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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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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볼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나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불안한 낙원> p209


본다는 것은 시선을 상대에게 고정시키는 것 이상으로 상대의 표정, 행동을 보고 상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행위이다. 본다는 행위가 상대의 실체를 어느정도 드러낼지 알 수 없다. 내 시선이 그 안에 섞여들어가서 공유되는데 어디까지가 내 시선이고 어디까지가 상대의 존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가 파악한 상대는 상대이면서 아직 나다. 내가 아는 만큼 상대를 본다. 내가 겪은 일 만큼 상대가 보인다.  

<불안한 낙원>의 한나가 아프리카 땅에서, 흑인들도 백인들도 아닌 경계선에서 모두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떤 권력 밑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땅에서 백인으로서, 부유한 사람으로서 군림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사람을 신뢰하고 싶어하기에, 사람들을 신뢰하려고 하고, 사람들이 신뢰를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백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놓은 체계 안에 갇혀 있다. 

그녀는 낯선 아프리카 땅에서 얻은 강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를 끊임없이 위협하거나 이용하려는 주변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백인으로서 흑인을 차별하면서 두려워했고, 백인에게 핍박받는 흑인을 보면서 가난한 처지이면서 약자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녀의 삶 속에서 다양한 계층의 감정을 경험했고, 주어진 권력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는 나뉘어진 세계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려고 했기에 그 위화감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사람을 신뢰하려고 했기에 신뢰가 불가능한 사회의 단면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 곁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그녀가 신뢰하려는 사람들이 실재와 말을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을 바라보았다. 흑인은 백인의 잔혹함을 두려워하여 말을 삼키고, 백인은 흑인이 연합하여 복수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유색인종은 이 무언의 규칙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피하는 말만 내뱉는다. 이들은 ‘불신’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같은 그룹 사람들끼리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그것을 유지해야 그룹이라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불신하는 상황을 막으려고 규칙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깨뜨리려는 사람을 배척하려고 한다. 서로는 상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거울이 되지 못하고, 불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녀에게 매음굴은 ‘불안한 낙원’이었다. 잠시 머물다 갈 곳이었지만, 나중에 그녀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아무도 그녀를 거스르지 않았고, 돈이 많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 상황 자체가 그녀에게 신뢰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서도 모순이 생겼다. 그녀는 몸을 파는 사람들의 이익을 챙겨야 하고 그것이 그들의 공동의 목표였는데, 그녀는 여성으로서 그 일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 상황 자체가 이미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백인 남편에게 배신당하여 그를 살해한 흑인 여성을 돕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매음굴을 찾지 않게 되고, 매음굴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들도 그녀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그들의 차별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연결될 수도 있는데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돈이 많고 시간이 많은 한나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그 일을 할 이유가 없다 느낄 수도 있었나보다. 


이성복시인 무한화서 397번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어젯밤 방 안에 들어온 벌레를 살려주려고, 쓰레받기에 쓸어 담고 창을 열어 던져주었어요. 그 틈에 나방 한 마리가 들어와 휘젓고 다니기에, 빗자루로 때려잡아 바깥에 내버렸어요. 지금까지 제가 한 좋은 일은 늘 그런 식이었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릇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상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세상을 품으려면 어떤 것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것이 때때로 내 욕구를 배신하는 일일지라도. 거대한 생명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는 길은 그뿐인걸까 하고 의문을 품었지만 반박할 길은 없었다. 나는 최근에 이 의문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내가 육체를 가지고 이 몸뚱아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한, 나는 이 안에서 숨쉬어야 한다. 이 몸뚱이를 지키고, 이 몸뚱이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면, 누군가를 배척할 수밖에 없고, 때때로 그건 누군가의 욕구를, 나아가 생계를 위협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최대한 자제하겠지만, 내 손에서 벗어나 벌어진 일들 모두를 내가 책임지고 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나쁘고 싶지 않아도 “복잡하게 나쁜 사람”(김영하가 쓴 표현)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한나의 처지도 이와 비슷해보였다. 그녀 자신과, 타자를 위해서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좋을 지는 몰라도, 어떤 규칙 아래서는 그것을 당장 동의할 수 없는 상황. 


결국 한나는 경계선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싸움은 전적으로 그녀가 강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싸움이고, 그렇기때문에 한편으로는 위선적이고 비극적이었다. 

한나는 그 경계선에서 모두를 신뢰하고 싶었기 때문에 배척당했고, 결국 모두를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되려 누구에게나 배척당하는 걸까. 그저 집단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우연이 없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한나는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말로, 그녀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두고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일기장을 작성한다. 그곳에서 그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곳의 실상을 적어간다. 그녀는 오로지 그녀의 말만 믿을 수 있었다. 바깥으로 공표된 규칙들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도,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나가 사랑한 흑인 남자 모세스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회 안에서는 그에 관해 말 이상의 행동으로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그 체계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신뢰하는 것들을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잃어버린다. 그것들을 그녀는 붙잡을 힘이 없다. 그녀 혼자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 있으려고, 아직은 그 체계 안에 남아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잊어버린 게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럼 기억하는 것도 부끄러워야 하지 않겠어요? 제 이름은 반지입니다.” p431


사람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을 존중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일까. 보통 사람은 어떤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신뢰하지 않을 것인지를 판가름한 이후 이름으로 신뢰도를 그것을 기억한다.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는건,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하다. 애초 저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아닌지 조차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나는 마지막 즈음 그녀의 소중한 친구였던 카를로스를 묻는 걸 도와준 반지에게 그의 이름을 묻는다. 그를 신뢰하고 기억하겠다는 몸짓일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살아갈 뿐이지만, 그렇다고 인간다운 마음을 잃은 것도 아닌 사람에게,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다하겠다는 듯, 이제까지는 묻지 않던 이름을 묻는다. 그러나 그 물음이 떠나겠다는 결정까지 막지는 않는다. 그녀가 짊어진, 위선으로 이루어진 짐은 그 작은 희망보다 그녀에게 더 컸다. 수많은 아이의 시체를 묻으며 운영되는 매음굴의 주인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서는 그곳에서 살기 어려운데, 매음굴의 주인으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 모순 상황 자체에서 도망치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패배라고만 말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 상황을 보았고, 그녀의 패배에는 패배라고만 지칭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결정이 도피 하나 뿐이었을지라도, 그 결정은 단지 이 이야기가 끝나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때때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일을 노력하고, 그것이 패배로 남는다해도 패배가 아닌 일들이 종종 있듯, 내게는 이 소설의 결말도 그런 식으로 읽혔다. 

한나는 낯선 땅을 떠난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느낀 위선을 수정할 수 있는 공간. 그 사람이 있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녀는 결국 가루를 먹고 나비가 되었을까. (가루를 먹으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모세스가 들려주고 자루를 남겨주었다. 모세스는 그녀가 도왔던, 흑인 여성의 오빠이다.)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그냥 살아있는 것 말고, 사람으로서 기능하고 스스로를 키워나가는 건, 모순적인 상황들을 참아낼 수 있는지, 그 상황에서 얼마나 스스로 그 모순을 줄여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하는지, 어떤 집단의 이해에 굴복하지 않고 얼마나 경계선에 잘 서있는지에 따라 좌우되는 걸까.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이 모순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것 같다. 


헤닝 만켈은 이 소설을 쓰면서, 백인 남성으로서 백인 여성이 되어 흑인의 감성까지 읽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수많은 작가들에게 너무도 쉽게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이는지 불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마음에 들었으나 제목을 반토막만 표현한 표지디자인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낙원’이라는 두 단어가 상충하면서 마음 안에 주는 위화감이 살아있지 않다고 느꼈다. 책을 덮고 나서, 내 생각이 선입견에 가득찬 생각이었다고, 이 책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이 책은 읽을 때 다소 호흡이 빠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해석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기보다, 계속 사건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둔다. 작가는 한나가 무엇을 느끼는지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분히 따라가는 서술방식을 택한다.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내면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정의내린다. 이런 서술방식이 처음에는 단편적인 것처럼 보여서 불편했지만, 가면 갈 수록 서술방식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하게 되었다. 만약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빠르게 훑어가는 형식이 아니었다면, 한나가 이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짧고 빠른 호흡에 불만이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문체가 주제를 표현하기에 부족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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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1-27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1-27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시 `수라(修羅)`에도 화자가 새끼 거미를 밖으로 내보내는 경험에 대한 느낌이 언급됩니다. 처음에 밖으로 버린 새끼 거미를 찾으려고 어미 거미가 나오는데 그 거미마저 밖으로 보냅니다. 화자는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가 재회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새끼 거미가 어미를 찾으려고 헤맵니다. 화자는 슬픈 감정을 느끼면서 이 새끼 거미도 밖으로 내보냅니다.

맥거핀 2016-01-27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저도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작은 기록에서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떻게보면 참으로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한나는 약자도 강자도 되어보았기 때문에 양쪽의 사이에서 그렇게 불안하게 위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리뷰를 읽다보니 소설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데 한나가 그 흑인여성을 돕겠다고 나섰을 때 매음굴의 여성들이 보이는 어떤 이중적인 태도 말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우리들 대부분이 가지는 일반적인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군요.
 
[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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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끄트머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아래 리뷰는 책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몰락해가는 헌드레즈홀에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무엇이 감추어지고 드러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화자인 페러데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헌드레즈에 집착한다. 페러데이의 서술이 객관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의사인 자신의 직업상 누군가에게 비밀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것을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성직자에 비유하여 어떤 자백을 받아내는 모습이라든지, 그 자백을 이용해 로더릭이 겪는 일을 정신이상으로 치부하는 일이라든지.. 실재로 이 저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공포만으로 모든 일이 조작되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범인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저택을 가지려고 모든 것을 조작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그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 닥터 페러데이다. 그는 저택을 살 만큼 부자도 아니고 능력도 없지만, 야망에 가득차 있다. 그것을 헌드레즈홀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손쉽게 메우려고 한다. 게다가 책 표지에 적힌 소개말로도 이미 그가 범인이라는 점들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으니,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만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마련한 반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저택의 ‘리틀 스트레인져’가 닥터 페러데이라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닥터 페러데이가 어느정도 그 일에 기여했으리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책의 묘미는, 그가 어디까지 개입한 범인일지, 혹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할지 추측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욕망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지 살펴야 할까. 원했으나 가질 수 없다. 혹은 몰락을 원하지 않았으나 몰락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닥터 페러데이와 에어즈가가 이런 점에서 비슷한 인물들이라 이들이 교차점에서 만난 게 이 책이 묘사한 부분이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거나, 공포에 떨거나, 더더욱 욕망에 매몰되어 욕망만을 쫓거나, 어떤 아비규환이든 소환해내는걸까.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에어즈가 사람들은 돈이 없기에 헌드레즈 홀의 땅들을 하나 둘 처분하고, 수많은 고용인들이 청소하고 보수하던 저택에는 하녀가 한 명 있으며, 유일한 수입원인 농장에서 귀족이었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고용된 사람과 일해야 했다. 깨진 컵들은 이어붙여서 사용하고, 몇개의 방들을 제외하곤 먼지가 쌓인 채 빗물이 샌다. 관리가 되지 않는 헌드레즈홀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을 묘사한 것을 읽으면서나는 몰락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에어즈가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런 외부적인 몰락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뻣뻣하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을 구분하며, 비슷한 집안이라 판단한 곳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페러데이는 아직도 같은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욕망을 헌드레즈홀에 사는 에어즈가의 유모 자식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헌드레즈홀에 고용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페러데이와 같은 욕망을 표출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급에서 오는 차이, 무관심 그는 욕망 그 자체에 이끌려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하다. 케럴라인을 사랑한다면서 정작 케럴라인이 무엇을 바라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그녀와 결혼해 그가 가지게 될 지도 모를 저택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나 그 저택을 가진 이후에 관한 계획을 들어보려 해도, 거기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일단 욕망이 실현되면, 자신의 지위도 올라가고, 갑자기 돈도 생기는 듯, 어릴 적부터 키워온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의사가 되는 건 덜 중요해진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수하면서 키우는 야망보다, 눈에 보이는, 어쩌면 허영을 더 손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으로 헌드레즈 홀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케럴라인 역시 페러데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 듯 페러데이를 보지 않고  집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궁리만 한다. 한때 페러데이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힘든 순간에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통해 저택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가 계급적 지위를 버리려 한 것인지, 그것도 사실 이 소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닥터 페러데이에게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방안을 사귀는 동안 명확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닥터 페러데이가 표출한 저택에 대한 욕망, 계급적 욕망 때문이었을까. 사랑이 보은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러면 이들이 행복하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이 필요했을까. 

결국 에어즈가는 누군가가 불씨를 지핀 공포에 물들어 하나 둘 미치거나 죽는다. 이미 몰락의 예감때문에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공포는 어쩌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까. 이 소설에서는 단 한명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있더라도 묘사되지 않는다. 어딘가 모두 불만족스러워한다.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미신에 기댄다. 자신이 바랐기에 결혼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도 나온다. 그러면,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세월의 흐름을 잘 슬퍼하고 흘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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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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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나는 입을 열어 당신을 부른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저 쪽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온다. “지금도 여기 있어요,” 아직 서로의 곁에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의 존재가 있기에 내 존재가 의미가 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듯 당신도 나를 의지하기에 나는 힘이 난다. 존재가 존재에게 존재만으로 온기를 전하는 일은 위대하다. 서로가 없다면 세상에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은 물이 되어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스며들어 온 이 온기를 뿌리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새 고스란이 몸 안에 흘러 핏줄기 사이에 줄기줄기 뿌리내린다. 어느 무엇도 이 순간을 갈라놓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뿐. 서로의 존재를 확신하는 우리들만 남아서 다시 서로를 확인하고 쓰다듬는다. 

이 위대함이 없이 우리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가? 미치지 않고 세상에 살아남은 게 용하다는 말이 그릇된 말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 이유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정합적인 과학정보만 진짜 취급하느라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곁을 나눈 사람 뿐이다. 그런데 곁을 나눈 사람과 함께 잘 살다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지? 그 사람은 나와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사람과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어떻게 파악해야 하지? 세계가 전쟁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복수심에 가득차서 서로를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 둘만 곁을 지키며 잘 살 수 있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나와 당신 뿐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내 곁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위대함을 쫓아야 하는가.


『파묻힌 거인』에서 엑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암용이 내뿜는 숨 때문에 안개가 세상을 뒤덮어서, 그들 자신도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닥쳤던 전쟁을 잊어버린다. 부부는 그 기억을 되찾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당시엔 판가름하지 못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 망각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증오심을 기억하고 물려주기를 바란다. 작가는 이것을 동화처럼 그려낸다. 가웨인은 망각을 부르는 암용을 수호하는 역할을, 위스턴은 암용을 죽여 증오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고 하는 역할을 맡는다.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그냥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 하지만 오래된 과거고, 이제는 죽은 뼈들도 기분 좋은 푸른 풀밭 카펫 아래 편히 쉬고 있다오. 젊은 사람들은 그 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오래된 상처들이 영구히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기에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거요. …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오래된 두려움이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되기를 당신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땅속에 하얀 뼈로 묻힌 채 사람들이 파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 p426-427『파묻힌 거인』


유럽의 어떤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세계2차대전을 언급하며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한 학생이 질문했다. 

“세계 2차대전을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세계 1차대전도 있었나요?” 

아직 한 세기도 체 지나지 않은 싸움을 잊어버린 학생이 유럽에만 있는 건 아니다. 역사를 잊어버린 젊은 세대가 교실에 앉아 있다. 이들이 전쟁을, 민주화 과정을 기억하지 않고 평화를 평화로 유지할까. 

일본 우익들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데서 비롯한 증오를 자식세대에게 학습시키려고 교과서를 왜곡한다. 자위대를 키운다. 

누군가가 수직적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지적했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와 소통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끼리만 대화를 주고받는다. sns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내뱉고, 다른 세대가 대화에 끼는 것을 어려워한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도,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말들이 아닐까.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관한 기억이다. 삶으로서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어버릴 정도로 바쁘기만 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자기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워하면서도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고, 살아온 그대로 주어진 생명을 연명하는 걸까. 알 껍질은 너무도 단단하기에, 패배감을 가슴 깊숙히 눌러놓았기에,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아서? '암용은 무시무시하고, 그것을 잊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려면,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암용을 죽일 힘은 없지만 암용을 없애는 데 동의한다. 아서왕 시절 법을 세우고 그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액슬, 그것을 부수고 암용이 세상의 기억을 지우도록 도와서 평화로운 상태를 꿈꾼 가웨인, 평화를 기억하지만 그 이후 경험한 분노를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에 복수를 실현하려는 위스턴, 그리고 아직 어린 세대인 에드윈. 에드윈에게 위스턴은 분노를 학습시키려고 하고,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우리에게는 소통이 필요하다. 무슨 방법이든 논의하려면, 소통이 필요하다고, 서로의 존재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대화가, 아프지만 평화로운 약속을 담은 대화가, 각자의 아픈 역사를 품을 자세로 나누는 대화가. 여전히 "관습과 의심은 사람들을 갈라놓을지라도,"(p443『파묻힌 거인』) 기억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니까."(p468『파묻힌 거인』)


신화적으로 현대사회의 축소판을 그리고서,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p.s.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궁금하다. 무거운 이야기가 신화적으로,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은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 사회를 향한 목소리일까, 아니면 조금 더 부드럽게 마음에 가닿기 위한 장치일까? 피카소가 폭격당한 마을을 묘사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린 것은, 우리가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어떤 사진작가는 잔인한 전쟁 장면을 찍어서 사진전을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것에 충격을 받고 나중에는 사진이 아닌 글로만 책을 냈다. 작가가 리얼리즘 형식이 아닌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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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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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원칙으로 삶을 버텨온 사람의 이야기이다. 혹은 한 인간의 생애에 걸친 종말을 다룬, 소설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는 그 친구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수치감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 p133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버키가 살고 있는 마을에 덮치자, 버키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마을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의 역할은 ‘놀이터’의 체육선생님이었고, 그는 체육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의 든든한 우상이 되어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전염병 앞에서 그런 체육선생님의 위엄은, 별로 위엄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그는 할아버지에게 ‘강인함과 결단력, 신체적으로 용감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해지는 것, 남들에게 휘둘리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 그들이 두뇌를 사용할 줄 안다는 이유로 허약한 유대인이나 계집애 같은 유대인이라는 비방을 당하지 않는 것(p34)’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놀이터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사명감을 가졌다. 폴리오가 발병하고 그가 폴리오를 피해 도망친 이후 그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배운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가 달아난 곳에서도 폴리오가 발생하자 그 자신이 폴리오를 옮긴 것이라고 ‘확신’할정도로, (실재적인 근거는 없었음에도!) 그 일때문에 평생을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을 정도로 그는 그 원칙을 지키려고 ‘순교’했다. 

그런 그를 두고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평가한다. 상황을 상황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살아온 대로만 사고하였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치 그 일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무의미한 ‘종말’이라는 듯이...


나는 필립로스가 그런 인간의 운명을,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하게 첨예하게 그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생의 믿음을 다른 화자를 통해 깨뜨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한 인물이 행동한 것을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읽힐 수도 있지만 ‘운명’이라는 것이 어쩔 도리 없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걸까? 이런 평범한 결론을? 


 인간이 어쩔 도리 없이 맞게 된 어떤 비극적 순간을 어떻게 버텨나가는 지, 그 과정을 지켜보다 그 일이 있은 지 한참 이후를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있으면, 내 삶은 정말 내것인가 궁금해진다.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에 휩쓸려버리면, 나같은 것은 흔적도 없이 와해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미 처음과 끝이 정해져 버린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운명이 아니라,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기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러나 일어난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범주이기에 ‘운명’으로밖에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 그런 의미에서 한 인간의 ‘의식의 동일성’이라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의식이라는 것 역시도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아닐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조금은 평범하게, 작은 꿈을 꾸며 살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걸까. 이 소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기도 하다. 운명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이고 나면, 어차피 똑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건데 조금은 덜 강박적으로,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를 영웅이라 칭한다면, 공동체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영웅인가? 그가 영웅인지 아닌지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모욕하는 일이 아닐까. 그는 영웅이 되기 위해 행동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그가 그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라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라 볼 수도 있다. 그건 그가 책임지고 싶어했던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 그의 삶 자체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은 과업을 완수하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삶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폴리오라는 전염병이 그것을 깨트렸다. 그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마저도 그가 책임지려고 하는 태도가 어쩌면 영웅적이라 불릴 수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으로 실천하는 게 과연 영웅일까. 


그는 신과 대결하였던 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누구를 위한 영웅일지도 모르곘다. ‘효용성’만으로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버키의 일생을 무의미한 것으로 ‘판정’해버린 무례한 일을 했다. 그가 살았던 방식으로 나는 살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그 이유로는 부족하다. 게다가 그 일생을 무의미하다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이런 기로에 서게 만드는 ‘운명’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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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0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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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0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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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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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덕과 명예
도덕을 만든다, 한 국가, 혹은 공동체를 잘 지탱하기 위해 도덕은 필요하다. 이 도덕은 선입견의 영향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공정하지 않은 도덕은 도덕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도덕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로서 개인이 온전히 사회에 어울릴 수 있도록,

대부분의 일은 선의를 가진 사람을 오해하는 데서 생겨난다. 
선입견, 자아도취, 등 
나는 조지에게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 읽어보면 소크라테스는 기존 관념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관습, 관념들이 소피스트의 밥벌이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지와 오해와 악의, 선입견들이 무고한 소크라테스를 죽였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한다면서 정말 자기가 생각하는 이성적 진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은 파훼한다. 쪼개고 나누어서 옳음을 증명한다. 잘잘못을 칼로 나눈다. 마치 아이를 둘로 나누어 해결하라는 판결을 내렸던 솔로몬처럼.(솔로몬의 판결은 정말 아이를 둘로 가르라는 의도에서 내려진 것은 아니라 알려져 있으니, 적절한 비유는 아닌가?) 그렇기에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애초 소피스트들이 그토록 선입견으로 꽉꽉 들어차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소크라테스는 그렇게까지 변론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아닐 수도 있다.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인정한 것까지도, 소크라테스는 존중하고 인정했을 테니까. 소피스트들이 꽉막힌 사람이라 소크라테스를 더 몰아간 것이 아닐까. 혹은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진리'자체를 믿었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한 순수한 인물이라 여기고 있으니, 어떤 점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비판하고 싶은 것들을 비판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때때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 믿는 순수함은 그 자체로 폭력으로서 상대에게 작용하기도 하니까. 어떤 것이 답일지는,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당시 희생당한 혹은 진리에 순교한 사람으로 비추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해석이 더 적절할까? 다른 해석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공격을 받은 소피스트들의 선입견은 밥벌이가 걸려 있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너를 찌른다.' 마치 전쟁터같다. 
전쟁중에도 도덕이라는 건 필요하지 않나? 어떤 평화가 더 좋은 평화인지는 수많은 논의를 거쳐야 하고, 그 논의는 끝나지 않아야 하지만, 그 와중이라 하더라도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중요하다. 보통 전쟁중에는 평화라는 것이 어디로 숨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다르게 보이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역동하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고 믿는다. 피난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평화를 찾아 떠난다. 그러면 상대편이 적이라면서 적군을 죽이는 사람들은? 역설적이지만,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적을 죽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편은 죽이지 않는 '도덕률'을 적용한다.
스텐퍼드셔에서는 기이하게도 평화를 위해 조지가 희생된다. 조지를 위한 도덕적인 판단은 배제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조지를 제거한다. 조지는 터무니없는 고발과 변호와 증언때문에 감옥에 갇힌다. 죄가 없는데도. 앤슨 대위는 자신의 자아도취를 지켜내려고 조지를 계속 유죄로 몰고 간다. 그 일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방식을 지키는 일이고, 그가 손에 쥔 권력과 밥벌이를 지키려는 일일 것이다. 어쨋든 그들, 자아도취에 빠진 자들은 증거물 앞에서, 철저한 논증 앞에서 다시금 항복을 선언한다. 그럼에도 밥그릇은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고, 그것까지 빼앗지는 못했다.
타자가 평화의 상태에 있지 않은데 내가 평화로우리라는 주장은, 도덕적이지 않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를 억누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진정한 평화를 위한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소외된 조지가 그나마의 평화를 얻은 것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도덕적인간인 '아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다른사람에게만 평화로운 상황이 되어있는 이 불편한 상태를 바꾸려고 나선다. 그러니까, 도덕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그 사람이 진정 어떤 사람이든,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덕이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덕목이고 그건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인지시켜주는 동시에 함께 살 궁리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명예가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상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그러니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길일지도 모른다. 


마무리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아서 코난 도일', 그리고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때문에 희생된 '조지 에들러' 그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철저하게 각자 화자의 시선에서 서술되었고, 그러므로 독자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지 않으면 화자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어느정도인지 잘 살피기 어렵다. 하지만 그게 많은 단서를 가져다준다. 어쩌면 이런 서술방식은 작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완하는 소설적 장치로서 사용되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작품성을(작품 내에서 모자란 점을) 작가와 긴밀하게 연결시키지 않아도, 그 자체로 화자가 결점을 가진 존재이므로, 소설가의 결점으로 읽히지 않고 화자의 결점으로 읽히는, 그렇기에 작품으로서는 나은 조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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