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
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다. 미리 계획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일들밖에 없다. 나는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블록을 빙 돌았지만 내 발걸음이 집을 향했다.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p37


이 소설을 만나고 마음에서 떠나보낼때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긴 시간도 아니다. 생각하고 싶은만큼 생각했고, 쉬고 싶은 만큼 쉬었다. 그러면서 살았던 시간동안 쌓은 감정의 더미들을 꺼내보았다. 감정을 내려놓을때는 바른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어떤 길이든 바른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렇게 생각했다니 스스로도 모순적이라 여겼다. 


그때 이 문구가 들어왔다.

" 쉰 살이 넘으면 우리는 놀라옴 속에서,

또 자살과도 같은 죄의 사함 속에서,

우리가 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으며---

더 잘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로버트 로웰 \<셰리든을 위하여\>에서


나는 어떤 한 사람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생각은 너무 많았고, 행동은 자주 성급했다. 돌이켜보면,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잘 모르겠다. 많은 생각들과 성급한 행동을, 받아들이기 벅찼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거부했어도, 너의 마음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종종 나는 튕겨져 나갔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친절했고, 경직되어 있을 때도 있었지만, 때때로 홀로 들떠보였다.  나는 그게 무엇때문에 생긴 차이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주, 그 사람의 행동이 모순이라 느꼈다. 그 사람은 날더러 모순적인 인간이라고 말했다. 함께 즐거운 시간도 많았지만,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길었다. 둘 다 서로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내 온도는 너무 높았고, 그 사람의  온도는 너무 낮았다. 그 자신에 대한 자존감, 기대감이 낮고, 사랑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나는 그의 불신에 종종 휘둘렸다. 결국 그는 바뀌었지만 나는 그를 바꿀 수 없었다. 존중받는다고 느끼지 않았고, 그가 나를 존중하도록 바꿀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그가 존중하지 않는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를 바꾸는 걸 포기하는 것 말고 답이 없었다.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사람만을 원했던 순간이 내게 주어진 것만을, 감사해야 한다는게 너무나도 비참했다. 결과가 좋든 좋지 않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감사해야 했다. 


레온테스

속삭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뺨을 맞대는 것이? 코를 맞대는 것이? 

입술을 벌려 입을 맞추는 것이? 마구 웃다가

한숨을 쉬는 것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발에 발을 얹고 있는 것이?

구석으로 살금살금 다니는 것이? 시간이 빨리 가기를,

한 시간이 1분 같기를 정오가 자정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두 사람만 빼고 모든 이들이 눈병에 걸리기를, 부정함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 역시 아무것도 아니고,

머리 위를 덮은 하늘 역시 아무것도 아니고, 보헤미아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내 아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p398-p399


LEONTES

Is whispering nothing?

Is leaning cheek to cheek? is meeting noses?

Kissing with inside lip? stopping the career

Of laughing with a sigh?--a note infallible

Of breaking honesty--horsing foot on foot?

Skulking in corners? wishing clocks more swift?

Hours, minutes? noon, midnight? and all eyes

Blind with the pin and web but theirs, theirs only,

That would unseen be wicked? is this nothing?

Why, then the world and all that's in't is nothing;

The covering sky is nothing; Bohemia nothing;

My wife is nothing; nor nothing have these nothings,

If this be nothing.
[http://shakespeare.mit.edu/winters\_tale/full.html]


이 구절을 작가는, 화자가 말 내부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의미를 심어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도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부인이 부정하다고 의심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것에 마음이 휘둘렸다. 이 사람이 친구와 부인이 서로 좋아한다고 의심하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니, 그리고 이것이 인생이라니.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것도 결국은 의미없음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노력일 뿐이라고. 그리고 의미를 찾는 과정중에 있는 동안만 내 생을 살아있는 상태로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나의 사랑을 돌아보았다. 

사랑을 포기하기 전에는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이 의미없었다. 사랑을 내가 못하는 것이었고 노력해서 극복하면 될 것으로 여겼다. 사랑을 포기한 이후에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안될 일은 안될 일이었다. 남은 건 그를 기다리듯 남은 마음을 정리하는 나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해온 일이었다. 그 일만 내가 할 수 있었다.


인간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미리 생각했던 대로 정확히 행동하거든. p245


남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 선택이 잘한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상전벽해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상대가 나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더 품이 넓어져야. 그를 만나든 누군가를 만나든, 새로운 관계가,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을 지금 꿈꾸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함께 아침을 맞는 기적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규정짓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어쩌면 지금 이대로 그날을 맞을지도 모른다. 


퍼디타

곧 우리는 삶을 함께할 것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일을 하러 가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저녁을 만들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고, 요즘 세상은 순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꿈을 갖겠지만, 과연 이루어질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기적이 일어난 장소임을 잊을지도 모른다. 사용하지 않게 되고, 잡초가 웃자라고, 황폐하고 방치된 순례지. 어쩌면 우리는 함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이 어쨌든 너무 힘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은 영화에나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까지 부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곳에 절대로 없었음을 증명하는 알리바이를 찾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어쩌면 날씨가 좋지 않은 어느 날 밤, 당신이 내 손목을 지나치게 꽉 잡고, 나는 손전등을 들고 빗속으로 산책을 하러 가고, 바람을 막기 위해서 옷깃을 세우고, 어둠 속에는 별이 없고, 새 한마리가 깜짝 놀라 산울타리에서 튀어나오고,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물웅덩이들이 번들거리고, 저 멀리 큰 도로의 소리가 들리고, 하지만 여기에는 밤의 소리와 내 발소리와 내 숨소리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나는 기억할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 반복되고 우리는 항상 추락하지만, 내 안에는 역사가 담겨 있고 내가 잠시 과거에 다녀와도 아무 흔적도 남지 않지만, 나는 알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거칠고, 존재할 것 같지 않고, 판에 박힌 모든 것을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뒤집힌 배에 남아 있는 공기처럼.

사랑. 그 크기. 그 규모. 상상할 수 없는. 광대한.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 진정한. 그래. 나는 비록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들고 길을 찾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 바로 이 사랑의 목격자이자 증거다. 

내 삶의 작디작은 원자. p400-401\<시간의 틈\>


나는 그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내 인생의 시간 일부를 점유한 그 사랑을 기억한다.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던 기억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고, 이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할 방법도 배웠다. 나는 이 일을 내 몸에서 새로 생긴 습관에서 찾을 수 있지만, 어쩌면 내 몸이 땅에 묻혀 썩는 순간에는 이 모든 일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고, 그것들도 오랫동안 전해져내려오는 순간 희석될 것이다. 내가 나였던 증거도 이젠 내가 없으므로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나는 그럴 미래와 그랬던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의 살아있는 기적이 남아있고, 그 기적에 흠뻑 젖어 만끽하고 싶다. 때때로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마저도 쉬고 싶을 때는 쉬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 기적이 본디 어떤 맛이었는지도 모르고, 어떤 맛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기적을 기적으로 맞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것도, 삶이 어떻게 추락하냐에 따라서 자꾸 빛깔을 달리할 것을 , 이제까지의 경험을 통해 나는 어렴풋이 안다. 그 앎이 뒤집힐 날도 고대한다. 


>이 책은, 추상적으로 쓰여진 시를, 작가의 시선에서 연출한 하나의 극이라는 역자의 표현에 공감한다. 빠른 서사와, 전체를 아우르는 시선이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다만 쓰여진 인물이 다각적인 인물이 아니라서, 인물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사실성이라든가, 그것들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깊이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아 아쉽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6-08-17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형철 평론가가 영화 <박쥐>를 평하던 문장이 떠오르네요. ˝참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눈빛을 섞고 몸을 섞고 심지어 피마저 섞어도 뜻대로 안 되는 사업인 것이군요.˝

위 문장에서 ˝마음˝이 빠져 제가 덧붙이자면, 사람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라 우리는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운명인 것인지도요.

우끼 2016-08-24 01:20   좋아요 1 | URL
애달프게 그리워하고 좋아하던 마음은 어디 갔는지,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를 치고 있는 제게 남은 것은 사람을 만나도 기대하지 않게 되는 공허함 뿐입니다. 저는 이 상태를 바라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사랑이 지속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아무리 그 순간엔 어떤 인생이든 좋으니 그 사랑에 빠져있을 수만 있다면 좋다고 여겼을 지라도... 환각처럼 깨어나는 순간이 올테죠. 제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만 ㅜㅜ
영원히 살 수 있었다면, 그토록 간절하게 사랑을 도피처마냥 활용하려고 했을까 싶기도 하구요. 단지 죽음을 핑계삼아 영원함을 쫓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불가능을 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뒤바꿀 수 없는 세상의 온갖 결과들을 한순간에 경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움직여야 하고, 그래도 다른 생각을 해야하고, ... 그 순간에 읽어서인지 달몰이가 피로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자꾸만 생각하게 하고, 불가능에서 또다른 가능을 찾게 하고,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이렇게 피를 다해 쓰여진 글이 아니라면,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요즘 부쩍 제 글들이 가리키는 지점이 얄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전엔 그렇게 생각했어도 시간에 쫓겨서 글을 썼지만. 지금은 그렇게는 쓰지 않고 싶다 하는 생각으로 계속 무한정 글쓰기를 미루고 있습니다... ㅜㅜ 이 단계도 다시 넘어서야겠지요 ..

AgalmA 2016-08-24 0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키님 글을 한 번도 얄팍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한계란 건 누구나 느끼며 누구에게서도 보이죠. 자신의 한계가 느껴질 때 누구는 더 나쁜, 누군가는 더 성숙해지는, 선택의 문제는 남겠죠.
영원히 산다면 사랑에 대한 기대는 더 없을 걸요? 더많은 걸 겪고자 하고 생각하고 해결하려 들거나, 모든 걸 놓거나 그러지 않을까요.
요즘은 그래요. 쫓아가기 때문에 불가능이 느껴지기보다 거대한 벽처럼 언제나 거기 있어 그것을 어쩌지 못하는 걸 절감하기에 불가능을 느끼게 돼요.

달몰이는 온통 잠언이라 잠수해서 들어가는 기분. 스스로의 생각과 글을 고민하게 되는 책이긴 하죠. 하지만 우린 조에 부스케가 아니잖아요. 그만의 특별한 고통을 가질 수 없으니 그런 특별한 글을 쓰긴 힘들죠. 비교하며 절망하는 건 욕심일지 몰라요. 이미 자기 자신으로 살기도 벅차지 않습니까.

공허는 소리없이 오는 마취제 같죠. 살아가기 위해 사람이든 글이든 욕망이든 부여잡는 걸 테죠. 그런 과정을 통해 평생 우리는 담담해지는 걸 배우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저 있음으로. 있었음으로. 마침내 없음으로.

우끼 2016-08-24 03:1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힘이 됩니다. 징징거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어느새 징징거린거군요... ㅠㅠ 어쩔 수 없이, 이런 제 자신을 보면 `불가능`의 벽을 마주합니다. 지금으로선, 그 벽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벽이 제게 벽으로서 존재할 때 저는 또 좌절하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건, 제게는 불가능이 아닌 친구인 것이 그에게는 불가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토록 집요해질 수밖에 없었나. 그렇게 질문해야만 살 수 있는 일이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아직 궁금합니다. 제가 그의 자의식처럼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금새 제정신을 잃을 듯 한데.
그의 책 `악령`을 처음 접했을때, 그건 분명 번역본이라서, 문장이 비문투성이었는데도 그걸 읽고 온통 부끄러웠습니다. 책을 덮고도 1년간을 다시 책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마치 책에 독이 발라진 것처럼 느껴져서요..
`불가능`을 실현한 누군가를 모델삼아, 계속 욕망의 길을 달릴 동력을 제공한 건 그라고 생각합니다.. ㅜㅜ 그의 덕이 크죠. ... 이렇게 말하고서 아침이 되면 또 돌이켜 후회할까요 ㅠㅠ 순수한 마음은 표현되기 이전에만 순수하니..

2016-08-24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25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읽은 동기는 네가지이다. 

1.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이벤트가 있었다. (아쉽게도 시간 내에 리뷰를 작성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응모하긴 어렵겠지만..)

2. 원작,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3. 책을 열었을 때 흥미로운 문구가 지금 내 상황과 맞물려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 쉰 살이 넘으면 우리는 놀라옴 속에서,

또 자살과도 같은 죄의 사함 속에서,

우리가 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으며---

더 잘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로버트 로웰 <셰리든을 위하여>에서

4.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다시쓴다는 건, 이야기를 상품처럼 팔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의 장점(재미있는 이야기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했던 시기)을-- 더 이상 새로우면서 인간적인 것을 창출하는 데 의문을 표하는 지금(그런 것이 존재할까? 가능할까? 더 나오지 않은 이야기가 아직 있을까? 등등), 다시 끌어온다는 의미에서 흥미롭다. 다르게 생각하면, 지나친 상업주의에 찌든 지금 상황이기에 다시 끌어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늘 필요한 입장에서 볼때는. 재미있을 수 있다면 소재가 같고 이야기 구도가 비슷해 보이는 정도,는 괜찮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번역때문인지 원문장이 쉬운지는 몰라도, 쉽게 읽힌다. 원문의 의미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겠는 번역을 빼면, 쉽게 읽힌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 


소설을 읽는 중 든 생각은, 이 소설은 ‘서사’가 중점인 소설이라는 것이다. 


지금 중반정도 읽고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소설을 다 읽고 써보아야겠다. 아직 시간이 없어서, 정리하지 못했다.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다. 미리 계획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일들밖에 없다. 나는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블록을 빙 돌았지만 내 발걸음이 집을 향했다.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p37


댓글(4) 먼댓글(1)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시간의 틈에 끼어든, 내 삶의 작디작은 원자
    from 작고 협소한 2016-07-30 22:01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다. 미리 계획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일들밖에 없다. 나는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블록을 빙 돌았지만 내 발걸음이 집을 향했다.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p37이 소설을 만나고 마음에서 떠나보낼때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긴 시간도 아니다. 생각하고 싶은만큼 생각했고, 쉬고 싶은 만큼 쉬었다. 그러면서 살았던 시간동안 쌓은 감정의 더미들을 꺼내보았다
 
 
에이바 2016-07-15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도 읽고 계셨군요! 전 올해 셰익스피어 읽으려고 계획 세워서 어떤 이벤트들이 있나 주목하고 있었거든요. 특히 새 번역 관련해서요. 현대문학에서 호가스 시리즈 나온다 그래서 눈여겨보는 중인데 지금 앤 타일러 책까지 나왔어요. 다음은 마거릿 애트우드인데 템페스트 다시 쓴 거라 엄청 기대돼요. 얼마 전에 햄릿이랑 로줄을 읽었는데... 짧은 극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게 여전하더라고요. 좋았어요. 생각 4번에서요. 이야기를 상품처럼 팔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 는 제 생각엔 좀 달라요. 극 무대에 올려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팔려야 하는 이야기를 써야 하지 않았나, 당시 영국 사회의 중류 계급의 부흥 그러니까 상인들의 입에도 일반 민들의 구미에도 높으신 분들 눈치도 조금 넣은 적당한 이야기들 말이에요. 표가 안 팔릴까 봐요. ㅋㅋㅋ 물론 요즘이랑은 다르겠지만... 다시 쓴다는 점에서 일종의 팬픽션, 패스티시가 아닐까 하는데 결국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 쓴 글을 또 읽고 쓰는 우리는 결국 거대한 팬덤에 속해있는 거 아닐까요 ㅋㅋ 우끼님 글 기대돼요!!! 자주 자주 글 써 주세요 ㅠㅠ

우끼 2016-08-04 11: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ㅠㅠ 힘이 되요!!
4번의 경우, 특허가 생기기 이전 시대에 `반복`을 더 훌륭한 미로 생각했던 동양이나 서양을 생각하면서 쓴 글이지만.. 셰익스피어시대는 초기자본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이므로 조금 상황이 다를 수 있겠어요.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썼네요 ㅎㅎ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서 쉽게 글을 못올리고 있지만, 눈팅은 자주 합니다. ㅎㅎ 저도 에이바님 글 보고 싶어요~~^^

AgalmA 2016-10-09 11:37   좋아요 1 | URL
<풍성한 삶을 위한 문학의 역사> 보면 셰익스피어가 당대 정치권에 거스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눈치껏 훌륭히 작품을 썼는지 이야기가 나오죠. 두 분 다 문학에 대해 고심해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 도움받을 정보가 많을 거라 공유차 알립니다. 말한 제가 부담되지 않게 도서관에서 빌려 보시길^^;

AgalmA 2016-10-09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 글이 하도 안 보여서 한 번 와 봤어요. 완벽주의가 너무 심해도 안 써지는 거 아시죠^^? 우끼님, 화이팅~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고통은 공유할 수 없다. 특히 신체에 국한한 고통은 그 신체를 가진 사람만이 그 고통을 느낀다. 심리적으로 어떤 점을 공감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그 고통 그 자체를 느낄 수는 없다. 고통이 내밀할 수록, 말로 표현되지 않고, 소통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반면 소음은 공동으로 들을 수 있다. 소리이기 때문에 전방위로 퍼져나가고, 듣는 사람 대다수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고통을 준다. 그러므로 그가 '소음'을 말하는 건, 시대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한 시대의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신체의 고통과도 같이, 다른 시대와 소통불가능하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고통을 보낸다. 한 시대의 고통을 다른 시대에서 말한다는 것은, 당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이지 그 시대의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이 다른 시대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은, 그 시대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 이해하고 나면, 조금은 그 고통이 완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것이 조금 견딜만한 것이 되는 걸까, 

화자도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이 다친 맥락을 찾아 헤맨다. 그가 왜 길가다가 총상을 입었는가? 그의 옆에 있던 리카르도는 왜 죽었는가? 그는 초반부에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길가면서 쉽게 암살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그런 시대적 불안 속에서 살다가, 자신도 우연히 총에 맞은 것이다. 그런 불안 속에 자신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게된 사람이 나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p16 

총에 맞기 전과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총에 맞기 이전, 그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 총을 맞은 이후 그의 모든 삶은 상처에 집중되어 있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나며, 아내가 걱정하는 것이 짜증이 난다.  그의 상처와는 무관한 걱정으로 느껴진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면, 선생으로서 그 지위에 머물러야 하는데, 학생들의 말에 선생으로서 반응하지 못한다. 그는 그의 주변 누구도 그의 상처를 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 자신도 이유를 모르지만, 리카르의 흔적을 끊임없이 찾는다.  그것을 찾으면 그의 고통도 견딜만한 것이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결국 그는 리카르도가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리카르도의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에 관한 역사를 알고 이해하고 나서야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일과는 무관한 기억들을 더듬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다시 무언가를 지키겠다는 환상으로 돌아온다. 작가의 어조에 따르면, ‘환상’에 가까운 행동을 하려고 다시 노력한다. 사실 그게 환상일지라도, 그 노력을 그의 가족은 필요하다 여겼고, 그 역시도 그의 가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져서 그 노력이 의미없는 일이 될 때까지,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그의 노력은, 그의 세계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나이 자체가 자아 통제에 대한 유해한 화상을 심어주고, 흔히 그 환상에 종속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인데, 그런 망상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자율성과 연관시키고, 어른이 되자마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주권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각성의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인데, 각성은 온다는 약속을 결코 어기지 않는다. 각성이 올 때 우리는 썩 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 충분히 오래 산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생애가, 자신의 결정이 조금 개입하거나 전혀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타 사안들에 의해, 타인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을 거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삶과 마주치게 될 그 기나긴 과정들은 지하의 수맥처럼, 판구조들의 신중한 이동처럼 늘 숨겨져 있고 — 때로는 삶이 필요로 하는 강한 추동력을 삶에 부여하기 위해, 때로는 우리의 가장 화려한 계획을 산산조각내버리기 위해 —, 결국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가 배워온 ‘사고’, ‘우연’, 가끔은 ‘운명’이라는 단어 등을 사용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p289-290


이 소설은, 고통을 겪은 한 사람이 그와 같은 일을 겪은 다른 사람의 비극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덮어 가면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이 소설은 비교적 지금 시대가 규정하는 선과 악의 규정점으로부터 벗어나있다. 리카르도가 살던 그 시기엔, 평화봉사단 단원이 마약을 재배하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시기이고, 리카르도가 비행술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하여 마약 운반책을 맡는 시기이고… 영웅이 있었던 시기에 영웅으로서 생을 누리던 사람의 손자가, 영웅이 쇠락한 시대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시기였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면서 그 영광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추락’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는 크다. 화자가 자신의 삶을 자신이 통제한다고 생각하면서, 영광을 누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총에 맞은 이후 추락했다 여기고 원래의 삶에 더더욱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마음의 간극도 크지만, 그들이 실재로 하는 행동들이 맺는 간극이 크다. 간극이 클수록 소음도 크다. 이 소설은 그 마음들을 다룬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다루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그들이 어떻게 한발짝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지, 지켜본다. 필연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필연들을 본다. 지금의 관념으로는 정당화되지 않을 행동들이 맺어가는 결과물들을 본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해진 시기인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중요해졌다. 이 소설은 그 책임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그렇기에 교조적이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도 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걸 독자가 생각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기능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화자가 고통을 만지는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 인생은 예측불허한 것이라고만 말하기 위하여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현실 세계를 그대로 끌어와서 여기 책으로 재현된 것 뿐일까. 나는 아직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방향을 결정하지 못했다. 단지 시대적 고통에 나를 내맡기고 살아가는 것 뿐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모든 이야기는 결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화자가 한 행위와 생각의 결말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잘 쓰여진 인간의 삶만 두고서, 소설의 가치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야기된 많은 것들이 마무리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화자의 입장에서 쓰여졌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결말을 맺는다. 결말 가까이 와서,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자 급작스럽게 화자가 치유된 기분이 들었다. 경계선을 잘 그리고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 여겼는데,  그 이상의 것, 뭔가 예측하지 못하는 어떤 점들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멍이 났다.  이 구멍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인간이 자기합리화를 하는 생물이라는 점에서부터일까? 아니면,  늘 스스로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누구를 위한다는 생각도, 자기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내 감정에 충실할 때는 더더욱, 다른 사람의 마음은 쉽사리 잊혀진다. 그것이 요즘 슬프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마음이 슬프고 쓰라렸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오기라는 등장인물을 내세워 답하게 한다. 자아라는 껍질을 벗지 못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본 적이 없는 오기는, 늘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상대가 왜 그런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합리화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객관화하여 바라보지 못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느낀 것들에 섬세하지 못하다고 봐야 할까. 그가 살면서 누굴 얼마나 사랑했건 간에, 상대가 왜 이 말을 하는지 고민하고,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고민했으면, 그가 처한 상황까지 치닫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간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위해야 한다. 누구도 대신 자신을 책임질 수 없다. 우선 개인은 철저히 개인이어야 한다. 그 이후에 소통을 하여 조율해나가야 한다.  자기 감정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남을 배려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맥락도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내가 처음 오기와 J와의 관계를 의심했을 때, J를 쳐다보는 오기의 눈빛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듯이, 오기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려고 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감정이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아내와의 관계가 이렇게 악화일로로 치닫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는 아내를 보며 오기는 웃었다. 이게 슬픈가. 겨우 이런 얘기로 우네. 아내가 이렇게 감상적이었나. 이해할 순 없지만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달래고 싶었다. 우리는 무사할 테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저 너머로 홀로 가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허튼 약속 없이, 섣부른 이해 없이 아내를 슬픔에서 천천히 건너오게 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오기는 미래의 슬픔을 이미 겪은 듯한 아내를 가만히 안아주었고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다가 그쳐가는걸 지켜봤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편혜영, \<\<홀\>\>p208-209


소설의 마지막부분에서, 우는 아내를 보면서 오기가 슬픔에 함께 잠기지 않고, ‘겨우’라고 판단했던 것은 오기가 오기의 입장에서 아내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함께 슬픔에 잠기는 것만 정답은 아니다. 오기는 오기로서 있되, 아내의 마음에도 공감하는 상태에 균형을 잡고 서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라는 문장을 보면서는, 개인은 영영, 개인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우리가 소통이라 말하는 것들도 사실은 각자 각자의 슬픔으로 치환하여 생각한 것일 뿐. 상대의 슬픔 그 자체를 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나. 결국 각자는 따로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통을 잘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또 다시 생각했다.  교육기관에서 이런 것을 교육한다면, 사회생활이 조금 더 수월해질까?

소설은 처음에는 오기의 입장에서 평온하고 선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점차 진실이 밝혀지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자아가 왜곡한 현상을 보여주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진실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작가가 이런 화법을 써서 소설을 전개한 것은, 오기가 대표하는 인간의 자기합리화 성향을 폭로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너무 여러번 말해지고,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말해질 이야기다. 소재가 신선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읽고 나서 현실 상황이 암담하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마음이 공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잘 쓰여진 소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1-08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9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9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0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아는 평가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누구나 그런 일을 해왔을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지키는데 충실하려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한다. 요즘 사회에선 특히나 자아의 생존능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이므로, 누구나 자아의 능력을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불안해한다. 그렇기에 현대의 많은 소설들은 ‘자아’가 주요하게 등장하여 세계를 멋대로 판단하고 휘젓나보다. 여기 작가의 가치관이 개입되기도 한다. 

언제부터 자아가 주인공이 되어 ‘소설’장르가 발달했는지는 모른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도 ‘자아’의 위력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자아’는 어떤 상황을 분석하고 해석하지만, 그 해석이 과연 진실과 얼마나 가까웠는가? 그리고 진실과 가깝지 않은 그 해석이 누군가를 어떻게 상처입히고, 나중에 자신에게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왔던가?

최정화의 인물들은, 자아의 내면이 발달한 인물들이다. 외부세계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존하여 세계를 다시 재배열한다. 그렇기에 판단한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 여겨지면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을 받는다. 그 균열은 사소한 판단에서 시작된다. 

 「구두」 의 경우, 주인공은 어떤 종류의 착각을 지속적으로 하는 듯 하다.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러 집에 온 여자가 자신이 되려 한다는 감각을 느끼고 계속 경계를 한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편하게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아무리 제안받았다고는 하지만 태연하게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식사준비를 도우려고 하며, 식사준비 하는 것을 극구 말리니 남편의 옆에 가서 자신이 부인인 양 TV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주인공은 남편에게 그 가사도우미의 험담을 하는데, 그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꾸며낸 거짓말이다. 정작 남편은 가사도우미에게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도록 반응하여, 다시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오지만, 경계하는 주인공의 마음에 부합하려는 듯, 주인공의 구두를 그 여자가 신고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주인공이 ‘선생님’이라 불리는 누군가에게 이 내용을 말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주인공이 누구든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여, 자신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느끼는 탓에 병원에 가서 ‘선생님’께 진료를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까지도 하게 한다. 그렇다면, 타자가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주인공이 홀로 병적으로 상상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입장에서 벗어나 그 가사도우미를 보면, 겉에서 보기엔 크게 주인공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았고, 침범했다가는 저지당했을 것이다. 구두를 훔쳐간 것은, 별개의 일로 볼수도 있는 일인데 굳이 연결시킨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주인공의 자아는 자아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는 상으로 타자를 왜곡하여 바라보고, 자신이 있을 세계마저 없애버리려는 욕구를 가진 것이라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 

「홍로」 의 경우, ‘그녀’는 ‘그’에게 고용된 사람이다. 마치 부인처럼 모든 일은 하지만 ‘그’는 딱히 ‘그녀’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으며, ‘그녀’의 일을 댓가로 돈을 주는 게 전부다.  ‘그’에게 ’그녀’는 고용하기에는 적합하지만 결혼할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렇게 주늑들어 살던 ‘그녀’는 ‘그’의 필요에 의해 동창회에 나가게 되고, ‘그’의 필요때문에 거짓말을 시작하고, 그 거짓말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이전보다 생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현실은 아무것도 변한게 없어도 그녀는 그 환상세계 안에서 ‘그’의 부인이고, 잘 살고 있는 자식들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 이 역시 자아가 현상세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간 부분이라 볼 수 있다.  타자와 소통해서 만들어낸 맥락이 아니라, 혼자만의 맥락 안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이 이루어진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서로 대화하지만 정말 대화하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서로의 영역을 감각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도 어디까지 가능한지, 어디까지 불가능한지 가늠을 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어떤 영역을 허용했다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상대를 잃어버리는, 「틀니」의 경우, 만약 세계를 자아의 영역으로 판단하여 좌지우지 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로 보인다. 자아의 호의때문에 벌어진 일이든, 자아가 못견딘다 여겨서 그런 일이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세계를 자신의 마음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더라면 상대를 잃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지극히 내성적인 이야기들. 지극히 일상적인 불안들을 잘 묘사한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로 재미있었지만, 두세 작품들은 피상적인 이야기에 그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도 쉽게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에, 인물과 함께 불안에 시달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때문인지, 재미가 덜했다. 이 이야기들이 인물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뭔가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까지 이어지기보다는 현상적인 이야기들에 그치고 있다는 점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런 점들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아의 사소한 판단이 개인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포착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묘한 차이로 사람의 판단이 변화한다. 그 사소한 판단이 스스로가 서 있는 자리의 지형을 변화시킨다. 소설 안에서 자극적이거나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해도, 불안은 그대로 전이된다. 그런 균열을 일상적으로 겪는 독자도 겪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대적인 균열을 잘 포착한다는 건, 지금 인간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이야기로 풀어낼 능력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