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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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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를 읽고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소설은 작년에 읽었다. 책장을 덮기 전까지, 화자가 겪는 소용돌이에 나도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화자가 그 걸음을 쫓게 되는 이야기로 귀결되는데, 그 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다만 <<익사>>가 소설인지,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실재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사람들이 말하길 '조코 코기토'는 작가의 페르소나 격인 인물이라 하고, 작가에게도, 화자에게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 너무 좋다고 느꼈기에, 되려 편견 중 하나에 의문을 품었다. 작가는 자신이 품은 의문이 담긴 모티브를 소설에 녹일 수는 있지만, 실재 작가의 삶을 그대로 적으면, 그건 소설이 아니게 된다고 여겼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하기에, 이번에 읽은 오에 겐자부로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중 초기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삶을 소설의 형태로 엮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단편이 다 의미있다고 느꼈다. 물론 작가가 처음부터 어떤 형태로든 완성된 소설을 느끼고 쓴 것보다 응집력이 부족하다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소설도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중기, 후기 소설들은 그에게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도구 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도대체 어떻게 ‘반핵, 반전’을 소설로 녹여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허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그가 겪은 자잘한 일들을 엮어낸 그의 소설엔, 어느 순간에 그가 바라고 있기 때문에 반전, 반핵의 의미가 들어갔다. 예를 들어, 그가 만난 어떤 인물이 그에게 반핵 이야기를 강연으로 해달라고 요청한다든가, 그 와중에 반핵 운동의 세부 내용이 차이가 나서 요청이 취소되고, 또 다른 일행을 만나서 반핵과 관련된 또 다른 유형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든지 등등. 반핵을 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가는 화자가 겪는 일화들을 통해서 반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이건 주장문도, 수필도 아니고 자잘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엔 맥락에 맞는 어떤 문장들이 마치 맥락 바깥으로 나와서 사람을 겨냥하는 기분이 들어서, 읽다가 놀라곤 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에는 이런 문단이 나온다.


“우린 개를 죽일 생각이었지.” 내가 애매하게 말했다. “그런데 도리어 우리 쪽이 살해당한 셈이네.”

여학생이 미간을 찡그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피곤에 지쳐 웃었다. 

“개는 살해되어 쓰러져 가죽이 벗겨져 나가지. 그런데 우리는 살해되어도 이렇게 돌아다녀. 

그러나 가죽은 벗겨졌다는 거지.” 여학생이 말했다. 

  p26<기묘한 아르바이트><<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이 문단을 읽고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개를 죽이는 아르바이트를 잠시 했을 뿐이고, 돈을 주기로 한 사람이 불법으로 개고기를 고깃간에 팔아넘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을 뿐인데,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하다니. 그리고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개에 물려 병원에 가야 하는 기묘한 상황에서 잘린 ‘나’, 잘린 상황을 ‘살해’당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었을까. 이 소설의 ‘살해’라는 비유 역시 무척 뜬금없이 느껴지는데, 어쩐지 맥락에서 아주 벗어난 느낌은 아니다.  그러나 대화 하는 발화 당사자들 끼리의 이야기 인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 바깥의 독자를 겨냥한 말 처럼 들린다. 


한편 중기 단편인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도전적으로 항변한다. ‘아무도 남을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 남을 자기 자신 만큼 존경하지 않아요. 또한 “사상”으로 그보다 위대한 것을 알 수 없어요. / 그러니 아버지, 어떻게 내가 나 자신 이상으로 당신이나 형을 사랑할 수 있어요? 문간에서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작은 새만큼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사제가 분노하여 소년을 끌어다가는 악마라고 고발을 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했다 일찍이 많은 사람이 화형 당한 거룩한 곳에서, 울고 있는 부모들의 눈물은 헛되다 이런 일이 아직도 여전히 엘비언 벼랑에서 행해지고 있을까?’ 

p433-434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그리고 이 이후에, 아들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비탄에 젖은 상태로 가족들에게 겁을 준 상황이 나온다. 그리고 화자는 아들의 비탄을, 자신이 존경하던 H의 비탄을 보았기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다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앞서 말해진, ‘아무도 남을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화자가 겪은 몇가지 자기 반성적인 이야기로 뒤집는다. 


나는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 내가 집에 없는 동안 한없이 난폭했다는 아들의 눈이 발정 난 짐승이 충동이 이끄는 대로 갖은 난음을 다 하고도 그 여운에서 풀려나지 못한 혹은 그런 짐승에게 내부를 물어뜯기고 있는 것 같은 차마 마주 볼 수 없는 눈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눈곱 같은 누런 광채가 형형한 그 눈에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던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이었다. 

…그러나 늦게 나마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감각으로 아들의 눈에서 비탄을 읽어낼 수 있었던 건 뉴델리 공항의 바에서 H씨의 눈에 일순간 드러났던 ‘비탄’의 정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p452-453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초기 단편들은 상징들을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일본의 현실을 비판한 단편들이 많다. 하나의 상징이 작품 마지막까지 단서를 품고 통과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이 제일 처음에 실려 있는데, ‘개 짖는 소리’가 배경도 설명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학생들은 개를 죽이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개를 죽이는 데 참여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전쟁에 참여한 일본을 빗대어 표현한 느낌이 든다. <남의 다리>라는 작품에서는 말로만 혁명을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영달을 추구하게 되는 이기적인 인간상이 나오는데, 그 역시도, 일본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불안한 사회 현실 가운데 기댈 곳을 찾지 못해서 적극적으로 ‘우익’이 되는 <세븐틴>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화자는,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들 모두,  인물들이 각 집단 안에서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거기에서 어떤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어떻게 인물들이 각자의 믿음에 배반당하는지, 어떻게 순수한 사람들, 혹은 생명이 아프게 되는지 드러난다. 이 아픔들을 통해,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기, 후기 단편들은 그에 비해 훨씬 개인적인 삶 속에서 아이러니들을 찾아내고 상대를 비판하든, 비판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뚜렷한 목적은 초기 단편들보다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고, 어찌 보면 그렇기에 상징이 이끌고가는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훨씬 복잡해져서, 무엇을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지 모호하지만 감정이 마음 안에서 불러일으켜진다. 어떻게 살고, 죽을 지 고뇌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 거기 있다. 그 투쟁과 통찰 속에서 자꾸 나를 비추어보게 된다. 


중,후기의 소설들이 일본 문학 장르 중 ‘사소설’에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고뇌가 지난하고 처절하기에, 그가 그의 삶의 주제에 사로잡혀 평생 그것만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하더라도 나는 이해할 것 같다. 어차피 독자인 나로서는 어디까지가 작가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허구인지 구분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양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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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16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증기의 레인트리 연작이나 이요를 다룬 이야기들은 맬컴 라우리의 소설이나 블레이크의 시들을 읽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 작품들을 읽지 않고서는 아마 오에의 이 중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아무리 어떻게 노력해도 반쪽 그 이하의 이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한가지만은 그래도 어렴풋하게 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위의 우끼님 말슴처럼 오에가 끊임없이 글로서 투쟁과 통찰을 해나가는 인물이라는 거죠. 말씀하신 최근에 나온 <익사>를 봐도 현재에 안주해있으려는 의식 같은 것은 오에에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는 않아도 그의 작품들이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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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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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차별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하는 사회적 현실이다. 그 슬픔은 아랫대로 내려가고, 물려받는다. 사회에 기대어 살아야만 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는 현실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자급자족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럴 능력을 박탈당했는가. 

로레타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기 전에도,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과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난을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꿈을 꾸기 위하여 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도 술병이 나 있다. 열심히 일할 만한 자리도 없거니와, 일한다 해도 상황이 극복될 만한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오빠는 돈때문에 밖으로 나돌고, 로레타가 처음으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일어나보니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빠가 그를 죽였다고 믿는다. 그녀를 사모해왔던 경찰이 그 시체를 보고서, 로레타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고, 그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녀와 섹스를 한다. 그 이후 그녀는 그와 결혼한다. 그가 그녀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가 나타났기에 자신의 정서적 충격과 혼란을 모두 해결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로레타는 그날 이후 자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감정에 무감하게 된다. 일상 속에 스며든 폭력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폭력을 당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내가 폭력을 행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하루를 버텨내고 살아갈 뿐. 그건 정말 ‘돈’ 때문일까. ‘돈’ 이외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돈’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회적 환경 때문일까.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시스템 때문일까. 어떤 상상력도 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그들은 삶이 닥쳐오는대로 그대로 그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로레타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돈이 없는 자에게 돈이 없어도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돈이 없어도 인간다운 삶을 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완충작용을 할만한 시스템도 없다. 어딘지 모르게, 생계 수단은 전부 ‘돈’이고, ‘돈’이 없거나 벌기 힘든 사람은 여성인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지, 의문을 품을 겨를조차 없어 보인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면서 결혼하고 하는 생각은,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것으로 무엇을 살지 꿈꾸는 것 뿐이다. 그녀의 딸중 하나인 모린도, 오로지 ‘돈’을 위해서 남자에게 몸을 파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돈은 돈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지, 무엇을 하고 싶어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돈을 모아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이라 여긴다. 실재로 그녀는 처음에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어했으니까. 하지만 로레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모린이 어떤 일을 해도 싫어했다. 그녀의 손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의존하고, 그녀에게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얻고 싶어했다. 그녀의 삶은 통제되지 않았기에, 모린을 통제하여 얻을 수 없는 충족감을 얻고 싶어했다. 원하는 것은 질서에 맞게 행복한 방향으로, 상상되지 않고, 누군가가 원했던 것을 자신이 원한다고 착각하거나, 질서를 어그러뜨려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통제한다고 착각하면서만 가능했다. 구조가 바르지 않으면 수정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다. 로레타의 이런 혼란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자란 로레타의 아이들은 로레타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겉모양으로는 다른 삶을 이루어낸 것처럼 보이며, 로레타와 달리 그것을 실재적으로 만드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줄스는 질문한다. 


“평범한 일상과 폭력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중략) 모두들 그것을 살아내고 또 살아내고, 도무지 끝나질 않아요. 갈 곳도 없고, 도시 한복판에 공터도 없고……도시 한복판에 공원이 있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공원은 불에 타지 않아요!(중략) 그건 상처를 입히지 못해요. (중략) 강간범과 강간 피해자가 동틀 무렵에 마침내 폐허에서 일어나 각자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식당을 향해 걸어갑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열정은 오래가지 않아요! 열정이 다시 찾아오기야 하겠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p698<그들>


사람들이 불을 지르고,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을 한쪽에서는 ‘폭동’이라고, 한쪽에서는 혁명이라 부른다. 줄스는 왜 저렇게 말했을까? 누가 적이고 적이 아니고, 구분하는 게 중요한 게아니라. 각자에게는 각자의 ‘일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저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누구에게도 그들의 삶을 침범당하지 않고. 모린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결혼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들을 외면한다. 그런 모린에게 줄스가 와서 말한다.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중 하나가 아니야?”p706


모린은 줄스의 말을 외면하지만, 줄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던 것에 냉소를 가지고, 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냥 살아있고 싶은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있고 싶다.”는, 인간이라면 모두 가진 소망을 실현하고 싶어서,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환경을 외면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걸 알기에 줄스는 그렇게 모린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정말 읽기 힘들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잔인한 부분은 오히려 가볍게 처리되었는데도. 일단 분량과,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뒤틀린 내면묘사때문에 읽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며 다시금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헷갈리지 않고 바르게 잘 살수 있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시간내서 천천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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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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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이라는 소설에서 말해진 불행은, 모두 여호와 때문에 벌어진 일 같다. 여호와는,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위하지 않고, 오로지 신의 관점에서 인간을 판단하고 벌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책에서 말해진 카인은 열심히 일했고, 공물을 바쳤는데도 여호와가 그것을 거절했고, 그래서 아벨을 질투하여 죽인다. 그리고 그 책임을 여호와에게 돌린다. 


주가 내 생명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우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를 시험하는 문제였다. 주꼐서 직접 창조한 것을 왜 시험한단 말입니까. … 주에게 내가 아벨을 죽이는 것을 막을 자유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다른 모든 신들과 공유하고 있는 무오류성에 대한 자부심을 아주 잠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또 아주 잠깐만 진실로 자비를 베풀어 겸허하게 제 제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카인 39p


책에 나오는 여호와는 카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카인에게 표식을 준다. 그 표식은 카인이 아우를 죽였다는 증거이자, 여호와가 신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자, 그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부터 땅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돌게 된다. 그 이후, 카인은 구약성경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관여하게 되고, 결국 책의 마지막에서 신의 책임을 묻기 위해 노아의 방주는 무너진다. 


나는 책의 후반부로 갈 수록 카인의 행동, 말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가 묘사하는 여호와는, 강대하면서도 강대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에게 충성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하여, 하지 않아도 될 시험을 하고, 그때문에 인간들은 죽고 고통받지만 누구에게서도 그 보상은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일들에서 ‘여호와’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우리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곁에서 우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옆에 있지만, 결국 그 자신의 힘을 시험하는 대상인 것으로 이 책에서는 묘사되는데, 그건 ‘전지전능’하여 더 필요한 것이 없는 신이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끊임없이 ‘인정’을 필요로 하고, ‘인정’이 없이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건 인간처럼 보였다. 이 책에서 불리는 여호와는, 자비롭고 자애로운 신이 아니다. 예수처럼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미는 신은 아닌 것이다.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으로서 껴안는 신은 아닌 것이다. 왜 이렇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다를까? 성경은 신이 쓴 것이라 지칭되지만, 사실은 그 책을 쓴 것이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고서는 세상을 견딜 수가 없지만 ‘신’이 있고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자꾸 겪기 때문에 ‘신’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나치게 주관적인 여호와의 입장을 카인을 통해 대면하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러면 카인의 논의가 무의미해진다. ‘신’은 더이상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진 ‘신’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되, 타자의 입장도 자신의 입장만큼이나 최대한 대변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니까. 신에게도 기댈 수 없고. 실재로, 우리가 죽든, 진보를 겪든, 퇴보하든, 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카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똑같이 인정을 원하는 존재들이, 한 쪽은 엄청난 힘을 휘둘러서 인정을 강제로 얻어낼 수 있고, 한쪽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만, 인정을 겨우 받아낼 수 있는 거라면, 이건 애초 시작부터 불공정하다.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모든 행위들에 반하는 사건이다. 상황이 이런 것을 믿으면,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수동적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데 실상 삶을 살아보면,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일들이 많다. 신이 실제로 있든 없든, 그건 나는 증명할 수 없고, 그렇기에 알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내가 설계한 일들이 설계한 대로 된 적보다, 그렇지 않은 적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모두 불공정하다고 여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도 한켠에 가시지 않는 분노가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런 인간의 운명에 대해 너무도 화가 났던 게 아닐까. 정말 신이 있다면, 당신이 당신의 책임을 좀 알라고, 인간이 이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는 건, 당신 때문이라고, 신에게든, 운명에게든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이렇게 전면에 나서서 자신이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주는데도 책이 흥미롭고 공감이 간다고 느낀 점은 처음이라, 역시 소설은 잘 쓰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앞으로 나서서 소설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못 쓴 소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작품을 읽는 게 그 작가의 주장을 읽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 거라는 생각도 해봤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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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P.160 : 보통 사람들은 말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말하는 것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사실 말은 대체로 모든 논쟁에서 가장 얕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말은 그 뒤에 숨어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과 욕망을 희미하게만 보여줄 뿐이다. 혀를 놀리는 일을 그만둘 때 비로소 마음이 귀를 기울인다.


말, 언어가 아니라면, 내가 도대체 그의 속을 어떻게 알까? 하지만 말이 얼마나 많은 마음들을 품고, 혹은 가리고 태어나는지, 말만 들어서는 사람의 마음까지 파고들어가기 어렵다. 그래서 문학이 그토록 쓰기 어려운 것인가보다. 계속 쏟아져나오는 말들 속에서 어느 때 침묵을 지켜야 하는지 잘 알기 어려워서. 

이 묘사에 마음이 아파서, 그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졌다.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에는 나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출판사 책 소개 말


시작을 이렇게 간결하게, 써내려간 점에서 흥미가 일었다. 

소설은 늘,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그 인간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어떤 곳에 있든, 누구에게나 어떤 사건이든 일어날 수 있다. 난독증이었던 사람이 난독증을 극복하고 쓴 소설이 작가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만들었다면, 읽어보고 싶다. 






 173~174

난 고문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왠지 모르지만, 고문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의미가 있으리라는 인상을 받아요. 왠지 알겠소? 고문은 개인의 책임이오.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들 하지만 용납할 수는 없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관의 명령이라는 초라한 변명 뒤에 몸을 숨기고 합법적으로 발뺌하며 자신을 지키지요. 이해하겠소? 근본규범 뒤에 숨는 거요.


고문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고문관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차피 고문했는데 이름을 기억하나 하지 않나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고문하는 일을 거부하지 못한 대신 이름을 기억하여, 자신의 책임을 기억하겠다는 태도는 본받고 싶어졌다.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일에서는, '상관' 뒤에 숨을 수 없다. 는 그의 위선적인 자존심이 좋아보였다. 이 모순을 표현한 그의 소설이 읽고 싶었다.



윤이형의 소설은 많이 읽어본 적이 없다. 그가 <쿤의 여행>을 썼을 때 느꼈던 이미지들이 흥미로웠다. <루카>의 일부분("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윤이형 [루카], 제 5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p61)을 읽었을 때, 그가 표현하는 문장들이 예뻐서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이번 소설집을 읽어보고 싶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를 읽었을 때, 그의 어투가 꼭 할아버지같았다.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느낌. 비슷한 느낌의 비슷한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멀리 날아가지 않고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깊어졌다. 비슷한 느낌이었는데도 끝장을 넘길 때까지 지루하지 않았다. 아픈 이야기도 아프지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도 조금씩 아프게 스며왔다. 


그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지는 충분한 이유였다.






매달 추천 신간을 뽑는 것도, 사실은 쉽다고 여긴적은 없다. 하루는 책을 고르고, 하루는 할 말을 고르고, 그러고나서 작성하는데도 영 시원치 않은 기분으로 포스트를 올린다.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을 때도 많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순간에는 말을 나불대는 경우도 많다. 생각의 방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말이 쏟아져나와서 말을 가리기 때문일까. 말을 적절하게 하는 것은 본디 쉬웠던 적은 없다. 나는 늘 치우친다. 억지로 치우치지 않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읽힐만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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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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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볼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나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불안한 낙원> p209


본다는 것은 시선을 상대에게 고정시키는 것 이상으로 상대의 표정, 행동을 보고 상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행위이다. 본다는 행위가 상대의 실체를 어느정도 드러낼지 알 수 없다. 내 시선이 그 안에 섞여들어가서 공유되는데 어디까지가 내 시선이고 어디까지가 상대의 존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가 파악한 상대는 상대이면서 아직 나다. 내가 아는 만큼 상대를 본다. 내가 겪은 일 만큼 상대가 보인다.  

<불안한 낙원>의 한나가 아프리카 땅에서, 흑인들도 백인들도 아닌 경계선에서 모두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떤 권력 밑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땅에서 백인으로서, 부유한 사람으로서 군림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사람을 신뢰하고 싶어하기에, 사람들을 신뢰하려고 하고, 사람들이 신뢰를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백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놓은 체계 안에 갇혀 있다. 

그녀는 낯선 아프리카 땅에서 얻은 강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를 끊임없이 위협하거나 이용하려는 주변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백인으로서 흑인을 차별하면서 두려워했고, 백인에게 핍박받는 흑인을 보면서 가난한 처지이면서 약자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녀의 삶 속에서 다양한 계층의 감정을 경험했고, 주어진 권력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는 나뉘어진 세계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려고 했기에 그 위화감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사람을 신뢰하려고 했기에 신뢰가 불가능한 사회의 단면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 곁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그녀가 신뢰하려는 사람들이 실재와 말을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을 바라보았다. 흑인은 백인의 잔혹함을 두려워하여 말을 삼키고, 백인은 흑인이 연합하여 복수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유색인종은 이 무언의 규칙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피하는 말만 내뱉는다. 이들은 ‘불신’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같은 그룹 사람들끼리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그것을 유지해야 그룹이라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불신하는 상황을 막으려고 규칙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깨뜨리려는 사람을 배척하려고 한다. 서로는 상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거울이 되지 못하고, 불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녀에게 매음굴은 ‘불안한 낙원’이었다. 잠시 머물다 갈 곳이었지만, 나중에 그녀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아무도 그녀를 거스르지 않았고, 돈이 많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 상황 자체가 그녀에게 신뢰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서도 모순이 생겼다. 그녀는 몸을 파는 사람들의 이익을 챙겨야 하고 그것이 그들의 공동의 목표였는데, 그녀는 여성으로서 그 일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 상황 자체가 이미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백인 남편에게 배신당하여 그를 살해한 흑인 여성을 돕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매음굴을 찾지 않게 되고, 매음굴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들도 그녀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그들의 차별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연결될 수도 있는데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돈이 많고 시간이 많은 한나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그 일을 할 이유가 없다 느낄 수도 있었나보다. 


이성복시인 무한화서 397번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어젯밤 방 안에 들어온 벌레를 살려주려고, 쓰레받기에 쓸어 담고 창을 열어 던져주었어요. 그 틈에 나방 한 마리가 들어와 휘젓고 다니기에, 빗자루로 때려잡아 바깥에 내버렸어요. 지금까지 제가 한 좋은 일은 늘 그런 식이었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릇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상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세상을 품으려면 어떤 것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것이 때때로 내 욕구를 배신하는 일일지라도. 거대한 생명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는 길은 그뿐인걸까 하고 의문을 품었지만 반박할 길은 없었다. 나는 최근에 이 의문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내가 육체를 가지고 이 몸뚱아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한, 나는 이 안에서 숨쉬어야 한다. 이 몸뚱이를 지키고, 이 몸뚱이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면, 누군가를 배척할 수밖에 없고, 때때로 그건 누군가의 욕구를, 나아가 생계를 위협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최대한 자제하겠지만, 내 손에서 벗어나 벌어진 일들 모두를 내가 책임지고 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나쁘고 싶지 않아도 “복잡하게 나쁜 사람”(김영하가 쓴 표현)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한나의 처지도 이와 비슷해보였다. 그녀 자신과, 타자를 위해서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좋을 지는 몰라도, 어떤 규칙 아래서는 그것을 당장 동의할 수 없는 상황. 


결국 한나는 경계선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싸움은 전적으로 그녀가 강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싸움이고, 그렇기때문에 한편으로는 위선적이고 비극적이었다. 

한나는 그 경계선에서 모두를 신뢰하고 싶었기 때문에 배척당했고, 결국 모두를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되려 누구에게나 배척당하는 걸까. 그저 집단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우연이 없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한나는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말로, 그녀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두고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일기장을 작성한다. 그곳에서 그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곳의 실상을 적어간다. 그녀는 오로지 그녀의 말만 믿을 수 있었다. 바깥으로 공표된 규칙들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도,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나가 사랑한 흑인 남자 모세스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회 안에서는 그에 관해 말 이상의 행동으로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그 체계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신뢰하는 것들을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잃어버린다. 그것들을 그녀는 붙잡을 힘이 없다. 그녀 혼자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 있으려고, 아직은 그 체계 안에 남아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잊어버린 게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럼 기억하는 것도 부끄러워야 하지 않겠어요? 제 이름은 반지입니다.” p431


사람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을 존중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일까. 보통 사람은 어떤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신뢰하지 않을 것인지를 판가름한 이후 이름으로 신뢰도를 그것을 기억한다.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는건,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하다. 애초 저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아닌지 조차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나는 마지막 즈음 그녀의 소중한 친구였던 카를로스를 묻는 걸 도와준 반지에게 그의 이름을 묻는다. 그를 신뢰하고 기억하겠다는 몸짓일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살아갈 뿐이지만, 그렇다고 인간다운 마음을 잃은 것도 아닌 사람에게,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다하겠다는 듯, 이제까지는 묻지 않던 이름을 묻는다. 그러나 그 물음이 떠나겠다는 결정까지 막지는 않는다. 그녀가 짊어진, 위선으로 이루어진 짐은 그 작은 희망보다 그녀에게 더 컸다. 수많은 아이의 시체를 묻으며 운영되는 매음굴의 주인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서는 그곳에서 살기 어려운데, 매음굴의 주인으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 모순 상황 자체에서 도망치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패배라고만 말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 상황을 보았고, 그녀의 패배에는 패배라고만 지칭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결정이 도피 하나 뿐이었을지라도, 그 결정은 단지 이 이야기가 끝나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때때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일을 노력하고, 그것이 패배로 남는다해도 패배가 아닌 일들이 종종 있듯, 내게는 이 소설의 결말도 그런 식으로 읽혔다. 

한나는 낯선 땅을 떠난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느낀 위선을 수정할 수 있는 공간. 그 사람이 있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녀는 결국 가루를 먹고 나비가 되었을까. (가루를 먹으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모세스가 들려주고 자루를 남겨주었다. 모세스는 그녀가 도왔던, 흑인 여성의 오빠이다.)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그냥 살아있는 것 말고, 사람으로서 기능하고 스스로를 키워나가는 건, 모순적인 상황들을 참아낼 수 있는지, 그 상황에서 얼마나 스스로 그 모순을 줄여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하는지, 어떤 집단의 이해에 굴복하지 않고 얼마나 경계선에 잘 서있는지에 따라 좌우되는 걸까.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이 모순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것 같다. 


헤닝 만켈은 이 소설을 쓰면서, 백인 남성으로서 백인 여성이 되어 흑인의 감성까지 읽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수많은 작가들에게 너무도 쉽게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이는지 불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마음에 들었으나 제목을 반토막만 표현한 표지디자인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낙원’이라는 두 단어가 상충하면서 마음 안에 주는 위화감이 살아있지 않다고 느꼈다. 책을 덮고 나서, 내 생각이 선입견에 가득찬 생각이었다고, 이 책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이 책은 읽을 때 다소 호흡이 빠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해석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기보다, 계속 사건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둔다. 작가는 한나가 무엇을 느끼는지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분히 따라가는 서술방식을 택한다.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내면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정의내린다. 이런 서술방식이 처음에는 단편적인 것처럼 보여서 불편했지만, 가면 갈 수록 서술방식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하게 되었다. 만약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빠르게 훑어가는 형식이 아니었다면, 한나가 이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짧고 빠른 호흡에 불만이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문체가 주제를 표현하기에 부족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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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27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1-27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시 `수라(修羅)`에도 화자가 새끼 거미를 밖으로 내보내는 경험에 대한 느낌이 언급됩니다. 처음에 밖으로 버린 새끼 거미를 찾으려고 어미 거미가 나오는데 그 거미마저 밖으로 보냅니다. 화자는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가 재회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새끼 거미가 어미를 찾으려고 헤맵니다. 화자는 슬픈 감정을 느끼면서 이 새끼 거미도 밖으로 내보냅니다.

맥거핀 2016-01-27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저도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작은 기록에서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떻게보면 참으로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한나는 약자도 강자도 되어보았기 때문에 양쪽의 사이에서 그렇게 불안하게 위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리뷰를 읽다보니 소설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데 한나가 그 흑인여성을 돕겠다고 나섰을 때 매음굴의 여성들이 보이는 어떤 이중적인 태도 말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우리들 대부분이 가지는 일반적인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