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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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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으로 삶을 버텨온 사람의 이야기이다. 혹은 한 인간의 생애에 걸친 종말을 다룬, 소설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는 그 친구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수치감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 p133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버키가 살고 있는 마을에 덮치자, 버키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마을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의 역할은 ‘놀이터’의 체육선생님이었고, 그는 체육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의 든든한 우상이 되어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전염병 앞에서 그런 체육선생님의 위엄은, 별로 위엄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그는 할아버지에게 ‘강인함과 결단력, 신체적으로 용감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것, 남들에게 휘둘리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 그들이 두뇌를 사용할 줄 안다는 이유로 허약한 유대인이나 계집애 같은 유대인이라는 비방을 당하지 않는 것(p34)’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놀이터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사명감을 가졌다. 폴리오가 발병하고 그가 폴리오를 피해 도망친 이후 그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배운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가 달아난 곳에서도 폴리오가 발생하자 그 자신이 폴리오를 옮긴 것이라고 ‘확신’할정도로, (실재적인 근거는 없었음에도!) 그 일때문에 평생을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을 정도로 그는 그 원칙을 지키려고 ‘순교’했다. 

그런 그를 두고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평가한다. 상황을 상황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살아온 대로만 사고하였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치 그 일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무의미한 ‘종말’이라는 듯이...


나는 필립로스가 그런 인간의 운명을,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하게 첨예하게 그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생의 믿음을 다른 화자를 통해 깨뜨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한 인물이 행동한 것을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읽힐 수도 있지만 ‘운명’이라는 것이 어쩔 도리 없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걸까? 이런 평범한 결론을? 


 인간이 어쩔 도리 없이 맞게 된 어떤 비극적 순간을 어떻게 버텨나가는 지, 그 과정을 지켜보다 그 일이 있은 지 한참 이후를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있으면, 내 삶은 정말 내것인가 궁금해진다.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에 휩쓸려버리면, 나같은 것은 흔적도 없이 와해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미 처음과 끝이 정해져 버린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운명이 아니라,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기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러나 일어난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범주이기에 ‘운명’으로밖에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 그런 의미에서 한 인간의 ‘의식의 동일성’이라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의식이라는 것 역시도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아닐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조금은 평범하게, 작은 꿈을 꾸며 살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걸까. 이 소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기도 하다. 운명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이고 나면, 어차피 똑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건데 조금은 덜 강박적으로,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를 영웅이라 칭한다면, 공동체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영웅인가? 그가 영웅인지 아닌지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모욕하는 일이 아닐까. 그는 영웅이 되기 위해 행동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그가 그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라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라 볼 수도 있다. 그건 그가 책임지고 싶어했던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 그의 삶 자체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은 과업을 완수하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삶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그것을 깨트렸다. 그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마저도 그가 책임지려고 하는 태도가 어쩌면 영웅적이라 불릴 수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으로 실천하는 게 과연 영웅일까. 


그는 신과 대결하였던 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누구를 위한 영웅일지도 모르곘다. ‘효용성’만으로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버키의 일생을 무의미한 것으로 ‘판정’해버린 무례한 일을 했다. 그가 살았던 방식으로 나는 살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그 이유로는 부족하다. 게다가 그 일생을 무의미하다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이런 기로에 서게 만드는 ‘운명’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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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0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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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0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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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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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사는 시대가 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을까? 지금은 이상향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는 단어 ‘유토피아’는, 지상에 없는 곳이라는 의미로 토마스 모어가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그린 책이다. 책 내용을 전해들은 내가 했던 생각은, 정말 터무니없는 세계를 꿈꾸었다는 것이었고, 유토피아라는 이름에 걸맞다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나라면, 이상향을 그렇게 꿈꾸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이루어지기 어렵게 느껴지고, 꿈꾸는 것 자체를 멍청한 것으로 취급하게 한다. 그렇기에 이상향을 어떻게 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렇게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상향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 걸까. 사실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면 이상향을 꿈꾸지 않는 게 좋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고, 온갖 부조리한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는 계나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다.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고,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p11 하는 꿈이다. 그걸 한국에서 실현하기에는 스스로가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목숨 걸고 어떤 것을 할 인물도 못된다고 스스로를 평한다. 그래서 호주로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호주에 가서도 제일 밑바닥 알바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 사귀던 전 남자친구 지명에게서 전화가 온다. 계나를 사랑한다고, 호주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같이 살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백한다. 


“얘는 내가 지금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는 건가? 무슨...... 마치 자기를 구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하며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같았어. 낙하산을 멘 건지 아닌지도 몰라.” p138


구원을 받으려는 건지, 안받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지명은 사랑에서 그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녀가 지금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절박하다. 그만큼 그녀를 사랑한다고, 상상 속에서 그녀와 일평생 함께하리라고 맹목적으로 믿어버린다. 그걸 계나는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라 일컫는다. 이 구원이라는 게 계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계나는 스스로가 지명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지명으로부터 과연 어떤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지 미심쩍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주에 있는 것이 아닐수는 있다. 이 소설 안에서는 이런 사랑은 ‘빌딩에서 낙하산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안하고 뛰어내리는’일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랑’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로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지명이 말하는 사랑을 계산하고, 그걸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질문한다. 그 질문이 무서웠다.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가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 지명은 사랑의 환상에 허우적대고, 계나는 사랑을 계산하여 측정하지 않는 지명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어느 것이 맞다 어쩌다 하기보다 이 두가지 모두가 지금 ‘사랑’이 겪는 현실이라는 게 섬뜩했다.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p155


계나가 바라보기에, 그녀와 지명의 사랑은 의좋은 형제의 처지이다. 그녀의 시선에서 의좋은 형제는 괜히 서로를 사랑하느라 뻘짓하는 사람들이다. 서로 사랑해서 호혜적으로 편한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그렇기에 또 끊임없이 힘들 뿐인, 언제 지쳐 떨어져 나갈 지, 언제 그런 서로를 마주하고 경악하게 될 지 모르게 되는 사이. 이런 사이라는 것을 들키기 전에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계나는, 어쩌면 사랑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걸까? 계나의 이런 생각에 깔린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보였다. ‘사랑’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맞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걸까. 아니면 계나처럼 사랑에 대해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인 계나는 이런 형제의 처지에 빠져서 살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 싶어. 

내가 그런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명이는 자기가 주말에 쉴지 안쉴지도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 데이트 계획 같은 건 세울 수도 없었어." p153


지명은 그가 그토록 되기를 바랐던,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여전히 고달프다. 계나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일이기에 꿈꾸고, 지명은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이상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산다. 계나가 보기에 지명은 불안하다. 사랑 하나만을 믿고 지명을 따라가기엔, 자신과 지명의 처지가 너무 다르다. 지명은 열성적으로 자신이 꿈꾸던 일을 쟁취해냈고,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도 그런 식으로 헌신하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계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계나는 그 간극을 버틸 다른 방법을 찾지만, 쉽지 않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 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p159


이건 계나가 여자라서만 겪는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에 있으면 ‘진짜 직업’과 다른 것들로 나뉜다. ‘진짜 직업’을 가진 사람만 대우를 받는다. 계나는 그런 차별대우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계나가 돌아보면, 계나의 가족은 전부 ‘진짜 직업’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면서 삶을 꾸려간다. 계나는 그것이 싫다. 계나와 계나의 가족은 한국에서 존엄성을 무시받는다. 그러면 호주는 다를까.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해.” p124-125


계나는 호주에서 베이스 점프를 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다. 작가는 이 베이스 점프를 계나의 삶과 빗대어 표현하려고 한 것 같았다. 끊임없이 행복하려고 시도하고, 그렇기에 호주에까지 왔건만, ‘베이스점프’를 그녀가 세든 건물에서 하게 내버려뒀다는 이유로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녀의 삶은 본디도 그다지 희망이 없었지만, 더 절망적으로 변해버렸다. 만약, 그녀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 역시 마찬가지의 삶이 아니었을까.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어쩐지 마찬가지의 삶을 통과하는 중인 건 아닐까? 재앙이 닥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하고 빌고 있지만 이미 나 역시도 포함되어버린 삶을 사는 중인 건 아닐까. 어떻게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이 삶이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보일까? 나은 것으로 변할 수 있도록 조금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작가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계나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계나의 새로운 목표다.

지명처럼 사는 사람이 더 많을까. 계나처럼 사는 사람이 더 많을까 알 수 없다. 자기계발서의 양을 보면 두 방향 다 비슷한 것 같다. 지명과 계나의 유토피아는 언제까지 유토피아로 남을 수 있을까. 유토피아는 곧 현실의 벽에서 스스로 비웃음을 생산해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고, 꿈꾸어야만 하고,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비웃음당하지 않을만한 것일까. 하루하루가 사는 게 버겁다. 언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는 말에 찔리지 않는 삶을 살지는 몰라도 그렇게 발언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나 둘 만드는 것밖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에 안주하려 한다고 비난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라서 어쩔 수 없다면, 아주 조금씩만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란다.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여가에서도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 이런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 바보같은 일이라면, 그때그때의 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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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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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덕과 명예
도덕을 만든다, 한 국가, 혹은 공동체를 잘 지탱하기 위해 도덕은 필요하다. 이 도덕은 선입견의 영향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공정하지 않은 도덕은 도덕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도덕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로서 개인이 온전히 사회에 어울릴 수 있도록,

대부분의 일은 선의를 가진 사람을 오해하는 데서 생겨난다. 
선입견, 자아도취, 등 
나는 조지에게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 읽어보면 소크라테스는 기존 관념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관습, 관념들이 소피스트의 밥벌이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지와 오해와 악의, 선입견들이 무고한 소크라테스를 죽였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한다면서 정말 자기가 생각하는 이성적 진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은 파훼한다. 쪼개고 나누어서 옳음을 증명한다. 잘잘못을 칼로 나눈다. 마치 아이를 둘로 나누어 해결하라는 판결을 내렸던 솔로몬처럼.(솔로몬의 판결은 정말 아이를 둘로 가르라는 의도에서 내려진 것은 아니라 알려져 있으니, 적절한 비유는 아닌가?) 그렇기에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애초 소피스트들이 그토록 선입견으로 꽉꽉 들어차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소크라테스는 그렇게까지 변론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아닐 수도 있다.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인정한 것까지도, 소크라테스는 존중하고 인정했을 테니까. 소피스트들이 꽉막힌 사람이라 소크라테스를 더 몰아간 것이 아닐까. 혹은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진리'자체를 믿었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한 순수한 인물이라 여기고 있으니, 어떤 점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비판하고 싶은 것들을 비판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때때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 믿는 순수함은 그 자체로 폭력으로서 상대에게 작용하기도 하니까. 어떤 것이 답일지는,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당시 희생당한 혹은 진리에 순교한 사람으로 비추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해석이 더 적절할까? 다른 해석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공격을 받은 소피스트들의 선입견은 밥벌이가 걸려 있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너를 찌른다.' 마치 전쟁터같다. 
전쟁중에도 도덕이라는 건 필요하지 않나? 어떤 평화가 더 좋은 평화인지는 수많은 논의를 거쳐야 하고, 그 논의는 끝나지 않아야 하지만, 그 와중이라 하더라도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중요하다. 보통 전쟁중에는 평화라는 것이 어디로 숨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다르게 보이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역동하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고 믿는다. 피난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평화를 찾아 떠난다. 그러면 상대편이 적이라면서 적군을 죽이는 사람들은? 역설적이지만,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적을 죽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편은 죽이지 않는 '도덕률'을 적용한다.
스텐퍼드셔에서는 기이하게도 평화를 위해 조지가 희생된다. 조지를 위한 도덕적인 판단은 배제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조지를 제거한다. 조지는 터무니없는 고발과 변호와 증언때문에 감옥에 갇힌다. 죄가 없는데도. 앤슨 대위는 자신의 자아도취를 지켜내려고 조지를 계속 유죄로 몰고 간다. 그 일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방식을 지키는 일이고, 그가 손에 쥔 권력과 밥벌이를 지키려는 일일 것이다. 어쨋든 그들, 자아도취에 빠진 자들은 증거물 앞에서, 철저한 논증 앞에서 다시금 항복을 선언한다. 그럼에도 밥그릇은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고, 그것까지 빼앗지는 못했다.
타자가 평화의 상태에 있지 않은데 내가 평화로우리라는 주장은, 도덕적이지 않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를 억누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진정한 평화를 위한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소외된 조지가 그나마의 평화를 얻은 것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도덕적인간인 '아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다른사람에게만 평화로운 상황이 되어있는 이 불편한 상태를 바꾸려고 나선다. 그러니까, 도덕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그 사람이 진정 어떤 사람이든,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덕이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덕목이고 그건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인지시켜주는 동시에 함께 살 궁리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명예가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상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그러니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길일지도 모른다. 


마무리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아서 코난 도일', 그리고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때문에 희생된 '조지 에들러' 그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철저하게 각자 화자의 시선에서 서술되었고, 그러므로 독자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지 않으면 화자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어느정도인지 잘 살피기 어렵다. 하지만 그게 많은 단서를 가져다준다. 어쩌면 이런 서술방식은 작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완하는 소설적 장치로서 사용되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작품성을(작품 내에서 모자란 점을) 작가와 긴밀하게 연결시키지 않아도, 그 자체로 화자가 결점을 가진 존재이므로, 소설가의 결점으로 읽히지 않고 화자의 결점으로 읽히는, 그렇기에 작품으로서는 나은 조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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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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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이상의 시 '절벽'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얼마 전에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의 작품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 여행의 초반부에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만, 아버지를 찾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중인 그 순간만이 희망이다. 그 희망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은 없다. 어떤 사건도 길을 막지 못한다.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찾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너는 네 문제로 우리를 따분하게 만들고 있어. 너는 살아 있잖아. 그걸 복으로 알고 살아.” 127p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여서 서로에게 안도했는데,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로에게서 확인받고, 살아있음 그 자체에 기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과거를 잊은 척 하며, 과거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망명자들은 각자의 치열한 삶을 버텨나간다. 살기 위해 망명해온 망명자들이 모여 만들었기 때문에,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그 가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중요성을 잃은 것처럼 산다. 하지만 그들은 산다는 행위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자신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았는가?’ 사는 행위 자체에만 의미부여를 하다가 그들의 존재가치를 묻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낙천적인 세계’인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만들어 서로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했는데, 그렇게 부여한 의미가 그들의 과거에 의해, 과거가 쌓아올린 그 자신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잔인하다.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고 음식을 나누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그들은 숨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들은 그 안에서 어떤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환희에 가득 차 있었는데, 자신이 마주한 사건의 진실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다.’ 진실을 마주하고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정확히 말하면 살기 위해 잊을 수 없었던) ‘안개 속의 풍경’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 이야기를 미셀이라는 화자를 내세워 말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 미셀과 미셀의 가족에게 어떻게 투영되어 일어나는지 맞물려 보여주면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미셀은 호기심때문에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만나고, 그 이후로 자신이 겪는 사건들을 그 사람들에게 상담하면서 그 사람들과 우정을 다져간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클럽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셀의 가족 역시 역사적인 배경이 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역할이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양 그렇게 산다. 그렇기에 미셀의 가족도 좌충우돌을 겪는다. 살던 대로 사는 방식을 고수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어떤 조화점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일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재단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서, 그 조화점을 찾으려면 역사를 벗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환경 안에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졌는데, 자신의 어떤 경향이 환경 탓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애초, 그것은 쉬운 일이었던 적은 없다. 알아도 얼마나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 지 모르겠다. 그것을 뒤집는 일은 자신의 존재근거를 뒤집는 일이고, 그것은 자신이 실존하는 일일 수 있지만 동시에 실존하지 못한다는 위험에 스스로를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준거기준이 없이 인간이 어떻게 정상적인 사고활동을,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생명 그 자체, 공동체가 모든 것을 지탱하고 서서 개개인을 지탱해주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은 개인을 스스로가 지탱해야 한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 고군분투해야 한다. 실존하고 있다는 감각이 살아있음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그것을 스스로, 혼자 찾아야 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은 욕구는 늘 존재하지만, 그런 복잡한 와중에 나 자신을 어떻게 제대로 볼 수 있는 걸까?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근거를 무너뜨려가면서까지 나 자신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일은 이 사회를 파악하는 일이고, 그건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혼자’ 찾아야 한다. 서로의 이익은 상충되고 살기에 급급하여 내가 정말 여기 존재하고 있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겨를 조차 없다.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지탱할 ’희망’이 없다. 환상이 없다. 그저 나에게 그것이 너의 실존이야 라고 지칭된 어떤 명분들을 마치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는 양 받아들인다. 그 명분 안에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도 없고, 공동체를 지탱해야 겠다는 믿음도 없이 오직 ‘나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나 자신을 먹여살리는 것 자체도 공동체가 지탱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건데, 마치 별개인 양. 이미 주어진 명분만을 고스란히 따른다. 마치 미셀의 가족처럼.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거나,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늘 불안에 시달리는 스스로가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진짜 명분이 뭔지 왜 사는지 늘 고민하지만 밥벌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 고민에 치여 제대로 사는 법을 잘 모르겠다. 알았다가도 금새 잊어버린다. 오래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나에게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은 , 건강한 공동체를 꿈꾸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남을 제한하지 않는 건강한 도덕적 규율 안에서 사는 것이지만, 도대체 그 추상적인 낱말이 가리키는 실재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실재를 알지 못해 알려고 노력한다. 사는 대로 살지 않으려고, 역사가 나에게 준 명분대로 살지 않으려고, 나 자신의 실존을 굳건하게 사는 동안만큼은 지키고 살려고 노력한다. 


공산주의의 선의를 믿었던 낙천주의자, 샤르트르는 까뮈가 교통사고로 죽은 지 며칠 지난 후 이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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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와 나는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사이가 틀어진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고- 설령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작고 좁다란 세계에서 서로 멀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일 따름이다. 그와 사이가 나쁘다 해도 나는 그를 생각했고, 책이나 신문을 읽는 그의 시선을 의식했으며, ‘이것을 두고 그는 무어라고 말할까? 지금 이 순간 그는 무어라고 말할까?’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 고집스런 인도주의, 좁고 순수하며 엄격하고도 관능적인 그 인도주의 때문에 그는 이 시대의 거창하고 기이한 사건들에 맞서 의심스런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는 완강한 거부를 통해 우리 시대의 한복판에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에 맞서, 현실주의의 황금 송아지에 맞서, 도덕적인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주었다......”166p

 

비록 소설의 결말은 ‘구제불능낙천주의자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흩어져 버리는 것으로 났다. 그건 아마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건강한 규칙, 혹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일까. 살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자신을 반성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결론으로 끝나도 좋은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어떤 ‘희망’을 찾는 일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희망’은 찾는 행위 그 자체로 ‘희망’이기 때문이고, 그 희망은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찾는 것이라 믿는다. 살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이 지켜지고, 서로를 믿을 수 있고, 서로 의견이 갈라서더라도 ‘사랑’이라는 믿음 아래서 결국 “이 작고 좁다란 세계에서 멀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성능력을 지나치게 활용하면, 모든 일을 판가름하려고 한다. 판가름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일도 판가름할 수밖에 없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았는데, 그가 쓴 소설에는 그가 쓰지 않은 것도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능력으로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 감성적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조화점을 찾은 게 아닐까. 그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희망’을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조화점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작가의 가치판단이 지나치게 개입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였고, 그 사이사이 들어있는 진실들이 너무 좋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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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읽고 싶은 소설들..

 

 

 

나는 밀란쿤데라를 좋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감정을 숭배하는 소설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나는 그의 발언에 놀랐다. 소설은 어떤가 하고 읽어봤더니, 정말 잘 쓰더라. 도스토예프스키의 화자는 감정적으로 작중 인물들을 왜곡하고 비꼬는데, 쿤데라는 화자를 내세우지 않고 작가가 직접 개입한다. 담담하다. 작가랑 인물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지 않는 것 같기도.

그 쿤데라가 추천한다. '스스로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한 점도, 신기하다.

 

 

 

 

 

 

문단에서 금기시 된 사건을 소재로 글을 쓴 작가의 배짱이 대단하다. 양철북도,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한 데 얽혀 큰 서사를 이루어낸다. 그의 글로 버무려낸, 그 사건이 듣고 싶다.

 

 

>출판사 책소개 <

 

 

이념과 수치(數値) 속에 감춰진 죽음의 표정들, 단 한 측면만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는 역사 왜곡 위험 등에 대해 경고하면서, 역사의 거시적 차원과 그 알맹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필립로스가 쓴 미국의 목가를 읽고, 작가에게 반했다. 개인차원의 일을 역사적 차원의 일과 연결시키는 능력이 잘 발현된 소설이라 생각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포착해내는 관찰력을 배우고 싶다.

 오늘을 사는 나는 내가 어느 흐름에 속하여 가고 있는 지 알아채고, 발버둥치고 싶기 때문이다. 산다. 산다. 살아야 한다.

 

 

 

 

 

 

 

 제목에 눈이 휙 돌아갔다. 나는 한국이 싫다.  태어난 땅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투표했는데, 다수결로 뽑힌 정부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냥 정부 욕을 하기에는 나 역시 무지해서 어떤 대안을 못찾겠다. 그때문에 공부하려는데도, 갈 길이 너무 멀다. 이런 건 한국이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 싶으면서도, 부당하게 해를 당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얄팍한 얼음위의 자유가 참 하찮아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질문하게 한다.

 

한국이 싫어서 라는 제목을 읽는 순간, 이 작가는 한국을 좋아하는 구나 싶었다. 한국이 싫어서- ~한다. 라는 말을 기대하게 하는데, 그게 소설 제목이라는 건 그만큼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 한국이 싫어서라면서 한국 이야기를 하겠지. 작가가 느끼는 한국이 펼쳐지겠지. 읽고 싶다.

 

 

 

-- 잘 쓰고 싶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글들만 겨우 구상하고 내지른다. 별로 좋은 글이 아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적당한 글을 무미건조하게,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나는 목마른 척 하면서도 아직 덜 절박한 것이 아닐까..

좋은 문장들을 필사해볼까. 좋은 문장이란 게 뭘까.

아니면 내 사유가 아직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뚝뚝 끊겨서 그런 걸까.

이상하다. 하여튼, 모자라다. 많이.

더 많이 읽어야 겠다. 더 꼼꼼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온갖 형용사를 다 동원하여,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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