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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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p77 (사이보그 선언문)

요약하자면 서구 전통에서는 특정 이원론들이 유지되어왔다. 이 이원론 모두는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 - 간단히 말해 자아를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하라고 동원된 타자-로 이루어진 모든 이들을 지배하는 논리 및 실천 체계를 제공해왔다. 이 골치아픈 이원론에서는 자아/타자, 정신/육체, 문화/자연, 남성/여성, 문명/원시, 실재/외양, 전체/부분, 행위자/자원, 제작자/생산물, 능동/수동, 옳음/그름, 진실/환상, 총체/부분, 신/인간과 같은 것이 중요하다. 지배되지 않은 주체이며, 타자의 섬김에 의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자아다. ... 하지만 주체됨은 환상이며 그때문에 타자와 함께 종말의 변증법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p77

기원이 없는 사이보그. 뿌리를 잘라내는 사이보그. "타자를 거울 삼아 자아를 재생산하는" 인간과는 달리, 여성이라는 범주조차도 사라져버린. 신화조차도 없는. 언어가 나와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분리하면서 하나보다 더 많지만 둘보다는 작은 것을 생성하듯이. 나는 이 사이보그 선언문으로 되고자 하는 인간이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잘라내고 하나보다 더 많지만 둘보다는 작은 존재가 되려는 시도로 읽혔다. 그러나 그의 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계는 생명을 불어넣거나 숭배하거나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이고, 우리의 작동방식, 체현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기계를 책임감있게 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p83

그는 잘라낸  무중력의 관계에 책임을 넣는다. 그러니, 그가 꿈꾸던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관계의 재조립이었다. 구태의연하고 지킬 이유가 없는 고리를 끊고, 책임의 관계로 재창조하는 꿈. 그것이 사이보그의 꿈이었던 것. 

첫째, 보편적이고 총체화하는 이론을 고안하면, 아마도 언제나, 지금은 확실히, 현실 전반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둘째, 과학기술의 사회관계에 대한 책임은, 반과학적 형이상학과 기술의 악마학을 거부함으로써,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능숙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p85-p86

그의 의견과 이상에 동의하나, 사이보그로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반려종 선언에서 그 나머지 답을 찾는다.

2. 더불어 되기의 기쁨. (반려종 선언)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p123

창발된 실천이 필요하다. 서로 다르게 물려받은 역사, 그리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동의 미래 모두를 책임질 수 있는, 부조화스러운 행위 주체들과 삶의 방식을 적당히 꿰맞추는 작업, 취약하지만 기초적인 작업 말이다. 소중한 타자성은 내게 이런 뜻이다. p125

<반려종 선언>은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삶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다양한 존재자가 그 이야기 속으로 호명되고, 그 이야기는 위생적 거리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 나는 독자들에게 기술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와 사실 모두의 차원에서, 자연문화의 공생발생적 신체조직을 가진 존재인 우리가 되었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다. p136

이와 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영원한 합일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 번역이 필요하다. p147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주문은 우리 대부분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바로 그것, 더 정확히 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추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대일 관계, 연결된 타자성을 통해 개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p173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p178

이것은 존재론적 안무다.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몸과 마음의 역사를 통해 발견해내고,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육체적인 동사로 다시 만들어낸, 필수적인 놀이다. 이 게임을 발명한 것은 그들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들을 새로 만든다. 다시 한번, 메타플라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이 지닌 생물학적 맛을 언제나 다시 음미한다. 이 말은 필멸의 자연문화 속에 육신으로 만들어져 있다. p240



나이든 부모님을 마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돌봄을 할 수 있을까? 

참여하는 세미나에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상호 돌봄"이라는 말. 자식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동안  나 역시도 나 한 몸 먹여 살리는 존재가 되었으며, 내가 자식을 돌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고. 당신 혼자였으면, 엉망으로 살았으리라고. 그러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본 것이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상호 돌봄이므로, 돌봄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끝없이 우울로 치닫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를 어떻게든 살게 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 할 수 있는 게 있었겠는지. 아마도 아니었을 수 있다. 당신이 살아남은 것은 당신이 결심한 일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결심한 일이다.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은 까닭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적어도 나는 그렇다. 삶이 아무리 무의미해도, 당신의 마지막은 보고 끝내자고 생각했으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남았고. 그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하자. 지금은 살아남았지만, 언젠가는 자의가 아닌 이유로 이별하겠지. 

우리는 어떻게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을까? 당신의 사소한 습관부터, 신경질적인 면모까지, 나는 당신을 닮아 있었으니, 나는 당신과는 다른 몸을 가지고, 어느 날에 다른 소통방법을 배워왔고, 우리는 어느 순간엔 말로 소통하는 것을 중단하고, 우선 포옹을 한다. 

나는 품안에 들어오던 우리의 온기를 기억할거야, 살과 살이 맞닿지는 않아도, 옷 사이로 스미는 온기를 기억할거야. 맞닿은 것처럼 고요하게 박자를 맞추며 뛰는 심장소리를 기억할거야. 그 순간들이 당신을 돌보는 일을 해내도록 만들기를, 당신과의 이별을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게 만들기를 바라면서, 나는 매번 힘을 내기 위해 포옹을 준비한다. 억지로 붙들지도 않고, 꽉 매달리지도 않으면서, 느슨하게 마주안은 품 안의 온기를 내내 기억하면서, 이별 후에 내게 남은 삶을 힘내서 마저 살아가다가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이별을 준비할 수 있기를. 매 순간의 만남이 끝을 예감하는 일인 것처럼, 나는 슬퍼졌다가, 할 일을 도로 내일로 미뤘다가, 다시 오늘 해야할 일을 끌어온다. 이 온기를 기억하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자주. 생각나는 때에는, 매달리고 싶을 때에는 당신의 품을 요청한다. 나는 자주 그렇게 당신 앞에서 아이가 된다. 그리고 그게 당신에겐 만족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니지만, 포옹하는 순간에는 당신의 것이니까.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는 그 순간에는 당신의 소유가 된다. 그리고 이 포옹이 우리가 찾아낸 놀이였다. 기쁨을 담아, 증오를 담아, 상대를 꽉 쥐었다가 놓고, 들어올리고, 키를 비교하고, 등을 토닥이거나, 어깨에 기대거나. 우리는 그때 그 순간 우리의 기분을 포옹이라는 틀 안에서 전달했다. 언젠가 내가 감당해야 할 노동도, 이 기쁨으로 감당해내기를 바랐다.

3.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p288 (반려자들의 대화)

절멸, 멸종, 종 학살의 시대에 진정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요? 
"죽일 수는 있지만 살해할 수는 없게"뿐만 아니라 또 "죽이지 말지어다"가 아니라,...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가 됩니다. ...
'우리'의 '삶'의 방식 전체가 엄청난 규모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의 폭력으로 수식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죽임이나 처형이 아니라, 분명히 죽일 수 있지만 살해할 수는 없게 만드는 관행을 통해 대대적으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 말이죠. 공장식 축산의 경우 처럼요. p286-289

인간이든 아니든 죽여도 괜찮은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죽이는 것이 가끔은 가장 책임 있는 행동, 심지어는 좋은 행동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절대 무고한 행동은 아닐 거에요. 어떻게 하면 정말로 무고하지 않음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로요. 저는, 생명우선 입장을 취하는 한은 책임감 있게 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고함에 대한 추구는 절멸주의와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에는 필멸이라는 우리 삶의 조건에서는 생명우선이 아닌 지속우선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291


사람이든 동물이든, 이 자본의 소용돌이에 묶여 자본을 생산하느라 자신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인식하거나, 타자를 죽여도 되는 존재로 파악한다. 나는 여기 탈피하고자 내 죽음과 나와 연결된 사람의 죽음, 나와 연결된 동물의 죽음에 내 손이 닿는 한 책임을 다하고 싶다. 이 다짐에서부터 시작하자. 우리각자가 각자의 삶에서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쌓아올린 관계들을 발견하고 귀히 여기자. 

4. 마무리하며.

요즘 집중하는 게 너무 힘들다. 그건 아마 내가 나를 보기 힘들어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문득 깨달았다. 내내, 사는 동안은 친구일 줄 알았던 친구와 관계가 단절되고 난 이후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 그 이전부터, 책을 읽는 게 힘들었다. 내가 오래 좋아하던 친구는 행복할 때 연락하라고,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 말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를 감당하는 게 힘들었다. 계속 달라지고 싶었는데, 내내 나를 벗어나고 싶어했는데, 그게 나를 갉아먹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친구는 내가 고장난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서 오히려 고장난 상태에서 머무른 게 아니냐 했다. 어찌되었건, 관계의 춤을 출 수 없었던 건 내가 고장난 사람이었기 떄문이다. 어차피 관계가 단절될 거라면 나는 무엇으로부터 달아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고장난 채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오늘에야 글자가 하나씩 읽힌다. 결론이 이상하지만, 이게 내가 존재의 춤을 추는 방식이라 인정한 이후엔, 나는 내가 지금 당장 존재하는 형태 때문에 나를 더 갉아먹지는 않을테니, 이제부턴 독서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도망치려 했던 나를 도로 거둬들일  수 있으니, 나는 이제 준비가 된 것도 같다. 

0. 여담으로 남은 의문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쩐지 제이슨 무어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가 많이 생각난다 싶더니.. 296p에 인용하시더라. 제이슨 무어의 책에 해러웨이의 추천사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무어는 마르크스의 사고체계를 비판한다고 여겼기에 마르크스주의 정치생태학자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서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자본을 비판하면.. 마르크스주의로 분류되는 겁니까? 맑스가 자본을 비판하던 틀을 비판해도? 맑스 세계관의 확장은 어디까지..? 아니면 내가 뭘 잘 못 읽었나. 
맑스무식자 혹은 학문분류체계 무식자의 의문은 여기선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으니 우선 내버려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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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7-14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는 적고 둘은 많다 - 라면 먹을 때마다 느끼는 말입니다.

우끼 2023-07-14 17:32   좋아요 1 | URL
그렇담 한 개 반을 끓이고 냉장고에 반 개를 킵해두는건..?(아무도 해답을 묻지 않았다)

2023-07-14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4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07-14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이네요. 역시 해러웨이....
분류체계 해체하세요.ㅋㅋㅋㅋ 용기가 안나신다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추천드립니다. 세상에는 분류학이라는 학문이 있답디다. 체질에 맞는 사람은 모를까... 그거 하려고 하면 우회로에서 길을 잃을 테니 지금 하시는 것 처럼 직진하시고요.

우끼님. 고장나있는 나를 인정하기 싫어서 나도 어떤 친구와 단절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하느니 친구를 보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까지가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이 더 심해지기도 했어요. 세상에는 타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더 수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나를 더 생각하자가 아니라 타인과 내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더 집요한 더더 집요한 인식일지도 모르겠어요. 그걸 더 파고 들면....

나는 나라는 친구를 사귀고 있다고 생각해요. 친구한테는 좀 더 관대해지잖아요?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내게 하는 말이 될 때도 있습니다. 관계는 유한하지만 나와의 관계는 살아있는 한은 계속되니까요. 잘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우끼 2023-07-14 18:00   좋아요 1 | URL
앗 저도 그 책 읽었어요 ㅎㅎ 결말부분은 조금 허탈했지만요 ㅎㅎ 분류는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타인과 내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집요한 인식 ㅜㅠ 이 말씀에 정말 공감 도장 꽝꽝 찍고 갑니다. 나라는 친구 사귀고 있다는 표현에도요!! ㅠㅠ 저도 그렇게 정리했거든요 ㅎㅎ잘 지내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난티나무 2023-07-14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 2222222

우끼 2023-07-14 17: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난티님!! 저두 항상 난티님 글 잘 읽고 있어요 ㅎㅎ
 














역자서문 

"근대와 근대적 인간은 주지하다시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기호를 달고 탄생하였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 인간과 지구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작위성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서술할 수 없는 신을 배제하면 모든 관심이 우리가 알 수 있고, 만들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집중된다. 이런 관점에서 근데의 이데올로기는 '가능한 것은 만들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근대인은 자신과 이 지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 전체주의의 핵심적인 체계는 전체주의적 정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p31-32


인간의 삶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인간조건을 파괴하는 기술의 근본악을 이해할 수 있는가? p34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어야 하며, 둘째,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 생명, 세계성, 다원성(신판:다수성)을 인간 실존의 세 조건이라고 명명한다... 탄생성과 사멸성은 이들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선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p35-36


전체주의는 그것이 정치적이든 기술적이든 간에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기 떄문에 궁극적으로 수단만을 영구화할 뿐이다. 목적이 없으면 시작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인간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창조라는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p36


정신은 본래 신에 의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을 추구하는 자기애는 이미 올바른 이웃사랑과 동시에 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한편으로는 인간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신을 추구할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정신을 추구할 때에만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거부하는 어떤 완전성의 추구도 결국은 탄생성의 조건을 스스로 파괴하기에,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이 유한한 세계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행위양식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다. p37


노동이 인간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라 다른 여러 활동양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탄생성의 회복은 인간조건에 대한 성찰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나치의 전체주의를 겪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에게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줄 '공통의 공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단언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를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적 활동을 제외하고 신체적 활동(Vita activa)을 '노동', '작업', '행위'로 범주화하여 해명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철학적 인간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한나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유하지 않음'과 실천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진단한다.p38-39



언제부터 할 수 없다는 느낌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면의 나와 화해하지 못한 채로 결국 스스로 내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봄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느낌을 존중하지 않기로 하고 나를 최대한 갈아넣었다. 노력의 결과물을 얻지 못한 채로 건강만 망친 채로 살던 와중에, 돌봄을 행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에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그는 마땅한 직업도 가지지 못할 나이부터 돌봄을 시작하여, 늘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빚을 지다가, 그의 돌봄을 받던 사람의 허락 하에 생명유지장치를 껐고, 그떄문에 살인죄로 재판장에 섰다. 그 기사를 보고, 그것이 내 미래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내내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설령 그게 내 미래가 되지 않더라도, 그 일을 겪어야만 했던 그 동시대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왜 그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했나. 그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서 죽였겠는지. 그는 그 순간에 이미 몇 년을 미친 상태로 버텼는데. 그리고 사법부가 그런 판단을 내린 것도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누구도 그를 그 순간까지 도울 수 없었는지. 왜 우리에겐 돌봄을 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왜 돌봄이 오롯이 개인의 몫이기만 한 것인지. 
















기후정의라는 책을 쓴 저자가 쓴 서문이 어렴풋이 기억났고, 여기 적기 위해서 찾아보았다. 기후위기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자신은 어떠한 희망도 가지지 않는다고, 애를 써야겠지만, 자신할 수 없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강연을 하고 나서, 자신의 강연을 듣던 청소년의 눈을 보게 되었다고. 그제서야, 아, 자신이 잘못하고 있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겁을 줘서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다 생각했던지, '기후우울증'을 배설하고 있었던 것인지. 무슨 권리로 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일지 싶었고, 그 이후로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합류하여 사회운동을 했다고 했다. 나는 요즘에야 이 말이 무슨 뜻이었는 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기후우울증을 배설하지만, 이것이 널리 퍼지기를 바라지는 못했다. 같이 우울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아예 기후위기가 아무 일도 아니라 여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소중한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지만, 그냥 내가 너무 우울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사람을 만나기에 적절하지는 않았다는 걸 나도 알아서, 공감했던 것 같다. 

나는 내내 기후우울증을 앓고 있던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매일 기후위기를 느끼기 이전에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영화를 본 이후에는 동물을 먹는다는 사실에 우울했고, 안티 페미니즘 사태와, N번방 사태를 맞닥뜨린 이후에는 그에 관한 우울을 앓고 있었다. 내내 우울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내가 우울한 사람이라 우울을 끌어들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 사건들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나는 내 우울을 감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내 기후우울증을 전시했던 사람이면서, 동시에 무엇을 해야할 지 갈피를 못잡던 사람이었다. 

내가 몇년 전에 살던 곳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쓰레기를 하루만에 배출했는데, 대부분이 배달음식쓰레기였다. 아무도 그릇을 씻어서 내놓지 않고, 음식물과 분리하지 않고 배출했으며, 매일 플라스틱 컵을 새롭게 버렸다. 분리수거만으로 해결될 일인가 싶을 정도로 하루만에 몇봉투의 쓰레기가 쏟아졌다. 그곳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매립장이 곧 찬다는 뉴스를 보았고, 배달음식 쓰레기를 수거하다 과로하는 청소노동자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뉴스를 보았다. 또 생분해 컵이 친환경이려면 이것을 6개월간 특정 온도를 유지하며 묻을 장소가 필요한데, 그런 처리를 위한 시설이 또 필요한데 국내에는 없으며, 그냥 매장시에는 플라스틱과 같이 썩지 않아서, 결론적으로 순환할 겨를도 없다는 뉴스도 보았다. 나는 쓰레기를 마구 양산하는 행동이 미웠다. 왜 사람이 버리는 쓰레기에, 어떤 생물들은 먹이가 아닌 것을 먹고 죽어야 하는 건가 싶어졌다.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내가 느끼는 심각성을 같이 이야기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담스럽다는 말과 함꼐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쓰레기를 계속 많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고 언제까지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문제인데. 왜 나만 노력하는 건지. 내가 이들을 질투하여, 이렇게 편하게 쓰레기를 버리며 사는 것을 질투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 무렵부터 누군가와 이와 관해 대화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신뢰하는 사람이 점차 줄었다. 사람을 믿지 않았다. 편리함 앞에서는 공동의 책임도 무시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그 무렵 하던 일을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성과가 잘 나오지 않았는데 몸이 버텨주지 않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사를 했다.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어차피 우울할 거, 무엇이든 해보자 싶어서, 체제전환과 기후정의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강연을, 반쯤은 냉소하면서 들으러 갔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간 것이었고. 나는 거기서 강의 중반부부터 눈물을 쏟았다. 지금와서 기억나는 건 많지 않다. 광물을 캐기 위하여 파헤쳐진 땅. 거기 남은 거대한 구멍. 돈을 벌기 위해서 하나둘씩,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던 도덕성을 철회하고, 그 이후로 자연이 얼마나 많이 파괴된 채로 방치되었는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어떻게 수탈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수탈당하고 있는지.  기후위기로 인한 가뭄과 홍수가 어떻게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지. 그리고 이윽고, 에너지 및 식량을 통해서 사람을 종속시켜 돈을 벌려고, 우리 삶의 필수품까지 수탈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 들었다. 
이전에도 거대종자회사에서 1년만 생산할 수 있는 종자를 매년 비싸게 판매한다고 농사짓는 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한국 어딘가에 설치된 태양광발전에 해외자본이 투자되었으며, 이윤이 나지 않으면 이 자본을 철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그렇게 되면, 여기서 나는 이윤 이상으로 빚이 나면, 한국정부가 우리 세금을 또 빚 갚는데 써야 하는 형국이 될 수 있단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이 사람은 진짜 체제전환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구나. 깨달았다. 우리의 문제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강연자에게는 다가가지 않았다. 무엇이든 하려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무서워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토록 절박한 까닭에,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다가가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이미 행동하는 사람은 나를 비난할까봐 믿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미워했다. 사람 자체가 미운 게 아니고, 행동이 미웠다. 그렇지만 그게 구별되어 표현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아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면서,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 

4.14 기후정의파업을 설명한다는 사람의 강연을 들으러 간 건 또 울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의무감으로. 함꼐하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 운동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를 밀어넣어서,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다른 동력을 얻으려고 했던 것 같다. 꿀벌이 노동하는 시기와 올해 꽃이 피는 시기와 겹치지 않을 수 있어서, 꿀벌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부터였을까. 삼척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화력발전소를 없애야 한다고, 자신의 일터를 없애고, 그들 자신에게도 일자리를 마련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이뤄야 한다는 마음으로 4.14 기후정의파업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부터였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간헐적으로 울고 있었지만 울컥 눈물이 터져나왔을 때가 기억난다. 2021년 선진국 국가 17개국을 대상으로 '무엇이 당신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가족인데 한국만 물질적 풍요로 답했다고 했다. 강연자가 이게 한국인이 속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이 하나도 없어서, 물질적 풍요로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서 그런거라고. 공공재로, 기본재로 있어야 하는 게 전부 사유화되고, 경쟁체제로 내몰렸기 떄문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마스크에 눈물이 흡수되었고, 나를 굳이 보고 뭐라 할 사람이 없었어서, 그냥 울고 있었다. 그리고 강연자는 말했다. 개인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투자자본으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것을 막는게 더 중요하다고. 개인이 발생시킬 수 있는 이산화탄소는 한계가 있지만 거대자본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는 한계가 없다고. 그래서 이 기후위기 시대에, 금융기업,포스코,두산 등 대기업들이 투자한 석탄화력발전소가 새로 지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이들이 핵발전소, 육식산업, 생명자본주의에 투자할 때,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 것이라 절대 감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들에게 책임을 묻게 해야 한다고. 이번에 민간에서는 에너지 비용이 상승했는데, 거대 투자기업들은 횡재세도 내지 않고 이익을 취득하지 않았느냐고. 내내 공기업이 적자라고 말하는 내막에는, 주주배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당신은 아직 희망을 믿는다고. 행동하면 그게 당신의 말이 되고, 설득력이 생긴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화를 내기만 했지, 믿고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누구든지 속도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가지지 않았다. 현실을 보고 절망할 때면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후붕괴의 속도를 늦출 가능성이 되려고 그들이 노력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다. 

이산화탄소는 대기중에 100년 유지되고, 메탄은 25년이니, 우리는 지난 세기의 이산화탄소와 우리가 현재 내뿜은 이산화탄소의 총체로 현재를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가 할 행동이 누적되어 미래세대의 대기환경이 결정된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넷제로. 즉 탄소 중립이 아니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하는 목표를 마주하고 있다.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멈추지 않을 테니까. 이것은 불가능해보이지만, 사회가 경쟁체제로 가지 않으면, 산업부문의 에너지를 확 줄일 수 있으니 가능할 수 있다고. 그러니,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가능해지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모두 실어서, 반자본 대정부 투쟁으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려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 어떻게 어그러질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배우고 싶다. 


 지금 당장 완벽할 것을 요구하는 건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건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운 전체주의적 태도였다. 내내 할 수 없다 여긴 걸 스스로에게 강요해왔고, 그걸 마찬가지로 타인을 대할 떄도 그렇게 행동한 거다. 그러니 타인을 대할 떄도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 나도 변하는 존재고, 타인도 변하는 존재니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변할 지는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나는 긍정적으로 아직은 변화가능하다고 믿고. 그 방향으로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행동해보고 싶었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긍정적인 나비효과가 되기를. 우리 자신을 살리기를. 이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 나는 나를 초월한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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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5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26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0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4-13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점심 먹다가 또 눈물 닦네요;;;
우끼 님 페이퍼는 점심 먹다가 저 눈물 닦는 용....?

공쟝쟝 2023-04-13 13:22   좋아요 1 | URL
내 글도 읽다가 울어줄래요?

잠자냥 2023-04-13 14:10   좋아요 1 | URL
미안해 그런 적이 없었어.......
도리어 최근에 쟝 페이퍼에 단 내 댓글 보고 울컥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끼 님이 위로받았다는 그 댓글)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3 14:28   좋아요 2 | URL
자신에게 울컥하는 냥 ㅋㅋㅋㅋ

우끼 2023-04-13 22:27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과 다락방님, 공쟝쟝님 대디님 등등 서재에 계신 분들 덕분에 쓸 수 있던 리뷰입니다 ㅜㅜ ㅋㅋ 사실 저번에 시집 리뷰에 달아주신 댓글 보고 울컥했거든요 .. 감사하기도 하구요. 열려있으려는 노력을 해야하는구나 생각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그래야할 이유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어제자 뉴스를 오늘 읽었고 읽기를 미루었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심층적응도 다 읽지 못했는데…


아래는 기사의 첫 문단이다.

“2040년 이전까지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막으려는 인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육지와 해양에서 생물이 감소해 식량 자원은 부족하고 곳곳에서 가뭄과 홍수, 이상 고온과 저온 현상으로 인한 기후 재난이 빈번할 것으로 보인다. 전세계 과학자와 195개국 정부 관계자가 참여한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6차 종합보고서에 담긴 미래다.”

https://v.daum.net/v/20230320220053656

”1.5도 온난화 상황에서는 10만5000개의 육지 생물 종 가운데 곤충의 6%, 식물의 8%, 척추동물의 4%가 서식 공간의 절반 이상을 잃는다. 해양 생물 종이 본래의 서식지보다 고위도로 16도 가량 이동하며 일대 혼란이 생기고, 해양 생물이 서식지로 삼는 산호초의 70~90%가 백화현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1.5도를 사수하려는 이유는 인류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피해와 손실을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 온도가 평균 2도 오르면, 산호초의 99%가 죽는 멸종 상태에 이를 수 있다. IPCC 6차 보고서는 향후 10년 간 인류의 대응이 젊은 세대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지적한다. 1.5도 상승으로 인한 재난에 대비하는 동시에 그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



원전밀집도 1위인 한국은 핵발전소(원자력발전소)를 추가로 건설중이다. 현재 지어진 핵발전소는 활성지진대 위에 설치되어 있다.
사용후 핵연료문제는 전 세계 어디도 명확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문제이다. 일본의 기술자는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이 현실불가능한데 시도를 지속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사용후 핵연료 문제:아포리아 kbs)
땅에 묻는 것을 실현한 곳도 핀란드 한 곳 뿐이다. 10만년이라는 세월을 지하수를 오염시키지 않고 버틸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지만, 그나마 나은 점은 모든 정보가 공개된다는 점이다.

소형 원전 역시 같은 방사능 물질이 나오므로 대안이 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12년,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리라고 결정했고 올해 시행될 예정이다. 그 방도가 가장 싸기 때문이다. 4월이라는 말이 있고 6월이라는 말도 있는데 … 언제든 간에 방사능 오염수는 약 20년-30년 배출될 분량이라고 한다. 이게 전부인지 앞으로 폐로과정을 거치면서 더 생겨나는지 알 수 없다 … 이 오염수에 포함된 방사능 물질의 구성요소는 일본정부가 밝힌 바 없다.

https://amp.seoul.co.kr/seoul/20220723500023
후쿠시마 사고 후처리는 아직도 현재진행중이다. 로봇이 들어가면 반도체 회로가 타버려서 사람이 작업해야만 하는 곳이라 작업자들이 피폭을 감수하고 그곳에 들어간다.

방사능은 노출되는 정도에 비례해 암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핵발전소(원전) 인근에 사는 주민들의 몸에서는 방사능 물질의 한 종류인 삼중수소가 배출된다. 그렇게 안전하다 광고했고 아직 사고도 나지 않은 곳에서도 방사능 물질은 배출된다. 벌써 약 10년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현재 인근 주민들은 국가를 대상으로 이주대책 마련을 촉구하거나, 갑상선암 발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송을 진행중이거나, 탈핵을 주장한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자는 대를 이어 방사능피해로 고통받고 있고, 체르노빌은 아직 인간에게는 죽음의 땅이다.

앞으로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 핵발전소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날이 뜨거워지면, 열을 식히려 바닷물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바닷물도 지구 온도가 오르면서 같이 오를 것이기에, 열을 식힐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위험하다. 또 예기치 않은 홍수로 물에 잠기면 방사능물질이 “관리”될 수 있는가? 후쿠시마 사고도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때문에 전력차단이 되고 원전 몇기가 한꺼번에 폭발한 사고이지 않았나.

이와중에 뉴스에는 한수원이 과징금을 받은 사건이 눈에 보인다. 부실 용접 때문이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핵발전소가 안전하다 광고되며 신규로 건설되는 이유는 돈이 원인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안전이 담보되지 않고도 정부가 자금을 주는게 어떻게 이렇게 쉬울 수 있는건지…??

https://m.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80984.html

이 상황에서 걱정하는 것은,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문제라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안전보다, 인권보다, 돈을 당장 벌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원칙이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필요한 이유도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 아니었던지.
결정권자 따로 피해입는 자 따로 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안을 숨기지 않고 전부 오픈해야만, 사용후 핵연료 문제에 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도 있다.(아직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사용후핵연료갈등 책을 쓴 저자가 kbs다큐 : 사용후 핵연료 문제: 아포리아에서 이렇게 발언한 것을 들었다..)

아래는 관련 기사들이다. 

"이윤만 쫓는 에너지 체제에 맞서 투쟁하자 _4.14 기후정의파업

흔히 간과되곤 하지만, 에너지 수요 감축과 에너지 소비 효율화는 에너지 전환의 중요한 축이다. 수요 감축과 소비 효율화는 재생에너지 발전소를 늘린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공공교통 중심의 교통 시스템 변화, 단열을 강화한 건물·건축 규제 및 리모델링, 산업계의 에너지·자원 소비 축소가 중요하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국제에너지기구(IEA) 등은 에너지 효율성 향상 및 소비 감축으로 2050년까지 요구되는 에너지 관련 배출량 감소의 최대 40%를 달성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이런 영역의 변화도 지금까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에너지 소비 감축도 요원한 일이라고 전망한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기업은 에너지를 더 많이 판매할수록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또한 공공교통으로의 시스템 변화,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건축 규제와 건물의 대규모 개축은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지만 거기서 이윤이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영역에도 인위적인 시장을 조성해서 수익이 발생하는 사업으로 뒤바꿀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전문가들은 그런 궁리를 하지만, 실제로 작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과 같이 기업과 투자자의 '이윤을 위한 에너지 체제'가 지속되는 한 에너지 소비 감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부와 기업은 소비 감축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애먼 시민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스스로에겐 면죄부를 주고 있다.

우리가 에너지 전환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더 이상 이윤을 위한 에너지 체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변화의 핵심에는 에너지 생산·소비와 효율화·감축 등 모든 에너지 시스템의 '탈시장화'와 '탈상품화'가 있다. 시급한 전환을 위해서 이윤을 위한 에너지 체제를 공공성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10929

윤석열 정부, 산업계 ‘온실가스 감축’ 부담 줄인 ‘탄소중립 기본계획’ 발표

https://v.daum.net/v/20230321092031467


“젊은층 권리 침해”…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낮춘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행정소송

https://m.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84406.html#cb

“향후 10년 동안 시행된 선택과 행동은 수천년 동안 영향을 미칠 것이다.”

1천명이 넘는 과학자가 내놓은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195개국의 650여명 대표단이 만장일치로 이 메시지를 승인한 것은, 무엇보다도 ‘탄소예산’(지구 기온을 특정 온도 이내로 붙잡아두기 위해 허용되는 온실가스 배출 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감 때문으로 보인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844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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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3-2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문제는 모두 차치하더라도 발전단가가 싸다는 이유로 폐기물의 대안이 없이 계속 발전하는 것은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나머지 비용과 고통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나마 전정부에서 원자력 발전비율을 20% 초반까지 낮추었는데 이번 정부에서는 30% 이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있어 많이 걱정됩니다. ㅠㅠ

우끼 2023-03-21 15:17   좋아요 1 | URL
발전단가에 폐기물 처리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싸다고 생각합니다 ㅠㅠ 그나마 현재 지어진 안전시설도 다른 국가 원전시설에 비해 단가가 싸게 지어졌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핵발전소 인근에 대도시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 말고는 또 없다고 들었는데.. 안그래도 근래 발표된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행정소송 제기하였다고 합니다

stella.K 2023-03-21 16: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우려스럽긴 해요.
특히 김정은이 동해상으로 하도 미사일을 쏴서
동해안이 남아날까 싶어요.
이런 건 국제범죄로 규정하고 엄히 문책을 해야할텐데
강건나 불구경이네요.ㅠ

우끼 2023-03-21 19:17   좋아요 2 | URL
제가 국제정치학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이 사안에 관하여 뭐라고 제 의견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저는 김정은이 그의 방식대로 정권유지에 실패해도, 이대로 계속 유지해도 딜레마상황에 처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중국이나 미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그게 우리나라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우려스럽고요... 강대국이건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건 핵을 보유하지 않는 게 어떻게 가능할지, 아마 더 오래전부터 고민해오신 분들이 계실 테니 아마 그부분 공부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인버스 - 욕망의 세계
단요 지음 / 마카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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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이 금융자본주의를 마냥 예찬하기만 했으면 이 책에 몰입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돈의 속성에 관하여, 도박에 빠지는 사람의 심리에 관하여, 그걸 허용하는 합법적인 시스템과 정부,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나열된 불법적인 일과 그 경계에 있는 일에 관하여, 어떻게 이렇게 잘 드러낼 수 있는지, 그마저도 옳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휘말려들어가는 사건을 쓰는 힘에 놀랐다. 장편인데 지루한 곳 하나 없이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고 읽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나, 소망 등이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적응하지 못한 본래의 삶에서 느낀 좌절감도, 스스로 한 말을 번복해야 하고 사람들을 실망시켜야 하는 그런 과정들도...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좌절감도. 그럼에도 계속 그가 바라는 삶을 놓치 못하는 것도, 바라는 삶을 놓아버릴 정도로 수단에 집착하여 주객전도가 되는 모습도, 내가 봐왔고 겪었던 일들과 비슷했다. 나는 금융자본주의가 지닌 속성을 경멸하기만 해왔던 사람이라, 이 욕망이 이토록 좋고 나쁜 의미에서 인간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할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전통적 의미에서 인간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성을 몰살하고서라도 쫓는 욕망과, 그 욕망의 파괴적인 속성, 그 파괴적인 욕망을 좇은 이유가 인간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앞으로도, 그가 걸었던 길과 비슷한 길을 전혀 갈 생각이 없으므로, 이 책은 내게 완전한 판타지 소설 속의 이야기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판타지 소설은 현실의 은유이므로. 이토록 선명하게 현실을 비틀어 만들어낸 판타지를 판타지소설이니 뭐니 하는 표현으로 말하는 것조차도 이상한 것 같기는 하다. 여러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이 사태에 이 시대에 사는 다수가 한 번쯤은 얉게나마 발을 담궈보았을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다수의 사람들이 주식을 한다고 말을 했었기도 하고... 나는 노동수익으로 삶을 꾸려갈 수 없어서 주식을 하는 사람들이 회사의 발전과 안정을 통해 수익을 얻으려고 하는 거라고 믿고 있었기 떄문에, 이는 위험부담을 개인이 어느정도 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돈을 버는 일이고, 불로소득과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한다. 모든 불로소득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예 노동을 할 수 없더라도, 그를 위한 수입은 필요하다. 투자자, 또는 피투자자가 되어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건 이상하다. 투자자나 피투자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버려진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느정도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이들의 노동력을 그렇지 않은 사람과 동등하게 놓고, 해낸 만큼만 수입을 준다고 하면, 임금 노동자의 수입이 능력에 따라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기준에서 조금씩 더 주어진다는 사실이 잊혀진다....  누군가는 크게 차등을 두는 게 옳다고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한 가치만큼 주는 것도 측정이 어렵다는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능력주의'를 표방한 곳마저도 그렇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사업가'로 일해야만 하는가? 이것 역시도 이상하다. 모두가 사업가가 되면, 모두가 사업가로 살아남을 수는 있는가? 대다수는 대기업에 병합되거나 하청업체가 되지 않던가?
편향적으로 주어지는 불로소득,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고 역할을 하는 개인과는 무관하게, 그 시스템이 괜찮지 않아도 시스템에 따라 행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불로소득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어떤 종류의 불공정이 유리한 인간에게 비인간성을 유발한다는 사실에도 부정적이다. ….이 분배 시스템은 노동강도에 따라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빈익빈부익부에 따라서 제도 활용에 따른 유불리가 나누어질 뿐. 지구 온난화를 심화시킨 이산화탄소 배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투자자본'인 만큼이나, 정부의 눈먼 돈을 활용하는 건 더 많이 감시받고 검증해야 하는 빈자가 아니라 부자라는 점에서도 비판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금융자본주의를 한 인간이 도박처럼 활용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소설이,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우리 시대 사회상을 잘 그리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모두가 비슷하게 바라는, 인간다운 삶을 살리라는 소원을 이루려고 금융자본주의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결국 나쁘지 않은 결말을 얻었기 때문에도, 시스템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고, 따라서 권장하기는 어렵다. 신랄하게 비판하는 서술어 사이에 선명하게 살아있는 욕망이 나와 닮아서 어쩔 수 없이 몰입해서 읽고 말았다, 종종 매력적이고 분석적인 문장들과 묘사와, 이야기 구성 측면에서도. 잘 만든 이야기라서,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가 부러워졌다. 그렇지만... 역시 이 길에 눈꼽만큼도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그럴 능력도 없고. 욕망을 이룬 사람이 지고 있는 반대편의 그늘이  무섭고 섬뜩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건, 아마 내가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라 그렇기도 한 것 같다. 내가 과연 내가 바라는 대로 계속 조심하면서 살 수 있는 인간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나 살자고 다른 것들에 눈감으며 살면 어떡하지 항상 무섭다. 그래서 이렇게 리뷰를 쓰고 나서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소설은 인물의 욕망이 계속 끌고나가는 세계이지 않나 싶어서,  하여튼 이 소설은... 잘 썼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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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개의 단상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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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른 내용으로 시작하면 그게 뭐든 그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되어버릴 것이다."p5


'300개의 단상'에는 자신이 했던 말이든, 타인이 했던 말이든, 그와 그 주변의 타인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이든 간에, 우선 뒤집는 말들이 담겨있다. 어떤 사람은 솔직한 글이 가학 혹은 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는데, 수치스러운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선언한 건 그가 솔직한 글을 쓰고자 한다고, 솔직한 글이 지루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로서 그가 느끼기에 부끄러울 일조차도, 적어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수치스러운 일을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 누구든지 그에게 지루해하지 않고 공감할 누군가가 존재할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공감할, 누군지 알지 못하는 독자를 만나려고 손을 내미는 듯한 그의 발언이 도발적으로 들렸다.


한편으로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이 익숙히 괜찮다고 믿었던 사실이 뒤집힐 때라고 한다면, 위의 문장은 무언가를 뒤집으면서 시작하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앞과 뒤를 뒤집어, 놀라게 하라는 것. 이 단상의 재미는, 이 뒤집힘에서 오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빚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에 오랜 친구와 연인을 버린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거나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멍청한 인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인간이 자기가 나라는 멍청한 인간을 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p7


그러니 어떤 인물을 멍청한 사람으로 평하고서,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것. 이점은 재미있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신은 부정하고 있지만, 혹여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고, 그런 점이 자신에게 있을 수 있겠다는 의심을 거두지는 못한다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로서, 확신에 찬 발언을 불확실한 상태로 내버려둔다. 도로 발언하는 자신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말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발언을 모순으로 뒤섞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집힌 말은 어느새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는 이런 모순을 삶에서 발견하고 글로 옮긴다.


'300개의 단상'에는 모순을 폭로하는 듯한 짧은 글들이, 내용연결 없이 연이어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한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쓴 일기를 읽을 때의 기분이었다. 일기를 쓸 때 연이어 이어진 사건을 쓰기 보다는 계속 끊임없이 주어지는 생각을 쏟아내기 바빴다. 이후 읽어보면 그 생각이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무언가 깨달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는데 받아적기 바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솔직한 이야기들은 누가 읽지 않으리라는 생각없이는 쉽게 쓸 수 없는 글이었다. 이 단상은 그런 의미에서 일기처럼 느껴졌다. 일기보다는 압축적이고, 사건이 구체적으로 상상되지만, 축약되어 있는, 내밀한 이야기들. 길게 쓰면 한 편의 단편이 될 듯한 인상들이, 계속 연이어 나열되고 있었다. 나열된 글들은 규정된 무언가를 억압으로 느끼고 계속 탈주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가 탈주를 하려는 이유는, 이 단상에 잠깐 언급되듯이 그가 가진 장애가 내내 그를 괴롭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장애로부터 사유를 이용하여 간헐적으로 탈출하는 것으로 숨을 돌렸을 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그 느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섹스, 약물, 우범지대처럼 사람들이 흔히 빠져드는 것들에 빠져들곤 했다. 그 갈망을 마침내 충족시킨 건 모성이었다. 모성은 멈추는 법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는 자기 소멸의 한 방법이다." p97

삶을 그저 견디려 애쓰는, 책임을 하나도 져버리지 못한 듯한 모습, 아슬아슬하게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자신의 병을 견디고 엄마가 된 자신을 견디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그의 삶이 힘겨워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나드는 사유와, 그 사유대로 사는 삶이, 무기력하고 자유로워보였다. 다른 모든 일탈보다도 낭비하고 있다는 갈망을 충족시킨 것은 모성이었으며, 알아차리는 법도 멈추는 법도 없는 자기소멸의 방법이라고 묘사한 데 있어서, 그가 탈출하지 못한 그 자신의 몸이, 그가 짊어진 책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는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일탈을 하며 갈망했던 죽음에 가까워졌고, 역설적으로 삶에 닻을 내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그가 실은 단상 첫 페이지에 쓴, 그의 말은 실현된 것일까? 그는 그가 닻을 내린 그의 삶을 부끄러워하는건가? 아니면, 그 이전의 삶을 부끄러워하는 걸까? 그가 무게를 두는 게 어느 쪽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그가 버티고 있는 삶을 그대로 말한 건 남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그저 그는 고백하는 것 같았다. 


몇 문장 밖에 안되는 글에 함축된 생각의 일부를 듣고 있는데, 그 사이에 숨어있는 서사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어쩌면 그건 그의 서사가 아니라, 내 내면에 불러일으켜진 서사일 수도 있다. 문장들은 너무 짧아서, 모든 사안을 유추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읽었을 때 바로 어떤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건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일에서 오겠지만,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단상들은, 단상을 왜 적었을까, 이 단상의 배경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나라면 이런 생각을 언제 할 지 상상해보면서 이 사람의 삶을 그려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연속적인 단상의 나열은, 그 생각을 통과하여 연속적인 삶으로 살아있다. 자기자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려 애쓰는 사람으로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안의 서사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저자의 서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별로 재미없는 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발견한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재미없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평범하지는 않은 생각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전에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사슬을 읽을 때도 단편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 집합을 책으로 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단편, 혹은 장편에 등장할 수 있는 인물의 단면들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이 독후감을 이렇게 쓴 것이 조금은 후회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둘러 읽기 위해 읽느라 흘려보낸 글들이 많아서, 오히려 아쉽다.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며, 오래 두고 읽는 시집처럼 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른 내용으로 시작하면 그게 뭐든 그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되어버릴 것이다. - P5

어떤 사람들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빚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에 오랜 친구와 연인을 버린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거나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멍청한 인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인간이 자기가 나라는 멍청한 인간을 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 P7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그 느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섹스, 약물, 우범지대처럼 사람들이 흔히 빠져드는 것들에 빠져들곤 했다. 그 갈망을 마침내 충족시킨 건 모성이었다. 모성은 멈추는 법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는 자기 소멸의 한 방법이다." - P97

우울증은 그 병에 걸린 사람에게서 즐거워하는 능력만 훔쳐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한 적 없는 모든 일과 할 수 있었던 모든 일을 장막으로 덮어버린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죽는다. 이런 경우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는 내리(de) 누름(press)을 당하는 것이다. 영원히.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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