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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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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글쓰기를 읽었다. 그 자신감이 불편하다. 책을 덮고 나서 더더욱 불편해졌다. 나는 소설이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상에 상상력을 더하는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에 작가의 가치관이, 세계관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객관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작가가 발견한 세계의 진실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을 상상해도, 더 깊숙히, 아주 깊은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온 소망이 담겨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이야기에는 이야기 바깥에서 스며든 꿈이 필요하다. 이 책 어디에 그 꿈이 있는지 나는 찾지 못했다. 고발하고,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마치 그것이 객관이라는 듯 너저분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왜 사는가? 이들은 왜 살아 숨을 쉬고 먹고 일하고 잠을 자는가? 작가는 이 인물들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그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작가가 더한 것은 사실에 덧붙인 상상력 뿐인가? 작가의 철학은?

사람에게도 때때로 쥐구멍이 필요하다. 물러설 곳이 없는 공간에서, 몇 배는 더 악랄해진다. 자폐적인 섹스를 반복하고, 승리를 만끽하며 자리를 보전하려는 삶을 이들이 계속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미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작가는 진보진영을 까려고 한 것인가? 보수진영을 까려고 한 것인가? 왜 그들이 보수가 될 수밖에 없는지, 왜 그들이 댓글부대를 이끌어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는지, 그들의 내면을 파고들어서 더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아무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럴듯한 인물들이지만 살아있지 못하다. 아직 살아있지 못하다. 특히 그 안에서 여자는 철저히 대상화되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못하다. 작가조차도 인물들을 쓰고 버린다. 그 안에서 자신을 보전하려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처럼. 그들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작가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책은 비난해야할 한 쪽 면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좋은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하는 표준같은 게 있을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로,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문학이다. 왜 이상한 것처럼 보이는 저들이, 나와 같은지 체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희망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어서, 희망을 말해야만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인물에게 몰입하여 옹호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거리를 두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인물의 곁에서, 작가가 최대한의 통찰력을 발휘하여, 드러내고 말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이미 알거나 상상하고 있는 것 너머에 있는,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서사의 힘으로 소설이 되었고, 이미 출간되었지만, 이 이야기가 조금 더 생명력을 갖기를 원하는 나로서는, 이 이야기가 이대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영화같은 빠른 서술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다운 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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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25 0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가와 소설가는 분야 중에서 제일 근접하다고 생각해요. 인간과 환경을 재구성하는 그 방법이나 기술로 봐도. 그들은 자신이 파악한 원인으로 그 수많은 것들을 해석하고 분류하고 배치하죠. 그것은 그가 보는 시대이기도 하겠으나, 그 자신이 시대에 속한 방식을 보여주죠. 너무 가까이 가면 편협하거나 단순하거나 오류가 되기 쉽죠. 자신의 능력을 믿고 글을 쓰고 여지도 없이 재단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끝까지 모를 수도 있고 너무 뒤늦게 알 수도 있다는 게 언제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강명 작가에게서 계속 느껴지는 아쉬움은 `거리두기의 실패-이성적이라 생각하겠지만 매우 감정적`입니다. 자기 분석에 빠져 있단 느낌 또한.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뛰어넘은 작가, 철학자들도 있다는 게 희망이겠죠. 하나의 세기와 싸웠던 니체는 참 대단했다 싶어요. 끝이 그리 되어 안타깝지만...

우끼 2016-01-25 10:57   좋아요 1 | URL
새삼 소설 안의 인물들간의 관계에서 조차도, 끊임없이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면서 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개척하기를 바라듯...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관계가 되려면, 왜 이 사람이 이렇게밖에 행동을 못하는지 이해하고, 나 역시 왜곡된 방식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도 바라보면서, 그것을 넘어서서 나와 그 사람을 바라봐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장강명작가의 불편함을 지적하는 제 말하기 방식과 태도도, 그와 닮은 것 같아서 글을 올리기 많이 망설여졌는데 더는 리뷰를 미룰 수가 없어 올렸네요.. 그래서 더더욱,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고민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소설이 확실히 어떤 지점에 멈춰서다보니까, 일종의 관찰에 머무르고, 관찰 이상의 성찰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대로 심지어는 인물을 쓰고 버리는 듯한 느낌마저 주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 찻탓캇을 바다에 던져버리기 전에 그에게 물었어야 했죠. 왜 그랬어, 왜 여기까지 왔어,라고 그 왜를 집요하게 캐물었어야 하는데, 그런 것에 작가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국이 싫어서> 같은 소설에서도 계나에게 조금 더 물었어야 하고요. 너는 왜 여기 호주까지 와서도 행복하지 않지?,라고요.

아무튼 저는 장강명 작가의 이런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장점도 분명히 있는 작가라고 봅니다. 다만 그런데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이런 식의 소설 작법이 단지 미숙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함에도 다른 어떤 것을 노리고 의도한 것이라면..조금 우려되기는 합니다만.

우끼 2016-01-29 01:13   좋아요 1 | URL
저도 그게 참 아쉽습니다. 시사적인 중대한 문제를 잡아내는 눈, 그것을 풀어내는 서사, 플롯 모두 훌륭한데, 그것을 드러내는 문장이, (어떻게 보면 사유가) 너무 앙상합니다.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걸 이성적으로 치우쳤다 말한다면, 감정이입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적당히 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가 작중인물에게 갖는 연민이 없습니다. 중립적인 입장에 서려면, 그 사람의 편에서도, 그 사람의 반대편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사실을 르포처럼 드러내고서, 그 한계 이상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넘어서는 게 연민 혹은 슬픔이라는 감성이라 보고 있습니다. 단지 폭력으로 쭉 밀고 나갔기 때문에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절실히 하고 싶었던 말이 제외된 채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 아쉬웠습니다. 저는 그게 혹시, 기자로서 오래 생활했던 탓에 생긴 습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전달하려고, 물러서서 글을 쓰는 습관?... 감정을 객관으로 포장한다고 표현해야 할까요...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좀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것 같아요.
 
[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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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끄트머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아래 리뷰는 책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몰락해가는 헌드레즈홀에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무엇이 감추어지고 드러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화자인 페러데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헌드레즈에 집착한다. 페러데이의 서술이 객관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의사인 자신의 직업상 누군가에게 비밀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것을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성직자에 비유하여 어떤 자백을 받아내는 모습이라든지, 그 자백을 이용해 로더릭이 겪는 일을 정신이상으로 치부하는 일이라든지.. 실재로 이 저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공포만으로 모든 일이 조작되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범인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저택을 가지려고 모든 것을 조작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그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 닥터 페러데이다. 그는 저택을 살 만큼 부자도 아니고 능력도 없지만, 야망에 가득차 있다. 그것을 헌드레즈홀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손쉽게 메우려고 한다. 게다가 책 표지에 적힌 소개말로도 이미 그가 범인이라는 점들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으니,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만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마련한 반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저택의 ‘리틀 스트레인져’가 닥터 페러데이라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닥터 페러데이가 어느정도 그 일에 기여했으리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책의 묘미는, 그가 어디까지 개입한 범인일지, 혹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할지 추측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욕망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지 살펴야 할까. 원했으나 가질 수 없다. 혹은 몰락을 원하지 않았으나 몰락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닥터 페러데이와 에어즈가가 이런 점에서 비슷한 인물들이라 이들이 교차점에서 만난 게 이 책이 묘사한 부분이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거나, 공포에 떨거나, 더더욱 욕망에 매몰되어 욕망만을 쫓거나, 어떤 아비규환이든 소환해내는걸까.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에어즈가 사람들은 돈이 없기에 헌드레즈 홀의 땅들을 하나 둘 처분하고, 수많은 고용인들이 청소하고 보수하던 저택에는 하녀가 한 명 있으며, 유일한 수입원인 농장에서 귀족이었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고용된 사람과 일해야 했다. 깨진 컵들은 이어붙여서 사용하고, 몇개의 방들을 제외하곤 먼지가 쌓인 채 빗물이 샌다. 관리가 되지 않는 헌드레즈홀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을 묘사한 것을 읽으면서나는 몰락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에어즈가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런 외부적인 몰락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뻣뻣하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을 구분하며, 비슷한 집안이라 판단한 곳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페러데이는 아직도 같은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욕망을 헌드레즈홀에 사는 에어즈가의 유모 자식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헌드레즈홀에 고용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페러데이와 같은 욕망을 표출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급에서 오는 차이, 무관심 그는 욕망 그 자체에 이끌려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하다. 케럴라인을 사랑한다면서 정작 케럴라인이 무엇을 바라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그녀와 결혼해 그가 가지게 될 지도 모를 저택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나 그 저택을 가진 이후에 관한 계획을 들어보려 해도, 거기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일단 욕망이 실현되면, 자신의 지위도 올라가고, 갑자기 돈도 생기는 듯, 어릴 적부터 키워온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의사가 되는 건 덜 중요해진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수하면서 키우는 야망보다, 눈에 보이는, 어쩌면 허영을 더 손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으로 헌드레즈 홀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케럴라인 역시 페러데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 듯 페러데이를 보지 않고  집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궁리만 한다. 한때 페러데이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힘든 순간에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통해 저택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가 계급적 지위를 버리려 한 것인지, 그것도 사실 이 소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닥터 페러데이에게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방안을 사귀는 동안 명확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닥터 페러데이가 표출한 저택에 대한 욕망, 계급적 욕망 때문이었을까. 사랑이 보은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러면 이들이 행복하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이 필요했을까. 

결국 에어즈가는 누군가가 불씨를 지핀 공포에 물들어 하나 둘 미치거나 죽는다. 이미 몰락의 예감때문에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공포는 어쩌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까. 이 소설에서는 단 한명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있더라도 묘사되지 않는다. 어딘가 모두 불만족스러워한다.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미신에 기댄다. 자신이 바랐기에 결혼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도 나온다. 그러면,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세월의 흐름을 잘 슬퍼하고 흘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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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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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나는 입을 열어 당신을 부른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저 쪽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온다. “지금도 여기 있어요,” 아직 서로의 곁에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의 존재가 있기에 내 존재가 의미가 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듯 당신도 나를 의지하기에 나는 힘이 난다. 존재가 존재에게 존재만으로 온기를 전하는 일은 위대하다. 서로가 없다면 세상에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은 물이 되어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스며들어 온 이 온기를 뿌리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새 고스란이 몸 안에 흘러 핏줄기 사이에 줄기줄기 뿌리내린다. 어느 무엇도 이 순간을 갈라놓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뿐. 서로의 존재를 확신하는 우리들만 남아서 다시 서로를 확인하고 쓰다듬는다. 

이 위대함이 없이 우리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가? 미치지 않고 세상에 살아남은 게 용하다는 말이 그릇된 말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 이유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정합적인 과학정보만 진짜 취급하느라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곁을 나눈 사람 뿐이다. 그런데 곁을 나눈 사람과 함께 잘 살다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지? 그 사람은 나와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사람과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어떻게 파악해야 하지? 세계가 전쟁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복수심에 가득차서 서로를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 둘만 곁을 지키며 잘 살 수 있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나와 당신 뿐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내 곁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위대함을 쫓아야 하는가.


『파묻힌 거인』에서 엑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암용이 내뿜는 숨 때문에 안개가 세상을 뒤덮어서, 그들 자신도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닥쳤던 전쟁을 잊어버린다. 부부는 그 기억을 되찾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당시엔 판가름하지 못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 망각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증오심을 기억하고 물려주기를 바란다. 작가는 이것을 동화처럼 그려낸다. 가웨인은 망각을 부르는 암용을 수호하는 역할을, 위스턴은 암용을 죽여 증오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고 하는 역할을 맡는다.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그냥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 하지만 오래된 과거고, 이제는 죽은 뼈들도 기분 좋은 푸른 풀밭 카펫 아래 편히 쉬고 있다오. 젊은 사람들은 그 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오래된 상처들이 영구히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기에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거요. …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오래된 두려움이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되기를 당신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땅속에 하얀 뼈로 묻힌 채 사람들이 파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 p426-427『파묻힌 거인』


유럽의 어떤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세계2차대전을 언급하며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한 학생이 질문했다. 

“세계 2차대전을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세계 1차대전도 있었나요?” 

아직 한 세기도 체 지나지 않은 싸움을 잊어버린 학생이 유럽에만 있는 건 아니다. 역사를 잊어버린 젊은 세대가 교실에 앉아 있다. 이들이 전쟁을, 민주화 과정을 기억하지 않고 평화를 평화로 유지할까. 

일본 우익들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데서 비롯한 증오를 자식세대에게 학습시키려고 교과서를 왜곡한다. 자위대를 키운다. 

누군가가 수직적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지적했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와 소통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끼리만 대화를 주고받는다. sns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내뱉고, 다른 세대가 대화에 끼는 것을 어려워한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도,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말들이 아닐까.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관한 기억이다. 삶으로서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어버릴 정도로 바쁘기만 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자기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워하면서도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고, 살아온 그대로 주어진 생명을 연명하는 걸까. 알 껍질은 너무도 단단하기에, 패배감을 가슴 깊숙히 눌러놓았기에,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아서? '암용은 무시무시하고, 그것을 잊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려면,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암용을 죽일 힘은 없지만 암용을 없애는 데 동의한다. 아서왕 시절 법을 세우고 그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액슬, 그것을 부수고 암용이 세상의 기억을 지우도록 도와서 평화로운 상태를 꿈꾼 가웨인, 평화를 기억하지만 그 이후 경험한 분노를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에 복수를 실현하려는 위스턴, 그리고 아직 어린 세대인 에드윈. 에드윈에게 위스턴은 분노를 학습시키려고 하고,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우리에게는 소통이 필요하다. 무슨 방법이든 논의하려면, 소통이 필요하다고, 서로의 존재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대화가, 아프지만 평화로운 약속을 담은 대화가, 각자의 아픈 역사를 품을 자세로 나누는 대화가. 여전히 "관습과 의심은 사람들을 갈라놓을지라도,"(p443『파묻힌 거인』) 기억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니까."(p468『파묻힌 거인』)


신화적으로 현대사회의 축소판을 그리고서,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p.s.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궁금하다. 무거운 이야기가 신화적으로,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은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 사회를 향한 목소리일까, 아니면 조금 더 부드럽게 마음에 가닿기 위한 장치일까? 피카소가 폭격당한 마을을 묘사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린 것은, 우리가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어떤 사진작가는 잔인한 전쟁 장면을 찍어서 사진전을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것에 충격을 받고 나중에는 사진이 아닌 글로만 책을 냈다. 작가가 리얼리즘 형식이 아닌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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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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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으로 삶을 버텨온 사람의 이야기이다. 혹은 한 인간의 생애에 걸친 종말을 다룬, 소설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는 그 친구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수치감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 p133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버키가 살고 있는 마을에 덮치자, 버키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마을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의 역할은 ‘놀이터’의 체육선생님이었고, 그는 체육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의 든든한 우상이 되어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전염병 앞에서 그런 체육선생님의 위엄은, 별로 위엄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그는 할아버지에게 ‘강인함과 결단력, 신체적으로 용감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것, 남들에게 휘둘리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 그들이 두뇌를 사용할 줄 안다는 이유로 허약한 유대인이나 계집애 같은 유대인이라는 비방을 당하지 않는 것(p34)’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놀이터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사명감을 가졌다. 폴리오가 발병하고 그가 폴리오를 피해 도망친 이후 그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배운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가 달아난 곳에서도 폴리오가 발생하자 그 자신이 폴리오를 옮긴 것이라고 ‘확신’할정도로, (실재적인 근거는 없었음에도!) 그 일때문에 평생을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을 정도로 그는 그 원칙을 지키려고 ‘순교’했다. 

그런 그를 두고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평가한다. 상황을 상황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살아온 대로만 사고하였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치 그 일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무의미한 ‘종말’이라는 듯이...


나는 필립로스가 그런 인간의 운명을,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하게 첨예하게 그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생의 믿음을 다른 화자를 통해 깨뜨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한 인물이 행동한 것을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읽힐 수도 있지만 ‘운명’이라는 것이 어쩔 도리 없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걸까? 이런 평범한 결론을? 


 인간이 어쩔 도리 없이 맞게 된 어떤 비극적 순간을 어떻게 버텨나가는 지, 그 과정을 지켜보다 그 일이 있은 지 한참 이후를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있으면, 내 삶은 정말 내것인가 궁금해진다.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에 휩쓸려버리면, 나같은 것은 흔적도 없이 와해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미 처음과 끝이 정해져 버린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운명이 아니라,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기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러나 일어난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범주이기에 ‘운명’으로밖에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 그런 의미에서 한 인간의 ‘의식의 동일성’이라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의식이라는 것 역시도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아닐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조금은 평범하게, 작은 꿈을 꾸며 살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걸까. 이 소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기도 하다. 운명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이고 나면, 어차피 똑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건데 조금은 덜 강박적으로,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를 영웅이라 칭한다면, 공동체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영웅인가? 그가 영웅인지 아닌지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모욕하는 일이 아닐까. 그는 영웅이 되기 위해 행동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그가 그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라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라 볼 수도 있다. 그건 그가 책임지고 싶어했던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 그의 삶 자체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은 과업을 완수하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삶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그것을 깨트렸다. 그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마저도 그가 책임지려고 하는 태도가 어쩌면 영웅적이라 불릴 수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으로 실천하는 게 과연 영웅일까. 


그는 신과 대결하였던 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누구를 위한 영웅일지도 모르곘다. ‘효용성’만으로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버키의 일생을 무의미한 것으로 ‘판정’해버린 무례한 일을 했다. 그가 살았던 방식으로 나는 살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그 이유로는 부족하다. 게다가 그 일생을 무의미하다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이런 기로에 서게 만드는 ‘운명’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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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4 0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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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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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사는 시대가 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을까? 지금은 이상향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는 단어 ‘유토피아’는, 지상에 없는 곳이라는 의미로 토마스 모어가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그린 책이다. 책 내용을 전해들은 내가 했던 생각은, 정말 터무니없는 세계를 꿈꾸었다는 것이었고, 유토피아라는 이름에 걸맞다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나라면, 이상향을 그렇게 꿈꾸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이루어지기 어렵게 느껴지고, 꿈꾸는 것 자체를 멍청한 것으로 취급하게 한다. 그렇기에 이상향을 어떻게 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렇게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상향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 걸까. 사실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면 이상향을 꿈꾸지 않는 게 좋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고, 온갖 부조리한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는 계나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다.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고,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p11 하는 꿈이다. 그걸 한국에서 실현하기에는 스스로가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목숨 걸고 어떤 것을 할 인물도 못된다고 스스로를 평한다. 그래서 호주로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호주에 가서도 제일 밑바닥 알바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 사귀던 전 남자친구 지명에게서 전화가 온다. 계나를 사랑한다고, 호주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같이 살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백한다. 


“얘는 내가 지금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는 건가? 무슨...... 마치 자기를 구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하며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같았어. 낙하산을 멘 건지 아닌지도 몰라.” p138


구원을 받으려는 건지, 안받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지명은 사랑에서 그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녀가 지금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절박하다. 그만큼 그녀를 사랑한다고, 상상 속에서 그녀와 일평생 함께하리라고 맹목적으로 믿어버린다. 그걸 계나는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라 일컫는다. 이 구원이라는 게 계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계나는 스스로가 지명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지명으로부터 과연 어떤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지 미심쩍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주에 있는 것이 아닐수는 있다. 이 소설 안에서는 이런 사랑은 ‘빌딩에서 낙하산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안하고 뛰어내리는’일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랑’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로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지명이 말하는 사랑을 계산하고, 그걸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질문한다. 그 질문이 무서웠다.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가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 지명은 사랑의 환상에 허우적대고, 계나는 사랑을 계산하여 측정하지 않는 지명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어느 것이 맞다 어쩌다 하기보다 이 두가지 모두가 지금 ‘사랑’이 겪는 현실이라는 게 섬뜩했다.


“우리는 뭐랄까, 전래 동화의 의좋은 형제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지. 지명이는 나를 아껴. 나도 걔를 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 사이에 개선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밤에 서로 상대 몰래 볏짚을 나르느라 몸만 피곤한 상황이었지.” p155


계나가 바라보기에, 그녀와 지명의 사랑은 의좋은 형제의 처지이다. 그녀의 시선에서 의좋은 형제는 괜히 서로를 사랑하느라 뻘짓하는 사람들이다. 서로 사랑해서 호혜적으로 편한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그렇기에 또 끊임없이 힘들 뿐인, 언제 지쳐 떨어져 나갈 지, 언제 그런 서로를 마주하고 경악하게 될 지 모르게 되는 사이. 이런 사이라는 것을 들키기 전에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계나는, 어쩌면 사랑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은 걸까? 계나의 이런 생각에 깔린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보였다. ‘사랑’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맞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걸까. 아니면 계나처럼 사랑에 대해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인 계나는 이런 형제의 처지에 빠져서 살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 싶어. 

내가 그런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명이는 자기가 주말에 쉴지 안쉴지도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었어. 데이트 계획 같은 건 세울 수도 없었어." p153


지명은 그가 그토록 되기를 바랐던,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여전히 고달프다. 계나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일이기에 꿈꾸고, 지명은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이상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산다. 계나가 보기에 지명은 불안하다. 사랑 하나만을 믿고 지명을 따라가기엔, 자신과 지명의 처지가 너무 다르다. 지명은 열성적으로 자신이 꿈꾸던 일을 쟁취해냈고,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도 그런 식으로 헌신하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계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계나는 그 간극을 버틸 다른 방법을 찾지만, 쉽지 않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 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p159


이건 계나가 여자라서만 겪는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에 있으면 ‘진짜 직업’과 다른 것들로 나뉜다. ‘진짜 직업’을 가진 사람만 대우를 받는다. 계나는 그런 차별대우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계나가 돌아보면, 계나의 가족은 전부 ‘진짜 직업’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면서 삶을 꾸려간다. 계나는 그것이 싫다. 계나와 계나의 가족은 한국에서 존엄성을 무시받는다. 그러면 호주는 다를까.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해.” p124-125


계나는 호주에서 베이스 점프를 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다. 작가는 이 베이스 점프를 계나의 삶과 빗대어 표현하려고 한 것 같았다. 끊임없이 행복하려고 시도하고, 그렇기에 호주에까지 왔건만, ‘베이스점프’를 그녀가 세든 건물에서 하게 내버려뒀다는 이유로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녀의 삶은 본디도 그다지 희망이 없었지만, 더 절망적으로 변해버렸다. 만약, 그녀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 역시 마찬가지의 삶이 아니었을까.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어쩐지 마찬가지의 삶을 통과하는 중인 건 아닐까? 재앙이 닥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하고 빌고 있지만 이미 나 역시도 포함되어버린 삶을 사는 중인 건 아닐까. 어떻게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이 삶이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보일까? 나은 것으로 변할 수 있도록 조금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작가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계나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계나의 새로운 목표다.

지명처럼 사는 사람이 더 많을까. 계나처럼 사는 사람이 더 많을까 알 수 없다. 자기계발서의 양을 보면 두 방향 다 비슷한 것 같다. 지명과 계나의 유토피아는 언제까지 유토피아로 남을 수 있을까. 유토피아는 곧 현실의 벽에서 스스로 비웃음을 생산해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고, 꿈꾸어야만 하고, 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비웃음당하지 않을만한 것일까. 하루하루가 사는 게 버겁다. 언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는 말에 찔리지 않는 삶을 살지는 몰라도 그렇게 발언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나 둘 만드는 것밖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에 안주하려 한다고 비난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라서 어쩔 수 없다면, 아주 조금씩만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란다.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여가에서도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 이런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 바보같은 일이라면, 그때그때의 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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