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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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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한 달 전에 읽었는데, 책장을 넘기면 내용이 다시 생생하게 내게 다가온다. 마음 깊숙히 숨겨둔 감정을 끌어올리는 좋은 책이다. 그런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 뭐라고 서두를 써야 할 지 모르겠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으로 탄탄한 서사를 메꾸었다. 라는 말은 이 소설을 표현하기엔 불충분하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서 기억에 남았던 것도 아니고, 독특한 서사로서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며, 사유로서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라 미묘하다. 


읽으면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꼽아야 하련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지점은 각박하고 우울한 지금이며, 주인공이 소설 안에서 무언가 해방될 수 있는 지점을 찾은 것도 아니다. 아마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역시 지금을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할 것 같은 내일을 마주할 것 같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도 없지만 소설과 삶이 별개로 갈라져버리지도 않는다. 대리만족을 하게 만듦으로서 값싼 위로를 행하는 것도 아닌데 이 소설집을 엮은 이야기꾼이 왜 위로를 한다고 느낀 걸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세상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고통을 본다. 그들의 고통은 극적으로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쉽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 그들은 사회가 변하기를 바란적도 없다. 애초 ‘사회가 변한다’는 개념도 후대에 와서 역사가들이 ‘변화하는 사회’라는 것을 기점으로 정리한 까닭에 사회가 변화하였다고 ‘믿는’것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회’라는 것은 얼마나 불분명한 것인지 눈에 보이지도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누군가는 사회에 대해 논평을 하고 변혁을 꿈꾼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통해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라 지칭되는 추상적인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각기 개인적인 고민들을 치열하게 하면서 어떻게든 암담한 현실을 하루라도 살아낸다. 그리고 각기 가진 작은 고민들에 대한 그 순간만을 위한 답을 찾아내고 앞으로도 수없이 닥쳐올 것들에 대해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순간’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어쩌면 ‘순간’을 겨우 넘긴 인물들의 삶이 나의 삶을 닮았기에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그들의 고통을 처절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독자로서 그들의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던 것도 ‘위로’에 한 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끔찍하게 보이는 일도 ‘순간’과 ‘순간’을 넘기면 어느새 다른 해방감이 있기라도 할 듯, 소설은 끝이 난다. 무사히 ‘순간’이라도 넘겼기에 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순간’을 넘기면 지금의 고민이 해결될 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은 당연한 공식처럼 내 일상을 위로해왔다. 정말 그런지는 어떤 일이 지나고 나야 안다. 그렇게 따져보면 고민이 해결되었던 적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다. 지금의 믿음이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빗대어 살피면  추측하려는 시도가 무안하게도 쉽게 하찮아진다. 하찮아지지 않기를 ‘지금’ 바라고 있을 뿐이다. ‘바란다’는 것은 ‘영원’과 ‘완벽성’과는 관계가 없다. 완벽하지 않다고 판명되더라도 바랄 수밖에 없고, 바람으로서 지금의 삶을 버티고 앞으로라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향해 다가갈 수 있으니 기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점에서 어쩌면 소설과 나는 서로의 삶이 맞닿아 통했다고 느끼고 위로를 얻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루 하루 살기도 벅차서 좌절하지만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는 것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기 때문에. ‘순간’을 넘기는 것은 중요했다. 그건 개인적 불행의 총량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가 견뎌야 할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 뿐이라 쉬쉬하며 지냈던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쓴 이야기꾼은 내가 가진 이야기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전개한다. 마치 농담처럼 느껴졌다.


이미 충분히 ‘삶’이 부담스러워서,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회의’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이 소설이 어울리는 곳에서 살고 있기에 소설로부터 위로받았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아서 무거운 이야기를 농담처럼 쉽게 읽었으며, 오래 마음에 남아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농담같은 위로는 던져졌을 뿐이라, 나는 책장을 덮고서 마음에 남은 위로로 다음 ‘순간’을 향해 간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부러진 팔로 아이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삼십팔 킬로그램의 여자가 한 생명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흠뻑 젖은 소년의 몸은 파충류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팔딱거리고 있었다. 수억수천만년간 박동을 멈추지 않은 심장이었다.

.

.

이번엔 절대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결심을 주문처럼 되뇌는 동안 그녀는 물속에서 소금이 녹듯 스스르 잠들었다."

-파충류의 밤106-10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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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신간리뷰어 활동을 마무리하며,


나는 좋은 독자는 아니었다. 좋은 리뷰어도 아니었다. 공감을 얻을 만한 리뷰를 쓴 것도 아니고, 뭔가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도 아니다. 

내가 쓴 글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하여 내가 이 글을 풍부하게 읽었느냐 보다, 읽다가 걸리는 허점에 집중한 글이 더 많았다. 어떤 글은 책에 집중하기보다 책 내용이 시사하는 사실에 집중하여 책이 드러내는 바를 잘 잡아내지 못했다. 

스스로가 아직 리뷰같은 글을 쓰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부족한 리뷰를 쓸 줄 몰랐다. 이렇게 리뷰를 쓴 것은 나에 대한 예의도, 작가에 대한 예의도 누군가 내 리뷰를 읽을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던지, 아니면 알고도 글로서 표현해내지 못했던 것인지. 별로인 리뷰들만 올린 것은 단지 생각이 덜 숙성되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객관적이려고 노력했는데 객관적이지도 않았고, 주관적인 부분을 넣으려고 했는데도 겉만 맴돌았던 건지도 모른다. 속이 비어서 뭘 채워넣을 지 몰라 겉껍질만 거대하게 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 쓰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 실망스럽다. 

시간에 쫓겨 다급하게 쓴 까닭에 서툰 리뷰가 더 서툴게 쓰여졌다. 책은 오자마자 읽는데도, 시간분배도 최선을 다해서 하여 나름대로는 최선의 결과물이라고 내놓은 것이 한참 모자란 리뷰다. 서툰데도 신간 리뷰어로 뽑아주셔서 6개월동안 정말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었다. 마냥 죄송하고 감사하다. 


내가 꼽은 나만의 베스트 5는 이렇다. 이것은 절대 다른 작품들이 덜 좋아서가 아니라, 기억에 오래 남아서 나를 괴롭힌 작품들을 위주로 선정했다.


< 신중한 사람 >
왠지 계속 기억에 남아서 책의 문구들이 삶을 방해했다. 나는 책에 반발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꺼내놓게 되었는데 … 이 작품이 말하는 논리가 설득력있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 미국의 목가 >

그가 '미국'의 뛰어난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작품이었다. 

< 기 드 모파상 >

짧은 단편들이 전부 매력적이었다. 있을 법한 이야길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게 좋았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자각도 재미있고, 서사를 놓치지 않았던 게 좋았던 것 같다.

< 무의미의 축제 > 

단순하고 명쾌했다. ‘기호’로서 오래 남아버렸기에… 불가항력으로 선택.

< 비트켄슈타인의 조카 >

신간평가단 하면서 가장 처음에 읽은 책이다. 어떻게 리뷰하면 좋을 지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리뷰하다 보니 왜곡된 줄 알았던 화자의 시선이 올곧아서 놀랐던, 그래서 흥미로웠던 소설이다.



< 소년이 온다 > 도, < 투명인간 > 도 너무 좋았다. 소년이 온다와 투명인간은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그들이 찾아낸 깊이, 깊이를 찾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신간평가단을 하며 처음 접한 작가들인데, 앞으로도 찾아읽고 싶었다. 특히 천명관의 <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는 위트가 있어 슬픈 이야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의 다른 책 < 고래 >를 꼭 읽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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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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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이 잘 재현된 이야기다. 구성도 매끄럽다. 제르미날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실패의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큰 얼개는 뻔할지라도, 세세하게 짚어낸 구체적인 설정과 행동들이 이 이야기를 뻔한 이야기가 아니도록 만들었다. 전체 서사의 방향을 기억하지만 그 서사 안에서 살아 숨쉬는 개별적인 인간을 모두 존중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책에 나오는 인물을 미화하거나 매도하려 하지 않은 시도들이 곳곳에 보이니 인간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노력하는 것에도 모순점이 존재한다는 걸 빼놓지 않고 표현하려 했던 것도 그것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여기 등장하는 부르주아 역시 인간은 끝없이 원한다는 모순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도 얼마 안되는 살림살이들로도 우열을 가리며 서로를 헐뜯기도 한다는 것들이 인간적이었다. 작가는 그런 묘사를 통해 인간은 어떻게 해도 영원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인간이 인간답게 노동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작품 전체에서 말하고 있지만 어느 인간도 소외시키지 않는 묘사와 희망을 언급하는 마지막 부분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그의 발밑, 깊은 땅속에는 고집스레 리블렌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의 동료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에티엔은 그의 걸음마다 그들이 따라다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탕무밭 아래에서는 위윙거리는 통풍기 소리에 묻힌 채 허리가 부서져나가도록 일하고 있는 라 마외드의 거친 숨결이 들려왔다. 왼쪽, 오른쪽 그리고 더 먼 곳에서도 또 다른 동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에티엔은 밀밭 아래, 산울타리 아래 그리고 어린나무 아래에서까지 도처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가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제르미날 2 369p-370p


책의 뒷면에 에밀졸라가 빚어낸 자연주의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어서 자연주의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자연주의는 야비한 일상적 현실을 묘사한 극단적 사실주의의 한 형식이다. 자연을 유일의 현실로 간주하는 입장으로 개인의 운명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유전과 환경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발전시켰던 문학의 학파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 결과 자연주의 작가들은 인물이 어느 정도 야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정하면서 개인을 내적 혹은 외적 힘의 희생자로 그린다.”([네이버 지식백과] 자연주의 [naturalism, 自然主義] (영화사전, 2004.9.30, propaganda)) 에밀졸라는 책에 잠시 등장하는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내면풍경과 외면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애를 썼다. ‘부르주아’의 입장도 ‘광부’의 입장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추악한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 모두를 서술하였다. 게다가 당시 광부들은 이 책을 읽고 에밀 졸라의 장례식 때 제르미날을 외쳤을 정도로 열광했다고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역시 그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광부혁명과 흡사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총 7부로 나뉘어있다. 1부에서는 광부들이 굶주리면서 부당한 임금으로 광산에서 일하는 모습이 나오고, 2부에서는 광부들의 생활이 얼마나 피폐한지 묘사되며, 3부에는 에티엔이 광부일에 적응해가며 사람들과 친해져서 혁명을 도모하려는 내용이 나온다. 4부는 광부들이 피폐한 생활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파업을 알려주고 실행을 계획하는 장이다. 5부에서는 파업을 실재로 이행하고 6부에서는 파업이 경과한 결과 피폐해진 광부들의 삶이 나오며 7부에선 그들의 파업이 실패한 이후 피폐한 생활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극복하려고 사회적으로 노력할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언급하며 마무리된다. 이렇게 큰 얼개로 나누는 것이 조금 억지스럽기도 하다. 장이 나뉘어있고 분위기는 대략적인 얼개에 따라 나뉘나 그것들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고, 사람의 행동은 각 장이 나뉜다고 나뉘어지는 부분이 아니었다. 작은 얼개로 보면 에티엔과 카트린의 사랑이야기 이며, 넓게 보면 더 나은 삶으로의 노력실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얼개가 포함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전에 일어난 일이 다음 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게다가 이 책은 주인공 몇명의 감정과 불합리성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이 될 수도 있는 인물들의 상황과 행동까지 빠짐없이 다루려고 노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의견을 표면으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좋은 소설이었다. 작가가 표면에 드러나서 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인물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그 시대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서 소설 안에 녹아있기 보다 작가의 무지로서 드러나서 소설을 읽는 데 약간 방해되었다. 이는 작가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활용한 까닭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소설 특성상 전지적 작가 시점 이외의 시점으로는 전개가 어려웠을 것을 감안할 때, 그런 점들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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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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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얇은 책이다. 짧지만 굵다. 유의미의 무의미, 무의미의 유의미. 단순하게 말하여 삶 안의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린다. 단어나 에피소드가 넘치지도 않는다.  문장 하나에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어렵지는 않은데 허투루 넘어가는 것들이 없었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이외의 설명을 보탠다는 것은 식상하고, 재미없다. 작가가 이미 지나치게 명료한 어떤 주제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를 풀었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설명이 될 터였다. 


그래도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라몽의 나르키소스에 관한 언급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 다르넬로를 만나면 보잘것없는 인물이 아니라 나르키소스를 상대하게 될 거야. 이 말의 정확한 의미에 주의해야 해. 나르키소스라는 건 거만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야. 거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낮게 평가해. 나르키소스는 과대평가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더 멋있게 만들고 싶어하거든.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거울들에 친절하게 신경을 쓰는 거지.(25p-26p) ”


다르넬로는 책 안에서 나르키소스로 묘사된다. 이 책 안에서 라몽에게 나르키소스인 다르넬로는 ‘위대한 진리의 엄숙함에 애착을 가진 인물(149p)’이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라몽은 다르넬로가 위대한 진리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나르키소스이기 때문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 스탈린 자신이 답한다. ‘나는 말이오, 동지들, 인류를 위해 나를 바친 겁니다.’ 

모두들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 거창한 단어들을 인정한다. 카가노비치는 박수를 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인류가 뭐죠? 전혀 객체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적 표상일 뿐, 말하자면 내 주위에서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데 내가 내 눈으로 노상 봤던 게 뭘까요, 동지들? 당신들, 당신들이라고!’ (118p-119p)


이 책에서 나오는 스탈린 역시도 ‘인류를 위해 나를 바친다’라는 개념을 비웃고 있다. 스탈린 본인이 인류라는 것을 주관적인 표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대한 진리의 위대함을 뒤집는 발언이다.


농담의 중요성에 대해, 농담은 무의미한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에 대해 명료하게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중간에 삽입된 것 중 스탈린이 한 농담에 관한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이 자고새 24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12발 남은 총으로 자고새를 다 쏘았다고 했다. 그러고서 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집에 가서 탄창을 가져와 나머지 12마리가 앉아있는 나무를 향해 쏘아 모두 24마리를 잡았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지만, 그의 측근인 호루쇼프는 스탈린의 거짓말이 역겹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말하는 등장인물 샤를은 스탈린 주위의 사람들이 농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기에, 새로운 역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위대한 시기라는 단어로 그 당시를 표현함으로써 ‘위대한 진리’를 좋아하는 다르넬로를 조롱했듯 그 ‘위대한 시기’를 조롱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가 무의미가 귀중하다는 것의 증거로 내놓은 다른 예시를 보자. 알랭의 어머니는 알랭에게 말한다.


“저 사람들 전부 좀 봐라! 한번 봐! 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이 못생겼지. 못생겼다는 것, 그것도 역시 인간의 권리에 속하나? 그리고 한평생 짐처럼 추함을 짊어지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너는 아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네 성(性)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뭐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133p) ”


이것은 다르넬로의 엄숙함과 나르키소스 적인 면을 한차례 다른 예시로 비웃는 대목이다. 책에서 말하고 다르넬로가 좋아하는 위대한 진리는 ‘인권선언문’같은 것인데, 알랭의 어머니가 중요한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권선언문’은 쓸데없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라몽은 다르넬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147p) ”


이 대목으로 무의미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못을 박는다. 


책은 이제까지 의미있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한 것들을 무시하고서 그 위에 선 것이었다고 말한다고 여겼다.

각자는 삶을 사는 데 필사적인 투쟁을 하고 있다. 살면서 삶의 불행을 가지고 농담거리로 삼는 사람은 봤어도, 삶의 불행 자체가 없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마 있다고 해도 극소수라서 내 주변에는 없었는 지도 모른다. 굳이 특정지어 마음에 담아둘 대목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투쟁을 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어서 게시한다.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44p)”



도가철학자들이 무위자연을 말한 것이 생각난다. 모든 것에 가치가 있기에 모든 것에 가치가 없다. 어떤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고, 무의미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이다. 더 이상 가치구분의 의미가 없어지는 지점. 그래서 그것을 가치구분하지 않고, 무의미한 존재 그대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점. 그것이 삶의 축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참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도가도 비상도에 의하면 진리는 '말'로 풀이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 역시도 모순이 되어버리는 것이 함정일지라도,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걸!) 이제는 너무 자명한 것으로 자리해서 더는 말이 필요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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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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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이 매력적이라 판명되고 그들이 사랑을 받을 때, 그들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주장을 필요할 때 명료하게 할 줄 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편리하게 얻어낸다.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이용할 줄 안다. 세상엔 매력적인 사람들이 많다. 매력적인 사람들은 곧잘 주목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신중한 사람>이라는 단편집에 작가가 자리를 마련한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사랑받기는 어려운 사람들이다. 현실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현실상황에서의 매력적인 사람들과도 대치된다. 자신에게도 답답한 사람이지만, 타인에게도 답답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그 이외의 사람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매력적인 사람들은 소설의 주제가 되지 않아도 그들을 분석하는 책들은 시중에 많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이 언급될 때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 뿐이다. 그렇기에 현실 상황에서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책으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들은 소외되기 이전에도 소외되었지만 책으로부터도 소외되었기 때문에 더욱이 소외된 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성찰하거나 소외된 자 그대로 있을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외된 자의 권리가 무시당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외된 자가 권리에 집중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발돋움 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소외된 사람이 아니다. 

소설이 지목하고 있는 점은 소외된 자들이 소외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식들이 어떻게 그들을 소외시키는 지에 관한 것들이다. 권리를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어떤 것을 주장한 만큼 성취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늘상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신중한 사람>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단지 적극성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적극성을 가지고 행동을 하지만, 그들의 적극성은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고, 세상에 와 닿지 않는다. 그 행동들은 각기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이유들은 <<하지 않은 일>>에 나오는 것처럼 ‘하지 않은 일’이기에 아무리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해도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중한 사람>>에 나오는 인물처럼 트러블을 원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마음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병적으로 침해받기도 한다. <<이미, 어디>> 에 나오는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던 곳에서 떠난 사람이 되어서 온전하게 있을 공간을 찾고자 하지만 적극성에도 불구하고 옮겨온 곳에서도 점차 없는 사람이 된다. <<어디에도 없는>> 에 나오는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스스로를 여기에 없는 사람이라고 지칭하지만 몸이 있는 곳을 여러가지 조건들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행동할 자유를 잃는다.

이 책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심지어 자신의 권리를 잘 주장하는 사람들도 겪을 수 있는 소외들에 관해 집중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매력적이지 않든, 매력적이든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다소 극단적으로 치닫는 면들은, 치우친 것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인간의 본연의 모순을 부각시키고 세밀하게 파고든다. 소외된 모습을 거울의 단면처럼 비춘다. 그렇기에 도리어 매력적인 인물들로서 소설을 이어나간다.

‘신중한 사람’에 실린 이야기들은 읽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함은 불편함으로 발전한다. 그가 그린 인물들이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각각의 내용이 삶의 진실을 닮아서 두 번 읽고 싶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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