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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새해가 되었다. 

해는 넘어갔는데, 내 생각은 그대로이다. 나는 여전히 '나'를 몽상한다. 내가 절대 되어보지 못할 인물들의 감정선을 상상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지탱할까. 나는 어느정도 그들의 삶에 몰입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과 내 삶이 어떻게 다를까. 내 육체는 여기 이곳에 묶여 안온하게 숨쉬는 채 두고서, 몽상한다. 단지 몽상하지 않으면, 숨이 쉬어지지 않기 때문에, 앞날은 보이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여유로운 척 앉아서 물을 마신다. 물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가운데 침도 꼴깍꼴깍 삼킨다. 나는 나로부터 달아나고 싶고, 나에게 안주하고 싶다. 변화하고 싶지만 변화하고 싶지 않다. 올해도 여전히 그런 날들일 것 같다. 

작년엔 희망이 무엇인지 배웠다.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한 것. 절망만을 품고 사는 줄 알았던 나조차도, 사실은 절망이 일침이기를 바라는 까닭에 품었다는 것. 그 일침이 뭔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를 바랬다는 것. 그러고서 그 모든 무거운 짐을, 절망을 말로서 남에게 퍼부었다는 것. 말을 끝맺을 때 절망만을 쏟아내서는 곤란한 까닭은, 그것이 나만의 불평불만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몽상하면서 숨통을 찾고, 나를 벗어난다. 그러고서 내가 내지르는 글들은 누군가가 대신 품어주길 바라는 절망으로 가득차 있던 것은 아닌지. 그게 내가 살려는 발버둥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무리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들이 많다고 해도,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조금 더 넓게 포용해나가는 과정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행복하길 바라면서, 근데 그게 욕심이고 이기심이라는 것도 이해한다. 타자를 위한 것이라 하고서 나에게 돌아오는 콩고물을 기다릴 때 처절하게 느낀다. 정신적인 위안이 되었다는 말이 되돌아오길 늘 기다렸다. 결국 나는 나를 위할 수밖에 없기에, 모두가 동의할 수 없다는 것도, 숨쉬고 살려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매번 이해하는 건, 나는 나를 움직이는 것도 힘겨운 무력한 존재라는 것 뿐이다. 그래도, 이것 또한 살아가는 필연적인 한 방법이라면, 나는 책을 읽고 몽상하고, 끊임없이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으로 그 사이를 메우려고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인간의 의미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 그 공간, 여백이라 불러도 좋고 무어라 불러도 좋은,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점은 결코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그 공간에 있다.”(「배회」)




전소영 문학평론가가 추천사를 쓰며 퍼온 글이다. 나에게도 와 닿았다. 인간의 의미는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간의 의미를 인간에게서 아직 찾는다. 나는 이 간극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작가는 이 간극을 어떻게 파악했을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미국 현대문학을 이끄는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대표작. 오츠는 1960년대부터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편이 넘는 단편을 썼으며,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거의 모든 문학 분야에 걸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20세기 후반 미국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천명관이 조이스 케럴 오츠의 말을 언급했다. 소설은 예술만 있으면 개인적인 것이고, 기술만 있으면 밥벌이에 불과하다. 그럼 그는, 적어도 소설에 예술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작가인 셈이니,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겠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기대된다. 




<출판사 제공 첫 소개>

20세기 유럽의 가장 훌륭한 역사소설로 꼽히는 <라데츠키 행진곡>의 작가 요제프 로트가 생애 마지막 넉 달을 바쳐 쓴 작품. '살아감'의 힘겨움을 술로 달래며 구원을 찾아 길 위를 헤매는 한 남자의 애환과 소망을 사실적인 문체로 그려낸 단편소설이다.


나는 사소한 이야기가 좋아졌다. 버로스의 '정키'라는 소설을 읽고, 나는 마약중독자는 아니지만, 구원을 쫓으며 허공을 짚는 내 삶이랑 어떤 면에서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사소하게 노력하고, 사소하게 실패하고, 인생을 말아먹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그 안에서 숨쉬는 생명력이, 좋다. 이 소설에서 그걸 기대해도 괜찮을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전작 <굿바이 동물원>을 통해 특유의 날카롭고 위트 있는 문체로 경쟁사회에서 실패하거나 좌절한 이들의 웃픈 현실을 생생히 묘파했다는 평가를 받은 작가는 이번 작품 <두 얼굴의 사나이>에서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인격체의 등장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겪으며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고 밀도 있게 그린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욕망이 꿈틀거리는, 찌질한 삶의 이야기 였으면.








<알라딘 밑줄긋기>

P.262 : 가끔 우리는 사실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약한 순간, 강한 순간. 
구원의 순간, 모든 것의 순간.

이 구절이 마음에 들어 가져왔다. 살아가지만 내 삶은 아니고, 도대체 나는 뭔지 모르겠는 상황들을 스쳐서, 과거를 붙들고 여기까지 왔다. 이 작가는 삶에 관한 어떤 통찰력을 이 책에서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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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05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께 새해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영웅과 불굴의 의지를 말하지만 사실 우린 매우 나약한 존재죠. 찰라에도, 아주 긴 시간에서도. 들키지 않길 바랄 뿐. 하지만 초원에 내어 놓으면 바로 사자밥-_-(좀 웃으셨습니까. 요즘 벗을 웃기(그러고보니 우끼...님..)려는 가당치 않은 병이 생겨, 쿨럭쿨럭쿨럭;;;)
우끼님이 곰브로비치 <코스모스> 소개한 것도 반가웠는데, <거룩한 술꾼의 전설> 추천하신 것도 반가워요. 일전에 부코스키 책 놓친 걸 몇 권 샀어요. 버로스도 그렇고 그 절절한 망가짐도 좀 영웅적인 데가 있죠.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들의 모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끼님께 웃는 일을 더 뿌려 달라고 하늘의 별을 보고 특별주문 할께요 :) 어머; 나 좀 느끼한 거 같아ㅜㅜ;

우끼 2016-01-05 22:44   좋아요 1 | URL
Agalma님 감사합니다 사자밥 좋네요 ㅎㅎ 영양식이었으면 ㅎㅎ 오염되었다고 싫어하면 어쩌나 ㅎㅎ
Agalma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해 가득 웃음으로 채우시길 기원합니다~~

서니데이 2016-01-21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 친구신청 해주셔서 감사해요.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우끼 2016-01-21 19:0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16-01-22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우끼 2016-01-22 19:40   좋아요 0 | URL
따뜻한 밥드시고 힘찬 저녁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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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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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끄트머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아래 리뷰는 책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몰락해가는 헌드레즈홀에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무엇이 감추어지고 드러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화자인 페러데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헌드레즈에 집착한다. 페러데이의 서술이 객관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의사인 자신의 직업상 누군가에게 비밀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것을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성직자에 비유하여 어떤 자백을 받아내는 모습이라든지, 그 자백을 이용해 로더릭이 겪는 일을 정신이상으로 치부하는 일이라든지.. 실재로 이 저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공포만으로 모든 일이 조작되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범인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저택을 가지려고 모든 것을 조작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그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 닥터 페러데이다. 그는 저택을 살 만큼 부자도 아니고 능력도 없지만, 야망에 가득차 있다. 그것을 헌드레즈홀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손쉽게 메우려고 한다. 게다가 책 표지에 적힌 소개말로도 이미 그가 범인이라는 점들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으니,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만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마련한 반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저택의 ‘리틀 스트레인져’가 닥터 페러데이라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닥터 페러데이가 어느정도 그 일에 기여했으리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책의 묘미는, 그가 어디까지 개입한 범인일지, 혹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할지 추측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욕망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지 살펴야 할까. 원했으나 가질 수 없다. 혹은 몰락을 원하지 않았으나 몰락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닥터 페러데이와 에어즈가가 이런 점에서 비슷한 인물들이라 이들이 교차점에서 만난 게 이 책이 묘사한 부분이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거나, 공포에 떨거나, 더더욱 욕망에 매몰되어 욕망만을 쫓거나, 어떤 아비규환이든 소환해내는걸까.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에어즈가 사람들은 돈이 없기에 헌드레즈 홀의 땅들을 하나 둘 처분하고, 수많은 고용인들이 청소하고 보수하던 저택에는 하녀가 한 명 있으며, 유일한 수입원인 농장에서 귀족이었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고용된 사람과 일해야 했다. 깨진 컵들은 이어붙여서 사용하고, 몇개의 방들을 제외하곤 먼지가 쌓인 채 빗물이 샌다. 관리가 되지 않는 헌드레즈홀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을 묘사한 것을 읽으면서나는 몰락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에어즈가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런 외부적인 몰락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뻣뻣하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을 구분하며, 비슷한 집안이라 판단한 곳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페러데이는 아직도 같은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욕망을 헌드레즈홀에 사는 에어즈가의 유모 자식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헌드레즈홀에 고용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페러데이와 같은 욕망을 표출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급에서 오는 차이, 무관심 그는 욕망 그 자체에 이끌려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하다. 케럴라인을 사랑한다면서 정작 케럴라인이 무엇을 바라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그녀와 결혼해 그가 가지게 될 지도 모를 저택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나 그 저택을 가진 이후에 관한 계획을 들어보려 해도, 거기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일단 욕망이 실현되면, 자신의 지위도 올라가고, 갑자기 돈도 생기는 듯, 어릴 적부터 키워온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의사가 되는 건 덜 중요해진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수하면서 키우는 야망보다, 눈에 보이는, 어쩌면 허영을 더 손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으로 헌드레즈 홀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케럴라인 역시 페러데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 듯 페러데이를 보지 않고  집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궁리만 한다. 한때 페러데이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힘든 순간에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통해 저택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가 계급적 지위를 버리려 한 것인지, 그것도 사실 이 소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닥터 페러데이에게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방안을 사귀는 동안 명확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닥터 페러데이가 표출한 저택에 대한 욕망, 계급적 욕망 때문이었을까. 사랑이 보은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러면 이들이 행복하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이 필요했을까. 

결국 에어즈가는 누군가가 불씨를 지핀 공포에 물들어 하나 둘 미치거나 죽는다. 이미 몰락의 예감때문에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공포는 어쩌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까. 이 소설에서는 단 한명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있더라도 묘사되지 않는다. 어딘가 모두 불만족스러워한다.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미신에 기댄다. 자신이 바랐기에 결혼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도 나온다. 그러면,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세월의 흐름을 잘 슬퍼하고 흘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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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상사는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권력을 누리고, 만나고 싶었던 여자는 끝내 연락이 되지 않으며, 실종된 a의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E는 이 모든 것들이 어딘가 모르게 폭력적이고 권태롭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E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사 제공 줄거리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않고 명령대로 했기에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다. 생각하지 않음이 악이 되는 세상, 새로운 종류의 악의 출현이라고 말하는데, 오래된 것인지 새로운 것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반드시 말해져야 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구멍은 '나 자신'이기도 '내 생활'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늘 나 자신을 택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내 생활을 택한다. 우리는 구멍을 채우는 대신 목구멍을 채우고 만다. 서로의 구멍을 바라보는 대신 서로의 목구멍을 바라보고 만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 자신과, 내 생활은 분명히 다르다. 내가 존재한다는 감각은 내 생활에 의해 유지되지는 않는다. 생활이 없이는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낄 새도 없다. 생활에 먹혀버린  나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나 하는 무력감에 떨던 나를 감화시킨 책소개말.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어떠한 인간적인 기획을 신뢰할 수 없다.' (밑줄긋기)고 말하는 그의 책이, 어디까지 건드리고 있는 지 궁금해졌다. 

그럼에도 인간적인 기획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에는 욕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물의 목적이 서로 얽히면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서사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인물들은 욕망이 없다고 한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인물들로 도대체 어떤 서사를 펼쳐나가는 걸까?

현대인이 너무 많은 것들에 짓눌려 어떤 것도 욕망하지 못하는 것을 꼬집으려는 걸까? 욕망은 도처에 널려 있는데 모두 내 욕망을 자극하고서 쫓지 못하도록 나를 짓누른다. 










이방인의 시선에서 본 나치 전후의 분위기가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일었다.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시기를 보낸 걸까. 어떤 상황이 그들을 지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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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나는 입을 열어 당신을 부른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저 쪽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온다. “지금도 여기 있어요,” 아직 서로의 곁에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의 존재가 있기에 내 존재가 의미가 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듯 당신도 나를 의지하기에 나는 힘이 난다. 존재가 존재에게 존재만으로 온기를 전하는 일은 위대하다. 서로가 없다면 세상에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은 물이 되어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스며들어 온 이 온기를 뿌리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새 고스란이 몸 안에 흘러 핏줄기 사이에 줄기줄기 뿌리내린다. 어느 무엇도 이 순간을 갈라놓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뿐. 서로의 존재를 확신하는 우리들만 남아서 다시 서로를 확인하고 쓰다듬는다. 

이 위대함이 없이 우리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가? 미치지 않고 세상에 살아남은 게 용하다는 말이 그릇된 말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 이유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정합적인 과학정보만 진짜 취급하느라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곁을 나눈 사람 뿐이다. 그런데 곁을 나눈 사람과 함께 잘 살다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지? 그 사람은 나와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사람과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어떻게 파악해야 하지? 세계가 전쟁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복수심에 가득차서 서로를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 둘만 곁을 지키며 잘 살 수 있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나와 당신 뿐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내 곁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위대함을 쫓아야 하는가.


『파묻힌 거인』에서 엑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암용이 내뿜는 숨 때문에 안개가 세상을 뒤덮어서, 그들 자신도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닥쳤던 전쟁을 잊어버린다. 부부는 그 기억을 되찾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당시엔 판가름하지 못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 망각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증오심을 기억하고 물려주기를 바란다. 작가는 이것을 동화처럼 그려낸다. 가웨인은 망각을 부르는 암용을 수호하는 역할을, 위스턴은 암용을 죽여 증오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고 하는 역할을 맡는다.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그냥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 하지만 오래된 과거고, 이제는 죽은 뼈들도 기분 좋은 푸른 풀밭 카펫 아래 편히 쉬고 있다오. 젊은 사람들은 그 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오래된 상처들이 영구히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기에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거요. …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오래된 두려움이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되기를 당신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땅속에 하얀 뼈로 묻힌 채 사람들이 파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 p426-427『파묻힌 거인』


유럽의 어떤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세계2차대전을 언급하며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한 학생이 질문했다. 

“세계 2차대전을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세계 1차대전도 있었나요?” 

아직 한 세기도 체 지나지 않은 싸움을 잊어버린 학생이 유럽에만 있는 건 아니다. 역사를 잊어버린 젊은 세대가 교실에 앉아 있다. 이들이 전쟁을, 민주화 과정을 기억하지 않고 평화를 평화로 유지할까. 

일본 우익들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데서 비롯한 증오를 자식세대에게 학습시키려고 교과서를 왜곡한다. 자위대를 키운다. 

누군가가 수직적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지적했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와 소통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끼리만 대화를 주고받는다. sns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내뱉고, 다른 세대가 대화에 끼는 것을 어려워한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도,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말들이 아닐까.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관한 기억이다. 삶으로서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어버릴 정도로 바쁘기만 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자기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워하면서도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고, 살아온 그대로 주어진 생명을 연명하는 걸까. 알 껍질은 너무도 단단하기에, 패배감을 가슴 깊숙히 눌러놓았기에,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아서? '암용은 무시무시하고, 그것을 잊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려면,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암용을 죽일 힘은 없지만 암용을 없애는 데 동의한다. 아서왕 시절 법을 세우고 그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액슬, 그것을 부수고 암용이 세상의 기억을 지우도록 도와서 평화로운 상태를 꿈꾼 가웨인, 평화를 기억하지만 그 이후 경험한 분노를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에 복수를 실현하려는 위스턴, 그리고 아직 어린 세대인 에드윈. 에드윈에게 위스턴은 분노를 학습시키려고 하고,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우리에게는 소통이 필요하다. 무슨 방법이든 논의하려면, 소통이 필요하다고, 서로의 존재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대화가, 아프지만 평화로운 약속을 담은 대화가, 각자의 아픈 역사를 품을 자세로 나누는 대화가. 여전히 "관습과 의심은 사람들을 갈라놓을지라도,"(p443『파묻힌 거인』) 기억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니까."(p468『파묻힌 거인』)


신화적으로 현대사회의 축소판을 그리고서,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p.s.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궁금하다. 무거운 이야기가 신화적으로,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은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 사회를 향한 목소리일까, 아니면 조금 더 부드럽게 마음에 가닿기 위한 장치일까? 피카소가 폭격당한 마을을 묘사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린 것은, 우리가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어떤 사진작가는 잔인한 전쟁 장면을 찍어서 사진전을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것에 충격을 받고 나중에는 사진이 아닌 글로만 책을 냈다. 작가가 리얼리즘 형식이 아닌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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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다, 나는 지루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보고 싶고, 지루하기 때문에 공백이 나를 찾아오는 것을 내버려둔다. 미래에 대해 상상하면 공허해진다. 나는 그때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을까. 나는 그때쯤은 무엇을 더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게 될까. 내 마음은 여전히 할 말이 많고, 상황을 분석한다. 나는 여전히 자주, 나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라도 괜찮다고, 존재 자체로 살아있는 환희를 느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이 외로움을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바둥거리는 순간. 몰입이 절실한 순간, 책을 만나고 싶다.


 


어떤 사람으로 이 지상에 서 있다는 건, 

어디까지가 내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주변사람의 영향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적 차원의 영향일까. 

인간에게 악의 측면이 있다는 것은 요즘에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다. 

집단에게 악의 측면이 있다는 것도,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가야 할 문제라는 것도, 당연했다. 

당연하기에 의문이 든다. 왜 그런 것들이 당연해야만 할까. 그러면 소설이, 문학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언동은 무조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


 

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늘 그 답을 알 수 없는 일.




"P.99 : 어떤 감정들은 견뎌내야만 했으니까. 그들은 하고픈 말이 넘쳤고 말해야 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했다. 슬픔 혹은 황홀함이 넘치는 개울을 흔들어야 했기 때문에 몸을 흔들었다. 그 모든 삶과 죽음이 저 작은 관 속에 갇혔다는 생각에 춤을 추고 고함을 질렀다. 신의 뜻에 반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신의 손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 닿는 것뿐이라는 자기들의 신념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알라딘 밑줄긋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신의 손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 닿는 것 뿐이라"면, 

살아있는 고통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을 인정하고 살아있는 것을 느끼며 사는 것인가. 근데 그런게 도대체 무엇일까.




"희망이 없다. 그들은 유령처럼, 쇠락한 조선소처럼 황폐한 상태로 겨우 삶을 이어간다. 그들을 지탱하는 건 광기와 증오이다."(출판사 제공 책 소개_)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살고자 하는 희망일까. 왜 살아야 할까. 어느날부터 살기를 고민했던 걸까. 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살기를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걸까. 살아있는 그 자체로 행복한 것과 살아있는 그 자체로 허무한 것은 같은 거라면 왜 선택하지 못하는가. 왜 광기와 증오에 때때로 몸을 내맡기게 되는가. 




"고전 동화의 경계 밖으로 추방되었던 다양한 삶의 국면을 담은 이번 작품집은, 확고하게 여겨지는 진리와 교훈을 경계하며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촉구하는 제언이다. 즉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아픈 자리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일깨우는 구병모식 ‘탐미주의보’이다. " (출판사 제공 책 소개_)


동화를 화소로 현실을 이야기하는 구병모 작가의 신작이다. 

나는 그녀의 판타지가 좋다.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일상을 날카롭게 해부하여 거친 폭력성의 심연에서 다부진 진실 탐문 작업을 계속해온 등단 15년차, 사십대에 이른 작가의 자기 성찰이 돋보이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_)


P.36 :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왔고, 그를 보자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고,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난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사실은 그를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외면하고, 망각하려 애쓰던 과거의 시간이 우연히 만난 그 때문에 너무나 선명해졌다. 나는 왜 내 인생이 그렇게 삐뚤어졌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알라딘 밑줄긋기)


무엇을 잊고 잊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일들이 있다. 잊으려고 그 일을 떠올리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의지에서 벗어난 일을 마주할 때마다,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생을 무력감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끊임없이 자기기만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것에 몰입하여 행복해지거나, 정말 잊어버리거나. 어떤 일이든 벌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어떤 일들을, 이 책에서 읽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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