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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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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무의미, 무의미의 세계.


김엄지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디를 가는 지 모르게 어디를 가고, 아무런 목표의식도 없이 부유하다가 결말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끝난다. 이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존의 서사방식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소설이든, 인물의 욕망을 파헤쳐 지난하게 풀어내든, 볶아먹든, 좌절시키든, 기승전결이 있는데, 김엄지의 소설에서는, 뭔가 기승전결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소설을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뭔가 모를 재미와 긴장감이 있다. 인물들이 아무것도 제대로 원하지 않고, 뒤엉켜도 뒤엉키는가보다 하고 자신들의 삶을 방관하는데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이루어진다. 누구나 ‘목표’를 말하지만, 정작 그 자신들을 그게 왜 목표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달려가고 있는 그 상황이, 맛깔나는 문체와 결합하여 이야기가 되었다.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랍다. 이 시대를 표현하기 위하여 불려내진 새로운 소설형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돼지우리」, 「영철이」,「어느 겨울날」 에는, 인물들에게 목표같지 않은 목표가 있다. 하지만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목표가 이루어진 이후, 그 목표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끝난다.

인간이 목표 없이 무의미한 건, 단지 신이 없다 믿는 세상에 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그런 무의미를 조장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본디, 목표가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사회 안에서 함께 감당하지 않기에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까. 김엄지가 보여준 무의미한 세계가, 지금 이 시점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게 들린다.


표제작은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이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라는 제목은, 미래가 없어보여서 ‘헬조선’이라 불리는 곳에 산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도발적인 이름이다. ‘소설’로 어울리는 제목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느낌이 든다. 무수히 돌아다니는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미래를 꿈꾸는 행동은, 그 자신의 가치를 높히고, 사람답게 어울려 살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 생각해왔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미래’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이름이 없어서 독특하지도 않고, ‘그’라고 지칭되는 것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보인다. 원자화된 개인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이상, 이름이 불리워질 일이 없고, 그는 그이든 다른 이름이든 딱히 특별하지 않다. 이런 개인이 ‘도모하는 미래’라는 건, 딱히 거대한 목적이 없다. 한치 앞만을 보고 가는 것 뿐이다. 

 ‘그’ 역시 딱히 특별한 목적 없이 등산을 간다. 건강에 좋아서라든가, 그런 이유같은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딱히 연락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도 없다. 그와 헤어진 전 여자친구는, 미래가 없는 그라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한 가지 계획이 있다. 산에 가면 다이빙을 할 것이라는 것. 그런데 다이빙을 딱히 하지 않아도 좋고, 해도 좋은 그런 정도의 계획이다. 그렇게 등산을 가서, 숙소를 찾아 가고, 서로간에 의미를 주고받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목적은 이루지만, 그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상황처럼 보인다. 문장들도 뭔가 무의미하게 반복된다. ‘근처에 숙소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여러 특징없는 사람들에게 반복되고, ‘좀더 어두워지기 전에’라는 말도 반복된다. 반복되지만 의미는 없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처럼. 반복을 위해 반복되는 것처럼.


 ‘그의 기대에는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어제보다 더, 계곡과 다이빙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기대와 확신으로 그는 간밤에 꾸었던 악몽을 잊었다.’ (p167,「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그’는 그가 처한 모든 상황에 곧 ‘익숙해지고’, ‘기대와 확신’만으로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지만, 그를 뒷받침할 이유는 딱히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마저도 ‘이불빨래, 세금’같은, 목표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이유가 딱히 없는 생각뿐이다. 다이빙이라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지만, 그것은 마치 ‘죽음’을 향해 목표없는 그의 삶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처럼 암시된다. 소설 안에서 내내 반복했던 무의미만 계속 그 끝을 향해 가는 도중에 반복된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든다. 끝나지 않아야만 할 것 같다. 삶이 이렇게 끝나기를 누구도 진심으로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돼지우리」에서도 마찬가지의 양상이 등장한다. 「돼지우리」는 김엄지의 등단작인데, 이 소설에서도 ‘삶’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여기서도 주인공들에게서 딱히 ‘목표’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라라는 면접을 매번 ‘떡’같이 본다. 그것은 우라라에게 ‘개’, ‘좆’과 같은 말로서, 면접을 잘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취직이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 외설적인 단어들에 압축해서 표출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외설적인 단어들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데도 외설적으로 들리지도 않고, 거북하지도 않다. 화자가 그것을 지나치게 분노를 담아 이야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일까? 

면접에서 번번히 떨어지는 우라라가 취직한 곳은 ‘돼지우리’라는 식당인데, 채용 계약서가 재미있다. 돼지를 마음껏 먹게 하고, 최소 세 번만 출근하면 되고, 한달 급여는 백만원이고, 돼지가 될 때까지 돼지고기를 먹으면 된다. 뭔가 수상한 곳이다. 이윤을 내기 위하여 우라라를 고용한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게다가 ‘돼지우리’ 안의 ‘돼지’라니. 사실 우라라가 돼지가 되어 잡아먹힌다고 해도, 이 직장이 이득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요즘은 공장식 축산을 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인 인간을 돼지로 만들어서, 키워 잡아먹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돼지고기를 먹는 돼지는, 동족을 잡아먹어 스스로를 먹여살리는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가 우리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처럼.

그런데 만약 이 계약이 동화에서처럼 ‘돼지’가 되어 잡아먹히거나 하는 최후를 맞는 게 아니라면, 이 직장만큼 꿈처럼 들리는 직장도 없다. 이 직장에서 일하면 돼지가 되고, 사장이 말하는 음식을 일주일에 한 번씩 먹어야 한다고는 해도, 고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하는 일도 없는데 돈도 주는 곳이라니, 선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에 비교하면 현실의 직장은, 하고 싶지 않은 일만 잔뜩 하고, 밥값도 대체로 스스로 지불해야 하고, 자기 삶 없이 노동력, 시간을 전부 투자하여 겨우 돈을 받는다. 이것도 좋은 직장의 경우이지, 대부분의 취준생들을 그 삶 없는 삶을 위해서 삶 없이 취업을 준비한다. 스스로의 복지같은 것은 신경쓸 겨를도 없다. 그걸 생각하면, ‘돼지우리’라는 직장은, 정말로 이상적인 것처럼 들려서 이상하다. 

화자인 ‘나’는 그런 직장을 수상쩍어 하면서도, 스스로가 돼지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돼지우리’의 사장은, ‘나’를 가리켜 사람도 아닌 것이 돼지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직 ‘나’가  질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나’는 스스로를 돼지라 확신하고, 어느 부위가 돼지인지 질문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에게는 아직 이상한 곳을 이상한 곳이라 자각하는 능력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영철이」 에서도 삶의 단면이 나온다.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꼈다. 밥, 사람과 개에 어떤 상징성을 두고, 그것들을 비교를 통해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그닥 삶의 의욕이 없어보인다. 밥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밥이 주식이기 때문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취득하여 삶을 살아가려고 먹는 음식과 동치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밥맛이 없다. 이는 곧 삶의 의욕이 없다는 말로 치환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딱히 삶의 목표도 의욕도 없는 영철은 그냥 습관적으로 밥을 먹는다. 그의 아내는 그런 영철이 불만스럽다. 밥을 저렇게 맛없게 먹으니, 자신을 사랑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따로 소통하지 않는다. 영철은 아내의 말에 특별히 신경써서 대답하지 않고, 아내는 영철에게서 온기를 느끼는 데 포기한다. 그래서 개를 데려와 그와 똑같은 이름을 붙여 부른다. 그리고 개는 영철과 아내 모두에게서 더 사랑받고, 집 안에 온기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과는 소통하지 못하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개와는 소통한다. ‘언어’가 부재하는 순간이, 이들에게 더 따뜻함을 가져다 준다. 왜 소통이 부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딱히 없지만, 사람보다 동물을 더 편안하게 여기고, 함께 사는 것이 버거운 현대인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묘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철이 아무 별다른 이유 없이 실직 후, 잠시간의 화목한 시간을 주던 개 역시도 잃어버린 이후엔, 영철은 아내에게서 이혼 통보를 받는다. 그들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끈마저도 사라져버린 까닭이다. 외부 조건과 무관하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다. 

아내가 밥맛이 없어 밥맛을 되찾으려던 신혼 초의 시기에 친정엄마는 딸에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철과 아내가 이혼 후, 영철이 밥맛이 없다고 하자 아내는 무신경하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한다. 아내의 엄마가 추천했던 것과 동등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서, 서로간에 진정한 소통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또 다시 삶의 무의미로 치환된다. 요즘 사람들은, 이미 의미가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 그냥 태어나 주어진 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소통으로 사람들은 의미를 함께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소통이 없으면, 삶이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소설은 ‘소통’에 초점을 맞추어 무의미해진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겨울날」의 Y는 김수동에게 사기를 당해서 김수동을 쫓아다닌다. 김수동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망쳤다고 말하면서도, 김수동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 사실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보다 김수동을 쫓는 것이 더 중요해보인다. Y는 햄버거, 섹스, 김수동을 통해서 삶을 붙잡으려고 하는데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인물들은 계속 이야기한다. 계속 자고 싶은 의지가 있으면 잠을 마음껏 잘 수 있다는 것, 삶의 의지가 없어서 딱히 하고 싶은 일도, 기억하는 일도 없다는 것,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허무가 무엇인지 아느냐는 둥 대화를 나누지만, 별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나 역시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나는 피곤하고 우울한 삶의 면면들을 발견하지만 무언가를 딱히 시도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아득함’을 느끼고, ‘꽃’을 사고 싶어하지만 소망은 소망으로 그친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김수동을 쫓아간 Y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사기친 김수동을 붙잡아 벌을 주어도 Y의 허무와 외로움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식으로 끝난다. 이 소설에서의 ‘나’와 Y역시도, 과연 그들이 잘 소통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김엄지 소설들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김엄지가 사용한 여러 가지 비유와 상징이다. 인생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김엄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가령 「삼뻑의 즐거움」에 나오는 ‘팔광’은 세상을 테트리스에 비유한다.


그냥 쌓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이상하게 쌓으면 죽어요. 잘 쌓아야지 없어지고 다시 쌓을 수 있어요. 또 쌓고 없애면, 벽돌이 내려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요. 나는 그 속도를 따라서 계속 쌓고 없애야 돼요. 속도를 못 따라가면 나는 죽어요. 없애기 위해서 쌓는 것 같지만, 쌓기 위해서 없애는 거에요. (p42,「삼뻑의 즐거움」,『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작가가 나서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돼지우리」라는 작품에서처럼, 가게 하나가 통째로 우화적인 성격으로 현실과 무관하게 뜬금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앞 문장과 뒷 문장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적당히 리듬감이 있어서, 읽는 데 술술 넘어가는데도 마음이 움직여서,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엄지는 ‘삶’의 필수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다룬다. 먹는 것, 성관계,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활동, 일상에서 벗어난 자극적인 활동, 인간적인 상처, 사람과의 소통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소설을 이어간다. ‘무의미’하게 채워진 일상을, 어떻게 ‘무의미’하게 이끌어가는지 보여주면서 ‘무의미’ 자체로 보여준다. 밀란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에서, 우리는 무의미를 무의미 그 자체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무의미’ 자체가 부정적인 메시지를 준다고 바로 단정짓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김엄지도 무의미를 딱히 비난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좌절하는 것 같지도 않다. 비관적으로 좌절하면서 썼더라면, 이렇게 가볍게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가볍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우리는 이 소설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질문이 남았다.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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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24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우끼 님의 이 리뷰를 읽었다면 냉큼 별 하나를 더 추가했을 겁니다..
취향 타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호불호가 분명한...
전 소설은 좀 클랙식하게 읽는 편이라, 별로 였습니다.
하지만 제 취향의 문제일 뿐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실천문학주의자가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을 평가절하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잘 읽었습니다.

우끼 2016-08-25 2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이 소설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주변에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별로라고 하는 분들이 많아서.. 저는 정말 좋아했던 축에 속했습니다만..
이 소설집은 김엄지가 발표한 소설 순서대로 실려있는데요. 어떤 분은 김엄지의 소설 중 `돼지우리`가 가장 전통적 서사방식에 머무른 작품이고 점차 다음 소설을 읽을 수록 김엄지만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더라구요. 그 중간지점에 있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라는 작품이 그분께는 가장 좋았다고 하시더라구요. 김엄지의 스타일도 볼 수 있으면서, 형식을 너무 어그러뜨리지 않은, 너무 멀리 나가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었어요.
저도 곰발님이 올리신 리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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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은 동기는 네가지이다. 

1.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이벤트가 있었다. (아쉽게도 시간 내에 리뷰를 작성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응모하긴 어렵겠지만..)

2. 원작,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3. 책을 열었을 때 흥미로운 문구가 지금 내 상황과 맞물려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 쉰 살이 넘으면 우리는 놀라옴 속에서,

또 자살과도 같은 죄의 사함 속에서,

우리가 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으며---

더 잘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로버트 로웰 <셰리든을 위하여>에서

4.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다시쓴다는 건, 이야기를 상품처럼 팔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의 장점(재미있는 이야기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했던 시기)을-- 더 이상 새로우면서 인간적인 것을 창출하는 데 의문을 표하는 지금(그런 것이 존재할까? 가능할까? 더 나오지 않은 이야기가 아직 있을까? 등등), 다시 끌어온다는 의미에서 흥미롭다. 다르게 생각하면, 지나친 상업주의에 찌든 지금 상황이기에 다시 끌어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늘 필요한 입장에서 볼때는. 재미있을 수 있다면 소재가 같고 이야기 구도가 비슷해 보이는 정도,는 괜찮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번역때문인지 원문장이 쉬운지는 몰라도, 쉽게 읽힌다. 원문의 의미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겠는 번역을 빼면, 쉽게 읽힌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 


소설을 읽는 중 든 생각은, 이 소설은 ‘서사’가 중점인 소설이라는 것이다. 


지금 중반정도 읽고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소설을 다 읽고 써보아야겠다. 아직 시간이 없어서, 정리하지 못했다.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다. 미리 계획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일들밖에 없다. 나는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블록을 빙 돌았지만 내 발걸음이 집을 향했다.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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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간의 틈에 끼어든, 내 삶의 작디작은 원자
    from 작고 협소한 2016-07-30 22:01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다. 미리 계획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일들밖에 없다. 나는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블록을 빙 돌았지만 내 발걸음이 집을 향했다.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p37이 소설을 만나고 마음에서 떠나보낼때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긴 시간도 아니다. 생각하고 싶은만큼 생각했고, 쉬고 싶은 만큼 쉬었다. 그러면서 살았던 시간동안 쌓은 감정의 더미들을 꺼내보았다
 
 
에이바 2016-07-15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도 읽고 계셨군요! 전 올해 셰익스피어 읽으려고 계획 세워서 어떤 이벤트들이 있나 주목하고 있었거든요. 특히 새 번역 관련해서요. 현대문학에서 호가스 시리즈 나온다 그래서 눈여겨보는 중인데 지금 앤 타일러 책까지 나왔어요. 다음은 마거릿 애트우드인데 템페스트 다시 쓴 거라 엄청 기대돼요. 얼마 전에 햄릿이랑 로줄을 읽었는데... 짧은 극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게 여전하더라고요. 좋았어요. 생각 4번에서요. 이야기를 상품처럼 팔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 는 제 생각엔 좀 달라요. 극 무대에 올려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팔려야 하는 이야기를 써야 하지 않았나, 당시 영국 사회의 중류 계급의 부흥 그러니까 상인들의 입에도 일반 민들의 구미에도 높으신 분들 눈치도 조금 넣은 적당한 이야기들 말이에요. 표가 안 팔릴까 봐요. ㅋㅋㅋ 물론 요즘이랑은 다르겠지만... 다시 쓴다는 점에서 일종의 팬픽션, 패스티시가 아닐까 하는데 결국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 쓴 글을 또 읽고 쓰는 우리는 결국 거대한 팬덤에 속해있는 거 아닐까요 ㅋㅋ 우끼님 글 기대돼요!!! 자주 자주 글 써 주세요 ㅠㅠ

우끼 2016-08-04 11: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ㅠㅠ 힘이 되요!!
4번의 경우, 특허가 생기기 이전 시대에 `반복`을 더 훌륭한 미로 생각했던 동양이나 서양을 생각하면서 쓴 글이지만.. 셰익스피어시대는 초기자본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이므로 조금 상황이 다를 수 있겠어요.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썼네요 ㅎㅎ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서 쉽게 글을 못올리고 있지만, 눈팅은 자주 합니다. ㅎㅎ 저도 에이바님 글 보고 싶어요~~^^

AgalmA 2016-10-09 11:37   좋아요 1 | URL
<풍성한 삶을 위한 문학의 역사> 보면 셰익스피어가 당대 정치권에 거스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눈치껏 훌륭히 작품을 썼는지 이야기가 나오죠. 두 분 다 문학에 대해 고심해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 도움받을 정보가 많을 거라 공유차 알립니다. 말한 제가 부담되지 않게 도서관에서 빌려 보시길^^;

AgalmA 2016-10-09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 글이 하도 안 보여서 한 번 와 봤어요. 완벽주의가 너무 심해도 안 써지는 거 아시죠^^? 우끼님, 화이팅~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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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고통은 공유할 수 없다. 특히 신체에 국한한 고통은 그 신체를 가진 사람만이 그 고통을 느낀다. 심리적으로 어떤 점을 공감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그 고통 그 자체를 느낄 수는 없다. 고통이 내밀할 수록, 말로 표현되지 않고, 소통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반면 소음은 공동으로 들을 수 있다. 소리이기 때문에 전방위로 퍼져나가고, 듣는 사람 대다수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고통을 준다. 그러므로 그가 '소음'을 말하는 건, 시대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한 시대의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신체의 고통과도 같이, 다른 시대와 소통불가능하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고통을 보낸다. 한 시대의 고통을 다른 시대에서 말한다는 것은, 당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이지 그 시대의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이 다른 시대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법은, 그 시대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 이해하고 나면, 조금은 그 고통이 완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것이 조금 견딜만한 것이 되는 걸까, 

화자도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이 다친 맥락을 찾아 헤맨다. 그가 왜 길가다가 총상을 입었는가? 그의 옆에 있던 리카르도는 왜 죽었는가? 그는 초반부에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길가면서 쉽게 암살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그런 시대적 불안 속에서 살다가, 자신도 우연히 총에 맞은 것이다. 그런 불안 속에 자신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게된 사람이 나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p16 

총에 맞기 전과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총에 맞기 이전, 그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 총을 맞은 이후 그의 모든 삶은 상처에 집중되어 있다.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나며, 아내가 걱정하는 것이 짜증이 난다.  그의 상처와는 무관한 걱정으로 느껴진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면, 선생으로서 그 지위에 머물러야 하는데, 학생들의 말에 선생으로서 반응하지 못한다. 그는 그의 주변 누구도 그의 상처를 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 자신도 이유를 모르지만, 리카르의 흔적을 끊임없이 찾는다.  그것을 찾으면 그의 고통도 견딜만한 것이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을까? 

결국 그는 리카르도가 어떤 가정에서 자랐고, 리카르도의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에 관한 역사를 알고 이해하고 나서야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일과는 무관한 기억들을 더듬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다시 무언가를 지키겠다는 환상으로 돌아온다. 작가의 어조에 따르면, ‘환상’에 가까운 행동을 하려고 다시 노력한다. 사실 그게 환상일지라도, 그 노력을 그의 가족은 필요하다 여겼고, 그 역시도 그의 가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져서 그 노력이 의미없는 일이 될 때까지,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그의 노력은, 그의 세계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나이 자체가 자아 통제에 대한 유해한 화상을 심어주고, 흔히 그 환상에 종속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인데, 그런 망상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자율성과 연관시키고, 어른이 되자마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주권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각성의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인데, 각성은 온다는 약속을 결코 어기지 않는다. 각성이 올 때 우리는 썩 놀라지 않고 받아들인다. 충분히 오래 산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생애가, 자신의 결정이 조금 개입하거나 전혀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타 사안들에 의해, 타인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을 거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삶과 마주치게 될 그 기나긴 과정들은 지하의 수맥처럼, 판구조들의 신중한 이동처럼 늘 숨겨져 있고 — 때로는 삶이 필요로 하는 강한 추동력을 삶에 부여하기 위해, 때로는 우리의 가장 화려한 계획을 산산조각내버리기 위해 —, 결국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가 배워온 ‘사고’, ‘우연’, 가끔은 ‘운명’이라는 단어 등을 사용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p289-290


이 소설은, 고통을 겪은 한 사람이 그와 같은 일을 겪은 다른 사람의 비극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덮어 가면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이 소설은 비교적 지금 시대가 규정하는 선과 악의 규정점으로부터 벗어나있다. 리카르도가 살던 그 시기엔, 평화봉사단 단원이 마약을 재배하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시기이고, 리카르도가 비행술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하여 마약 운반책을 맡는 시기이고… 영웅이 있었던 시기에 영웅으로서 생을 누리던 사람의 손자가, 영웅이 쇠락한 시대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시기였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면서 그 영광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추락’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는 크다. 화자가 자신의 삶을 자신이 통제한다고 생각하면서, 영광을 누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총에 맞은 이후 추락했다 여기고 원래의 삶에 더더욱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마음의 간극도 크지만, 그들이 실재로 하는 행동들이 맺는 간극이 크다. 간극이 클수록 소음도 크다. 이 소설은 그 마음들을 다룬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다루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그들이 어떻게 한발짝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지, 지켜본다. 필연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필연들을 본다. 지금의 관념으로는 정당화되지 않을 행동들이 맺어가는 결과물들을 본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해진 시기인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중요해졌다. 이 소설은 그 책임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그렇기에 교조적이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도 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걸 독자가 생각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기능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화자가 고통을 만지는 방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 인생은 예측불허한 것이라고만 말하기 위하여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현실 세계를 그대로 끌어와서 여기 책으로 재현된 것 뿐일까. 나는 아직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방향을 결정하지 못했다. 단지 시대적 고통에 나를 내맡기고 살아가는 것 뿐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모든 이야기는 결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화자가 한 행위와 생각의 결말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잘 쓰여진 인간의 삶만 두고서, 소설의 가치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야기된 많은 것들이 마무리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화자의 입장에서 쓰여졌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결말을 맺는다. 결말 가까이 와서,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자 급작스럽게 화자가 치유된 기분이 들었다. 경계선을 잘 그리고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 여겼는데,  그 이상의 것, 뭔가 예측하지 못하는 어떤 점들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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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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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이 났다.  이 구멍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인간이 자기합리화를 하는 생물이라는 점에서부터일까? 아니면,  늘 스스로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누구를 위한다는 생각도, 자기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내 감정에 충실할 때는 더더욱, 다른 사람의 마음은 쉽사리 잊혀진다. 그것이 요즘 슬프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마음이 슬프고 쓰라렸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오기라는 등장인물을 내세워 답하게 한다. 자아라는 껍질을 벗지 못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본 적이 없는 오기는, 늘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상대가 왜 그런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합리화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객관화하여 바라보지 못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느낀 것들에 섬세하지 못하다고 봐야 할까. 그가 살면서 누굴 얼마나 사랑했건 간에, 상대가 왜 이 말을 하는지 고민하고,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고민했으면, 그가 처한 상황까지 치닫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간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위해야 한다. 누구도 대신 자신을 책임질 수 없다. 우선 개인은 철저히 개인이어야 한다. 그 이후에 소통을 하여 조율해나가야 한다.  자기 감정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남을 배려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맥락도 철저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내가 처음 오기와 J와의 관계를 의심했을 때, J를 쳐다보는 오기의 눈빛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듯이, 오기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려고 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감정이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아내와의 관계가 이렇게 악화일로로 치닫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는 아내를 보며 오기는 웃었다. 이게 슬픈가. 겨우 이런 얘기로 우네. 아내가 이렇게 감상적이었나. 이해할 순 없지만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달래고 싶었다. 우리는 무사할 테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저 너머로 홀로 가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허튼 약속 없이, 섣부른 이해 없이 아내를 슬픔에서 천천히 건너오게 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오기는 미래의 슬픔을 이미 겪은 듯한 아내를 가만히 안아주었고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다가 그쳐가는걸 지켜봤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편혜영, \<\<홀\>\>p208-209


소설의 마지막부분에서, 우는 아내를 보면서 오기가 슬픔에 함께 잠기지 않고, ‘겨우’라고 판단했던 것은 오기가 오기의 입장에서 아내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함께 슬픔에 잠기는 것만 정답은 아니다. 오기는 오기로서 있되, 아내의 마음에도 공감하는 상태에 균형을 잡고 서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라는 문장을 보면서는, 개인은 영영, 개인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우리가 소통이라 말하는 것들도 사실은 각자 각자의 슬픔으로 치환하여 생각한 것일 뿐. 상대의 슬픔 그 자체를 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나. 결국 각자는 따로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통을 잘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또 다시 생각했다.  교육기관에서 이런 것을 교육한다면, 사회생활이 조금 더 수월해질까?

소설은 처음에는 오기의 입장에서 평온하고 선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점차 진실이 밝혀지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자아가 왜곡한 현상을 보여주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진실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작가가 이런 화법을 써서 소설을 전개한 것은, 오기가 대표하는 인간의 자기합리화 성향을 폭로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너무 여러번 말해지고,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말해질 이야기다. 소재가 신선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읽고 나서 현실 상황이 암담하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마음이 공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잘 쓰여진 소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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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8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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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9 2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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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9 2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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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0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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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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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평가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누구나 그런 일을 해왔을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지키는데 충실하려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한다. 요즘 사회에선 특히나 자아의 생존능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이므로, 누구나 자아의 능력을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불안해한다. 그렇기에 현대의 많은 소설들은 ‘자아’가 주요하게 등장하여 세계를 멋대로 판단하고 휘젓나보다. 여기 작가의 가치관이 개입되기도 한다. 

언제부터 자아가 주인공이 되어 ‘소설’장르가 발달했는지는 모른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도 ‘자아’의 위력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자아’는 어떤 상황을 분석하고 해석하지만, 그 해석이 과연 진실과 얼마나 가까웠는가? 그리고 진실과 가깝지 않은 그 해석이 누군가를 어떻게 상처입히고, 나중에 자신에게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왔던가?

최정화의 인물들은, 자아의 내면이 발달한 인물들이다. 외부세계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존하여 세계를 다시 재배열한다. 그렇기에 판단한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 여겨지면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을 받는다. 그 균열은 사소한 판단에서 시작된다. 

 「구두」 의 경우, 주인공은 어떤 종류의 착각을 지속적으로 하는 듯 하다.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러 집에 온 여자가 자신이 되려 한다는 감각을 느끼고 계속 경계를 한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편하게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아무리 제안받았다고는 하지만 태연하게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식사준비를 도우려고 하며, 식사준비 하는 것을 극구 말리니 남편의 옆에 가서 자신이 부인인 양 TV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주인공은 남편에게 그 가사도우미의 험담을 하는데, 그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꾸며낸 거짓말이다. 정작 남편은 가사도우미에게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도록 반응하여, 다시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오지만, 경계하는 주인공의 마음에 부합하려는 듯, 주인공의 구두를 그 여자가 신고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주인공이 ‘선생님’이라 불리는 누군가에게 이 내용을 말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주인공이 누구든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여, 자신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느끼는 탓에 병원에 가서 ‘선생님’께 진료를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까지도 하게 한다. 그렇다면, 타자가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주인공이 홀로 병적으로 상상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입장에서 벗어나 그 가사도우미를 보면, 겉에서 보기엔 크게 주인공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았고, 침범했다가는 저지당했을 것이다. 구두를 훔쳐간 것은, 별개의 일로 볼수도 있는 일인데 굳이 연결시킨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주인공의 자아는 자아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는 상으로 타자를 왜곡하여 바라보고, 자신이 있을 세계마저 없애버리려는 욕구를 가진 것이라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 

「홍로」 의 경우, ‘그녀’는 ‘그’에게 고용된 사람이다. 마치 부인처럼 모든 일은 하지만 ‘그’는 딱히 ‘그녀’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으며, ‘그녀’의 일을 댓가로 돈을 주는 게 전부다.  ‘그’에게 ’그녀’는 고용하기에는 적합하지만 결혼할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렇게 주늑들어 살던 ‘그녀’는 ‘그’의 필요에 의해 동창회에 나가게 되고, ‘그’의 필요때문에 거짓말을 시작하고, 그 거짓말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이전보다 생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현실은 아무것도 변한게 없어도 그녀는 그 환상세계 안에서 ‘그’의 부인이고, 잘 살고 있는 자식들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 이 역시 자아가 현상세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간 부분이라 볼 수 있다.  타자와 소통해서 만들어낸 맥락이 아니라, 혼자만의 맥락 안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이 이루어진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서로 대화하지만 정말 대화하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서로의 영역을 감각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도 어디까지 가능한지, 어디까지 불가능한지 가늠을 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어떤 영역을 허용했다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상대를 잃어버리는, 「틀니」의 경우, 만약 세계를 자아의 영역으로 판단하여 좌지우지 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로 보인다. 자아의 호의때문에 벌어진 일이든, 자아가 못견딘다 여겨서 그런 일이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세계를 자신의 마음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더라면 상대를 잃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지극히 내성적인 이야기들. 지극히 일상적인 불안들을 잘 묘사한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로 재미있었지만, 두세 작품들은 피상적인 이야기에 그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도 쉽게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에, 인물과 함께 불안에 시달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때문인지, 재미가 덜했다. 이 이야기들이 인물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뭔가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까지 이어지기보다는 현상적인 이야기들에 그치고 있다는 점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런 점들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아의 사소한 판단이 개인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포착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묘한 차이로 사람의 판단이 변화한다. 그 사소한 판단이 스스로가 서 있는 자리의 지형을 변화시킨다. 소설 안에서 자극적이거나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해도, 불안은 그대로 전이된다. 그런 균열을 일상적으로 겪는 독자도 겪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대적인 균열을 잘 포착한다는 건, 지금 인간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이야기로 풀어낼 능력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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