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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의 숨어 있는 방 ㅣ 창비아동문고 228
황선미 지음, 김윤주 그림 / 창비 / 2006년 9월
평점 :
우리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산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남편은 판타지를 좋아해서 책이든 영화든 가리지 않는다. 남편 손에 이끌려 가서 본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도 그 순간에는 재미있었지만 남는 건 별로 없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 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에서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그런데 늘 현장감이 생생한 동화를 쓰는 작가 황선미가 판타지 동화를 썼다고 해서 의아함과 궁금증에 사로잡혀 책을 펼쳐들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자꾸 뒷장으로 손이 가곤 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오랫동안 책표지를 들여다보며 등을 댄 아이들 나온과 라온에 대해 생각했다.
천식을 앓고 있는 나온이가 사는 아파트는 재개발될 예정이어서 한두 집씩 떠나기 시작해 이젠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은 나온이 엄마는 부족한 자금을 당숙모로부터 물려받은 넝쿨집을 팔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그 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집은 팔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빠는 아이들을 위해 흙냄새가 나는 그 집에 들어가 살자고 하지만 엄마의 거센 반대가 어쩐지 수상쩍다.
꿈은 현실과 상상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나온이는 자주 꿈을 꾼다. 그리고 꿈 속에서 남자 앤지 여자 앤지 모를 '그애'를 만난다. 나중에야 나온은 그애가 자신의 쌍둥이 동생 라온임을 알게 된다. 꿈은 라온이 나온을 넝쿨집으로 부르는 신호였던 것이다. 결국 아빠의 심부름으로 넝쿨집에 가게 된 나온은 발원지를 알 수 없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게 된다.
넝쿨집은 나온을 기다린다. 엄마 모르게 혼자 찾아간 넝쿨집은 나온에게 반갑고 친근하다. 열쇠가 없는 나온에게 그 집의 문은 늘 열려 있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둘 생겨난다. 그리고 그애 라온과 오른쪽 눈이 갈색인 토끼와 상처를 치료해주는 초롱꽃을 만난다. 하지만 나온이 라온을 만날 때마다 엄마는 악몽에 시달리고 나온의 병은 심해진다.
나는 자꾸만 나온과 함께 라온을 찾아 안개가 끼어 있는 듯 뿌연 넝쿨집 정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온에게만 보이는 아이 라온은 할머니와 함께 넝쿨집에서 병든 아이들을 위해 꽃을 키우고 꽃향기를 모은다. 산파인 할머니가 받아낸 아이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나온이다. 할머니와 라온은 나온의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넝쿨집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나온이 넝쿨집 정원에서 느끼는 상쾌함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넝쿨집에는 어른들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넝쿨집은 나온이 태어나고 천식이 시작된 곳, 바로 라온의 방이면서 '나온의 숨어 있는 방'이기도 하다. 라온은 나온과 등을 기댄 아이, 바로 쌍둥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엄마 아빠의 대화 속에서 깨닫는다. 돌도 되기 전에 쌍둥이 중 하나를 잃은 엄마는 늘 나온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넝쿨집은 기억하기 싫은 아픔의 집이 되고 말았다. 나온마저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하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넝쿨집 정원에서 태가 들어 있는 항아리를 발견해서 태우자 라온은 그가 속한 시간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젠 나온이 혼자 스스로 견딜 만큼 자랐기 때문이다. 라온의 존재와 엄마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 나온이 성큼 자라 있는 것이 느껴진다. 엄마와 나온이 서로 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잊을 수 없는 아이, 강우. 강우는 나온과 같은 시간 속에 살면서 나온을 일으켜 세우는 존재이다. 강우는 집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깨진 전구를 갈아끼우고, 나온의 엄마에게 오해를 받아도 침묵으로 우정을 지킨다. 무뚝뚝하지만 마음속으로 늘 나온을 챙기는 또 하나의 초롱꽃 향기가 바로 강우이다. 아주 이기적으로 보이는 요즘 아이들 속에도 이런 우정은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