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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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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한 가지 목표에 ‘순수하게’ 매진했기 때문일까? 그 목표가 옳은 것이든 옳지 않은 것이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지혜는 편협하고 사상은 단조로웠을지라도 자신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소중한 지식은 없다고 여기며 행동했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돌진만 했다.

영웅이 되기 위하여 다사다난한 삶을 산 리모노프, 그가 돈키호테라 불리기에 적당하다 생각한 이유는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그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그의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영웅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고 ‘파시스트’가 되려고 노력하며, ‘전쟁’은 한번쯤 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들을 일생에 걸쳐 몸으로 실천한 그를 지칭할 수식어로 ‘돈키호테’보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왜 리모노프를 매력적이라 느꼈을까? 돈키호테야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이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사상을 추구한 것은 아니니 매력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자. 리모노프는 실존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현안문제에 대해 정말 ‘다른’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소설을 읽고 그의 넘치는 에너지를 보고 스타로 추앙하고 좋아할 수는 있어도, 전혀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내가 이유없이 그의 사상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동의는 커녕 그에게 권력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단순히 그가 영웅이 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매력적이라 느끼는 것은 사실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다. 그를 매력적으로 느낀 작가의 의도가 소설 안에 적절하게 배합되어 독자가 리모노프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기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리모노프는 나르시즘적인 사고방식으로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명석한 두뇌와 훌륭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오직 역사에 남겠다는 일념으로 명예만을 쫓는 사람인데. 이런 설명만으로는 그에게 매력을 느낄 이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앞서 말했지만 그는 “파시스트“가 되고 싶어했다. 파시스트라니!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의미하는 파시스트는 일당독재체제를 통해 국가를 지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서, 그 사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못 내도록 총력을 기울이며, 일반 시민들이 쉽게 발언권을 얻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고위당원들만 혜택을 공유하고, 위에서 고인 물들이 썩어간다 해도 그들끼리의 리그에서만 모든 물자를 독식하는 그런 상태. 그런데 리모노프는 영웅이 되고 싶어하면서 파시스트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영웅은 모든 사람이 추앙하는 인물인데, 사람들이 반대할 만한 사상을 내세우면서 영웅이 될 수 있나?

그런 이유는 러시아 역사를 살피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그가 파시스트가 되고 싶어한 이유는 그가 어릴 적에 느낀 러시아적인 가치를 복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태어난 시기에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포함된 국가로서, 공산국가였다. 모든 물자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배포되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것처럼 보였다. 


늘 켜져 있는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이 에두아르드는 눈에 거슬렸다. 불을 끄려는 아들을 어머니는 말렸다. 따뜻하고 방에 항상 누가 함께 있는 것 같아서 든든하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이러면 수천 프랑이 나와요> 하고 그가 한마디 하자, 그녀는 아들의 외국 생활에 대해 들은 몇 안 되는 얘기 중에 이 사소한 내용이 단연코 가장 충격적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거기는 사람들한테 <돈을 내고> 가스를 쓰게 할 만큼 나라가 짜단 말이냐?⌟305p


옛날에는 사는 게 고생스러웠어도, 구시렁구시렁 불평은 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자긍심을 느꼈다. 가가린스푸트니크 인공위성, 강한 군대, 광활한 제국의 영토가 있다는 사실이, 서양보다 공정한 사회에서 산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글라스노스트> 이후로 고삐가 풀린 표현의 자유 때문에 맞은 편의 사내 같은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1917년부터 이 나라를 지배한 자들은 모두 사디스트고 살인자이며 작금의 참패를 불러 온 장본인이라는 사고가 각인되었다고 에두아르드는 판단했다. <사실, 우린 딱 제 3세계 국가, 핵무기를 가진 오트볼타(부르키나파소의 옛 명칭)꼴이오> 하고 사내는 한탄했다. 어디서 한 번 읽은 게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겠다는 부담감 속에 같은 표현을 되풀이했다. 지난 70년동안 우리가 최고라고 세뇌를 받았지만 우리는 패배자들이었다고. <브쇼 프라이그랄리(폭삭 망했다)>. 70년 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희생한 대가가 이것이라고, 똥통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301p


평등한 가난함(?평등과 가난함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될까 모르겠지만..)과 제국의 자부심을 그리워하는 러시아 사람들은 공산주의 국가에 향수를 느꼈다. 리모노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기 때문에 러시아적인 사고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었다. 리모노프는 그런 의미에서 그가 추구하는 바와 러시아적 정서가 일치된, 철저하게 러시아적인 사람이다. 공산국가라는 특수한 환경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일까?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것은 러시아도, 남한도 마찬가지이지만, 애초 공산국가였던 적이 없던 남한과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정말 달랐다.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이행과 범죄적 이행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소. 범죄적 이행이냐 내전이냐, 둘 중 하나였으니까. 364p


인생의 한 모퉁이에서 이번엔 또 운명이 예고도 없이 그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보내 준 것이었다. 전쟁을 하면 삶과 인생에 대해 두 시간이면 배울 것을 평화로울 때는 40년이 걸려야 배운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쟁은 추악하다. 사실이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합리적인, 본능을 억누르는 문명의 삶도 결국 미친 짓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전쟁이 쾌락 중에서도 최고의 쾌락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다. 325p


인생의 한 모퉁이에서 이번엔 또 운명이 예고도 없이 그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보내 준 것이었다. 전쟁을 하면 삶과 인생에 대해 두 시간이면 배울 것을 평화로울 때는 40년이 걸려야 배운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쟁은 추악하다. 사실이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합리적인, 본능을 억누르는 문명의 삶도 결국 미친 짓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전쟁이 쵀락 중에서도 최고의 쾌락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다. 325p


전쟁의 맛, 진짜 전쟁의 맛은 사람한테는 평화의 맛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에, 평화는 좋고 전쟁은 나쁘다는 고매한 소리로 이 맛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녀의 존재가 그렇듯 현실에서는 <음양>의 이치처럼 이 둘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326p


작가가 리모노프와 비슷하다고 묘사한 ‘푸틴’은 정권을 잡았다. 리모노프는 ‘파시스트’가 되고자 했으면서도 ‘푸틴’을 ‘파시스트’라며 싫어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토록 뒤죽박죽이다. 작가 역시도 그걸 염두해두고 리모노프가 오직 영웅이 되기 위해 목숨까지 불사할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는 지도 모른다. 그는 러시아의 혁명을 위해 당을 만들었었고, 60대 후반에(2009년-66세) 푸틴에 반대하여(맞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31조를 상기시키는 <전략 31>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중이라 한다. 그는 영웅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사실 그가 목표로 한 바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리모노프는 그런 그의 인생을 ‘개떡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라고 요약했다고 한다. 작가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그렇게 끝내기 아쉬웠다.


에두아르드라는 파시스트한테 한 가지는 인정해 줘야 한다. 그는 과거나 지금이나 항상 소수의 편에 서 있다. 뚱뚱한 사람들보다는 마른 사람들,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수두룩하게 있는 착한 사람들보다는 당당한 개차반들의 편이다.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는 인생 역정이지만 그는 언제나, 정말로 언제나, 그들의 편에 서는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436p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가지는 일관성인지는 잘 모르나, 처음부터 지켜온 이런 일관성은 리모노프를 진짜 영웅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 역시도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이런 점에 반하기도 했다. 작가는 그 말에 덧붙여서 이런 말들을 곳곳에 적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신성한 단결>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는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대가 달랐으면 상황적 여건이나 명분을 내세워 충분히 나치에 협력하거나 스탈린주의나 문화혁명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세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치들, 내 시대, 내 나라, 내 계층의 사람들이 영구불변하고 보편적인 최고의 가치라고 확신 하는 것들 중에서 세월이 지나면 기괴하고 추악할 뿐 아니라 명백히 잘못된 가치로 판명되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나치게 고민하는지도 모르겠다. 리모노프류의 상종 못 할 사람들이 오늘날의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는 기독교 식민주의의 변형(야만인들에게 진실과 아름다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겠다는 똑같이 좋은 의도, 똑같은 선의, 똑같은 절대적 확신에서 출발하는)이라고 주장할 때, 나는 물론 이런 상대주의적 논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론할 근거도 없다. 331p


세상의 복잡다난함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상반되는 사실을 발견하면 덮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각시킨다.334-335p


우리의 전반적인 사고체계는 미덕에 의한 등급화, 가령 마하트마 간디는 살인범인 소아 성애자 마크 뒤트루보다 훨씬 고귀한 인간상이라는 판단에 기반하고 있다. 246p


<남과 비교해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심지어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인간조차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지고지상의 지혜이며, 이 생각을 수용하고 소화하고 체화함으로써 이 생각이 단순한 생각에 그치지 않고 여하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시선과 행동을 결정하는 좌표로 작용하게 만들기에 한 평생이라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247p


작가의 이런 생각들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욱더 리모노프의 삶을 실패자의 인생인 양 끝마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또한 타인의 카르마,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카르마를 판단할 때조차 오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515p” 그래서 작가는 이런 질문을 한다. “이 집에서 늙어 가는 상상을 해보나요, 에두아르드(리모노프)? 투르게네프의 주인공처럼 생을 마감하는?”

그 말에 리모노프는 이렇게 답한다.


사마르칸트나 바르나울 같은 도시들에, 태양이 작열하고 먼지가 자욱한, 느리고 격렬한 도시들에, 그곳, 총안이 뚫린 사원들의 높은 담장 밑 그늘에, 걸인들이 있다. 몇 무더기의 거지들이. 이가 빠지고 상당수는 눈도 없는, 그을린 얼굴의 앙상한 노인들. 이들을 때가 까맣게 묻은 튜닉과 터번을 두르고 앞에 벨벳 조각을 펼쳐 놓고 동전을 던져 주길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막상 던져 줘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다. 이들이 살아온 삶은 알 길이 없지만, 무연고자 공동묘지가 종착역인 것은 분명하다. 나이도, 혹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젠 재산도 없으며, 여태 이름이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넝마를 걸친 걸인들이다. 왕들이다. 519p


이 결말을 읽고 무릎을 쳤다. 암살당하지 못해서 영웅이 되고자 한 꿈이 좌절된 영웅의 이야기가 진짜 영웅의 이야기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넝마를 걸친 걸인이자 왕이라 묘사된 그들은 러시아적으로 ‘낙오자’가 된 리모노프를 묘하게 닮아있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리모노프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으면 그 열기와 에너지가 활자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리모노프가 욕망에 충실하고서도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착실히 밟아왔다는 점이 정말 사랑스럽다. 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에 놀라울 뿐이었다. 

책에 나오는 저돌적인 그의 생각과 행동은 오히려 영웅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라 여겼지만, 책을 읽고 나서 생각컨데 인생이라는 것은 참 신비해서 욕망만을 쫓는 사람에게도 열심히 노력할 경우 평범하고도 영웅적인(?) 깨달음을 주는 건가 싶기도 했다. 러시아 바깥에 살아온 나도 그의 삶이 이해되면서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나와는 전혀 다른 이세계의 사람인데도 나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점이 닮았다고 생각했냐면, ‘이상’이라 여겨지는 것을 향해 목숨걸고 돌진하는 점이다. 그렇게 돌진하다가 리모노프처럼 노년을 보낸다 해도 아량곳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노력하기를 희망하기에, 그러했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허영과 허세는 많아도 겁쟁이라서 리모노프처럼 영웅(?)적으로 살거나 무모하게 전쟁에 나서거나 하기보다 누구도 죽이거나 무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펜대만 잡고 굴릴 것 같지만. 그랬다. 그렇게 따지면 리모노프보다는 카레르가 추구하는 삶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복잡다난함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상반되는 사실을 발견하면 덮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각시킨다."라는 의견과 "<남과 비교해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심지어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인간조차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지고지상의 지혜이다"라는 카레르의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여튼 리모노프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소설 리모노프를 읽으면서 자신의 이야기와 리모노프 이야기를 절묘하게 섞어서 도대체 어디까지가 리모노프란 사람의 진실일까 궁금했다. 묘사라기보다는 관찰일기 같은, 논평을 읽는 기분이었다. 리모노프가 가로지르는 러시아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루었기에, 아무 지식이 없는 내가 읽기에 조금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책이었다. 읽고 나서는 리모노프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p.s. '리모노프'를 읽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왜 그런 인물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안에 등장했을 지 더 잘 알게 된 기분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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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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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는 것은 모두 한 데 모인다 


나는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단편소설의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로테스크를 규칙이라고 들이댈 수는 없지 않은가. 읽으면서 규칙성을 찾으려는 나를 비웃듯이 이야기들은 준비되지 않은 내 뒤통수를 쳤다. 아무리 어떤 뒤통수를 칠 지 미리 알아보려고 살펴도 결말은 항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났다.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 어떤 인물도 얌전히 믿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어떤 인물도 결말이 나올 때까지 비난할 수 없었다. 

대충 읽다가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게다가  소설 안에서 사건 하나가 터지고 나면 항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떤 인물도 스스로가 바랐던 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읽는 내내 뒤통수가 남아나질 않는다. 무엇 하나 놓칠까 싶어 꼼꼼히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꼼꼼히 읽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도 따라갈 수 없었다. 

매우 간결하게 그 장면에 필요한 이야기들만 서술되어 있었다. 문장 하나하나의 숨결을 느끼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고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인물에게 공감하도록 길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었다. 작가는 독자가 인물에게 공감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작품에서 대체적으로 선한 인물은 나오지 않고 어중간하게 속물적이거나 부적응자인 사람들이 나와서 판을 벌였고, 누군가가 죽거나 처절하게 상처받고 나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리고선 일상적으로 공유되던 의문들과 규칙이 하나씩 깨져갔다.

그러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와 연관지어 무언가를 찾으며 읽으려 해도 섬뜩함 이외의 것은 공유할 수 없었고, 감정적으로도 단편들을 단숨에 읽는 것은 힘이 부쳤다. 당신이 싫어하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해주마. 라고 작가가 말하는 듯 했다. 부적응자들의 위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믿었던 것들에 의해 사람들은 조롱당한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형성한 사건은 상징은 명료하게 말하기 애매한 지점에 서 있다. 작가가 서술하는 시점과 공간은 작품 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하려는 이 소설들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에 와서도 재해석 될만한 여지를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플래너리 오코너가 다룬 것들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인간이 품고 있는 모순 그 자체를 심연에서 끌어올려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손님 같은 분들은 호크슨의 교사 봉급에 대한 공약 때문에 호크슨에게 투표하시겠지요? 당연하죠. 돈이란 많을 수록 좋으니까요. “

“돈이라고요!” 레이버가 웃었다. “썩어 빠진 주지사 아래서는 돈을 얼마를 받아도 결국 잃는 돈이 더 많다는 걸 모르시나요?” 그는 자신이 드디어 이발사와 같은 수준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은 너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배척해요. 그 사람은 내 돈을 다먼보다 배는 더 빨아먹을 겁니다.”

“그러면 좀 어떤가요? 저는 좋은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일에는 언제든지 돈을 낼 겁니다.” 이발사가 말했다. 

“호크슨이 약속한 임금 인상은 이분 같은 선생님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방 뒤편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러더니 기업가 같은 태도의 뚱뚱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분은 대학 선생님이시지?”

“맞아요. 이분은 호크슨이 말하는 임금 인상에 해당이 안 돼요. 하지만 다먼이 돼도 봉급은 안 올라요.” 이발사가 말했다. 

“그래도 무언가 얻겠지. 학교는 모두 다먼을 지지해. 나름대로 얻는 건 있지. 무상 교과서, 새 책상같은 것 말이야. 그게 게임의 규칙이야.”

“학교 환경 개선은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레이버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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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깨닫지 못하는 건 우리가 그걸 싫어한다느 거에요. 선생이 수업하는 교실에 까만 얼굴 두엇이 섞여 있는 것이 좋습니까?”

레이버는 한순간 거기 없는 어떤 것이 자신을 땅에 때려눕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발사 29-31p)


‘이발사’라는 단편에서는 레이버가 흑인옹호가라는 별칭을 가진 다먼을 지지한다. 단편에서 확인하면, 다먼을 지지하는 이유는 호크슨을 지지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유(돈)와 비슷한데도 흑인 옹호가라는 별칭을 한껏 활용하여 흑인 이발사 고용인인 조지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연설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발생하는데, 레이버 스스로는 백인과 흑인에게 같은 대우를 하려 하면 싫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게다가 이발사는 아마도 이익 때문에 호크슨을 지지하지만 그 이유는 추상적이고 당위적이며, 지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이론들이 서로 모순되더라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단지 호크슨을 신뢰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을 뿐이다. 

한편 레이버가 작성한 연설문 역시 당위적인 내용일 뿐이다. 조지는 연설을 듣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호크슨을 지지한다는 말을 한다. 

이 단편만 봐도 단순히 흑인이냐 아니냐 사이에서의 편견은 시대적 배경으로서 인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될 뿐이다.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진 모순이 가져온 미묘한 균열을 겉으로 드러내서 위선을 폭로하는 과정일 뿐이다.  


‘오르는 것은 한데 모인다’라는 작품에서는 아들이 어머니의 편견(흑인은 백인과 근본적으로 급이 다르다)과 맞서싸우려 하지만 실재로는 자신도 편견에서 벗어났다기보다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수준에서 그치는데, 그 괴롭힘이 극에 달해 어머니가 쓰러지자 그 때문에 아들 역시 죄책감에 휩싸이며 괴로워진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 작가가 시대적 배경을 잘 활용하여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인간들의 자기모순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지만 그 자기모순이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순하게 해석이 가능하지만,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소설중에는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모순들도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시각에서 파악할 것인지가 각자 작품을 해석하는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플래너리 오코너가 마치 방관자처럼 존재하는 것을 소설화할 수 있었던 능력이 한 껏 발휘된 까닭일까? 내게는 아직 그녀의 소설은 수수께끼이다.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어떻게 바라봐도 다양하게 해석이 되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이 소설가에게는 새로운 영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르는 것이 모두 한 데 모인다’면, 그녀의 소설 역시 ‘오르는 것’에 속하기 때문일까.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첨예한 지점에 다가서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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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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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은 사람의 존재처럼 금새 사라진다. 반대로 말해야 할까. 사람의 존재는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금새 모습을 감춰버린다. 기억 역시 존재의 생리를 닮아서일지 중요한 것이라 여긴 것이든 아니듯 어느 순간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처럼 수많은 기억속으로 사라져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사는 동안에도 사그라지고 죽은 이후에는 구별되는 것이 더 어렵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그 소멸이 안타까웠던지, 아니면 그 사이에 숨쉬는 인간의 고독이 안타까웠던지. 소설의 초점을 사라지는 기억들과 존재들에게 맞춘다. 그는 마치 기억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듯한 문체를 사용하여 그가 생각하는 ‘기억’의 특성이 작품안에서 숨쉬게 했다. 그 점이 다른 작가들이 기억과 사건을 다루는 방법과 다른 점이었다. 이야기는 기억처럼 밀려들어왔다가 기억처럼 뚝 끊겼다. 한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치 옆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내 기억과 뒤섞여서 또 하나의 변주를 일으켰다. 소설의 이야기에 이끌리기보다, 나 자신의 기억을 더 자극받아 생각의 나래가 펼쳐졌다. 

소설은 듬성듬성 무언가 빠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고 매끄럽다. 그래서 마치 직조된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을 대하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그 어조를 부드럽다고 칭하기에는 어쩐지 부족하고, 여성적이라 하면 ‘여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해야 하니 뭐라고 말해야 적당할 지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마초적이지 않다고 해야 하나. 거대한 논리구조를 구축하여 독자를 압박해서 당위적인 설명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문체가 아니다. 마치 내 기억처럼 조용하게 스며든다고 해야 할까. 그걸 말하는 데 전혀 장황하거나 지루하지도 않다. 공감하고 쉬어갈 수 있을 정도의 분량에 담아낸다. 조각을 만들 때 정을 두드려도 정을 두드린 흔적을 내보이지 않는게 미덕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 작품 역시 내면에 담은 이야기를 말하려고 ‘기억’으로 비추어지는 ‘정’모양을 제외하고는 그런 방식으로 쓰여진 걸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만드는 방법,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대로 소설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이것이 기억이라는 듯 표면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순간 이후의 그들의 얼굴, 그들의 목소리는 마르가레트의 얼굴을 제외하곤 긴 세월 속으로 사라진다. 돌아가던 음반은 끽끽 소리를 내다가 일순간 뚝 멈추고 만다. 그게 아니라도,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는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그날 밤 마르가레트 르 코즈는 새 직장을 구해서 리슐리외 대행사 및 방금 만난 동료들과 완전히 연을 끊고 싶다고 보스망스에게 털어놓았다. 매일 구인광고를 읽으며 자신에게 또다른 지평을 열어줄 문구가 눈에 띄기를 고대한다면서, 오페라 광장에 도달하니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했다. …32p<<지평>>”

그들의 얼굴 그들의 목소리는 ‘마르가레트’의 얼굴을 제외하곤 긴 세월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창공)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 그곳에서 나와 그녀는 또다른 지평을 열어줄 문구를 찾으며 걷는다. 보스망스가 기억하려고 하는 마르가레트를 제외한 배경들은 덧붙여 설명하지 않고 ‘긴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작가는 그게 안타까웠는지. 당연하게 기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점들을 당연하게도 택스트로 끌어올려 적어둔다.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재차 말함으로서, 굳이 그 카페를 왜 그렇게 지었는지 궁금해하며 직접 물어보지도 않지만, 궁금해 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기억에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소중히 여기는 것 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연민을 가지는 듯이 조용하게 붙어있다. 이 소설의 독특한 ‘기억의 문체’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런 서술은 억지로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주된 타겟으로 삼은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살아내려 노력하는 ‘보통’사람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무수히 많은 사람 중 하나. 그 중에서도 세계의 흐름에 곁다리로 밀려나 부단히 살아내려 노력하는 사람 중 한 명의 기억을 쫓는다. 


소설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는 시대에 지쳐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삶을 이어나가고, 적극적으로 야망을 가지고 개척하겠다는 힘이나 의지는 이미 깎여나가버린 것처럼 노쇠해 보인다. 그래도 그 저변에 깔린 생명의 힘은 전혀 약하지 않았다. 뭐든지 다 해내겠다는 듯이, 무모하게 뻗어나가지 않을 뿐이었다.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다 해도, 연인에게 모든 것을 말하라고 캐묻지 않는다 해도 살아갈 뿐이었다. 그 일례로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가 무서워하는 대상에 관해 자세히 물어볼 수 없다고 느꼈음에도 그녀와 긴밀하게 연결된 연인이었다. 그런 모습이 어쩐지 이국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익숙했다. 자신이 사는 시대에 지친 상태로 앞으로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꿈꾸지 않는 요즘 세대와 비슷해보였다. 


“……그리고 마르가레트와 나, 우리 둘 역시 무허가로 캠핑중이었다. 대체 어떤 계기가 있어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잘 태어나 잘 자란 사람들, 자신 있는 입술과 눈빛으로 부모에게 사랑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그 한결같은 자신감과 적자다운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168-169p<<지평>>”


 “이본 고셰는 그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미래…… 지금의 보스망스에게는 날카롭고도 신비한 울림을 주는 말.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한 번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있었다. 170p<<지평>>” 


인물들은 ‘지평’어딘가에서 걷다 서로를 발견하고, 헤어지고 다시 떠올리며 만나려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지평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포개져 혼재하는 시공간”이라고 했다고 한다. 제목은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기억을 붙잡으려 해도 붙잡아지지 않고 그저 흘러가면서 혼재되어 있듯이, 인물들도 그렇게 등장하고 사라지고 만나고 헤어진다. 시간에 의해 공간이 뒤섞이고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공간. 그렇게 살피고 나니 책 표지도 잘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는 나도 지평을 걷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인지하려면 똑같은 인생을 두번 살아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서라도 그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섞인 시공간안에서 숨을 쉰다. 기억만큼이나 나라는 존재 역시 금새 잊혀지고 사그라져버릴 테지만 그럼에도 보스망스처럼 어떤 누군가를, 일생에서 귀중한 무언가를 찾으려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렇기에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쎄한 기분이 들면서도 익숙하다. 반드시 무엇을 해야 겠다는 당위성도 시간에 홀려 없지만 그럼에도 안타깝다. 가느다란 끈을 들고 떠난 그녀를 찾아서 책방에 찾아간 보스망스처럼, 펼쳐진 유리 수족관 안에서 어떤 것을 구별해내고, 아직은 나도 모를 무언가를 만나고 쫓아 갈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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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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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지식`이 존재한다는 관념에 갇혀있던 나를 바꾸어버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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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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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한 달 전에 읽었는데, 책장을 넘기면 내용이 다시 생생하게 내게 다가온다. 마음 깊숙히 숨겨둔 감정을 끌어올리는 좋은 책이다. 그런데 막상 리뷰를 쓰려니 뭐라고 서두를 써야 할 지 모르겠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으로 탄탄한 서사를 메꾸었다. 라는 말은 이 소설을 표현하기엔 불충분하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서 기억에 남았던 것도 아니고, 독특한 서사로서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며, 사유로서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라 미묘하다. 


읽으면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특징으로 꼽아야 하련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지점은 각박하고 우울한 지금이며, 주인공이 소설 안에서 무언가 해방될 수 있는 지점을 찾은 것도 아니다. 아마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역시 지금을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할 것 같은 내일을 마주할 것 같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도 없지만 소설과 삶이 별개로 갈라져버리지도 않는다. 대리만족을 하게 만듦으로서 값싼 위로를 행하는 것도 아닌데 이 소설집을 엮은 이야기꾼이 왜 위로를 한다고 느낀 걸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세상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고통을 본다. 그들의 고통은 극적으로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쉽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 그들은 사회가 변하기를 바란적도 없다. 애초 ‘사회가 변한다’는 개념도 후대에 와서 역사가들이 ‘변화하는 사회’라는 것을 기점으로 정리한 까닭에 사회가 변화하였다고 ‘믿는’것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회’라는 것은 얼마나 불분명한 것인지 눈에 보이지도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누군가는 사회에 대해 논평을 하고 변혁을 꿈꾼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통해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라 지칭되는 추상적인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각기 개인적인 고민들을 치열하게 하면서 어떻게든 암담한 현실을 하루라도 살아낸다. 그리고 각기 가진 작은 고민들에 대한 그 순간만을 위한 답을 찾아내고 앞으로도 수없이 닥쳐올 것들에 대해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순간’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어쩌면 ‘순간’을 겨우 넘긴 인물들의 삶이 나의 삶을 닮았기에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그들의 고통을 처절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독자로서 그들의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던 것도 ‘위로’에 한 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끔찍하게 보이는 일도 ‘순간’과 ‘순간’을 넘기면 어느새 다른 해방감이 있기라도 할 듯, 소설은 끝이 난다. 무사히 ‘순간’이라도 넘겼기에 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순간’을 넘기면 지금의 고민이 해결될 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은 당연한 공식처럼 내 일상을 위로해왔다. 정말 그런지는 어떤 일이 지나고 나야 안다. 그렇게 따져보면 고민이 해결되었던 적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다. 지금의 믿음이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빗대어 살피면  추측하려는 시도가 무안하게도 쉽게 하찮아진다. 하찮아지지 않기를 ‘지금’ 바라고 있을 뿐이다. ‘바란다’는 것은 ‘영원’과 ‘완벽성’과는 관계가 없다. 완벽하지 않다고 판명되더라도 바랄 수밖에 없고, 바람으로서 지금의 삶을 버티고 앞으로라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향해 다가갈 수 있으니 기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점에서 어쩌면 소설과 나는 서로의 삶이 맞닿아 통했다고 느끼고 위로를 얻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루 하루 살기도 벅차서 좌절하지만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는 것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기 때문에. ‘순간’을 넘기는 것은 중요했다. 그건 개인적 불행의 총량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가 견뎌야 할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 뿐이라 쉬쉬하며 지냈던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쓴 이야기꾼은 내가 가진 이야기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전개한다. 마치 농담처럼 느껴졌다.


이미 충분히 ‘삶’이 부담스러워서,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회의’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이 소설이 어울리는 곳에서 살고 있기에 소설로부터 위로받았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아서 무거운 이야기를 농담처럼 쉽게 읽었으며, 오래 마음에 남아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농담같은 위로는 던져졌을 뿐이라, 나는 책장을 덮고서 마음에 남은 위로로 다음 ‘순간’을 향해 간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부러진 팔로 아이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삼십팔 킬로그램의 여자가 한 생명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흠뻑 젖은 소년의 몸은 파충류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팔딱거리고 있었다. 수억수천만년간 박동을 멈추지 않은 심장이었다.

.

.

이번엔 절대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결심을 주문처럼 되뇌는 동안 그녀는 물속에서 소금이 녹듯 스스르 잠들었다."

-파충류의 밤106-10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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