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가족의 탄생
23일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조금은 들뜨고 푸근해져있는 마음에 날씨까지 포근하여 이날 가족의 탄생을 축하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부터 머리 감고 다듬고 희령인 이날 연주할 웨딩마치 연습을 한두 번 더 해보고 아침 시간을 보냈다.
나랑 띠동갑인 작은 이모는 오십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작고 여린 체구에 어울리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쓰고 뽀얀 신부화장을 하고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이모는 아들들이라며 두명의 인상 좋은 청년을 소개했다. 눈매가 사글사글하니 귀염성 있고 선해 보이는 큰아들과 조금은 개구쟁이처럼 성격 좋아보이는 작은 아들이었다. 나는 얼른 악수를 청하며 이야기 많이 들었다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약간은 어색했지만 이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는 착한 아들들이다.
이모가 낳은 아들은 아니다. 몇년 전부터 살고 있는 이모부의 아들들이다. 오늘은 이들 네명의 가족이 공식적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인사를 드리는 날이다. 이모는 면사포를 처음 쓴다. 이모 평생 처음 입어보는 웨딩드레스와 신부화장과 신부한복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이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을까 싶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이상하게도 이모에게는 좋은 연분이 닿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살지만 푸근한 보금자리를 꾸리고 살지 못하는 이모에게 어떨 땐 미안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가족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해져왔다. 가족의 탄생! 늦게 이룬 가정이니만큼 더욱 행복하게 알콩달콩 건강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어느날 갑자기 5년만에, 스무살 연상의 '괜찮은' 여인을 데리고 와 가족으로 엉켜사는 남동생>
얼마 전 보았던 <가족의 탄생>은 가슴 떨리는 감동이 전해지는 '좋은' 영화였다. 고두심, 문소리, 공효진의 연기의 힘 또한 만만치 않았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가족은 어떠해야 하는가, 에 대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잔잔하지만 힘있는 이야기였다. 세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로 펼쳐지면서 하나로 묶이는 '가족의 탄생'은 뜻하지 않았던 일에서 출발하여 난데없는 곳에서 갈등의 실마리가 풀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린다.
<사랑에 목을 달고 사는, 그래서 구질구질한 엄마 때문에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사는 여자. 나중에 알게된다. 엄마는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유난히 많았던 것이라고>
우리는 도대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몇이나 있나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우리를 몰고 가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밀리며 못 이기는 체 따라가는 것이다. 그게 삶이고 그게 사람이다. 그 힘을 과연 거역할 수 있던가. 고용주에게 '미친년'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악바리처럼 찾던 일거리를 놓고 고아가 되어버린 씨 다른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야하고, 못난 남동생 때문에 덤으로 얻은 생판 남의 피를 가진 아이를 키우며 처녀엄마가 되어야하는 운명이 이들의 몫이다. 살다보면 자신이 받은 만큼 베풀 수 있던가. 받은 것보다 베푸는 폭이 훨씬 적은 사람도 있는 걸 보면 그것도 다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도 주고 받는 폭이 꼭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저울로 단 것처럼 공평하지도 않다. 덜 주고 덜 받고 많이 주고 많이 받기도 하는, 가족의 탄생은 어쩌면 그렇게 계산되지 않는 저울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싶다.
<생면부지의 어린 계집애를 가족으로 품고 길러준 사랑, 그것을 받아본 여자는 남자친구와의 약속시간에 맞추어 버스를 타려다가도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제발 나한테 집중 좀 해 다오. 이렇게 외치는 남자도 알고 보면 사랑에 굶주린 탓이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한번쯤 어디선가 본 듯도 한 얼굴들이 빠르게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엇갈리기도 하고 때론 잠시 멈추어 인상적인 화면이 되기도 하는 얼굴들. 그 얼굴들을 자세히 보면 그들 중 누군가가 나의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어쩌면 어딘가에서 그런 인연으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상식적인 생각이 자연스럽게 상식이 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거리의 누구 한 사람이라도 가벼이 볼 일이 아닌 것인가. 특수한 경우처럼 보이는 일들이 사실은 보편적인 일인 것을 잊고 살기가 쉽다. 누구에게나 나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아픔과 말 못할 고민과 다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이 있다는 것쯤 잊지 않아야겠다.