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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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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란 무엇일까? 내가 시중에서 본 자기계발서를 쓴 저자는, 일생의 일부분만 편집하여 소위 ‘성공’을 말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자기계발서의 한 유형인 위인전이나, 자서전(?)은 일생을 다룬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도,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미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애초 ‘일생’을 다루려면 어느정도 편집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떤 책도 시간을 다루면서 이야기를 편집하지 않고 쓸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시중의 자기계발서나, 위인전, 자서전 들을 읽으면 정말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을 위하여 짜여진 것 같고, 그 이외의 그의 어떤 점들을 알기는 어렵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완벽한 모습일 때도 있다. 찌질하거나, 실패작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쓰거나, 그런 사람들을 다룬 이야기의 일부분을 읽고, 무엇인가 하고 싶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그 이야기들이 내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워서 그대로 살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그 사람들처럼 ‘성공’하면 허영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각자는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그동안 반드시 ‘먹고 살아야 하고’, 그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줄 것 같은 내용이 거기 적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신 하미드의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읽고 나면, 마치 그런 생존문제를 말하는 것처럼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대놓고 말한다. 실상은 자기계발서랑 달리 뭔가 생존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당신’의 일생만이 적혀 있다. 같은 아시아에 살고 있지만 한국과는 또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당신’의 일생을 읽으면, 부자되는 법을 알게 되기 보다는 ‘당신’이 생존해온 방식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할 뿐이다. 

거창한 부제들은 신랄하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상주의자를 멀리한다」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건 삶의 일부를 깎아서 사는 것 처럼 보이기에 내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이지만, 이 시대에서 생존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까.  「폭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는다」, 「관료와 친구가 된다」, 「전쟁 기술자들을 후원한다」, 이건 대놓고 ‘더럽게 부자가 된’ 사람들을 비꼬기 위해서 쓰여진 부제같다. 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들이 왜 일어나고,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 말하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래서 다른 형식의 자기계발을 독자에게, 독자를 통해 세상에게 호소하는 것이라 본다면, 이 소설을 자기계발서라 볼 수도 있겠다.
저자도 자기계발서 형식을 차용하려고 하면서, 자기계발서라는 게 무엇인지 고민한 것 같다. 사실 누구나, 일종의 자기계발을 하려고 글을 읽는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들은 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일할 뿐이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바로 여기에 독서의 풍부함이 있다.” p106 그래서, 이 소설은 독자에게 자기계발을 유도할만큼 유용할까? 이 소설 안에서 뭔가를 건저올릴 수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교육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는 도약대이다. 이것은 비밀도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좋은 것들이 늘 그렇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해서 쉽게 다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를 향한 길에는 가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향배를 좌우하는 건 선택이나 욕망, 노력 등과는 관례가 없는 순전한 우연이다. 당신의 경우 출생 순서가 그 향배를 결정한다. 셋째로 태어났다는 사실인 즉 조만간 시골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페인트공의 조수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또한 세상을 일찍 떠난 당신 집안의 넷째와는 달리 어느 나무 밑동의 조그만 무덤 속에 유골이 돼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사실 이점이 가장 중요하다.” p40

책의 화자, 즉 저자는 ‘부자’가 되는 조건으로,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을 꼽는다. 여기서 이미, 그는 ‘부자’가 되는 것이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 그는 자기계발서라 지칭하고서,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런 식의 부정은 초반에는 잘 이루어지지만, 후반부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제는 후반부로 갈수록 과격해지지만, 후반부로 갈 수록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면모보다는 ‘당신’의 인생이 어떤 역경을 거치는지 보여준다. ‘당신’의 아내는 ‘당신’이 아내가 가장 힘들었던 때 홀대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아들이 성인이 되자 떠나기로 결심한다. ‘당신’은 뒤늦게 아내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아내의 남동생을 고용하나, 나중에는 그를 신임하게 되어 ‘당신’의 오른팔이 되기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런 ‘당신’의 행동에도 아내는 마음이 돌아서지 않아 결국 때가 오자 떠난다. 이후 ‘당신’은 전처가 된 아내의 남동생에게 사기를 당한다. ‘당신’은 늘그막에야 어릴 때 좋아했던 ‘예쁜 여자’를 만나 살다가, ‘예쁜 여자’의 죽음을 먼저 본다. 그리고 환상에 휩싸여 결국 ‘당신’도 죽는다. 

“ 이 모든 것이 이제 곧 작동을 멈출 뇌가 만들어낸 환상임을 자각하고, 그리고 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당신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인간답게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느끼며, 당신이 사랑했던 다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누나와 아들, 그리고 당신의 전처를 사랑했으며, 누구보다 예쁜 여자를 사랑했고, 이미 당신 자신을 초월했으니 흔들림 없는 용기와 존엄을 가질 수 있으며, 두려움과 경외심에도 불구하고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고, 게다가 예쁜 여자가 당신의 손을 잡고 있으니 당신은 그녀를 담고 있고, 이 책과, 이 책을 쓰는 나를 담고 있으며, 나 역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당신 속의 내 속의 당신을 담고 있으니, 이것이 그렇게 오싹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신도, 나도, 우리도, 우리 모두 이렇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를.” p230-231

그는 ‘당신’의 고통에 공감한다. ‘당신’은 더이상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과는 관련이 없다. 그 역시도 한때는 ‘더러운 부자’였고, 사회의 불합리한 점들을 이용하여 잘 벌었으나, 결국 다시 불행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처음부터 연민의 대상이었고, 중반부를 거치고  마지막이 되자 다시 연민의 대상이 된다. 고로 ‘더럽게 부자가 된 당신’은 욕을 먹지 않는다. 여기서 자기계발서를 비꼬려고 했던 초기의 목적을 상실한 듯 하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당신’은 자기계발서에 등장할 만한 인물이 아니고, 악랄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행동을 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각기 행동을 하는데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처럼 폭력을 사용하고, 전쟁기술자를 후원하고, 부채를 경험하고.. 그렇기에 그런 행동들이 각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독자에게 다가오기 보다는, ‘당신’의 일생 전체를 보게 된다. 전체 골격은 ‘당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도중에 열심히 이 사회를 비꼬려는 것처럼 짜여져 있으나, 그게 ‘당신’의 삶과 아주 절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삶은 비판하려는 것만큼 악랄하지도 않다. 그럴 의도도 전혀 없이 주어진 시스템에 의해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이야기 흐름만 따라가면, 딱히 시스템에 의해 ‘당신’이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라, ‘당신’에 감정이입하고 보는 독자에게는 아이러니가 돋보이는 것같지도 않다. 시스템과 개인이 서로 맞서 싸우고 있는 대립구도도 아니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를 비꼬고, 이 사회를 비꼬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작가가 소제목이 달린 내용을 시작할 때마다 붙인 자기계발서에 관한 사유들은 독특하고 재미있었는데 그게 ‘당신’의 이야기와 완전히 잘 버무려졌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당신의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평범한 일생’은 고단하다. 누구의 잘못도 묻기 어렵게, 그는 열심히 살고, 끝을 맞이한다. 평범하게 살다 죽었는데, ’당신’의 끝이, 끝은 누구에게나 오는 당연한 것인데도 새삼 자꾸 돌이켜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는 ‘끝’을 이야기하지 않고 끝난다. 일생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이 중요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까지, ‘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어떻게든 살려고 하다가 무엇을 했든 간에 결국은 죽는다는 점. 그것 만큼 이 소설에서 내게 당연하고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다. 비참하지 않은 노년과 죽음이었기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맞은, 딱 그정도의 죽음은 나도 꿈꾸고 있던 죽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삶을 살았든 그것과는 무관한 죽음이었기에, 죽은 이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점이 충격이었고, 새삼스레 ‘당신’의 일생이 다루어진 소설이라는 점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다시 내 삶을 돌아보듯 ‘당신’의 일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로서, 작가의 의도도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 소설은 그렇기에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잘 쓰여진 자기계발서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야기에 거리감이 조금 줄어들면 더 좋겠지만, 기획할 때 의도치 않았을 것 같은 부분도 건저낼 수 있도록 이야기가 흘러가버린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살아있는’소설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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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캐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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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란 캐리가 도시로 와서 성공한 삶을 쭉 따라 서술된<<시스터 캐리>>는 번역된 책인데도 쉽게 읽힌다.  아마 번역이 복잡하지 않은 까닭 중 하나는, 원문 문장이 쉽게 쓰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묘사가 복잡하지 않다. 작가가 나서서 인물이 개략적으로 어떤 맥락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시하고, 인물의 행동은 그 다음에 표현된다. 인물들이 하는 행동이 꼬여있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도대체 왜 인물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몇번이고 곱씹어야 인물 구도가 머릿속에 들어오는데,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그린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각들을 하는 인물들이라,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게다가 인물이 품고 있는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익숙하다. ‘안락함’, ‘풍족함’, ‘부유함’, ‘허영심’. 남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비교하고, 노동하고, 좀 더 안락한 집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즐겁게 살고 싶으면서도, 풍족하게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들. 그게 꼭 나쁜 건 아닌데, 욕망을 추구한다고 해서 만족과 연결되는 것은 또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러기 위해 그저 끊임없이 노동하고 저축하고 빚을 갚고, 어느새 그 삶 자체에 길들여져 있다. 그들은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삶을 하루하루 이어나간다. 또 누군가는, 이미 주어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그런 보상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쉽게 주어지기에, 만족을 모르고 산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은 세계에서 산다는 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와, 다른 시대와의 차이점이 아닐까.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에게나 길이 열려있게 된 것이 온전히 자본주의의 덕택이라 하긴 어렵겠지만. 또 얼마나 많은 피가,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해 뿌려졌던지. 

현대적 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은, ‘캐리’의 입장에서 ‘캐리’가 욕망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에게 지워지는 마음에 부담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가독성을 높이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캐리’라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인물이 중심에 서 있는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에, 사회의 이면보다는, 욕망을 추구하는 ‘캐리’가 더 많이 보인다. 이미 내가 현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추구하고 있을 욕망이 ‘캐리’에 의해 대리만족이 된다. 마치 매번 같은 줄거리의 막장드라마를 매번 챙겨 보는 마음이나, 비슷한 플롯의, 인물 이름만 다른 판타지 소설을 읽는 마음과 닮았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와 판타지 소설과 다른 점은, 이 소설은 욕망을 실현하는 주인공을 끝까지 몰고 간다는 점이다. 캐리는 여배우로 성공한 다음 다시 불행함을 느낀다. 


홀로 앉아 있는 캐리는, 사고하기보다 느끼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다보면 잘못된 길로 들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비록 여러 차례 환멸을 겪었지만 캐리는 여전히 꿈이 현실이 되는 평온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임스가 더 나아갈 길을 가르쳐주었지만, 그 길로 나아간다 해도 그 길 너머에 또다른 것들이 잇달아 그녀 앞에 놓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세상이라는 언덕의 꼭대기를 물들이는 기쁨의 광채를 영원히 쫓게 될 것이다. 

아, 캐리, 캐리여! 아, 맹목적으로 분투하는 인간의 마음이여! 그것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한다. 아름다움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그 아름다움이 고요한 풍경에 홀로 울려퍼지는 양의 종소리건, 묵가적인 풍경 속의 아름다운 빛이건, 지나치는 눈 속에 엿보이는 영혼이건, 마음은 그것을 알아보고 응답하며 뒤따른다. 발길은 지치고 희망은 헛되어 보일 때, 바로 그때 가슴이 아파오고 갈망이 솟아오른다. 그때에야 비로소 싫증을 내지도, 만족하지도 못함을 알리라.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서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이런 문단들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문단을 통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단계 욕망을 실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허망함을 말한다. 욕망은 끝없이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을 뒤로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인간은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만 욕망을 바라보는 한, 단 한 순간도 만족한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렇다 해서, 시어도르 드라이저가 이 소설에서 ‘만족’을 바람직한 조건으로 설정하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를 위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세밀하지도 않아서, 나머지 빈칸을 독자에게 채우라고 내버려 두는 것 같기도 하다. 

드라이저는 캐리를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 전형으로 두고 그려낸 것 같다. 현대의 인간상과 많이 닮았다. 성공할 즈음엔 이기적으로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는 자신의 이익보다 뒷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사회적 구조. 그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위해 살았고, 결국 성공하지만, 진정함을 나눌 친구 한 명 사귀기 어려운 삶.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성공을 부러워할 테지만. 

작가의 서술이 처음 부분에서는 많이 눈에 거슬렸으나, 캐리의 맥락을 따라서 읽다 보면, 작가의 서술이 그다지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그 시대에 읽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서술이, 현대에 와서 거슬리는 부분들은 있었다. 이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라든지. 남녀의 성차에 대한 발언들.  캐리의 양심을 신의 목소리라고 묘사하는 부분들. 제 잘난 맛에 취해 가장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있는 줄도 모르는 중국의 황제라는 묘사. 요즘 시대에 들었다면, 시대착오적이라 말할 법 하다. 요즘 누가 ‘이성’만을 강조할까. ‘이성’은 현대에 와서 만능 통치약이 아니다. 게다가 이 책에서 드러난 남녀 성차에 관한 발언은, 내 입장에서는 관습적인 행동일 뿐인데 마치 남녀가 본디 성차를 가진 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맥락에 관한 따로 언급 없이 적혀 있어서, 자연스럽다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소설들은 묘사에 ‘신’을 맥락 없이 언급하지는 않을 테다. 또 중국 황제만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나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시대에 쓰여진 소설이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도 사고하기보다 느끼는 사람이 빠지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끝난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작가도 뭔가 대안을 제시하고 싶지만, 그 조차도 대안을 모르고, 문제가 해결되면 그 뒤에 문제가 발생하리라 여기기 때문에, ‘몽상’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소설이 별로 위력이 없는 시대에, 고대 그리스 - 비극이 유행하던 그 시절처럼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이 소설이 쓰여져서 출간될 당시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을지, 궁금하긴 했다. 

작가가 드러낸 문제의식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욕망을 쫓는 캐리처럼, 소설도 욕망을 쫓으며 읽다가 결말까지 오는 사람이 더 많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다. 소설 구운몽도 양소유의 욕망을 따라 죽 그린 서사이고,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음을 얻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힌다. 다만 그런 방식이 작가의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공유할 방법인지는 내가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 시대에는 이 소설을, 어떤 방향으로 읽을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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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4-0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랄까... 캐리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방향성을 잃은, 막연한 캐릭터라고 해야할까요? 그러니까 빈 껍데기 같은거요. 화려한 무대에서 환호받는 자신에 취하지도 않고, 그 인기로 얻은 명성이나 부산물들에 좌우되지도 않는 어찌보면 지난 교육(드루에, 허스트우드와 살면서 얻은 교훈)이 아주 잘 되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고요. 에임스도 캐리가 감정을 고스란히 담는 그릇 같다는 비유를 썼던 것 같은데 암튼 신기한 캐릭터였어요. 계속 심성이 고왔다 이런 표현이 나오고 친구한테 나름 의리도 지키고 하는 걸 보면 사이코 같진 않았고요. (제 생각엔요..) 남자들의 관계에서도 상당히 수동적이랄까, 그러면서도 수동적이지 않은 암튼 당시엔 모럴이 없다며 손가락질 많이 받았겠다 싶더라고요. 잘 읽었습니다.

우끼 2016-04-12 20:06   좋아요 0 | URL
앗, 제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썼었군요.... 조심히 지우고 싶어지네요 ㅠ(그래서 지웠습니다.) 저는 허스트우드가 쓸쓸히 죽어간 것이 생각나서, ㅠㅠ 그 점을 생각하면, 캐리가 잔인하게 느껴지더라구요. 하지만 그것만 잘라놓고 보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도 캐리가 그렇게까지 나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갈팡질팡하는 모습보다, 욕망을 쫓는 모습에 주목했었습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점이 아쉬웠고, 그게 잔인하게 보였지만, 그정도 잔인함을 누구다 다 행한다는 점에서 잔인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현대사회를 사이코패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라고 지칭하는 사람도 있고 하니, 그 측면을 이렇게 본다고 해서 뭐라 하기 어렵겠지만요.. 그렇다고 캐리의 다른 면모를 무시해서는 곤란하겠지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쓸때는 몰랐는데, 단어가 확 튀어서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캐리가 방향성을 잃은 막연한 캐릭터라서, 더 소설적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향성을 잃고 헤메는 현대의 우리와 비슷하여,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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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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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를 읽고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소설은 작년에 읽었다. 책장을 덮기 전까지, 화자가 겪는 소용돌이에 나도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화자가 그 걸음을 쫓게 되는 이야기로 귀결되는데, 그 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다만 <<익사>>가 소설인지,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실재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사람들이 말하길 '조코 코기토'는 작가의 페르소나 격인 인물이라 하고, 작가에게도, 화자에게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 너무 좋다고 느꼈기에, 되려 편견 중 하나에 의문을 품었다. 작가는 자신이 품은 의문이 담긴 모티브를 소설에 녹일 수는 있지만, 실재 작가의 삶을 그대로 적으면, 그건 소설이 아니게 된다고 여겼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하기에, 이번에 읽은 오에 겐자부로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중 초기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삶을 소설의 형태로 엮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단편이 다 의미있다고 느꼈다. 물론 작가가 처음부터 어떤 형태로든 완성된 소설을 느끼고 쓴 것보다 응집력이 부족하다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소설도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중기, 후기 소설들은 그에게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도구 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도대체 어떻게 ‘반핵, 반전’을 소설로 녹여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허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그가 겪은 자잘한 일들을 엮어낸 그의 소설엔, 어느 순간에 그가 바라고 있기 때문에 반전, 반핵의 의미가 들어갔다. 예를 들어, 그가 만난 어떤 인물이 그에게 반핵 이야기를 강연으로 해달라고 요청한다든가, 그 와중에 반핵 운동의 세부 내용이 차이가 나서 요청이 취소되고, 또 다른 일행을 만나서 반핵과 관련된 또 다른 유형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든지 등등. 반핵을 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가는 화자가 겪는 일화들을 통해서 반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이건 주장문도, 수필도 아니고 자잘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엔 맥락에 맞는 어떤 문장들이 마치 맥락 바깥으로 나와서 사람을 겨냥하는 기분이 들어서, 읽다가 놀라곤 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에는 이런 문단이 나온다.


“우린 개를 죽일 생각이었지.” 내가 애매하게 말했다. “그런데 도리어 우리 쪽이 살해당한 셈이네.”

여학생이 미간을 찡그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피곤에 지쳐 웃었다. 

“개는 살해되어 쓰러져 가죽이 벗겨져 나가지. 그런데 우리는 살해되어도 이렇게 돌아다녀. 

그러나 가죽은 벗겨졌다는 거지.” 여학생이 말했다. 

  p26<기묘한 아르바이트><<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이 문단을 읽고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개를 죽이는 아르바이트를 잠시 했을 뿐이고, 돈을 주기로 한 사람이 불법으로 개고기를 고깃간에 팔아넘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을 뿐인데,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하다니. 그리고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개에 물려 병원에 가야 하는 기묘한 상황에서 잘린 ‘나’, 잘린 상황을 ‘살해’당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었을까. 이 소설의 ‘살해’라는 비유 역시 무척 뜬금없이 느껴지는데, 어쩐지 맥락에서 아주 벗어난 느낌은 아니다.  그러나 대화 하는 발화 당사자들 끼리의 이야기 인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 바깥의 독자를 겨냥한 말 처럼 들린다. 


한편 중기 단편인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도전적으로 항변한다. ‘아무도 남을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 남을 자기 자신 만큼 존경하지 않아요. 또한 “사상”으로 그보다 위대한 것을 알 수 없어요. / 그러니 아버지, 어떻게 내가 나 자신 이상으로 당신이나 형을 사랑할 수 있어요? 문간에서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작은 새만큼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사제가 분노하여 소년을 끌어다가는 악마라고 고발을 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했다 일찍이 많은 사람이 화형 당한 거룩한 곳에서, 울고 있는 부모들의 눈물은 헛되다 이런 일이 아직도 여전히 엘비언 벼랑에서 행해지고 있을까?’ 

p433-434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그리고 이 이후에, 아들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비탄에 젖은 상태로 가족들에게 겁을 준 상황이 나온다. 그리고 화자는 아들의 비탄을, 자신이 존경하던 H의 비탄을 보았기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다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앞서 말해진, ‘아무도 남을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화자가 겪은 몇가지 자기 반성적인 이야기로 뒤집는다. 


나는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 내가 집에 없는 동안 한없이 난폭했다는 아들의 눈이 발정 난 짐승이 충동이 이끄는 대로 갖은 난음을 다 하고도 그 여운에서 풀려나지 못한 혹은 그런 짐승에게 내부를 물어뜯기고 있는 것 같은 차마 마주 볼 수 없는 눈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눈곱 같은 누런 광채가 형형한 그 눈에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던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이었다. 

…그러나 늦게 나마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감각으로 아들의 눈에서 비탄을 읽어낼 수 있었던 건 뉴델리 공항의 바에서 H씨의 눈에 일순간 드러났던 ‘비탄’의 정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p452-453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초기 단편들은 상징들을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일본의 현실을 비판한 단편들이 많다. 하나의 상징이 작품 마지막까지 단서를 품고 통과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이 제일 처음에 실려 있는데, ‘개 짖는 소리’가 배경도 설명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학생들은 개를 죽이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개를 죽이는 데 참여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전쟁에 참여한 일본을 빗대어 표현한 느낌이 든다. <남의 다리>라는 작품에서는 말로만 혁명을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영달을 추구하게 되는 이기적인 인간상이 나오는데, 그 역시도, 일본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불안한 사회 현실 가운데 기댈 곳을 찾지 못해서 적극적으로 ‘우익’이 되는 <세븐틴>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화자는,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들 모두,  인물들이 각 집단 안에서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거기에서 어떤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어떻게 인물들이 각자의 믿음에 배반당하는지, 어떻게 순수한 사람들, 혹은 생명이 아프게 되는지 드러난다. 이 아픔들을 통해,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기, 후기 단편들은 그에 비해 훨씬 개인적인 삶 속에서 아이러니들을 찾아내고 상대를 비판하든, 비판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뚜렷한 목적은 초기 단편들보다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고, 어찌 보면 그렇기에 상징이 이끌고가는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훨씬 복잡해져서, 무엇을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지 모호하지만 감정이 마음 안에서 불러일으켜진다. 어떻게 살고, 죽을 지 고뇌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 거기 있다. 그 투쟁과 통찰 속에서 자꾸 나를 비추어보게 된다. 


중,후기의 소설들이 일본 문학 장르 중 ‘사소설’에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고뇌가 지난하고 처절하기에, 그가 그의 삶의 주제에 사로잡혀 평생 그것만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하더라도 나는 이해할 것 같다. 어차피 독자인 나로서는 어디까지가 작가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허구인지 구분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양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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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16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증기의 레인트리 연작이나 이요를 다룬 이야기들은 맬컴 라우리의 소설이나 블레이크의 시들을 읽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 작품들을 읽지 않고서는 아마 오에의 이 중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아무리 어떻게 노력해도 반쪽 그 이하의 이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한가지만은 그래도 어렴풋하게 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위의 우끼님 말슴처럼 오에가 끊임없이 글로서 투쟁과 통찰을 해나가는 인물이라는 거죠. 말씀하신 최근에 나온 <익사>를 봐도 현재에 안주해있으려는 의식 같은 것은 오에에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는 않아도 그의 작품들이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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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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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차별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하는 사회적 현실이다. 그 슬픔은 아랫대로 내려가고, 물려받는다. 사회에 기대어 살아야만 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는 현실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자급자족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럴 능력을 박탈당했는가. 

로레타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기 전에도,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과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난을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꿈을 꾸기 위하여 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도 술병이 나 있다. 열심히 일할 만한 자리도 없거니와, 일한다 해도 상황이 극복될 만한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오빠는 돈때문에 밖으로 나돌고, 로레타가 처음으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일어나보니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빠가 그를 죽였다고 믿는다. 그녀를 사모해왔던 경찰이 그 시체를 보고서, 로레타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고, 그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녀와 섹스를 한다. 그 이후 그녀는 그와 결혼한다. 그가 그녀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가 나타났기에 자신의 정서적 충격과 혼란을 모두 해결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로레타는 그날 이후 자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감정에 무감하게 된다. 일상 속에 스며든 폭력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폭력을 당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내가 폭력을 행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하루를 버텨내고 살아갈 뿐. 그건 정말 ‘돈’ 때문일까. ‘돈’ 이외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돈’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회적 환경 때문일까.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시스템 때문일까. 어떤 상상력도 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그들은 삶이 닥쳐오는대로 그대로 그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로레타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돈이 없는 자에게 돈이 없어도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돈이 없어도 인간다운 삶을 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완충작용을 할만한 시스템도 없다. 어딘지 모르게, 생계 수단은 전부 ‘돈’이고, ‘돈’이 없거나 벌기 힘든 사람은 여성인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지, 의문을 품을 겨를조차 없어 보인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면서 결혼하고 하는 생각은,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것으로 무엇을 살지 꿈꾸는 것 뿐이다. 그녀의 딸중 하나인 모린도, 오로지 ‘돈’을 위해서 남자에게 몸을 파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돈은 돈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지, 무엇을 하고 싶어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돈을 모아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이라 여긴다. 실재로 그녀는 처음에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어했으니까. 하지만 로레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모린이 어떤 일을 해도 싫어했다. 그녀의 손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의존하고, 그녀에게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얻고 싶어했다. 그녀의 삶은 통제되지 않았기에, 모린을 통제하여 얻을 수 없는 충족감을 얻고 싶어했다. 원하는 것은 질서에 맞게 행복한 방향으로, 상상되지 않고, 누군가가 원했던 것을 자신이 원한다고 착각하거나, 질서를 어그러뜨려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통제한다고 착각하면서만 가능했다. 구조가 바르지 않으면 수정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다. 로레타의 이런 혼란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자란 로레타의 아이들은 로레타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겉모양으로는 다른 삶을 이루어낸 것처럼 보이며, 로레타와 달리 그것을 실재적으로 만드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줄스는 질문한다. 


“평범한 일상과 폭력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중략) 모두들 그것을 살아내고 또 살아내고, 도무지 끝나질 않아요. 갈 곳도 없고, 도시 한복판에 공터도 없고……도시 한복판에 공원이 있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공원은 불에 타지 않아요!(중략) 그건 상처를 입히지 못해요. (중략) 강간범과 강간 피해자가 동틀 무렵에 마침내 폐허에서 일어나 각자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식당을 향해 걸어갑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열정은 오래가지 않아요! 열정이 다시 찾아오기야 하겠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p698<그들>


사람들이 불을 지르고,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을 한쪽에서는 ‘폭동’이라고, 한쪽에서는 혁명이라 부른다. 줄스는 왜 저렇게 말했을까? 누가 적이고 적이 아니고, 구분하는 게 중요한 게아니라. 각자에게는 각자의 ‘일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저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누구에게도 그들의 삶을 침범당하지 않고. 모린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결혼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들을 외면한다. 그런 모린에게 줄스가 와서 말한다.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중 하나가 아니야?”p706


모린은 줄스의 말을 외면하지만, 줄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던 것에 냉소를 가지고, 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냥 살아있고 싶은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있고 싶다.”는, 인간이라면 모두 가진 소망을 실현하고 싶어서,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환경을 외면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걸 알기에 줄스는 그렇게 모린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정말 읽기 힘들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잔인한 부분은 오히려 가볍게 처리되었는데도. 일단 분량과,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뒤틀린 내면묘사때문에 읽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며 다시금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헷갈리지 않고 바르게 잘 살수 있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시간내서 천천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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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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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이라는 소설에서 말해진 불행은, 모두 여호와 때문에 벌어진 일 같다. 여호와는,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위하지 않고, 오로지 신의 관점에서 인간을 판단하고 벌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책에서 말해진 카인은 열심히 일했고, 공물을 바쳤는데도 여호와가 그것을 거절했고, 그래서 아벨을 질투하여 죽인다. 그리고 그 책임을 여호와에게 돌린다. 


주가 내 생명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우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를 시험하는 문제였다. 주꼐서 직접 창조한 것을 왜 시험한단 말입니까. … 주에게 내가 아벨을 죽이는 것을 막을 자유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다른 모든 신들과 공유하고 있는 무오류성에 대한 자부심을 아주 잠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또 아주 잠깐만 진실로 자비를 베풀어 겸허하게 제 제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카인 39p


책에 나오는 여호와는 카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카인에게 표식을 준다. 그 표식은 카인이 아우를 죽였다는 증거이자, 여호와가 신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자, 그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부터 땅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돌게 된다. 그 이후, 카인은 구약성경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관여하게 되고, 결국 책의 마지막에서 신의 책임을 묻기 위해 노아의 방주는 무너진다. 


나는 책의 후반부로 갈 수록 카인의 행동, 말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가 묘사하는 여호와는, 강대하면서도 강대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에게 충성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하여, 하지 않아도 될 시험을 하고, 그때문에 인간들은 죽고 고통받지만 누구에게서도 그 보상은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일들에서 ‘여호와’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우리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곁에서 우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옆에 있지만, 결국 그 자신의 힘을 시험하는 대상인 것으로 이 책에서는 묘사되는데, 그건 ‘전지전능’하여 더 필요한 것이 없는 신이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끊임없이 ‘인정’을 필요로 하고, ‘인정’이 없이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건 인간처럼 보였다. 이 책에서 불리는 여호와는, 자비롭고 자애로운 신이 아니다. 예수처럼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미는 신은 아닌 것이다.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으로서 껴안는 신은 아닌 것이다. 왜 이렇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다를까? 성경은 신이 쓴 것이라 지칭되지만, 사실은 그 책을 쓴 것이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고서는 세상을 견딜 수가 없지만 ‘신’이 있고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자꾸 겪기 때문에 ‘신’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나치게 주관적인 여호와의 입장을 카인을 통해 대면하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러면 카인의 논의가 무의미해진다. ‘신’은 더이상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진 ‘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되, 타자의 입장도 자신의 입장만큼이나 최대한 대변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니까. 신에게도 기댈 수 없고. 실재로, 우리가 죽든, 진보를 겪든, 퇴보하든, 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카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똑같이 인정을 원하는 존재들이, 한 쪽은 엄청난 힘을 휘둘러서 인정을 강제로 얻어낼 수 있고, 한쪽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만, 인정을 겨우 받아낼 수 있는 거라면, 이건 애초 시작부터 불공정하다.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모든 행위들에 반하는 사건이다. 상황이 이런 것을 믿으면,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수동적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데 실상 삶을 살아보면,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일들이 많다. 신이 실제로 있든 없든, 그건 나는 증명할 수 없고, 그렇기에 알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내가 설계한 일들이 설계한 대로 된 적보다, 그렇지 않은 적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모두 불공정하다고 여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도 한켠에 가시지 않는 분노가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런 인간의 운명에 대해 너무도 화가 났던 게 아닐까. 정말 신이 있다면, 당신이 당신의 책임을 좀 알라고, 인간이 이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는 건, 당신 때문이라고, 신에게든, 운명에게든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이렇게 전면에 나서서 자신이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주는데도 책이 흥미롭고 공감이 간다고 느낀 점은 처음이라, 역시 소설은 잘 쓰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앞으로 나서서 소설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못 쓴 소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작품을 읽는 게 그 작가의 주장을 읽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 거라는 생각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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