름에 속하여 가고 있는 지 알아채고, 발버둥치고 싶기 때문이다. 산다. 산다. 살아야 한다.

 

 

 

 

 

 

 

 제목에 눈이 휙 돌아갔다. 나는 한국이 싫다.  태어난 땅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투표했는데, 다수결로 뽑힌 정부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냥 정부 욕을 하기에는 나 역시 무지해서 어떤 대안을 못찾겠다. 그때문에 공부하려는데도, 갈 길이 너무 멀다. 이런 건 한국이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 싶으면서도, 부당하게 해를 당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얄팍한 얼음위의 자유가 참 하찮아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질문하게 한다.

 

한국이 싫어서 라는 제목을 읽는 순간, 이 작가는 한국을 좋아하는 구나 싶었다. 한국이 싫어서- ~한다. 라는 말을 기대하게 하는데, 그게 소설 제목이라는 건 그만큼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 한국이 싫어서라면서 한국 이야기를 하겠지. 작가가 느끼는 한국이 펼쳐지겠지. 읽고 싶다.

 

 

 

-- 잘 쓰고 싶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글들만 겨우 구상하고 내지른다. 별로 좋은 글이 아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적당한 글을 무미건조하게,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나는 목마른 척 하면서도 아직 덜 절박한 것이 아닐까..

좋은 문장들을 필사해볼까. 좋은 문장이란 게 뭘까.

아니면 내 사유가 아직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뚝뚝 끊겨서 그런 걸까.

이상하다. 하여튼, 모자라다. 많이.

더 많이 읽어야 겠다. 더 꼼꼼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온갖 형용사를 다 동원하여,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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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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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서 동떨어져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떨어져 지내려 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는 거 아닐까 싶네. 내 소설은, 대개 그런 개인을 그리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 시대정신의 표현을 지향하고 있지 않나.(조코 코기토)" 제 5장 거대 현기증 <익사> - 135p

역사를 인간 개인 차원의 문제로 끌어내려 독자가 전체 그림을 관조할 수 있도록 쓰여진 소설이다. 미궁의 사건을 던져주고 실마리를 한나씩 제공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든 이야기가 풀려나갔을 때 이야기는 예상가능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예상가능하지만 소설 마지막을 읽을 때까지 예상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다. '익사' 할 운명이었다는 듯이,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소설은 익사를 향해 간다. 넘을 수 없어 절망적인 한계때문에 익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기가 익사할 정도의 시기까지밖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익사한다. 그러므로 익사 이후의 미래는 남겨두고 익사가 진행된다. 
도대체 왜? 이 소설은 익사와 어떤 관련이 있기에?
모든 일은 소설의 주인공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가 익사하는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조코 코기토는 이 일이 전후 일본을 다시 전쟁으로서 일으키려는 아버지의 시도가 우스꽝스럽게 좌절되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젊을 때 <손수 나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날>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고 그런 아버지의 시도를 조롱한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는 그가 교육받은 그대로, 아버지가 지향하는 가치를 숭상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자란 이후 이성을 가지고 판단한 결과 그는 그 가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를 온전히 그 자체로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의 시대를 부정해야만 하기에 그는 그의 내면에서 어떻게 화해를 이루어야 할 지 모르겠다. 

[(<마음>의 선생님)"그런데 한창 더운 어느 여름날,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해서 천황에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그후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마음>의 선생님께 질문) 당신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동시대 사회에 등을 돌리고 또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사람이 아닙니까? 시대정신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정신이라는 게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천황에 빗대어 말한다.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 역시 시대가 끝나려 하자 미리 '순사'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나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들이라고 판단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대를 인식하는 방법, 시대의 정신 아래서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전후 일본, 그들은 극복해야만 하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전쟁에서 진 상흔을 어떻게 자주적으로 극복할 것인가.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재건할 것인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고쳐야 할까? 그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 고민이 시대를 지배했으리라 생각한다.
소설가인 조코 코기토는 새로운 시대에서 새로운 세대로서 살지만, 역사가 어떤 무게로 어느 정도의 상황으로 스며들었는지 모른다. 소설 안에서  조코 코기토는 그 내막을 끊임없이 탐구해나가고, 그를 소설로 만드려고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상황을 목도한다. 

하나. 그의 어머니는 그의 그런 시도 자체가 약간 어긋난체 소설화되면 가문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천황을 죽이고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시도와 무관하게 죽었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관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고, 아버지는 시대정신을 실현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그가 배워왔던 마을의 정신과 대치된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정신과 연결되지 않았는가? 그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마을의 정신이라는 것도, 그가 고유하게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고, 어쩌면 마을의 정신 역시 전체 시대정신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은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떤 형식으로든 그의 행동과 죽음은 시대정신과 연결되었다. 국가공동체를 지키는 방법의 일환으로, 더 나아가, 지역공동체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도 '순사'를 선택한 것이다. 그건 그가 살았던 세대의 논리였을지도 모른다. 
둘. 여성을 국가의 앞날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으로부터 배제하고, 마치 도구취급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이는 시대정신과 멀어진 상황이라 볼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여성 역시 시대정신을 반영했다.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고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동하였으면, 과연 일본 국토에 전쟁참여라는 참혹한 상황이 일어났을까? 아버지의 '순사'마저도 어머니의 손에서는 보잘것없고 평범한 일로 죽은 게 되었다. 만약 어머니와 상의했더라면 '순사'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선생님이 아내의 뜻을 받아들여 메이지 정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했더라면? 그 비판적 시선과 순사하려는 정신이 만나서 새로운 시대정신이 탄생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알레고리는 우나이코라는 여성 연극단원에게도 적용된다. 그녀는 시대를 비판하는 극을 많이 만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방해를 많이 받는다. 그녀가 방해를 받았던 것은 아직 시대정신이 그녀가 바라는 사상을 융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후 일본의 과제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것을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아마 이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여지를 없애지 못하고 과오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소설에서 풀어놓은 많은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우나이코는 큰아버지 식구가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을 연극에 삽입하여 고발하려다 실패하고, 다시 큰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다이오는 우나이코의 큰아버지를 죽이고 스승인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를 따라 '순사'한다. 화해에 실패하고 다음 세대로 가는 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대는 아직 변화하지 않은 상태이고, 과거의 잔재로 인해 발이 묶였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술술 풀릴 수 없었으므로 '익사'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익사'이후의 미래는 열려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정말 놀랐다. 소설인데 현실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인물의 다양한 측면을 다 말해주면서도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지지 않고, 모든 인물을 다층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스토리를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마무리지어가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소설이 가리키는 지점이 한국과 별다르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아직 전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국가에 살면서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이 소설이 굉장히 모호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가 쓴 '시대정신'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아서 그를 엮어서 소설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했지만 평면적인 것 이상으로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개인과 시대정신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어떻게 엮어 설명해야 할 지 몰랐던 것은 아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범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 잘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나는 도대체 나의 역사는 어떤 시대정신 아래에서 걷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앞으로 몇 번의 익사가 더 필요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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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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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내 어릴적 꿈이었다. 나는 그 꿈을 꾼 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사람이어서 꾼 꿈은 아니었다. 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서 그런 꿈을 꾼 나 자신을 대단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남도 행복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기뻐서 이것저것 살을 붙여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추켜세우고 그로서 기쁨을 창출해내려는 조악한 시도였다. 그 시도는 곧 시도를 빛나게 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손쉽게 실패했다. 너무 거대한 꿈이라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꿈조차도 한없이 하찮은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까닭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
이 책은 내 어릴 적 꿈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에서 소외된 사람이 비참하게 짓밟히는 광경을 그대로 목도해야만 했을 때, 나는 소설에 개입하여 아무것도 못하기에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못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해야만 했던 나 자신을 소설에 비추어 봐야만 했기에 역겨웠다. 역시 희생당하는 사람을 제외하고서라도 그것을 목도해야만 하는 목격자도 속죄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연을 마주하면 거울처럼 그 심연이 나를 비추리라. 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만 행복해서는 진짜 행복이 아닌 것이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행복일 뿐. 아니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체 느끼는 조각난 행복이거나. 그렇기에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게 기억났다.

파르마코스(Pharmakos)란 ,

"고대 그리스어로 속죄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염병이나 기근, 외세 침입, 내부 불안 등과 같은 재앙이 덮쳤을 때, 재앙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 자체의 경비로 인간 제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파르마코스라고 칭했다. 소나 송아지 같은 동물들 이외의 인간 파르마코스는 대체로 희생을 당하더라도 보복의 위험이 없거나 연고자가 없는 부랑자, 가난한 자, 불구자들 가운데 선택되었다.
특히 르네 지라르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희생제의 속에 내재된 욕망의 구조를 분석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이 말을 논의의 중요한 전거로 활용하고 있는데,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어떤 집단이 신에게 동물이나 인간과 같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풀고 신의 은총을 기원하는 의식이 아니라, 집단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폭력을 속죄양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통해 집단의 질서와 일체감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장치이다.
따라서 파르마코스는 어떤 불확실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는 속죄양이 아니라, 집단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언제든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폭력을 상징적인 폭력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떠맡은 희생물이다. 일종의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속죄양 제도를 통해 사회는 불순한 폭력(violence impur)을 응징하는 순수한 폭력(violence pur)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희생제의는 '해로운' 폭력과 '이로운' 폭력을 차별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폭력의 희생자인 속죄양에게 성스러운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하게 되는데, 이 성스러움은 바로 '이로운' 폭력의 폭력성을 감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문학비평사전 - Pharmakos)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소설은 그 욕망을 무참히 짓밟는다. 읽는 내내 부조리함을 소거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축적되고 집약된 분노가 가해자를 향하지 않고 희생자를 더욱 무참히 짓밟으면서 발효된다. 그건 희생자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연민의 시선이 기괴하게 비틀린 까닭이다. 그로서 독자가 온전히 연민할 수 있도록 더욱 잔인하게 희생자를 비튼다. 그건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스스로에게 향하는 분노이기도 할 것이다.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방관자가 되는,  방관자가 되었기 때문에 속죄양으로 작동하게 되기에 일어나는 분노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 소설<익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시대에서 동떨어져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떨어져 지내려 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는 거 아닐까 싶네" 익사 - 135p
시대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그런 이야기였다. 속죄양에게 죄를 떠넘기려다가 되려 스스로가 속죄양이 되어버리고 마는 사회의 비극을 가리키는 데도 적합한 것 같다.
그렇기에 작가는 타자를 계몽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을 두배 세배로 짓밟음으로서 독자가 그에게 연민을 가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연민하지만 그 연민을 역설적으로 발화함으로서 되려 그 인물의 편이 되어 그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든, 어떤 짓을 저질렀든, 저지른 것보다 더 큰 벌을 받고 있으며 지금 소설가에 의해 발화되는 것과 반대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작은 실수가 재앙급의 잘못이 되는 일은 막고 싶다고. 

"이제 가능한 한 월급이 표시하는 만큼의 일을 객관적 절차에 따라서만 할 것이고 사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린 다음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밀한 지향보다는 표면적 당위로 변질되어 부질없기만 했던 선언 - 누군가를 구제한다는 착각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며 봉사는 나의 모자람을 타인으로 인해 채워가는 행위라는 - 도 남몰래 코를 푼 휴지처럼 변기에 던질 것이다." 이물異物 192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지금까지 겪어온바 맘먹고 들이대는 사람에게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이 적지 않았다. 몸을 격렬하게 뒤치는 지렁이 앞에서는 구둣발도 어디를 밟아야 치명적일지 몰라서 잠깐은 멈칫한다. 그 뒤에 지렁이를 기다리는 운명이 압사뿐이라고 해도, 끝내 꿈틀하지 않으면 여기 아닌 다른 데로 가기란 요원하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어쩌면 거기  43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무엇보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하해와 같은 베풂과 나눔을 실천한들 바퀴나 엔진 소리로 미루어 이제 이 차도 오래가리라는 보장이 없어서 나중 가면 피차 난처해질 뿐만 아니라, ...... 최악의 경우 시신을 둘러메고 다녀야 할지 모른다. 누군가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다. 옆자리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 자리가 비어있다고만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품속에 몰티즈 한 마리나 무사히 지켜내는 게 정신적으로 남는 장사이며, 이 순간의 외면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문득 차창 너머의 디귿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눈 속에 담긴 혐오 내지는 공포 아니면 간구의 빛을 포착 했다고 느꼈음에도 니은은 다만 불가능한 행운과 안녕을 비는것이 서로에게 최선이라 믿으며, 디귿의얼굴거의 절반이 녹아내리는 이 순간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동등해진다." 식우蝕雨 164-165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그건 그의 소설 '이창'에 나오는 주인공의 행동과도 대비되는 방식이다. '이창'의 인물은 현실을 바꾸려는 계몽적인 노력이 역반응을 일으켜서 희생자가 희생되는 형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화자의 노력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을까? 나는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희생당하게 되었다 해서 연민과 참견 자체를 나쁜 일로 매도해야 하나. 아니다. 연민의 방식을 좀 더 섬세하게 가꾸기 위한 방도를 찾아야 할 뿐. 목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닌 것이다. 
지독히도 현실적이기에 환상층위를 끌어와서 더 몽환적이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소설을 읽고 나는 더 차가워진 기분이 들었다. 내 눈에는 환상기법이 드러내는 선명한 현실만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주세요. 현실에 안주하지말고, 분노해주세요. 하지만 그 분노는 타인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되요.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기에, 그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서로를 돌보는 방법이 온전한 길이에요. 그리고 그런 연민과 돌봄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볼 수 있기를, 그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기를"
이 이야기를 여태 꼬아서 보았지만, 다시 정방향으로 보면  구병모의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으면 건강한 집단을 이끌어갈 수 없는 우리 사회를 겨냥한 소설적 파르마코스인지도 모른다. 그로서 현실이 더 이상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하려는 바람이 담긴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왜 파르마코스가 되어야 했나?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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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다는 게 더 자신이 없다. 잘 써야 한다고 여겼는데, 사실 이렇게 우울해하면서까지 잘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아마도? 하여튼 모든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초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던 것처럼. 단 것을 아무리 먹어도 살 부딪치는 소리만 출렁거리고 엔돌핀이 돌지 않았다. 자꾸 도망치려 하고 회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버렸다. 딱 벽에 머리를 찧어서 세상이 팽글팽글 도는 순간의 기분이다. 

 더 섬세하게 글을 써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단어 하나 하나에 무게감을 두고 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잘 전달되지 않고, 주어, 목적어를 빠뜨리고... 과감한 생략이라 여기며 위안했는데, 곡해를 부르는 생략이었다. 

활자들이 알알히 가득 의미가 있는, 그러고도 재미까지 꽉 찬 소설이 마음을 정화해주길 바랬다. 

 

 

잭런던, 이름만 많이 들었다. 요즘들어 이름이 자주 들린다. 서점에 가서 곳곳을 둘러보다가 이름을 몇 번 발견했고, 2-3년전에는  EBS 에서 그의 소설을 영어로 읽어주었다.

 

 매일 하루에 천 단어씩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한 그는 만 40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야성의 부름』 『늑대개 화이트팽』 등 19권의 장편소설뿐만 아니라 수백 편의 기사, 에세이, 비평을 비롯해 200여 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남겼다. (출판사 책소개)

 

책 소개를 읽으니 참 소설 많이 쓰셨다. 한 번도 읽지 않은 게 신기할 뿐이다. 이번 기회에 읽어보자 하는 생각이 든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니 제목부터 참으로 찰지다 찰져. 나는 구제불능 비관주의자인데 낙천주의자는 어떻게 사고하는지 듣고 싶다. 

 

역사의 큰 사건들과 정교하게 겹쳐지는 청소년기를 보내며 차츰 성숙해가는 소년 미셸의 삶을 그린 소설.(출판사 책소개)

 

 역사적 사건과 개인은 절대 따로 놀 수 없다. 세계 2차대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웠는지. 또 역사적 사건으로 기술되지 않을만한 사소하고도 거대한 사건은 개인의 역사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러니까 그런 것보다 소설적으로 얼마나 잘 풀어냈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겠지. 과연 이 소설은?



  책소개를 보고 책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데, 책 소개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선택한다. 처음 보는 작가, 이국적인 이름. 그런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속해있다. 호기심이 인다.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나더쉬 피테르의 중편과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 로베르트 무질과 마르셀 프루스트에 종종 비견되는 피테르 나더쉬를 가리켜 수전 손택은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라고 격찬했다. 그의 작품들은 한때 헝가리 검열의 그림자 아래 가려 있었으나 그 천재적인 문학성을 인정받아 현재는 전 세계에서 번역되고 있다. (출판사 책소개)

 

 새로운 글쓰기 실험? 좋지요. 헝가리 작가? 읽어보지 않았으니 더 좋지요. 

수전 손택이 꼽았다구요? 읽어볼래요. 궁금하군요.



 

 

역시 마음을 정화하는 데 소설, 이야기만한 게 없다. 지금 '오에 겐자부로'의 '익사'를 읽고 있는데, 아까보다는 마음이 안정되어 집중력이 돌아왔다. 다시, 또 하루를 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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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5-0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자랑 완전 똑같..

우끼 2015-05-22 21:49   좋아요 0 | URL
:)!! 헤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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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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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분명 나 혼자만의 괴로움이 아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 나는 이 세상이 너무도 고도화된 문명사회라서, 겉보기엔 전쟁도 없고 아주 평화로워서 커서도  평온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토록 생존 그 자체를 위해 허덕여야 하는 세상인 줄 몰랐다. 커가면서 '현실'이라는 것들이 나를 짓눌렀다. 날더러 그것들은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고민하라고 요구했다.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리 없다. 고민보다는 지금 당장 닥친 일부터 해치우는 것. 혹은 부모님 말씀을 듣는 것 그런 수준에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 이외에 주변에서 종종 조언을 얻기도 했지만, 그것은 조언일 뿐. 부모님 말씀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보장된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 이 소설에, 그런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 나이대는 다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공감이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평범'한 고민들을 한다. '사랑'을 쫓고, '돈'을 고민하면서 같은 시대를 산다.

이 책은 연작 중편소설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물들도 다르고 이야기도 달랐지만 연관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결혼상담소에 다니는 나카고메 시즈코는 얼그레이를 좋아하는 이혼여성이다. 결혼생활에 지친 그녀는 재혼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나름의 즐거움을 찾고, 다른 여유를 찾아나간다. 그 과정에서 얼그레이는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 이라는 중편에서는 후쿠다라는 동창을 돕는 시게오가 나온다. 시게오와 후쿠다는 '물'을 매개로 우정을 맺는다. 이 중편에서는 '물'이 곧 우정을 상징하는데,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얻는 소설이다.

캠핑카라는 중편에서는 퇴직 이후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토미히로가 주인공이다. 그는 캠핑카를 사서 아내와 함께 여행다니는 것을 꿈꾸지만, 아내가 '자기만의 시간'을 주장하자 잠시 공황상태를 겪는다. 그리고 그것을 '커피'를 끓여마시는 일상을 통해 그려낸다. 그는 잠시 혼란 상태에 있을 때 '커피'를 자연스럽게 끓여먹던 자신을 잃는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할 희망을 얻으면서 '커피'를 다시 끓일 수 있게 된다.

펫로스(pet loss)에서는 보이차가 나온다. 남편이 자주 놀러가는 예전 거래 회사 전무의 아내가 타준 차가 보이차였고, 보이차를 좋아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실망하고 강아지 보비를 통해 그 빈자리를 메우려 하는데, 그때 공원에서 개주인이라는 처지로 공감대를 형성해 만난 요시다씨와 보이차로 서로의 간격을 보여준다. 마지막 즈음에는 남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가까워지는 계기를 '보이차'로 만드려고 결심한다. 

여행도우미는 트럭운전사인 겐이치가 주인공이다. 그는 해녀인 할머니에게서 햇차를 마시는 지금의 습관을 배운다. 그는 그 시기를 가장 소중하게 추억하지만, 그가 좋아했던 사람에게 그와 관련된 추억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자주 햇차를 마시며 추억을 떠올린다. 그가 변화를 결심한 것도 추억을 상기한 까닭이다. 그래서 그에게 햇차는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추억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은 '마실 것'에 마실 것 이상의 희망을 담아 삶을 버티고, 그 에너지를 독자에게도 전달한 셈이다. 일상에서도 실천해볼 법한 평온을 찾는 해결책인 듯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얼그레이나 보이차나, 햇차, 스파클링 물, 커피 등은 내게는 사치스러운 취미 같기도 해서 실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저 보온병 하나 딸랑딸랑 들고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혹은 마실 것을 매개로 사람과 만나는 것은 할지도..

 

정말 일상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간다. 현실은 '내 마음대로'흘러가지 않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살아가자는 듯이 반짝인다.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고, 보장된 것은 없어도, 가치있는 하루를 보내는 데는 현실적인 변화 없이 내면의 안정감만으로도, 가능하다는 듯이, 그것은 사람과의 소통과 사랑,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신뢰'로 가능하다는 듯 이야기가 이어져서 예쁘다.

 

맛있게 잘 읽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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